Poison-Eating Healer RAW novel - Chapter (38)
38화
“제 뒤쪽으로 오세요.”
일반적인 경우라면 탱커가 힐러에게 해야 할 말.
그러나 지금의 상황은 정 반대다.
제아무리 탱커라 해도 4성(★★★★) 던전쯤 되면 몬스터의 독을 버텨 내지 못한다.
육철완은 머쓱해하면서도 내 뒤쪽으로 물러났고, 나는 놈들을 주시하며 엑사를 빼어 들었다.
퍼플 스콜피온(Purple Scolpion / type – poison / 처치 난도 3성(★★★) / 물리 레벨 ‘C’ / 기타 레벨 ‘B’>
영롱하게 빛나는 자줏빛의 갑각.
단단함도 단단함이지만, 꼬리에 맺힌 독이 대단히 위협적인 녀석이다.
일단 한번 체내에 침투하면 힐러들 서너 명이 달려들어도 회복이 불가능하다.
그런 놈들이 열댓 마리 정도 모여들었으니 능히 이 던전의 난이도를 짐작할 수 있었다.
“숫자가 너무 많습니다. 역시 돌아가는 게…….”
뒤쪽에서 육철완의 고심 섞인 목소리가 들린다.
아닌 게 아니라 바닥, 옆, 위를 막론하고 퍼플 스콜피온이 득실득실하게 모여든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상처하나 없이 동굴을 통과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하지만, ‘몸’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어떨까.
지잉.
손에 쥔 엑사에 에테르를 불어넣는다.
손가락 마디만 하던 검은색 칼날이 이제는 한 뼘 이상 자랐다.
칼날이 길어졌다는 건 곧 살상 범위의 증가로 이어진다.
에테르를 더 많이 활성화시킬수록 강력한 무기가 되는 것이다.
‘우선은 천장에 붙어 있는 놈들부터…….’
하피를 잡았을 때처럼 엑사를 고쳐 잡은 뒤, 위쪽을 겨냥해 힘껏 앞으로 던졌다.
퍼버버벅.
제일 앞에서부터 보이지 않는 뒤쪽까지.
엑사는 십여 미터 가량을 쏜살같이 질주했고, 그 경로에 있던 모든 퍼플 스콜피온의 몸을 꿰뚫어 버렸다.
“아니……!!”
육철완의 경악성과 함께 천장에 매달린 전갈들이 후두두둑 떨어진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곧 육철완의 목소리에 다급함이 섞인다.
“위험합니다!!”
샤샤샤샷.
나머지 스콜피온들이 빠르게 접근하고 있었다.
영악한 전갈들은 무기가 없어졌으니 무방비 상태라고 생각한 듯하다.
별(★)이 많이 붙은 놈들은 기본적으로 지성이 있는 걸까.
언뜻 보기에는 그럴듯한 판단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녀석들의 판단은 악수가 되어 버렸다.
퍼버버버벅.
전갈의 몸을 꿰뚫었던 엑사가 방향을 바꿔 이쪽으로 되돌아왔기 때문.
설마 원격 조종이 가능한 물건이라고는 스콜피온도, 육철완도 예상하지 못했던 듯하다.
“어떻게?!”
어떤 원리인지는 나도 잘 모른다.
그저 마음속으로 진 박사를 찬양할 뿐.
확실한 건, 엑사는 내 의지에 따라 자유롭게 움직이고 있었다.
때로는 형태를 변화시키면서까지.
되돌아온 엑사를 받은 뒤, 방황하는 전갈들을 하나하나 베어 넘겼다.
서걱.
머리를 베어도 좋고, 그 주변 어디라도 상관없다.
일단 한번 엑사의 블랙 에테르와 닿은 녀석들은 꼬리 한번 휘두르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했다.
“오오……!!”
전갈들을 베는 동안 육철완의 감탄사가 끊일 줄을 모른다.
처음에는 다분히 걱정스러운 목소리였지만, 이제는 숫제 이 광경을 즐기는 듯하다.
‘독보’를 통해 시선을 교란하고, 주변의 모든 것들을 베어 넘긴는 모습이 퍽 그럴싸해 보이는 것 같다.
콜로세움의 특등석에 앉혀 놓으면 딱 저런 표정일까.
그런 생각과 함께 나는 마지막 남은 전갈의 꼬리를 베었다.
서걱.
“휴우.”
숨이 가빠 온 나는 천천히 심호흡을 시작했다.
전갈들의 움직임은 그다지 빠르지 않았다.
하지만 협소한 공간에서 몸을 움직이다 보니 신경 써야 할 것이 많았다.
“클랜장님. 채집 시작할까요?”
“그, 그러시죠!”
숨도 돌릴 겸, 나와 육철완은 각자의 ‘채집’ 활동에 나섰다.
동굴형 던전, 특히나 포이즌 던전에서는 상당량의 특이 물질을 확보할 수 있다.
마유석(魔乳石).
현실 세계로 따지면 종유석(鍾乳石)에 해당하는 물질인데, 쉽게 구할 수 없는 자원이다 보니 꽤 비싼 가격에 팔리곤 한다.
고기도 먹어 본 사람이 그 맛을 안다고, 육철완은 포이즌 던전의 형태마다 어떤 것들이 가치가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가지고 온 톱날 디바이스로 빛깔이 고운 마유석을 잘라 내기 시작했다.
‘이쪽도 시작해 볼까.’
푹.
퍼플 스콜피온의 사체를 뒤집어 배를 가른다.
갑각은 영롱한 자줏빛이지만 녀석의 코어는 새까만 색으로 뒤덮여 있었다.
전갈의 사체가 열다섯 개 정도이니, 이 정도 코어라면 던전에서 영생과도 같은 회복이 가능할 것이다.
절반 정도 코어를 추출했을 즈음, 어느새 가방이 두둑해진 육철완이 내게 묻는다.
“저…… 천해선 헌터님.”
“네.”
“저번부터 여쭤보고 싶었던 건데……. 그 폐기물은 왜 모으시는 겁니까?”
폐기물이라니.
이게 얼마나 귀한 재료인데.
절로 실소가 나왔지만, 겉으로는 진중하게 대답했다.
“겉으로는 쓸모없어 보이는 물건도 누군가에겐 도움이 될 수 있으니까요.”
“도움이라…….”
육철완이 미간에 주름을 세우며 고민하더니, 이내 탄복한 얼굴로 대답한다.
“과연……!! 헌터님께서는 블랙 코어의 성분을 정밀히 분석하시려는 거군요……!! 더 효율적인 치유 능력을 발휘하기 위해서! 헌터, 나아가 인류를 위해!”
“……예 뭐.”
이 정도면 꿈보다 해몽이라고 할 수 있겠군.
스스로 알아서 납득을 해 주니 이쪽에서는 고마운 일이었다.
그런데,
“헌터님! 위험합니다!!”
육철완이 갑자기 내 쪽을 향해 몸을 내던진다.
우당탕탕.
아니.
이 사람이 왜 이래.
무거워죽겠네.
“클랜장님?”
“으윽…….”
육철완의 입에서 신음 소리가 새어 나온다.
방독면 너머의 얼굴이 푸르딩딩하게 변하고, 순식간에 눈에 핏발이 선다.
이건 설마…….
‘중독이다……!!’
도대체 어디서?
전갈들은 이미 다 없애 버렸을 텐데.
나는 재빨리 일어나 상황을 파악했다.
주변을 확인한 나는 욕지거리를 뱉고야 말았다.
“이런 시발.”
육철완의 등에 퍼플 스콜피온 한 마리가 매달려 있었다.
몸통의 절반만 남은 채로.
‘아까 꼬리를 베었던 놈이다……!’
독이 퍼지기 전에 스스로 몸을 절단한 것인가.
한번 먹잇감으로 삼은 대상은 지옥 끝까지 쫓아간다더니, 과연 소문대로였다.
촤악.
재빨리 엑사를 꺼내 녀석을 그어 버린 뒤, 힘을 주어 육철완의 몸에서 떨어뜨렸다.
그와 동시에 육철완이 허물어지듯 바닥에 쓰러졌다.
‘빨리 처리하지 않으면 위험하다.’
스윽.
나는 곧장 손을 뻗어 치유 능력을 발동시켰다.
덜덜 몸을 떨던 육철완의 몸 상태가 점점 회복되기 시작한다.
그나마 이빨로 물어서 망정이지, 꼬리였으면 정말 위험할 뻔했다.
갑각류 몬스터는 이렇게 꼬리 자르기를 할 수도 있구나.
어지간한 독종이 아니고서야 할 수 없는 판단, 그리고 집념이었다.
‘덕분에 하나 배웠네.’
엑사에 칼날이 닿았다고 해서 무조건 죽는 것은 아니다.
이처럼 꼬리 자르기를 시전 하면 타격은 입되 죽는 것을 피할 수 있다.
전장에서 얻은 귀중한 교훈이었다.
“으음…….”
육철완이 서서히 의식을 찾는 모양이다.
생각해 보니까 어이가 없네.
그냥 내가 물렸으면 아무 일 없었을 텐데.
굳이 몸을 날려서 날 보호하다 이 꼴이 되다니.
입가에 쓴 웃음을 띤 채로 육철완의 뺨을 두들겼다.
“클랜장님. 정신 차리세요.”
“으으……. 헌터님 위험…… 절 방패막이로…….”
의식이 흐릿한 와중에도 이런 말을 하는 걸 보니 확실히 탱커는 탱커다.
수 분이 지난 뒤 육철완은 정상상태로 돌아왔다.
전갈이 물어뜯은 자국이 아직 남아 있지만, 그의 등급을 생각하면 빠르게 아물어 갈 것이다.
“다시 한번 신세를 졌습니다, 헌터님.”
“신세는요. 힐러가 치유를 하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당신이 몸을 날려 나를 구했듯이.
뒤에 말은 굳이 덧붙이지 않기로 했다.
지금도 독실한 신자의 얼굴을 하고 있는데, 더 이상 광신도로 만들고 싶진 않으니까.
“다만.”
“예……?”
“앞으로는 대신 물린다든가 하지 마세요. 적어도 포이즌 던전에서만큼은…….”
눈을 꿈뻑거리며 경청하는 신도를 향해, 나는 확실히 선을 그었다.
“제가 왕입니다.”
* * *
이곳에 오는 동안 두 번의 몬스터를 마주했다.
두더지의 모습을 닮은 2성 마수와 무식하게 생긴 그레이 베어(Gray bear).
“이놈은 제게 맡겨 주십시오!”
힘이 세 보이는 녀석을 발견해서일까.
육철완은 그레이 베어를 본 뒤 자진해서 전투에 나섰다.
뭐, 저놈은 딱히 독성이 강한 놈은 아니라 크게 문제 될 건 없었다.
쾅 쾅.
탱커는 어태커나 어쎄신 같은 공격형 나이트가 아니다.
그러다 보니 공격 스킬에는 서툰 경우가 대부분이다.
어설픈 동작으로 엑사를 휘두르던 과거의 나처럼 말이다.
쾅 쾅.
“으오오오오!”
하지만 그런 점이 되려 상대하는 입장에서는 공포심을 유발한다.
부풀어 오른 팔뚝을 되는대로 휘두르는 저 모습을 보라.
기세등등하게 등장한 그레이 베어는 곧 육철완에게 사정없이 두들겨 맞았다.
쾅 쾅.
-크웡!
샌드백처럼 얻어터지는 모습을 보자니 동정심이 생길 지경이다.
그렇게 내부에서 흘러나오는 독향(毒香)을 따라, 그리고 희귀초의 향기를 따라 걷기를 두어 시간.
마침내 보스의 거처로 생각되는 공간에 도달했다.
“던전은 던전이군요…….”
육철완이 주변을 둘러보며 신기한 듯 말을 걸었다.
실제 그의 말대로 이곳의 구조는 상식과는 거리가 멀었다.
끝이 날까 싶은 좁은 동굴을 지나니, 이제는 사방이 탁 트인 커다란 홀이 나타났다.
축구 경기장 하나는 족히 들어가고도 남을 사이즈다.
보스 몹의 거처가 이렇게 크다면, 녀석의 체격도 거대하지 않을까?
-꾸왕!
“음?”
갑자기 조용하던 뽀리가 모습을 드러낸다.
야, 사람 있을 때는 나타나지 말라니까.
“아니!!”
그 봐. 놀라잖아.
“천해선 헌터님! 조심하십시오! 보스 몹이 어느 틈에 헌터님의 어깨에……!!”
“……예?”
뽀리가 보스 몹이라고?
뭔가 큰 오해가 있는 모양이다.
육철완은 단숨에라도 뽀리를 움켜잡을 기세로 다가왔다.
“아. 얘는 아니에요.”
“네?”
“그러니까…… 음……. 제 애완동물입니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겠지.
하지만 그 이상의 설명을 하고 싶지는 않다.
그냥 그러려니 하십쇼.
“갑자기 없던 애완동물이 어디서…….”
육철완은 궁금해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더 물어보지는 않았다.
“이놈아. 갑자기 왜 날뛰는 거야.”
-꾸왕!!
뽀리가 난리를 치는 덴 보통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익숙한 던전의 향을 맡았을 때.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비수를 만났을 때처럼 은신한 녀석이 주변에 있을 때.
……가만.
“설마?”
“왜, 왜 그러십니까? 헌터님.”
내가 심각한 표정이 되자 육철완도 잔뜩 긴장한 눈치다.
“보스 몹이 이미 와 있는 것 같아요.”
“예??”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여기 없다고 단정할 수 없다.
뽀리가 으르렁거리며 바라보는 방향에 분명 뭔가가 있다.
예리한 단도처럼 날카로운 기운이 이쪽을 향해 쏘아져 내려온다.
나는 발로 육철완을 차 버린 뒤 ‘독보’를 사용해 훌쩍 뛰어올랐다.
파가가각-
지면과 금속이 튀는 기분 나쁜 소리가 들린다.
발톱이 얼마나 단단한지 땅에서 스파크가 튈 정도다.
“저놈은……!!”
칙칙한 잿빛으로 뒤덮인 날개.
강철처럼 단단해 보이는 발톱과 혐오스럽게 생긴 얼굴.
흔히 ‘역병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생명체가 날개를 퍼덕거리며 다시 떠오른다.
박쥐.
녀석은 분명 박쥐였다.
이 공간이 쓸데없이(?) 넓었던 이유는, 놈의 체격이 큰 것도 있지만 결정적으로 비행형 타입이었기 때문이었다.
“……껄끄럽기가 이를 데가 없군.”
까다로운 비행형에 뛰어난 전투 능력.
포이즌 타입도 모자라 ‘은신’ 스킬까지.
신경 써야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4성(★★★★) 포이즌 던전을 지키는 거대한 박쥐.
‘알카누스 뱃(arcanus bat)’이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