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ison-Eating Healer RAW novel - Chapter (4)
4화
“흐음. 어디를 째야 하나.”
난 지금 간접 체험을 하고 있다.
정육점에 거꾸로 매달린 꿀꿀이?
뭐 그런 느낌이다.
키릴은 나를 가만히 세운 뒤, 내 주위를 돌면서 이곳저곳을 훑어보고 있었다.
날이 시커먼 칼(!)을 쥐어 든 채로 말이다.
그녀는 정말 고민된다는 얼굴로 ‘여길 이렇게 찔러? 아니면 저기를 왕창 째 버려?‘ 따위의 말을 중얼거렸다.
결국 난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아까 저보고 죽을 일이 없다고 하셨죠.”
“응. 왜?”
“수식어가 빠져 있던 건가 해서요. ‘내가 죽이기 전까지는’, 뭐 이런 거.”
“뭐어? 꺄하하하.”
그녀는 정말 웃긴다는 듯, 한 팔로 배를 감싸 쥐었다.
시발.
칼날을 들고 내 주위를 빙빙 도는데 안 그러게 생겼냐.
한차례 배를 잡고 웃은 키릴이 칼을 잡은 손으로 내 어깨를 툭툭 친다.
“네가 죽는 걸 원했다면 그 고약한 흑두꺼비한테서 빼 왔을 리가 없잖아? 이쯤 되면 날 신뢰할 법한데…….”
“물론 신뢰합니다. 그 위험하게 생긴 물건만 치워 준다면요.”
“히히. 걱정 마. 방금 정했으니까.”
“네?”
키릴이 은근한 미소와 함께 내 뒤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스팟.
“윽……!!”
양쪽 다리 밑.
아킬레스건 쪽에서 뜨거운 고통이 느껴진다.
다리에 힘이 풀린 나는 무릎을 꿇고 털썩 앉아야 했다.
칼을 들고 요리조리 살펴볼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뒤꿈치를 타고 조금씩 핏물이 흐르는 게 느껴진다.
뭐?
신뢰가 어쩌고 어째?
“어때. 화끈하지?”
“덕분에요. 저한테서 받을 게 아킬레스건일 줄은 몰랐습니다.”
“헤헤. 그렇게 인상 쓸 것 없어. 왜냐면…….”
촤악.
난 휘둥그레진 눈으로 그녀를 볼 수밖에 없었다.
날 그었던 그 칼로, 그녀가 난데없이 자신의 허벅지를 찔렀기 때문이다.
“아, 따가워.”
“지금 무슨…….”
키릴은 특별한 대답 없이 줄줄 흐르는 피를 손바닥에 모았다.
샤르르…….
“?!”
마술과도 같은 일이 벌어졌다.
그녀의 손바닥 위에서 피의 빛깔이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피가 응고되면 색이 변한다고 하지만 이건 그런 차원이 아니었다.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인 양, 검게 흑화한 혈액이 곧 내 발 쪽으로 스며들었다.
“윽……!”
“가만있어.”
상처 부위로 놈들(?)이 날아오자 나는 반사적으로 움찔했지만, 이미 다리를 다친 터라 몸을 움직이지는 못했다.
스르르…….
발뒤꿈치 쪽으로 무언가 분명한 기운이 느껴진다.
앞서 치료를 받았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다.
다른 게 있다면, 그녀에게서 받은 기운이 사라지지 않고 내 발끝에 머물러 있다는 점이었다.
“어때? 혹시 속이 메스껍다거나 하진 않아?”
“아니요. 통증이 점점 없어지는 것 말고는…….”
“휘유~”
그러자 키릴이 감탄했다는 듯 휘파람을 불었다.
“못해도 한두 시간 정도는 게거품을 물 줄 알았는데, 역시 타고난 포이즈너라니까.”
“……고생할 걸 알면서도 이렇게 했다는 겁니까?”
“하하. 강아지.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어? 지금 얼마나 대단한 걸 받았는지도 모르면서.”
“말이 나왔으니 물어볼게요. 방금 당신의 혈액을 저에게 넣은 건가요?”
“응. 좀 더 정확한 표현을 하자면 블랙 에테르라고 해야겠지만.”
블랙 에테르.
어디선가 그 말을 들었었다.
그래.
그녀가 대형 몬스터를 잡기 전에 내게 했던 말이다.
블랙 에테르를 그렇게 쓰면 곤란하다고.
“적독사를 불러냈으니 이미 각성은 끝난 거 같고……. 혹시 오늘 기절했던 적이 있었니?”
“음……. 게이트가 열릴 때 잠깐요.”
“허. 재수도 좋네. 그 틈바구니에서 정신을 잃고도 살아 있었다니. 아니지. 네가 포이즈너이기 때문에 살 수 있었던 건지도.”
혼자서 이런저런 말을 중얼거리던 그녀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포이즈너의 각성은 일반적인 경우와 달라. 체내에서 폭발하는 독성을 스스로 치유하지 못해 죽는 경우가 다반사지. 네가 최근 들어 몸이 좋지 않았던 것도 다 그런 이유야. 다른 헌터 타입도 각성 중에 사망하는 경우가 1% 정도 되지만, 포이즈너는 전체의 1/3 정도가 사망해.”
“그럼 저는 어떻게…….”
“네 자생력이 그만큼 강하다는 이야기야. 내가 아까 말했지? 극과 극은 통한다고. 넌 아직 모르겠지만, 이미 넌 치유 능력을 사용하고 있었던 거야. 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키릴의 미소가 조금은 쓰게 변했다.
“포이즈너는 각성하기 전에 독 기운이 넘쳐나게 돼. 나중에는 몸 안에서 가두지를 못해 외부로 발산해 버리지. 그래서 포이즈너가 각성하기 전에 가족들이 죽거나 심각한 중독 상태에 빠져.”
해선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럼 누나가 지금 저 때문에…….”
그러자 키릴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천송화는 두꺼비 때문이야. 너 때문이었다면 진작 죽고도 남았지. 네가 가진 독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아? A급 나이트들도 네가 가진 독 한 방이면 바로 초주검이 될 거야.”
나이트 타입 헌터들은 강인한 신체로 몬스터들과 육박전을 벌이는 존재들이다.
특히나 B급 이상이 되면 일반 무기로는 상처를 입힐 수 없어 ‘금강불괴’라 칭송받는다.
그런 사람들을 한 방에 보낼 수 있다니.
내 몸 안에 그런 시한폭탄이 있었단 말이야?
“위력이 그만큼 막강하니 네가 가진 치유력으로도 한계가 있었을 거야. 완전히 중화시키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외부로 배출도 안 시키니까 부작용이 나타났던 거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키릴의 시선이 내 몸을 스캔한다.
전신에 생겨난 흉측한 반점들.
키릴은 그 반점들을 가리키고 있었다.
복잡한 피부병인 줄 알았는데, 그게 독을 배출하지 못해 생긴 부작용이라니.
“히히. 이제 알겠어? 너한테 어지간히 착하다고 한 건 그것 때문이야. 독을 어떤 식으로든 없애야 하는데, 네 무의식이 그걸 죽자사자 몸에 품어 버린 거야. 타인에게 위험할 거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아 버린 거지.”
내가 그렇게 착한 사람이었나.
좀처럼 수긍하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뭐가 가장 급할까 고민했는데, 역시 발을 째는 편이 좋을 것 같았어.”
“발이라면…….”
“지금 너에게는 기동력이 가장 필요하거든. 언제든지 빤스런을 할 수 있는 빠른 발 말이야.”
키릴이 이야기한 기동력.
그 정체가 무엇인지는 굳이 물어볼 필요가 없었다.
“독보…….”
“그래. 지금부터 네게 독보를 가르쳐 줄 거야.”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두어 번 독보를 시전했다.
파앗!
키릴이 독보를 쓰는 광경은 봐도 봐도 경이로웠다.
같은 인간이 의심스러울 정도의 스피드.
그걸, 어제까지만 해도 병자였던 내가 쓸 수 있을까.
두근두근.
무언가 특별한 능력을 배운다고 생각하니 심장이 고동치기 시작한다.
안 그런 줄 알았는데, 어쩌면 나에게도 헌터의 기질이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발밑에서 휘몰아치는 감각을 자연스럽게 폭발시켜 봐. 저쪽으로.”
키릴이 턱짓을 한 곳은 공터 반대편의 공장 지붕이었다.
한 번의 도약으로 저기까지 건너라니.
새삼 얼마나 비현실적인 능력인지 피부로 와닿는다.
‘그렇지만…….’
평상시라면 미친 소리라고 여겼겠지만, 어쩐지 지금은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발밑을 간지럽히는 그녀의 블랙 에테르 때문이다.
“빨리해.”
나는 고개를 살짝 끄덕인 뒤 혀로 입술을 훔쳤다.
상식적인 행동이 아니다.
하지만 이미 키릴을 통해 보았지 않은가.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무엇보다, 발아래 느껴지는 특별한 기운.
키릴의 블랙 에테르가 자신을 활용해 달라며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하루에도 몇 번을 죽을 뻔했는데, 이까짓게 대수냐.’
나는 그런 생각과 함께 발밑에서 요동치는 기운을 폭파시켰다.
파앗!
“우왁!!”
나도 모르게 비명 가까운 기합을 내지를 수밖에 없었다.
어찌나 빠르고 멀리 도약을 했는지 공중에서 균형을 잃을 뻔했기 때문.
촤아아악.
간신히 착지 지점에 발을 가져다 댄다.
볼썽사납게 몸이 한차례 크게 출렁였지만, 넘어지지는 않았다.
처음 해 본 시도라는 사실이 무색하게 단 한 번만으로 기술을 성공시킨 것이다.
“말도 안 돼…….”
방금전 발돋움을 한 위치를 보니 헛웃음이 절로 나온다.
대충 보아도 10m는 더 되어 보이는 거리.
이 정도의 스피드와 빠르기라면 어지간한 나이트는 옷깃도 스치지 못할 것이다.
“잘하네.”
공장의 건너편에서, 팔짱을 낀 키릴이 이를 드러내며 웃어 보였다.
* * *
그녀는 내게 몇 가지 팁을 알려 준 뒤, 고개를 돌려 게이트 방향을 응시했다.
“강아지. 작별 시간이야.”
“예?”
한창 설명하던 와중에 작별이라니.
첫 만남도 급작스럽지만, 헤어짐은 더 갑자기 찾아왔다.
“아무래도 누군가 뒤를 캐는 거 같아. 나 사실, 이렇게 나와 본 게 오랜만이거든.”
“쫓기고 있는 건가요.”
“응. 뭐 그런 셈이지.”
도망자치고는 너무 해맑은 표정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무렵, 그녀가 갑자기 한 팔로 내 목을 감싸 안았다.
“한동안 못 볼 텐데, 확실한 선물을 줘야지?”
“지금 뭔…….”
순식간에 키릴의 얼굴과 초근접 상태가 되었다.
지금 뭘 하려는 거야?
얼굴이 확 달아오른다.
도망을 어디 개방적인 나라에서만 하고 다녔나.
가까이서 보니 그녀의 진한 이목구비가 더욱 적나라하게 보인다.
살짝 그을린 매력적인 피부.
핏빛보다 더 새빨간 입술.
아름답게 솟아오른 코.
뱅글뱅글 회전하는 눈동자.
뭐?
“?”
눈동자가 회전을 하다니.
이것도 포이즈너의 특성인 건가?
스륵.
아니었다.
눈동자라고 생각했던 투명한 각막 같은 것이, 그녀의 눈에서 탈착된 뒤 내 오른쪽 눈에 달라붙었다.
나도 모르게 눈을 찔끔거렸지만 특별한 통증 같은 건 없었다.
“휴……. 오늘 대체 몇 번을 놀라는지 모르겠네요.”
“헤헤. 신기하지?”
“뭔지는 모르지만 받았으니까 이 손 좀 놓으시죠.”
“왜. 분위기 좋지 않아?”
키릴이 요염하게 웃으며 팔에 힘을 주었다.
그녀가 뛰어난 미색을 보유하고 있긴 하지만, 이런 장난은 사절이다.
“입 냄새나요.”
“윽……!”
당연히 구라지만 효과는 대단했다.
그럴 리가 없다는 눈빛을 하면서도, 키릴은 손을 풀고 한 발 물러섰다.
깜빡.
신기하다.
방금 전에 눈에 부착된 녀석인데 전혀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좀 전에 무언가가 내 눈에 달라붙었다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신기한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갑자기 시야 우상단에 글자들이 생겨났다.
Poisner Device-Prototype>
신규 사용자 인식 중 – 적합성 테스트>
포이즈너 타입 생체 반응 확인>
사용자의 신체와 동기화합니다.>
“우와…….”
또 한 번 감탄사를 토할 수밖에 없었다.
그 작은 렌즈 하나에 이런 기능이 들어가 있다니.
몬스터의 출현 이후 첨단 기술이 빠르게 발달했다고 들었지만, 이건 정말 문화 충격에 가까운 일이었다.
“어때. 죽이지? 이건 그 대단하다는 글로리 길드 놈들도 만져 본 적 없는 고성능 디바이스야. 진 박사가 만든 최고의 걸작이지.”
“진 박사가 누굽니까?”
“가서 확인해 봐. 어차피 이제 곧 만나야 할 텐데.”
“구미가 당기긴 하지만, 지금은 곤란한데요.”
글자 그대로 눈이 돌아갈 만한 장비다.
이런 걸 만든 사람이라니 호기심이 생긴다.
하지만 당분간은 누나의 곁을 지켜야 한다.
“누나를 간호해 줄 사람이 저밖에 없습니다.”
“그래. 그래서 하는 얘기야.”
“네?”
“천송화의 부상은 거의 다 나았어. 하지만 체내에 있는 독은 지금 당장 해결할 수가 없어. 몬스터의 독을 치유하려면 당사자의 심신이 안정되어 있어야 하거든. 진 박사에게서 해독약을 얻어 와야 해.”
나는 아직 치유를 하는 방법을 터득하지 못했다.
키릴은 쫓기는 몸이라 곧 떠나야 한다.
진 박사를 만나러 가는 건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키릴은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웬만한 정보는 네가 머릿속에 떠올린 것만으로 충분해. 디바이스가 알아서 텍스트를 띄워 줄 거야. 혹시 알아? 녀석이 어떤 눈 돌아가는 장비를 네게 줄지.”
샤아아.
키릴에게서 다시 특유의 기운이 휘몰아친다.
독보를 구사할 때마다 이런 느낌이 들곤 했다.
정말 가려고 하는구나.
나는 그녀가 곧 사라지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태어나서 이렇게 받기만 해 본 적이 처음입니다.”
“그래?”
“그래서…… 어떻게 고마움을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하하. 그럼 배워서 와. 그때까지 기다릴 테니까.”
내 목소리가 젖어 있는 것과 반대로 키릴은 끝까지 시원시원했다.
짧은 시간이지만 참 많이도 도와준 사람이다.
코끝이 시큰해졌지만, 나는 최대한 덤덤하게 물었다.
“우리가 다시…… 볼 수 있을까요?”
키릴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반드시.”
그 말을 끝으로, 키릴이 시야에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