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ison-Eating Healer RAW novel - Chapter (52)
52화
“여어, 고귀한 헌터.”
“만나자마자 기분 잡치게 하지 마.”
야차의 인사에 나는 씹어뱉듯 대답했다.
고귀한 헌터.
최근 들어 기자들은 천해선이란 이름 앞에 저 망할 놈의 수식어를 붙이고 있다.
포이즌 던전을 조용히 정리하며 세상 사람들을 구하는 ‘S’랭커.
나는 내 필요에 의해 하는 일이지만, 남들의 눈에는 ‘재능 기부’ 같은 것으로 보이는 모양이다.
고귀한 헌터라니.
단어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얼굴이 화끈거린다.
“반가워서 그렇지. 고귀한 헌터.”
저 망할 새끼가 내 별명을 자꾸 부른다.
당연히 놀리기 위함이다.
내가 그다지 고귀하지 않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놈이니까.
“도이수는 언제 오는 거야.”
“30분 후면 도착할 예정이다.”
“잘도 이 암시장에 발을 들일 생각을 했네. 꽤 위험한 곳인데.”
“뭣도 모르면서 이곳을 처음 방문하던 누군가가 떠오르지 않나?”
검은색 비닐 봉투에 동영화를 담아서 암시장을 찾아온 인물.
야차는 과거의 나를 상기시켜 주었다.
음.
지금 생각해 보면 꽤 위험한 일이었다.
“내 역할은 뭐야?”
“포이즌 던전에서 겪었던 일들을 설명해 주면 된다. 내 입장에서 너는 중요한 참고인이자 증인인 셈이지.”
야차는 그렇게 말한 뒤 사람을 시켜 두 가지 물건을 내게 전달했다.
“이게 다 뭐야?”
“변장 도구다. 네 정체를 숨기기 위한.”
“나도 가져온 거 있는데.”
“그 가방 안에 뭐가 들어 있든 우리가 준비한 것만 못할 텐데.”
“뒤로 구린 짓을 얼마나 하길래 그렇게 자신만만하지?”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순순히 물건을 받아 들었다.
얼핏 봐도 가방 안에 든 건 내 허접한 종이 가면과는 차원이 다른 퀄리티였다.
장인이 깎아 만든 듯 은은하게 빛나는 여우 가면 하나.
그리고 하나는…….
“망토? 이딴 걸 두르라고?”
“도이수 같은 굵직한 사업가들은 촉이 좋지. 얼굴만 가린다고 해서 될 문제가 아니다. 네 체형을 전부 덮어 줄 가림막이 필요하지.”
음.
그건 그렇다.
하지만 뭔가 찝찝한 느낌이 든다.
오늘 야차가 필요 이상으로 친절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달라진다던데…….”
그렇게 중얼거리며 여우 가면과 망토를 둘렀다.
과연, 어깨 뽕이 잔뜩 들어가 있다 보니 원래의 호리호리하던 체격이 거한처럼 변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조그마한 여우 가면에 비해 어깨가 태평양처럼 넓다 보니, 만화에 나오는 캐릭터처럼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되어 버린 것이다.
“와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야차가 침을 튀겨 가며 폭소를 터트린다.
저 시발놈.
처음부터 이 꼴을 보기 위해서 날 설득한 거였군.
“정말 멋진 모습이군. 사진을 찍어 두고 싶을 정도야.”
“그만 도발하는 게 좋을 텐데. 나중에 정산할 대가가 바트코인처럼 상승하고 있거든.”
“오. 그렇게 올라서는 곤란하지.”
야차는 웃음을 멈추고 날 별실로 안내했다.
그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기던 와중, 붉은 머리칼의 소녀가 조심스럽게 손을 흔들었다.
타오르는 듯한 머리가 너무나 잘 어울리는 그녀.
입가의 흉터만큼이나 치명적인 미색을 자랑하는 소매치기범.
비수다.
‘도이수도 도이수지만, 쟤한테 해 줘야 할 이야기가 있는데.’
평소 때처럼 장난스러운 얼굴을 보니 본인에게 일어난 변화를 잘 모르는 것 같다.
8성 던전 공략이 끝난 다음 날, 나는 육철완과 그때 있었던 일을 공유했다.
그는 내게 더없이 직관적인 경험을 들려주었다.
[갑자기 밥을 다섯 그릇은 먹은 것 같았지요!!]밥을 다섯 그릇 먹은 적은 없지만, 함께 버프를 받았던 입장에서는 어떤 느낌인지 알 것 같았다.
버프는 치유 능력만큼이나 헌터들에게 도움이 되는 능력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단 한 명도 나타나지 않았던 타입의 에스퍼가 아니던가.
그녀가 만약 헌터 자격 시험을 치른다면 나만큼의 주목을 받을지도 모른다.
그날 비수의 버프가 아니었다면 바닥에 쓰러진 건 자이언트 트레저가 아니라 나였을 테지.
나는 모처럼 밝게 웃으며 화답했고, 비수가 배시시 웃으며 조심스레 외쳤다.
“고귀한 헌터님……!”
이런 시발.
* * *
“엄브렐라 인더스트리, 도이수입니다.”
아무리 봐도 암시장에서 만날 사람 같지가 않다.
40대 후반의 나이가 무색하게 뽀얀 피부와 멋들어진 포마드 머리.
실로 ‘도련님’이라는 소리가 절로 나올 귀티 나는 남자였다.
이런 남자 앞에서 여우 가면과 어깨 뽕 망토를 두르고 있어야 한다니.
야차. 이 자식아.
쥐구멍이 어딨는지 알려 줘라.
“야차요.”
도이수와는 달리 야차에게는 내밀 명함이 없었다.
무례하다고 느껴질 만큼 단순한 소개만이 있을 뿐이었다.
뭐 당연한 일이다.
암시장의 총수가 명함 같은 걸 뿌리고 다닐 리 없을 테니까.
“실제 이름을 듣는 건 처음이군요.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엄브렐라 인더스트리가 꽤 큰 기업이라고 들었는데, 도이수는 시종일관 깍듯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야차가 업계 사이에서 이 정도의 인물이었나.
나랑 농담 따먹기를 할 때만 보면 동네 건달과 다를 바가 없어 보이는데.
“실례지만 이쪽은……?”
“내 부하요. 이름은 ‘고귀’라고 하지.”
하마터면 야차의 얼굴에 주먹을 날릴 뻔했다.
아무튼 그 별명을 지은 기자 놈은 조만간 나한테 큰 앙갚음을 당하게 될 거다.
“야차…… 고귀…… 암시장답게 특색 있는 이름들이군요.”
아니다.
아니라고.
내가 마음속으로 절규하고 있는 동안 야차가 본론을 꺼냈다.
“난 말이고 시간이고 질질 끄는 걸 싫어하지. 지금부터 내 부하 ‘고귀’가 던전의 상태에 대해서 말해 줄 거요.”
야차는 내게 턱짓을 했고, 나는 평정심을 유지하기 위해 심호흡을 크게 했다.
“현장에서 확인한 던전은 의심의 여지 없는 포이즌 타입이었습니다. 대기 중에 흘러 다니는 독성, 포이즌 몬스터의 출현, 희귀초의 발견 등. 포이즌 던전의 특성이라 할 수 있는 모든 요소가 그 안에 있었습니다.”
“던전의 난이도는?”
“어림잡아 짐작하건대 8성 수준으로 보입니다. 현장에서 확인한 보스 몹은 자이언트 트레저, 트라니움으로 뒤덮인 골렘이었습니다.”
내 보고에 도이수가 깊은 탄식을 뱉었다.
“맙소사. 하마터면 저희가 ‘고귀’님을 죽일 뻔했군요.”
“만만치 않은 던전이라는 건 이미 전해 들었습니다. 사고가 생겨도 그건 저희의 불찰이었겠죠. 실제로 그만큼의 소득이 있었고.”
도이수가 이채로운 눈으로 내 쪽을 응시한다.
흥.
그렇게 유심히 봐도 이쪽엔 여우 가면과 망토가 있다고.
“당신네 회사가 만든 파장 측정기가 쓸 만한 물건이라는 건 검증이 끝났소. 이제 당신이 말한 딜을 꺼낼 차례요.”
“네.”
도이수가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암시장 직원들답게 주변을 둘러싼 몇몇이 예민하게 반응했으나, 야차가 손을 들어 그들을 제지했다.
픽-
그는 작은 전자 기계를 들어 벽에 쏘았고, 곧 선명한 스크린이 나타났다.
“아무래도 이런 프레젠테이션이 편하다 보니……. 저희 방식대로 하겠습니다.”
“편할 대로.”
도이수는 스크린에 나오는 내용들을 바탕으로 설명을 시작했다.
이상 파장은 어떻게 해서 발생한 것인가.
이런 이상 파장이 왜 던전의 발생 전에 나타나는 것인가.
왜 자신들의 파장 측정기가 포이즌 던전을 예측하고 있는 것인가.
몇 분의 시간이 지났을까.
쩌억.
한창 설명하는 와중, 야차가 무례하게도 하품을 쩌억 벌렸다.
그리고 그제야, 나는 마음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좋아.
나만 이해 못 하는 게 아니었어.
“……이런 이유로 저희 파장 측정기는 포이즌 던전의 출현을 사흘, 길게는 일주일 전까지 예측할 수 있습니다. 아직 범위가 제한적이기는 하나, 지정된 구역 안에서는 97% 이상의 적중률을 자랑합니다.”
“97%면 사실상 전부 들어맞는다고 봐야겠군.”
“저희의 조건은 세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포이즌 던전에서 발생한 수익을 저희와 공유하는 것. 그리고 두 번째는…….”
도이수가 나와 야차를 한 번씩 쳐다본 뒤 말을 이었다.
“포이즌 몬스터의 혈액 채취입니다.”
“……!”
포이즌 몬스터의 혈액을 어디다 쓰려고?
블랙 코어는 포이즈너한테 쓰이기라도 하지, 혈액은 정말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물질이다.
아니.
쓸모가 없는 정도가 아니라 협회에서 지정한 최고등급 독극물로 분류된다.
아무리 하급 몬스터라 하더라도 그 혈액 한 방울이면 일반인을 골로 보낼 수 있다.
그런 물건을 굳이 왜?
“세 번째 조건은…….”
‘도련님’ 같던 도이수의 얼굴이 어느새 노련한 장사치의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두 번째 조건에 이유를 묻지 않는 것. 이것이 세 번째 조건입니다.”
흠.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왔다 나가는 것 같군.
세 번째 조건이 돈 한 푼 들어가지 않는 것이라는 걸 감안하면, 실질적으로 엄브렐라 인더스트리의 목적은 두 가지라고 할 수 있었다.
돈.
그리고 혈액.
하지만 어쩐지 돈은 구실일 뿐, 중요한 건 혈액뿐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수익의 배분에 따라 당신의 그릇을 따져볼 수 있겠군.”
사실 정보를 제공하는 것치고는 꽤 과한 요구 조건이다.
실제로 뺑이 치는 건 암시장 쪽 사람들일 테니.
특히나 혈액을 추출하는 과정은 조금만 실수가 발생해도 치명상을 입게 되는 작업이다.
지금까지 지켜본 바에 의하면 야차의 거래는 단두대의 칼날만큼 정확하다.
조금이라도 약을 팔거나 수상한 짓을 하면 반드시 대가를 치른다.
그것이 ‘제안’ 단계라 해도 말이다.
만약 도이수가 3/10 이상의 배분을 요구하면 이 자리에서 팔 하나쯤은 날아갈 수도 있다.
“저희는 1을 가져가겠습니다.”
“10%라. 양심은 있군.”
1이라는 말에 밑바닥에서 맴돌던 야차의 살기가 슬쩍 사라졌다.
도이수는 알고 있을까.
그가 조금 전까지 굉장히 위험한 상태였다는 것을.
그러나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게 있었다.
도이수가 말한 ‘1’의 의미에 대해서 말이다.
“10%가 아닙니다.”
“……?”
“백분지 일. 저희 엄브렐라 인더스트리는 1%만을 받겠습니다.”
와우.
보기보다 소박한 남자였네.
야차가 10%로 만족하는 모션을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도이수는 한발 더 나아가서 1%만 받겠다 공언했다.
99 대 1.
어떤 조건이 달린다 해도 지나치게 퍼 주는 계약이었다.
‘이걸로 더욱 확실해졌다.’
엄브렐라가 진정으로 원하는 게 돈이 아니라는 것.
이쯤 되니 그 혈액을 가지고 뭘 하려는 건지 몹시 궁금해진다.
“좋아. 받아들이지.”
야차는 군말 않고 도이수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어느새 그의 머릿속에서 이해타산이 정해진 듯하다.
“이후의 과정은 여기 서 있는 녀석들 중 한 명이 진행하게 될 거요. 당신도 굳이 나올 필요 없고. 피차 바쁜 몸들이니.”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아. 그럼 볼일은 끝났군.”
야차가 혼자서 결론을 지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음?”
“여기 계신 부하님께 포이즌 던전에 대해 몇 가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좋을 대로 하시오.”
야차 흘끗 나를 바라보더니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자리를 떠났다.
굳이 야차가 떠날 시간에 맞추어 이런 부탁을 한다는 것.
‘독대’를 하고 싶다는 요청이었다.
야차는 딱히 나와의 독대를 제지하지 않았고, 그렇게 별실에는 나와 도이수만이 남게 되었다.
“포이즌 던전은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고문과 같다고 하는데, 고생 많으셨습니다.”
“별말씀을.”
“저희는 포이즌 몬스터의 혈액을 통해, ‘균열’을 조사하고 있습니다.”
균열.
몬스터 브레이크.
대혼돈.
단어는 제각각이지만 모두 몬스터가 처음 출현한 기점을 뜻한다.
균열을 조사한다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이상하네.’
야차 앞에서는 ‘조건’까지 달아 가며 묻지 않기로 했던 주제가 아닌가.
그런데 왜 독대를 하자마자 술술 꺼내는 거지.
“이 별실에 뭐가 있는지 알고 함부로 말씀하시는 겁니까.”
“도청 장치는 없는 것 같습니다. 저희 나름대로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있지요.”
허세는 아닌 듯하다.
포이즌 던전도 사전에 예측하는 기업이니 어떤 기계를 만들었다 해도 이상할 게 없겠지.
다시 본론으로 돌아올 차례다.
어째서 나에게만 그 이유를 알려 주는 건가.
야차가 분명 자신의 부하라며 날 소개했었는데.
왜?
내가 누군지 알고.
잘생긴 중년 남자의 시선이 여우 가면 너머 피부로 느껴진다.
꾸벅.
한차례 고개를 숙인 도이수가 새로운 인사말을 꺼냈다.
“일전에 제 자식들이 신세를 졌습니다. 정말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 천해선 헌터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