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ison-Eating Healer RAW novel - Chapter (53)
53화
“……!”
나는 선택을 해야 했다.
끝까지 아닌 척을 하거나, 순순히 인정하거나.
그 고민의 시간은 그다지 길지 않았다.
스윽.
나는 쓰고 있던 여우 가면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천해선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실컷 별실에서 이야기를 해 놓고 이런 인사를 한다는 게 조금 우습지만, 어쨌거나 ‘천해선’으로서 대화를 나누는 건 이제부터다.
도이수도 그 의미를 알고 있는 듯 입가에 미소를 띄웠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야차와 사이가 좋지 않아 보이던가요?”
“물론 그런 느낌도 받았습니다만…… 저에게는 좀 더 확실한 근거가 있었습니다.”
“그게 뭔가요.”
“자이언트 트레저를 단신으로 잡을 수 있는 헌터는 우리나라에 없으니까요. 그건 구건이조차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저도 대한민국 헌터인데요.”
“하하. 표현을 달리해야겠군요. ‘공식적으로 등록된 한국 헌터’로 정정하겠습니다.”
그의 말처럼 공식적인 내 타입은 ‘힐러’다.
그리고 힐러 단신으로는 포이즌 던전을 클리어할 수 없다.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숨은 능력을 어느 정도 알고 있다는 의미다.
도이수를 바라보는 내 눈매가 한층 가늘어졌다.
“유의미한 성과는 최근 들어서야 나왔습니다만, 저희가 포이즌 던전의 위치를 추적한 지는 꽤 되었습니다. 발생 시점을 예측하는 과정에서 던전의 현황 파악은 필수지요.”
“…….”
“저희는 아주 옛날부터 클린업클랜에 대해 알고 있었습니다. 말이 클랜이지, 사실상 육철완 혼자 운영하는 곳이라는 것도 말입니다. 포이즌 몬스터의 혈액을 구할 수 있겠냐는 제안에 난색을 표하더군요.”
나는 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육철완이 포이즌 던전을 전전한 이유는 오직 하나, 금영화 때문이었다.
포이즌 몬스터의 혈액 같은 건 관심도, 채취할 능력도 없었겠지.
“그런데 최근 들어 ‘클린업클랜’의 실적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더군요. 과거 ‘청소부’ 역할에 집중하던 클랜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성과였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그 변화의 원인을 살펴보았습니다.”
“살펴봤다……. 육철완 클랜장을 미행이라도 했다는 겁니까?”
“아니요. 아닙니다. 저희는 그런 방법을 사용하지 않아요.”
그의 용모에서 우러나오는 젠틀함을 생각하면 그럴 법하다.
하지만 세상에는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이 너무나도 많다.
“이 땅에 ‘청소부’ 역할을 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시장이 좁으니까요. 저희는 과거 클린업클랜에서 다른 길드로 전향한 헌터들을 리스트업 해 보았습니다. 길드 명단은 클랜과 달리 소속을 확인하기가 수월하더군요.”
“이쪽을 미행하는 게 아니라…… 가능성 있는 헌터들을 하나하나 소거해 나갔다…….”
도이수에게서 작은 탄성 소리가 들렸다.
“정확합니다. 제 아들딸을 도와주실 때 짐작은 했습니다만, 심계가 깊으시군요.”
그렇게 해서 도이수가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았다.
기존 동료들 중 ‘클린업클랜’으로 돌아간 헌터는 없다.
기사로 인해 확인된 ‘천해선’ 말고는, 클린업클랜의 신규 전력은 확인되지 않는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100% 확신은 아니었습니다. 살상력을 갖춘 힐러라는 건 지금까지 유례가 없던 존재였으니까요.”
“흠.”
“하지만 던전을 설명해 주시는 모습과 야차 님을 대하는 태도에서 그런 결론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몇 마디 대화를 통해서 그런 것도 알 수 있는 건가.
도이수에게는 통찰력 이상의 무언가가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저희는 ‘균열’에 대해 조사하고 있습니다. 몬스터가 출몰하기 이전에도 각자의 세계가 있었을 텐데, 왜 하필 두 세계가 ‘현시대’에 연결이 되었는지를 말이지요.”
“몬스터의 혈액에 그 단서가 있나요?”
“아직은 지푸라기를 잡는 정도일 뿐입니다.”
말은 저렇게 했어도 나름대로의 확신이 있을 거다.
타당한 이유 없이 암시장의 총수와 거래를 하려고 하지는 않을 테니까.
혹시라도 헌터 협회에 발각된다면 틀림없이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아.”
그렇구나.
나는 그제야 왜 도이수가 독대를 청한 지 알 것 같았다.
나와 도이수는 꽤 비슷한 입장이었다.
외부에서 활동하는 모습과 내부의 모습이 다르다는 것도.
암시장에서 야차와 거래를 하고 있다는 것도.
결과적으로, 이 일이 새어 나가면 곤란해진다는 것까지.
이쪽이 혹여나 비밀을 발설하면 상대방도 편치 못하다.
도이수가 보여 주는 신뢰 이면에는 그런 안전장치가 깔려 있는 것이다.
‘이 사람…….’
나이 먹은 도련님인 줄 알았는데, 제법 배짱이 좋군.
도이수는 처음에 만났을 때처럼 깍듯이 인사를 하며 별실을 나섰다.
하지만 내 눈에 비친 그의 모습은 처음과는 제법 다른 느낌이 들었다.
* * *
“밀회는 즐거웠나?”
“별로. 내 정체를 알고 있더군.”
“그렇게 발연기를 하는데 눈치 못 채는 게 이상하지.”
시발.
이놈이고 저놈이고 연륜 있는 척들은.
나이 많아서 좋겠다.
“결과적으로 도이수와 네놈이 같은 배를 탄 셈이다. 한쪽은 정보를, 한쪽은 무력을 얻었군.”
기다리는 동안 야차는 나름의 기준을 생각하고 있었다.
3성(★★★) 이하의 던전은 암시장 내부 인력이 나서고, 그 위로는 내 도움을 받는다.
내가 채취한 자원은 일절 건드리지 않으며, 다만 동행자를 한 명 붙여 자원을 채집한다.
심플하지만 그만큼 깔끔한 방법이었다.
“좋아. 어차피 낮은 던전은 먹을 것도 별로 없으니까.”
“그럼 이제 정산만 남은 건가.”
“그래. 어지간한 정산 가지고는 안 될 거다.”
8성(★★★★★★★★) 던전을 깨느라 죽다 살아났으니까.
게다가 도이수 앞에서 등신 같은 망토를 두르고 있지 않았던가.
거래가 칼 같은 놈이니만큼 합당한 대가를 준비했을 테지.
야차가 ‘흐흐’ 하고 낮은 웃음소리를 흘리더니 손가락을 튕겼다.
딱.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이쪽으로 걸어온다.
누구지?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지만, 시간이 지나자 예민한 코끝으로 익숙한 냄새가 난다.
머리칼 색깔만큼이나 성격이 불같은 여자.
자신이 무슨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조차 모르는 여자.
그리고, 그 누구보다 자유를 갈망하고 있는 여자.
“비수?”
비수가 왜 지금 타이밍에 등장한 거지.
무언가를 전달하러 왔다고 하기에는 그녀에 손에 들린 것이 없었다.
비수의 얼굴을 보니 그녀 또한 무슨 일인지 영문을 모르는 듯하다.
“왜. 보상이 마음에 들지 않나?”
“!!!”
야차가 혓바닥을 낼름거리며 노골적인 제스처를 취한다.
눈앞에 있는 비수가 바로 ‘보상’이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순간적으로 역겨움이 치솟아 올랐다.
이 새끼가 사람을 뭘로 보고?
“개자식아. 사람이 물건이야? 보상 같은 소리하고 자빠졌어.”
“물건이라니. 난 그저 채무에 따른 종속 관계를 너에게 넘길 뿐이다. 그 처분은 너에게 달렸고.”
“난 그딴 인신매매 같은 짓거리는 안 해. 좋아. 보상을 받았으니 내 마음대로 해도 되겠지?”
나도 모르게 흥분을 하다 보니 목소리가 격앙된다.
그 목소리 그대로 비수에게 선언하듯 말했다.
“비수! 오늘부터 넌 자유다. 네 빚이 얼마든 다 갚은 걸로 하지. 더 이상 누구한테도 구속당할 필요 없어.”
한차례 쏟아붓고 나자 정적이 생긴다.
나도, 야차도, 비수도 아무 말 없이 서로를 쳐다볼 뿐.
잠깐만.
이렇게 되면……?
“…….”
잠깐의 시간이 흐른 뒤 비수가 정적을 깨고 야차에게 물었다.
물기를 가득 머금은, 떨리는 목소리로.
“아…… 아버지…… 진…… 짜야??”
야차가 귀를 후비며 건성으로 대답한다.
“그래. 이제는 나를 아버지로 부를 필요가 없다.”
비수의 몸이 벼락이라도 맞은 듯 경직되었다.
곧 그녀의 뺨을 타고 굵은 눈물이 줄줄 흘러내린다.
수년의 시간 동안 자유를 꿈꾸어 온 그녀가 마침내 족쇄를 끊어 낸 것이다.
와락.
갑자기 비수가 나에게 달려와 안긴다.
그리고는 거칠게 오열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드디어…… 으흑!!”
“야 이거…….”
일단은 잠자코 있어야겠군.
떨리는 그녀의 어깨를 보니 지난 밤이 생각난다.
자신을 버리고 간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잠꼬대를 했던 밤.
그때처럼 비수의 어깨가 한없이 왜소해 보인다.
어찌나 울음소리가 서글픈지 코끝이 시큰해진다.
축하한다 비수.
마침내 자유를 얻었구나.
이쯤 되니 버럭 화를 냈던 순간이 쪽팔리게 느껴진다.
야차의 농담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넘겼다면 좀 더 아름다운(?) 그림이 되었을 텐데.
“거래는 칼 같으면서 이럴 때는 솔직하지 못하네.”
“그런가.”
야차는 내 말을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물건처럼 비수를 내게 넘기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야차는 비수에게 자유라는 날개를 달아 준 것이다.
내가 자신처럼 그녀를 묶어 둘 리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게 풀어 주고 싶으면 지가 직접 풀지.
어쨌거나 놈에게서 처음으로 인간미가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너에게 줄 게 있다.”
“나?”
“아니. 너 말고.”
그러자 비수가 몸을 움찔하더니 고개를 돌린다.
불안한 눈동자를 한 채, 그녀가 야차의 앞으로 걸어갔다.
“눈을 감아라.”
야차는 그렇게 말하더니 품 안에서 뭔가를 뒤적거렸다.
기껏 자유의 몸으로 만들어 놓고 해코지하려는 건 아니겠지.
조금 걱정이 되기는 했지만, 묵묵히 지켜보기로 했다.
잠시 후, 나는 야차에 대한 내 생각을 일부 철회해야 했다.
놈이 비수에게 한 행동은 결코 해코지 같은 것이 아니었다.
도리어, 축복과도 같은 행동이었다.
반짝.
‘저건????’
우리 집에도 저것과 똑같은 게 한 조각 남아 있다.
프라니움처럼 오색 찬란히 반짝이는 꽃잎의 모양.
금영화의 잎사귀였다.
스윽.
야차가 금영화의 꽃잎을 비수의 입가에 대었다.
비수가 고개를 움찔했지만, 눈을 뜨거나 하지는 않았다.
샤르르…….
천천히 녹아내리는 금영화를 보며 야차가 내게 물었다.
“금영화의 치유 원리를 알고 있나?”
“몰라.”
“시간이다.”
시간?
화학적인 원리를 말하려는 줄 알았는데.
하긴, 그런 걸 알았다면 도이수가 설명할 때 하품이나 쩌억 할 리 없겠지.
“금영화가 최고의 희귀초로 불리는 이유는 단순하다. 손상되기 이전의 상태로 시간을 되돌리기 때문이지.”
야차가 말한 그 ‘손상’이 치유되고 있었다.
아름다운 얼굴과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그래서 더 흉측하게 느껴지던 입가의 상처가 점점 아물고 있었다.
진행 중인 병뿐만 아니라 과거의 흉터까지 치유할 수 있는 거였나.
수십억 이상의 가치가 있다는 말이 과연 허언은 아니었다.
“네가 직접 찢어 놓고 이제 와 고쳐 주는 의도가 뭐냐.”
내가 코웃음을 치며 묻자 야차가 악동 같은 웃음을 지었다.
“밖에 나다니기 쪽팔려야 도망을 덜 칠까 싶어서.”
“두 번 걱정하다간 발도 잘라 버리겠네.”
아무래도 놈과 같이 있다 보니 동화가 되는 것 같다.
평소에는 잘 하지 않는 농담이 나오는 걸 보니 말이다.
“맙소사……!!”
한 서른 번쯤 세다 포기한 것 같다.
확인하고 또 확인하고.
거울을 몇 번을 보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 또한 그녀의 드라마틱한 변화가 실감이 나질 않는다.
이제는 더 이상 ‘야차’한테 언제 호출될지 몰라 불안해할 필요도 없고, 무의식적으로 입을 가리며 웃을 필요도 없다.
흉터가 사라지니 확실히 얼굴이 더 부각된다.
특유의 요염한 미색에 훼방꾼이 사라지자, 그 대단하다는 마리아와 자웅을 겨룰 정도다.
그녀가 달라진 자신의 신분과 얼굴을 끝없이 확인하는 동안, 나는 야차에게 물었다.
“근데 제대로 정산한 게 맞아?”
“받을 거 다 받아 놓고 무슨 소리야.”
“결과적으로 내가 얻은 게 없잖아. 비수만 좋은 일 된 거고.”
“그게 뭐가 문제지?”
얼씨구.
야차가 되려 궁금한 얼굴로 내게 물었다.
“이미 그렇고 그런 사이 아니었나? 둘이 몸도 섞었을 테고.”
“??????”
이 미친놈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아니?”
“아닌데요?”
나와 비수는 한목소리가 되어 격하게 외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