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ison-Eating Healer RAW novel - Chapter (70)
70화
“도와줘서 고마워. 입금은 내일 아침에 해 줄게.”
본인이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걸 준다는데, 비수의 반응이 영 시원찮다.
“왜. 지금 바로 해 줘?”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비수가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묻는다.
“너, 정말 괜찮겠어?”
“뭐가.”
“강현이라면 나도 잘 알아. 그 새끼, 한때 헌터 중에서 제일 센 놈이라고 들었어.”
“그랬다더라.”
“……너 지금 되게 남의 일처럼 이야기하는데, 그 졸라 무서운 새끼가 널 노리고 있는 거라고. 바로 내일.”
“차라리 잘됐어.”
“뭐?”
“다짜고짜 집으로 쳐들어오는 것보다는 훨씬 나. 거긴 누나도 있고 진 박사님도 있으니까.”
“허…….”
비수가 ‘지금 남 걱정할 때냐’는 얼굴로 나를 쏘아보았고, 나는 빙그레 웃었다.
“피할 수 있는 싸움이 아니야. 피할 생각도 없고. 오히려 잘된 일이야. 그쪽 수장을 없애면 나머지 놈들은 뿔뿔이 흩어지게 될 테니까.”
“도와…… 줄까?”
동그랗게 만 입술로 비수가 조심스럽게 제안한다.
만난 지 꽤 된 사이지만 저런 얼굴은 처음 본다.
정말 어지간히도 걱정되는 모양이다.
한편으로는 그런 그녀의 모습이 퍽 고맙게 느껴진다.
“괜찮아. 한물간 헌터가 세 봐야 얼마나 세겠어.”
“……기다려 봐.”
비수가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뭔가를 꺼낸다.
낡은 헝겊 주머니 안에는 노란빛의 찻잎 같은 것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이게 뭐야?”
“이건 라투스(latus)라는 식물이야. 포이즌 던전에서 채집할 수 있어.”
“이걸 왜…….”
“라투스의 향을 맡으면 두통이 일어나는 사람들이 있어. 강현도 그런 사람일 거야.”
그걸 어떻게 알지?
눈을 깜빡깜빡거리는 날 향해 비수가 씹어뱉듯 이야기했다.
“강현도 우리 아빠랑 똑같은 사람이더라. 독편 중독자.”
“……!”
맞다.
애당초 비수가 암시장에 팔린 건 독편에 중독된 아버지의 빚 때문이라고 했었다.
본인에게는 별로 좋지 않은 기억일 텐데.
비수는 그 기억의 끝자락에서 내게 도움이 될 만한 물건을 가지고 와 준 거다.
“고맙게 받을게.”
나는 비수가 내민 주머니를 조심히 받아 넣었다.
솔직히 말하면 이게 얼마나 도움이 될까 싶은 마음도 있었다.
비수의 아버지는 일반인이고, 상대는 ‘S’랭크 헌터니까.
하지만 효과를 떠나 그녀의 마음 씀씀이가 굉장히 따듯하게 느껴졌다.
죽을 고비를 만났다고 생각해서 그러는 걸까.
어쩐지 비수의 행동이 이전과는 많이 다르다.
“매일 이렇게 상냥하면 좋겠다 야.”
“오……. 천해선. 혹시 그거 프러포즈?”
내가 아니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비수는 은신 스킬을 사용해 사라져 버렸다.
이보쇼 빨간 머리.
대답할 시간은 줘야지.
내가 뭐라고 대답할 줄 알고?
* * *
큰일이 있을 때 도와주는 사람이 많으면 잘 산 인생이라고들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난 인생을 꽤 괜찮게 살았나 보다.
헌터 랭킹전 결승 ‘강현 vs 구건이’ 5.03G (다운)>
글로리 길드가 실권을 잡은 이후로 헌터 협회 홈페이지에서 사라진 영상이다.
왜 사라졌는지 이유는 자명하다.
구건이가 꼼짝도 못 한 채 비 오는 날 먼지 나도록 뚜드려맞고 끝났기 때문.
물론 인터넷상에 저화질 버전을 구할 수는 있지만, 이렇게 고화질 영상을 구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그 어려운 일을 도이수가 해냈다.
[보시면 나름대로 도움이 되실 것 같아서요.] [나름대로가 아닌데요? 이건 꽤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아 그리고…… 한 가지 제안드릴 게 있습니다만.] [네?] [천해선 헌터님께서도 눈치채셨겠지만…… 진 박사님과 저는 구면입니다.] [네. 그럴 것 같았어요. 낯선 사람을 보면 발작을 일으키시는데 안 그러시더라구요.] [역시 짐작하고 계셨군요. 그때도 상태가 좋지 않아 보이시던데……. 헌터님만 허락해 주신다면 박사님을 저희 쪽에서 영입하고 싶습니다.]영입이라.
이런 경우에는 보통 ‘보호’라는 표현을 쓰지 않나?
[진 박사님의 질환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외부와의 접촉이 없는 독립된 연구 시설을 제공할 계획입니다. 무엇을 연구하든 관여하지 않을 겁니다.] [말만 들어도 돈이 수억 깨질 것 같은데요. 너무 큰 호의는 의심을 부르기 마련인데.] [이번만큼은 천해선 헌터님에 대한 호의가 아닙니다. 엄브렐라 인더스트리는 진 박사님께 빚이 있고, 지금 그걸 갚으려는 겁니다.]빚이라.
자세한 사정이 궁금하긴 한데 어쩐지 귀찮다.
중요한 건 내막이 아니라 진 박사의 마음이겠지.
[제가 진 박사님의 부모나 보호자도 아니고. 직접 물어본 뒤 진 박사님 의견에 따르겠습니다.] [감사합니다.]의도된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나, 항상 도이수와 대화를 나누다 보면 주고받는 것이 생긴다.
그림 그리는 데는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다.
화가를 해도 대성했을 사람이야.
혼자서 잠시 피식거린 뒤 다운로드 된 파일을 열어 본다.
“어디…… 전략을 좀 짜 볼까.”
강현 대 구건이.
누군가에게는 잊고 싶은 흑역사가 아주 정밀한 고화질로 눈앞에 펼쳐졌다.
* * *
너무나 노골적인, 그러나 이해는 갈 법한 전화가 걸려 왔다.
[천해선입니다.] [유인원이요.]자식을 잃은 마당에 안녕하냐고 물어볼 수는 없겠지.
[협회에 등록된 번호가 아니네요?] [개인적인 일이라서.] [……말씀하시죠.] [왜 사실대로 보도가 되지 않을까 궁금했을 텐데 조용히 있어 줘서 고맙소. 사건의 현황을 모두 파악한 후에 발표를 할 생각이었소.] [전화를 주신 걸 보니 파악이 끝나신 모양이군요.] [그렇소. 유감스럽게도 이번 조사 결과 또한 있는 그대로 발표하기는 어려울 거요. 하지만 현장을 처리해 준 천해선 헌터에게는 진실을 알려 줘야 한다고 생각했소.]아하.
그런 명목으로 슬쩍 불러내시겠다.
갑자기 ‘전 관심이 별로 없어서요. 그냥 혼자만 알고 계십쇼’라고 대답하면 어떤 반응이 나올지 무척 궁금해진다.
하지만 그랬다간 강현이 이판사판 집으로 들이닥칠 위험이 있다.
[그러죠. 시간과 장소를 알려 주시면 그쪽으로 가겠습니다.]오늘 아침 일찍 다녀왔던 그 장소가 문자로 도착했다.
밤 열 시 반.
한판 붙기 딱 좋은 시간이다.
* * *
입장 시간이 끝나자 수목원의 가로등이 하나둘 빛을 잃었다.
다만 다른 날보다 달빛이 밝은 탓에, 훤칠한 노인의 신형이 한눈에 잘 들어왔다.
헌터 협회 부회장이자, 죽은 유지원의 아버지.
망자를 그리워하는 음울한 기운이 검은 정장 차림의 그를 사신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유인원이 나를 알아보기 전, 체크해야 할 게 있었다.
‘잘 작동하고 있나?’
상태 이상 무. 정상 기동 중입니다.>
‘그래. 네가 갑자기 고장 날 일은 없겠지.’
간단한 확인을 마친 뒤 일부러 기척을 내 걸어갔다.
뜨겁게 타오르는, 그러나 한편으로는 갈 곳을 잃어 방황하는 동공이 나를 응시한다.
“……오랜만이오.”
보자마자 악귀처럼 달려들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유인원의 태도가 정상적이다.
“이런 곳에서 만나자고 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이해해 주셨으면 하오. 누구도 알아선 안 되는 정보라서.”
“뭐가요? 유지원의 죽음에 대해서? 아니면…….”
나는 약간의 조소가 담긴 눈을 한 채 말을 이었다.
“테네브라에 대해서?”
“……!!!!!”
유인원의 눈썹이 일순간 출렁이더니 금세 제자리를 찾는다.
예전에 볼 때부터 느꼈지만 표정 관리하는 기술이 보통이 아니다.
정곡을 찔렸을 텐데 유인원은 어느새 본연의 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예상했나?”
본심이 탄로 나니 주저 없이 하대를 하는군.
바라던 바다.
오늘 밤 나와 유인원이 마주친 이상 멀쩡하게 세상에 돌아갈 수 있는 사람은 하나뿐이다.
“주변에 애 아빠가 한 명 있는데, 백 퍼센트 당신이 날 죽일 거라고 했지.”
“…….”
“근데 정확히 알고는 있나?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러자 유인원의 이마에 굵은 핏줄이 돋아났다.
“이제 와서 네가 한 일이 아니라고 잡아뗄 생각인가? 개수작 부릴 생각하지 마!”
“그런 뜻이 아니다. 이 병신아.”
“……!!!!!!”
갑작스러운 욕설에 유인원의 얼굴이 휴짓조각처럼 구겨진다.
높으신 자리에 오른 이후로 험한 말은 들어 본 적이 없었겠지.
하지만 날 죽이려 하는 마당에 내가 못 할 말이 뭐가 있을까.
“누가 유지원을 죽였는지가 아니라, 왜 유지원을 죽일 수밖에 없었는지. 그걸 아냐고 물은 거다.”
“그 입 닥쳐!!”
유인원이 온몸을 부르르 떤다.
경련이 일어나는 그의 이마에는 굵은 핏줄이 또렷이 드러나 있었다.
“그 어떤 이유가 있든 내 아들이 죽은 건 변하지 않는다!! 지원이는 내…… 내 모든 것이었어!! 그리고 넌, 내 아들을 죽인 놈이고!!”
쯧쯧.
한심하지만 아주 조금 연민의 감정이 들기도 한다.
치밀한 성격의 소유자로 알고 있었는데.
아들의 죽음에 이성적인 판단을 완전히 상실해 버렸다.
전후 사정을 막론하고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 안달 난 상태.
마치 인간이 아니라 몬스터를 보는 듯하다.
팟.
한차례 감정의 격랑에 빠졌던 유인원이 돌연 오른손을 치켜들었다.
누군가를 부르는 일종의 시그널.
드디어 만나게 되겠군.
한때 대한민국 최고의 헌터라 칭송받았던 남자를.
‘저긴가.’
가로수길 한편에서 회색 야상을 입은 남자가 천천히 걸어온다.
멀리서 봐도 상당히 균형 잡힌 체형이었다.
궁극의 파이터를 마음속으로 그려 보면 저런 모습일까.
몸 전체에 바늘 하나 들어갈 틈이 보이지 않는다.
전반적으로 평이한 얼굴이었지만 눈 밑이 거뭇하고 볼이 움푹 패인 게 생기가 없어 보인다.
저것도 독편의 영향인가.
“반갑다, 후배.”
그가 비릿한 웃음과 함께 내게 인사를 건넨다.
“범죄자를 선배로 둔 적은 없는데.”
“너무 그렇게 박대하지 마라. 넌 모르겠지만, 난 오진아한테도 후배라 부른 적이 없어.’
“그런 건 관심 없어. 다만, 협회에서 쫓겨난 개가 부회장 가랑이 밑으로 다시 들어간 게 신기할 뿐이다.”
그러자 강현의 광대가 미묘하게 실룩였다.
“가랑이 밑이라니……. 우린 거래를 했을 뿐이다. 천해선의 목과 900억을.”
스무고개 놀이를 하면 어쩌나 했는데 알아서 술술 불어 주니 일이 편하군.
방금의 대화로 얻은 게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강현의 자백.
그리고 두 번째는 강현이 여전히 쓰레기라는 사실이었다.
죽은 동료를 언급할 때는 빙글거리며 웃던 놈이, 유인원의 개가 되었다는 말에는 동요를 보였다.
전우의 목숨보다 본인의 자존심이 더 중요하다는 의미다.
더 마음 편히 뚜드려 팰 수 있을 것 같다.
“얼마나 해 처먹었으면 그런 의뢰를 하지?”
그 질문은 강현이 아닌 유인원을 향한 것이었다.
부회장의 연봉이 수억 단위이기는 하나 그 돈만으로 900억을 마련하려면 유인원은 이미 신선의 경지여야 한다.
세간에 떠도는 협회의 부정이 거짓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유인원은 내게 대답하는 대신 강현을 향해 눈짓을 보냈다.
대화는 거기에서 종료.
강현이 물 흐르는 듯한 움직임으로 내게 다가왔다.
꿀꺽.
어느 누가 이 상황에서 긴장하지 않을 수 있을까.
눈앞의 남자는 대한민국에서 한때 최강으로 불리던 헌터다.
나름대로의 승산이 있다 한들, 조금만 일이 어긋나면 죽는 건 내 쪽이 될 거다.
‘우둑’ 하는 소리와 함께 목을 이리저리 돌리던 강현의 몸이 순간 아지랑이로 변했다.
파앗.
‘빠르다……!!’
#쾌속(快速).
스스로 붙인 명칭이 아니라, 그의 스피드를 찬양하며 사람들이 알아서 붙여 준 해시태그.
마치 등에 제트 엔진을 단 것처럼, 강현이 번개처럼 접근해 내 몸을 덮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