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ison-Eating Healer RAW novel - Chapter (72)
72화
지금의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유인원의 머릿속은 혼란으로 뒤범벅되어 있었다.
다 잡은 고기라고 생각했었는데 웬걸.
강현이 금방이라도 천해선의 목을 날릴 줄 알았는데, 되레 그의 칼에 쓰러져 버렸다.
유인원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눈만 깜빡이고 있었다.
S랭크 ‘힐러’인 천해선이 어째서 검은 화염을 쏘아 대고, 강현과의 격투에서 우위에 설 수 있는 것인가.
도저히.
그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장면이었다.
“놀랐어?”
강현의 소지품을 확인한 뒤, 천해선이 유인원 쪽으로 천천히 다가온다.
“……!!”
숨이 막힐 것 같은 공포에 유인원은 반사적으로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당대 최강이라 불렸던 강현을 단칼에 죽여 버린 자다.
자신을 죽이는 건 파리를 잡는 것보다 수월하겠지.
그 본능적인 공포에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지만, 악에 받친 목소리만큼은 처음 그대로였다.
“가, 강현을 무슨 수로 잡아낸 거지??”
“내가 더 세니까.”
허무하리만큼 단순한 대답에 유인원은 말문이 턱 막히고 말았다.
유인원을 향해 천천히 걸어오는 천해선.
그의 팔에는 여전히 검은 칼날이 돋아나 있었다.
“의뢰를 할 때에는 돈을 받은 사람의 상태도 확인했어야지.”
“상태…… 라니?”
“나라면 독편을 빨아먹는 놈한테 900억씩이나 주진 않을 텐데.”
독편.
강현이 독편 중독자라는 건 유인원도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실제 강현이 최강의 타이틀에서 내려온 것도, 온갖 명예를 포기한 채 은둔자의 삶을 선택한 것도 모두 독편 때문이었다.
“독편이…… 뭐가 어쨌다는 거야?”
푸욱.
유인원의 물음에 대답한 건 천해선이 아니라 그의 손에 달린 칼날이었다.
블랙 에테르로 돋아난 검은 칼날이 유인원의 심장을 정확히 파고들었다.
“그 이유는 아들한테 가서 들어.”
“크…… 학…….”
유인원의 눈에서 붉은 피 눈물이 흐른다.
자식인 유지원의 최후와 비슷한 모습에, 천해선은 순간 착찹한 기분이 들었다.
하나 유인원은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자신을 죽이기 위해 테네브라까지 고용한 인물을 살려 둘 수는 없었다.
명분은 이미 차고도 넘친다.
지금까지 유인원이 포장해 왔던 이미지는 조만간 완전히 찢겨질 것이다.
다만, 내용을 공개하면 자신의 능력 또한 밝혀지게 될 터.
그만큼 운신의 폭이 줄어들 가능성이 있었다.
“일단은…… 다중 능력(Multi ability) 정도로 해 둘까.”
쓰러진 유인원의 모습을 얼마 동안 지켜본 뒤, 천해선은 그렇게 마음을 먹었다.
화염계 에스퍼이자 힐러.
천해선은 앞으로 다중 능력(Multi ability)을 보유한 헌터로 이름을 날리게 될 것이다.
물론, 그것조차 그가 가진 능력의 일부분일 뿐이지만.
화륵.
천해선이 강현과 유인원의 시신을 한곳에 모은 뒤 ‘독염’을 방출했다.
그가 ‘나이트’가 아니라 ‘에스퍼’의 능력을 공개하기로 한 이유는 독 때문이었다.
시신에서 블랙 에테르가 확인된다면 포이즈너의 정체가 들킬 가능성이 크다.
이들의 시신에 남겨진 독을 지우려면 ‘소거’는 필수.
전투 과정 중에서 화염에 몽땅 타 버렸다고 하면 아귀가 맞는다.
“윽…….”
시체가 타는 고약한 냄새가 천해선의 코끝을 자극한다.
그나마 ‘독염’의 기운이 워낙 강한 탓에 몇 초 지나지 않아 두 시신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차라리 이 향이 선녀처럼 느껴지네.”
천해선이 걸음을 옮겨 전투가 벌어졌던 장소로 이동한다.
고운 흙바닥 한쪽에 노란 잎이 수북이 깔려 있었다.
라투스(latus).
비수가 전달해 준 이 꽃잎에는 독편 중독자들에게 취약한 물질이 담겨 있었다.
라투스의 향을 맡게 된 중독자들은 순간적으로 강한 두통을 느끼게 된다.
천해선은 전투 도중 일부러 라투스가 깔린 지역으로 강현을 유인했고, 독편 중독자인 강현이 허점을 보인 틈을 놓치지 않았다.
강현이 천해선에게 앞서는 것은 ‘물리 공력’ 정도가 전부였다.
천해선에 비해 염동력 레벨도 열세요, 라투스라는 약점도 가진 상태였다.
게다가, 천해선에게는 궁극의 무기인 블랙 에테르가 있지 않은가.
당대 최강이라 불렸던 강현을 맞아 천해선이 승리를 확신한 이유에는 그런 근거들이 깔려 있었다.
“당분간 시끄러워지겠네.”
음모와 증오, 전투와 피비린내가 뒤범벅된 공간 속에서, 천해선이 낮게 중얼거렸다.
* * *
“글자 그대로, 신문에 나올 일이군요.”
트레이닝복 차림의 표혁규가 침을 꿀꺽 삼킨다.
항상 잘 갖춰진 정장 차림만 보다가 이렇게 보니 새롭게 느껴진다.
‘나 공무원이요’라 쓰여 있는 고리타분한 얼굴.
그러나 그 표정은 공무원의 그것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최근 부회장의 거동이 평소와 다르다는 건 어느 정도 알고 있었습니다. 허나…….”
“아들을 잃은 사람이 멀쩡하면 그게 이상한 일이죠.”
“그렇습니다. 단순하게 그렇게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런 끔찍한 일까지 벌일 줄이야…….”
표혁규가 몇 번이고 모니터의 장면을 반복해 돌려 본다.
유인원을 만나기 전에 수시로 체크했던 건 V1의 녹화 기능이었다.
내 시선에 따라 화면이 움직일 테니 별도의 촬영 기술은 필요가 없었다.
유인원은 날 죽이기 위해 테네브라를 고용한 일과, 아들의 죽음에 거짓이 섞여 있다는 내용을 순순히 시인했다.
혹시라도 내가 녹화를 할 수 있다는 걸 간과한 것일까.
아니.
아마도 내가 그 자리에서 살아 돌아올 수 없다는 확신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전투 장면이 보이지가 않는군요.”
“뺐습니다. 일부러.”
표혁규는 굳이 ‘왜?’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그 반응이 날 더 아리송하게 만들었다.
나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길래 그런 것조차 묻지 않는 걸까.
“저에게 이 파일을 넘겨주신 건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뭐……. 골드 코어를 주셨던 것도 있고……. 제가 협회 사람들을 대부분 좋아하지 않는 이유도 있겠죠.”
테이블 위에 놓인 콜드브루를 한 모음 마신 뒤 나는 또 하나의 이유를 추가했다.
“표혁규 감독관님이라면 사람들도 쉽게 수긍을 할 테구요.”
“……아마 그럴 겁니다.”
그는 헌터 자격 시험의 감독관이다.
하지만 자격 시험은 분기에 한 번 벌어지는 행사.
어떤 단체도 3개월에 한 번만 일하는 직원을 두지는 않는다.
헌터 협회 감사부 내부감사팀장.
그것이 평소 표혁규가 맡고 있는 또 다른 직책이었다.
“발표 시점은 언제로 잡으면 좋겠습니까.”
“내일 당장이요.”
내 대답에 표혁규가 쓴웃음을 지었다.
“……오늘밤 잠은 다 잤군요.”
* * *
“해치웠나?!”
재수가 없어서라도 보통은 하지 않는 말.
그러나 구건이는 TV 속 화면을 보며 그렇게 외칠 수밖에 없었다.
‘헌터 협회 긴급 기자 회견’
무슨 일이 터졌길래 기자 회견까지 하는 걸까.
협회는 어지간히 중요한 일이 아니라면 언론사에 보도 자료를 뿌리는 것으로 일을 마무리하곤 한다.
기자 회견, 그것도 긴급으로 열 정도면 사안이 어지간히 심각하다는 의미다.
구건이는 기대 반, 긴장 반의 심정으로 화면을 지켜보았다.
기자 회견 자리가 세팅되는 동안 유인원에게 전화를 해 보았지만, 그의 전화기는 꺼져 있었다.
‘분명…… 그건 악귀의 눈빛이었다.’
구건이는 살인귀처럼 변해 버린 유인원의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천해선은 유지원을 죽였다.
실상은 그 안에 수많은 이야기들이 포함되어 있었으나, 구건이는 굳이 상세한 내막을 들려주지 않았다
뭐, 구건이가 어떤 설명을 하든 유인원의 귀에 들리지 않았을 테지만.
악귀처럼 변해 버린 유인원이 어떤 행동을 할지, 구건이는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유인원은 천해선을 죽일 것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언제 소식이 들리나 궁금해하던 참이었다.
똑똑.
“나중에 들어와!”
“네, 네.”
누군가 대표실 문을 두드렸지만 구건이는 소리를 버럭 질렀다.
때맞추어 터진 기자 회견에 조바심을 감출 수가 없었던 것이다.
“표혁규?”
구건이의 눈이 조금 크게 떠졌다.
유인원이 회견장에 나올 것이라 생각했는데, 정작 마이크 앞에 앉은 인물은 감사팀장 표혁규였다.
[안녕하십니까. 대한민국 헌터 협회 감사부 내부감사팀장 표혁규입니다.]구건이의 기억 속에 표혁규는 썩 좋은 이미지가 아니었다.
적당히 손을 내밀면 덥석 잡는 협회의 사람들과 달리, 그는 한 마리 고고한 학처럼 콧대를 세우고는 했다.
감히 글로리 길드가 내미는 호의를 무시해?
그의 소속이 감사부라는 걸 감안하더라도 괘씸한 일이었다.
구건이가 자신의 짧은 스포츠머리를 둔탁하게 쓸어 넘겼다.
화면 속에 표혁규가 나타난 걸 보자 석연찮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젯밤, 헌터 협회는 충격적인 제보를 입수했습니다. 제보의 내용은, 헌터 협회의 내부 관계자가 특정 헌터를 죽이기 위해 청부 살인을 의뢰했다는 것이었습니다.] [파바바바바밧]표혁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엄청난 플래시 세례가 쏟아진다.
그와 동시에 기자 회견장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고스란히 스피커를 타고 넘어왔다.
과연 기자 회견을 열 만한, 아니 기자 회견을 열지 않으면 안 되는 내용이었다.
대한민국의 헌터를 죽이기 위해 살인 청부를 하다니.
그것도 다름 아닌 협회 내부 직원이.
국민을 지켜야 할 경찰이 범죄 조직과 결탁해 민간인을 살해하는 것과 진배없는 행위였다.
기자 회견 현장이 난리가 난 건 당연한 일.
비단 기자 회견장뿐만 아니라 나라 전체가 들썩일 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구건이는 조금 다른 이유로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다.
‘실패인가……?’
살인 청부를 공개적으로 진행하는 멍청이는 없다.
성공을 하면 비밀리에 묻힐 일이고, 실패하면 내막이 드러나기 마련.
협회에서 이 사실을 공표한다는 건 의미하는 바가 명백했다.
유인원의 의뢰는 실패했다.
그 생각에 대답이라도 하듯, 표혁규가 진중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테네브라라는 조직이 있습니다. 강현을 비롯해, 과거에 불명예 은퇴한 헌터들이 세력을 규합해 만든 범죄 집단입니다. 협회 내부자는 테네브라와 접촉해 살인 청부를 의뢰했습니다.]표혁규는 거기까지 말한 뒤 조금 뜸을 들였다.
그들의 정체를 밝힌 뒤 닥쳐 올 후폭풍이 두렵기라도 하듯.
덕분에 지켜보는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타들어 갔다.
[테네브라에 살인 청부를 의뢰한 인물은 헌터 협회 부회장 유인원. 그가 죽이고자 했던 대상은 무소속으로 활동 중인 S랭크 힐러, 천해선입니다.]“……!!!!!!!!!!!!!!”
구건이는 순간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대한민국 땅덩이 전체가 요동치는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건 결코 환상 같은 게 아니었다.
S랭커가 가진 특별한 감각이, 건물 주변에서 일어나는 동요를 본능적으로 캐치한 것이었다.
[헌터 협회의 일원으로서,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한 것에 대해 깊은 사죄를 드립니다.]표혁규가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히 고개를 숙인다.
자연스럽게 드러난 정수리를 향해, 또다시 카메라 세례가 빗발친다.
꽤나 긴 시간이 지났음에도 현장의 소란이 끊이지 않는다.
표혁규가 다시 마이크를 잡고 이야기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이 사건의 결정적인 제보자는 살인 청부의 대상, 천해선 헌터였습니다. 그가 제공한 영상에는 사건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줄 당사자들의 대화가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습니다.]‘당사자들?’
테네브라와 유인원의 대화.
구건이는 그때부터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다.
테네브라에 대한 정보를 빠삭하게 알고 있는 것은 아니나, 그 수장이 누구인지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있어 역린과도 같은 남자.
승승장구였던 인생에 유일한 치부를 남긴 사내.
놀랍게도, 구건이의 귀에 그자의 이름이 들어왔다.
[어젯밤, 천해선 헌터는 강현과 유인원을 만났습니다.]“!!!!!!!!!!!!!!!!”
혹시나 했던 그 이름이 들리자 구건이는 반사적으로 몸을 움찔했다.
[유인원은 유지원의 사망과 관련해 알려 줄 것이 있다며 천해선을 불러냈고, 그 자리에서 강현과 천해선이 사투를 벌였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꿀꺽.
구건이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대표실 전체에 퍼졌다.
[강현과 유인원은 사망. 천해선은 무사합니다.] [파바바바바바밧] [오오!!!]표혁규가 발표를 하고, 카메라 플래시가 터진다.
계속해서 반복되는 상황.
그러나 이번 발표만큼은, 그가 들려주는 소식에 또 다른 소리가 가미되었다.
현장에 모인 기자들이 환호하는 소리.
천해선이 무사하다는 소식에 자기 일처럼 기뻐하는 목소리들이었다.
“이럴…… 수가…….”
풀썩.
그리고 여기.
글로리 길드의 대표실에는, 다리에 힘이 풀린 구건이가 소파에 주저앉는 소리만이 처량히 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