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ison-Eating Healer RAW novel - Chapter (75)
75화
-그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
X됐다.
이건 정말로 X된 일이다.
비행기 몸통만큼 두꺼운 촉수를 사방으로 내리치는 크라켄.
녀석을 보며 퇴역 헌터 손정희는 피가 식는 기분을 느꼈다.
퇴역 헌터는 나이가 들어 은퇴한 뒤, 구역의 안전을 보호하는 일종의 명예직이다.
군대로 따지면 예비군이나 민방위에 해당하는 역할.
노쇠했다고는 하나 일반인들보다는 힘이 강했기에 ‘만일의 사태’에 대응이 가능하다.
그러나,
‘저건 선 넘었지……!!’
저 커다란 문어 놈은 ‘대응’이라는 말이 무색한 녀석이었다.
언뜻 봐도 5성(★★★★★) 이상은 거뜬해 보인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손정희의 민머리에 땀이 송글송글 맺힌다.
그가 품고 있는 의문은 천해선과 동일한 것이었다.
게이트가 터진 지 1년도 안 됐는데, 같은 장소에 또 다른 게이트가 나오는 건 전례가 없던 일이다.
애시당초 민방위 역할에 가까운 손정희가 이 동네에 배정된 것도 다 그 때문.
만약의 만약을 대비해 퇴역 헌터들을 배치해 놓았을 뿐, 실제로 사건이 터질 것이라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큰일이다……!’
정신없이 내달리고 있어서일까.
아니면 크라켄의 공포에 짓눌려서일까.
손정희의 심장이 정신없이 곤두박질친다.
“꺄악!!”
혼비백산한 시민들이 연신 그의 몸을 스치고 지나간다.
대규모 강진이 일어난 것처럼 도로는 울퉁불퉁 솟아 있었고, 짓다 만 건물은 폭삭 주저앉아 버렸다.
매캐한 연기와 흙먼지가 뒤섞여 손정희의 코를 자극한다.
은퇴했다고는 했지만 나이트는 나이트.
핸드폰에 비상 신호를 전송한 손정희는 아직 못 빠져나온 사람들을 찾느라 이리저리 눈을 굴렸다.
-그오오오오.
크라켄이 다시 한번 촉수 두어 개를 바닥에 내리친다.
쾅!!!!!!!!!!!!!!!!!
몸을 축소했다면 마치 앙탈을 부린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눈앞의 크라켄은 지금껏 손정희가 지켜봐 온 몬스터 중에 가장 컸고, 당연히 그 위력 또한 단순한 앙탈 수준이 아니었다.
“큭……!!”
삽시간에 공중으로 날아간 손정희가 허리를 틀어 자세를 잡는다.
현역 시절의 탄탄한 식스팩은 없어졌지만 노련함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는 정확히 두 발로 착지한 뒤 이를 악물었다.
“아……!”
순간적으로 손정희의 얼굴이 무참히 일그러진다.
건물 더미에 다리가 깔려 움직이지 못하는 사내아이가 보였기 때문이다.
끔찍한 고통에 비명조차 나오지 않는 듯, 사내아이는 입을 크게 벌린 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손정희가 날랜 걸음으로 다가가 벽돌을 치운다.
‘D’랭크 나이트 출신인 손정희에게 이 정도의 잔해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다만, 짓뭉개진 아이의 양다리는 그가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으으…….”
피가 쏠려 불그스름하던 아이의 얼굴이 점점 희게 변한다.
손정희는 그것이 결고 좋은 변화가 아니라는 걸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여기, 여기 아무도 없어?!”
힐러, 아니 그냥 일반적인 의료인이라도 좋으니 아무나 와다오.
건물 잔해는 모두 치웠지만 아이의 다리는 완전히 으깨져 버린 상태였다.
피가 번져 가는 상태로 보아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일단은 둘러업고 병원으로 가야 하나.
손정희가 입술을 깨물고 크라켄 쪽을 노려보았다.
“아니?!”
그리고 곧, 그의 눈이 두 배로 커졌다.
-키아아아아아아아아악.
“시발……. 저건 또 뭐야……?!”
크라켄의 반대편에, 녀석보다 훨씬 더 무섭게 생긴 커다란 독사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덩치가 크라켄에 비해 큰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몸 전체를 덮고 있는 붉은 비늘과 표독스러운 눈빛에 손정희는 절로 오금이 저려 왔다.
나름대로 백전 노장이라 할 만한 그조차 감당하기 힘든 근본적인 공포.
그 공포에 손정희는 아주 잠깐 아이를 놓고 줄행랑을 칠 생각을 품기도 했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문어 하나에도 이 난리가 났는데, 저 뱀은 또 어디서 튀어나왔다는 말인가.
손정희는 이를 꽉 물고 아이를 조심스레 안아 들었다.
들것이 있으면 사정이 좀 나았겠지만 지금은 그런 걸 기대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최대한 빨리 안전지대까지 옮긴 후, 힐러나 의사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조금만 참아라.”
손정희가 막 도약을 하려는 찰나,
-키아아아아아아악!
또다.
전신을 얼어붙게 만드는 독사의 포효가 그의 귀를 파고들었다.
움직이고 싶은데 움직일 수가 없다.
스스로가 한심하다는 걸 알면서도, 그는 발걸음을 뗄 수가 없었다.
뱀을 앞에 둔 개구리의 심정이 이런 것일까.
몸이 완전히 굳어 버린 채,그저 떨리는 눈으로 적독사의 움직임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때, 다시 한번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콰아앙!!!!!
“???!!!”
이쪽을 향할 것이라 생각했던 적독사의 몸통이, 되레 크라켄 쪽에 적중한 것이다.
“이게 무슨…….”
흡사 자기들끼리 싸우는 것 같지 않은가.
같은 게이트에서 나온 몬스터가 아니었나?
손정희의 동공이 사시나무처럼 흔들린다.
-그오오오오오오오오오.
분노의 찬 크라켄의 포효가 천지를 울린다.
놈의 촉수가 적독사의 온몸을 휘감았고, 적독사 또한 끔찍한 포효를 내지르며 저항했다.
작금의 광경은 단 한 문장으로 설명이 가능했다.
‘괴수 대격돌’
크라켄과 적독사의 싸움은 인간의 스케일을 아득히 뛰어넘는 것이었다.
“저렇게 커도 연체동물은 연체동물인가 보네요.”
“그렇군. 조금 전 독사의 공격이 통하지 않은 건 몸체가 물렁하기 때문인 것 같네.”
누군가의 말에 무심코 대답하던 손정희.
그가 갑자기 대경하여 고개를 홱 돌렸다.
“누, 누구……!!”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나타나 태연히 말을 건 남자.
훤칠하니 잘생겼지만 조금은 예민해 보이는 인상의 남자가 어느새 자신의 옆에 서 있었다.
사내를 직접 보는 건 처음이었지만, 손정희는 그의 이름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지금 헌터라는 신분을 넘어 전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디.
“천해선 헌터!!!!!”
천해선이 슬쩍 웃으며 한 발 앞으로 다가간다.
“잠깐 그대로 들고 계세요.”
천해선의 양손이 아이의 두 다리로 향한다.
그리고 곧, 황금색의 빛무가 다리를 감싼다.
아이의 의식은 쇼크로 희미해진 지 오래.
그러나 미약하게 반복되던 신음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고, 창백했던 혈색도 원래의 빛을 찾았다.
회복이 되어 간다는 의미다.
“오오……!!”
손정희의 나이트 랭크는 겨우 D.
참전했던 던전의 난이도 또한 그저 그런 수준이었다.
눈앞에서 펼쳐지는 S랭커의 치유는 그야말로 위튜브 영상에서나 볼 수 있는 진귀한 장면이다.
“완전히 회복될 수 있겠소?”
“네. 몇 분만 늦었어도 돌이킬 수 없었을 텐데, 다행히 정상으로 돌아왔어요. 아저씨 덕분이에요.”
천해선이 손정희의 손을 보며 시익 웃었다.
아까 벽돌을 급하게 나르느라, 그의 손톱 두어 개가 덜렁거리고 있었다.
“아, 이건…….”
명색이 나이트 출신이 쪽팔리게.
손정희가 쓴웃음을 짓고 있는 동안 천해선은 그의 손을 냉큼 치유해 주었다.
-캬아아아아아아아악.
그러는 동안에도 적독사와 크라켄은 혈투를 벌이고 있었다.
초거대 괴수들이 격돌하는 아래에서 치유를 받는 기분은 정말이지 이질적인 것이었다.
“씁. 역시 직접 해치우는 게 나았으려나.”
천해선이 혀를 차며 뒷머리를 긁적인다.
손정희가 대경하여 급히 묻는다.
“직접 해치우다니……. 그럼 저 적독사를 천해선 헌터가 불렀다는 말인가?”
“예. 뭐…….”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말했지만, 손정희에게는 크나큰 충격이었다.
‘강현을 이겼다고 하더니만…….’
힐러 타입의 천해선이 테네브라 조직을 박살 냈다는 소식은 이미 퍼진 뒤다.
손정희는 기사를 보고 난 이후에도 반신반의했지만, 지금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저런 괴물을 불러내는 헌터가 누군가에게 진다는 걸 상상할 수 있겠는가.
“조직이 완전 고무처럼 되어 있나 본데, 무슨 수가 없을까요?”
천해선이 돌연 손정희에게 자문을 구한다.
D랭크, 심지어 그마저도 퇴역한 자신이 무슨 해법을 내놓을 수 있을까만은, 이런 경험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저런 타입이 물리 공격에 약할 것 같아도 의외로 질긴 법이네. 둔기로 내리치는 것보다 날카로운 무기로 자르는 게 효과적일 수 있지.”
물론 손정희가 상대했던 건 저런 크라켄이 아니었다.
기껏해야 상급 슬라임 정도를 상대했을 뿐이다.
하지만 천해선은 손가락을 튕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렇구나.”
천해선이 스읍, 하며 공기를 흠뻑 들이마신다.
그리고는 적독사를 향해 크게 소리쳤다.
“물어어어어!!!!”
“……?”
물어?
물라고?
처음에는 적독사에게 하는 말인 줄도 깨닫지 못했다.
하지만 천해선이 소환한 녀석은 찰떡같이 주인의 말을 알아들었다.
덥썩.
자신의 몸을 휘감고 있는 촉수들.
적독사는 날카로운 이빨로 그것들을 사정없이 잡아 뜯었다.
촤악!!
거대한 점액질이 사방으로 튀면서, 크라켄의 촉수가 찢겨 나간다.
“와……. 저거 하나 구우면 몇 인분이야, 대체.”
이런 비상사태에도 천해선은 천연덕스럽게 감탄사를 내뱉는다.
손정희는 기가 막힌 얼굴로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으나, 이내 침을 꿀꺽 삼켰다.
천해선의 턱에서 땀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긴……. 저런 엄청난 괴수를 부르는 게 보통 일은 아닐 테지.’
실제로 천해선은 가지고 있는 블랙 에테르를 절반 이상 소진한 상태였다.
적독사를 이렇게 오랫동안 부리고(?) 있는 건 그로서도 처음.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에테르의 소진이 너무 빨랐다.
키링.
별안간 청아한 소리가 나더니, 천해선의 손에서 검은색의 검날이 돋아난다.
깜짝 놀라 뒷걸음치는 손정희를 바라보며 천해선이 당부했다.
“시간 끌어 봐야 좋을 게 없을 것 같네요. 있다가 제가 부르면 좀 와 주세요.”
“으응? ……아, 알겠네.”
그 말과 동시에 천해선의 신형이 사라졌다.
‘텔레포트??!!’
처음에는 그가 순간이동을 쓴 줄 알았다.
그러나 그건 손정희의 착각일 뿐, 그는 그저 단순하게 빨리 움직인 것뿐이었다.
건물 옥상을 타고 넘어가며 크라켄을 향해 달려가는 천해선.
‘독보’ 스킬을 모르는 손정희로서는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힐러가 저런 괴물을 부리는 것도 모자라, 신체 능력까지 탁월하다니…….’
손정희가 낮은 등급의 던전만 돈 건 사실이지만, 국내 랭커들의 활약 영상을 둘러보아도 저런 능력을 보유한 헌터는 없었다.
몬스터를 대항하기 위해 모든 조건을 갖춘 ‘완전체’.
어느새 크라켄의 지척 거리까지 당도한 천해선을 보며, 손정희는 연신 감탄사를 터트렸다.
그러다 돌연 천해선을 향해 발작적으로 소리쳤다.
“위험해……!!”
천해선의 근처에 있던, 크라켄의 잘려진 촉수가 그에게로 날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슷한 연체동물이어서 그런 걸까.
식탁 위의 산낙지처럼, 몸체에서 분리되고 난 이후에도 녀석의 다리가 스스로 움직였다.
심지어 그놈(?)은 천해선을 공격하려는 명백한 의지가 보였다.
그런데,
서걱.
마치 뒤에도 눈이 달려 있는 것처럼, 천해선이 시선을 전방에 고정시킨 상태에서 팔을 뒤로 휘둘렀다.
그리고 곧, 흉흉한 기세로 날아가던 촉수가 깨끗하게 반으로 갈라져 버렸다.
“아니……!”
위험하다고 소리친 자신이 머쓱하게 느껴질 지경.
그렇게 천해선은 아무런 위협 없이 적독사에게 다가가 휘감고 있는 나머지 촉수를 베었다.
손정희는 눈을 가늘게 뜨고 천해선이 베어 버린 촉수들의 상태를 확인했다.
적독사가 물어뜯은 것과는 달리, 천해선이 벤 촉수들은 검게 흑화해 더 이상 움직이지 못했다.
어떤 원리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 모습에서 손정희는 명백한 가능성을 확인했다.
‘이길 수 있다……!’
처음에는 시간을 벌 수만 있어도 대성공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잘려 나간 촉수들이 완전히 사멸하는 것을 본 손정희는 생각을 바꾸었다.
믿겨지지 않지만, 정말로 저 괴수를 혼자 처치할지도 모른다……!!
“없애 버려!!!”
두 주먹을 불끈 쥔 채, 손정희가 천해선을 향해 목청껏 소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