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ison-Eating Healer RAW novel - Chapter (86)
86화
모두가 멍한 얼굴이 되어 강정현을 바라본다.
그의 어깨 부근에서 돋아난 식물이 블랙홀에 흡수되듯 빨려 들어갔고, ‘워 고블린’은 그 어떤 것도 남기지 못한 채 허망한 생을 마감했다.
잠깐.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고?
그럼 ‘그것’까지 흡수했단 말이야?
땡그랑.
맑고 고운 소리를 내며 무언가 바닥에 떨어진다.
몬스터들의 심장이자 헌터들의 능력을 신장시킬 수 있는 ‘그것’.
‘워 고블린’의 코어가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강정현이 불러낸 식물은 ‘워 고블린’의 신체를 먹어치웠지만 차마 코어까지 소화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협회 차장 주진해가 바닥을 구르는 코어를 보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 이것으로 모든 테스트를 종료하겠습니다.”
협회 직원들이 코어를 회수해 가는 장면을 보며, 주진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수십억을 들여 구성한 유리벽이 박살 난 것도 모자라, 워 고블린의 코어까지 회수하지 못했다면?
주진해는 오늘 밤을 새워 가며 시말서를 작성해야 했을 것이다.
“아쉽군.”
가열찬이 내게 다가와 묘한 미소를 짓는다.
“아쉽다니요?”
“만약에 강정현이 저 코어까지 소화했다면…… 그는 불세출의 천재가 되었을걸세. 코어를 아무런 가공 없이 흡수하는 헌터는 이 세상에 없으니까.”
흠.
과연 이 세상에 없을..… 까?
일단은 장단을 맞춰 주기로 하자.
“듣고 보니 그렇네요. 코어의 에테르를 헌터에게 주입하면 원래 효율의 10%도 안 나온다던데.”
“10%면 다행이지. 천문학적인 돈을 들여 상급 몬스터의 코어를 변환했는데, 에테르 전환률이 1%도 안 나온 경우가 수두룩하네. 그런 의미에서 보면 굉장히 아쉬운 일이야. 만약 강정현이 몬스터의 코어를 100% 효율로 흡수할 수 있었다면, 그 성장 가능성이 무궁무진했을 텐데.”
그 무궁무진한 성장의 결과가 눈앞에 있다는 것도 모른 채, 가열찬이 입맛을 다신다.
“만약 그랬다면, ‘대한민국 최고의 기대주’라는 타이틀은 자네가 아니라 강정현의 것이 되었을지도 모르지.”
“제가 지금 그렇게 불리나요?”
“……뉴스 좀 보게.”
“헤헤. 코어를 흡수하지는 못했어도, 강정현이 대단한 재능인 건 분명해 보이네요.”
“그렇지. 내가 20년 넘게 헌터 생활을 해 봤지만 저런 능력은 처음이네.”
몸 안에서 살상 능력을 갖춘 식물이 튀어나온다라.
나 또한 전장에서 이런저런 몬스터들을 봐 왔으나, 어떤 의미로 강정현은 던전 안의 괴물보다 더 괴물처럼 느껴졌다.
“일단은 ‘변이체’로 구분이 되겠군.”
가열찬은 그렇게 말하며 망설임 없이 버튼을 눌렀다.
꾸욱.
그를 따라 다른 심사자들이 ‘S’버튼을 따라 누른다.
눈앞에서 상급 몬스터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끔살 당했는데, 그 누가 반론을 제기할 수 있으랴.
그렇게 비수에 이어 두 번째 ‘S’랭커가 탄생하게 되었다.
* * *
찰칵찰칵찰칵.
펑펑.
헌터 자격 시험의 주인공은 누가 뭐라 해도 응시생들이다.
2차 시험을 마치고 나오는 수백 명의 응시생들을 향해 수많은 시선과 카메라 앵글, 플래시가 쏟아진다.
“아, 좀 밀지 말라고!”
“가이드라인 안 지켜?!”
“강정현, 강정현을 찾아!!”
“비수 씨! 잠깐 인터뷰 가능하신가요?”
“네! 여기 이쪽으로 동그랗게 모여 주세요!”
이제 갓 시험을 마친 주제에 기자들을 쥐락펴락하는 실력이 대단하다.
역시 연예인을 했었어야 했던 게 아닐까.
덕분에 나는 적당히 구석진 곳에서 편히 쉴 수 있었다.
오늘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었고, 그렇기에 끈덕지게 쫓아다니는 기자들도 없었다.
비수의 시험이 무사히 끝났으니 더 이상 녀석의 옆에 있을 필요는 없다.
하지만 아직 모든 일정이 끝난 건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비수의 시험보다도 더 중요한 일이 남아 있었다.
부릉.
커다란 SUV 차량이 헌터 시험장 안으로 들어온다.
유난히 커다란 바퀴가 눈에 띈다.
바퀴.
예전 같았으면 그냥 ‘크네’ 하고 넘겼을 장면이다.
하지만 날이 날이어서 그런지, 천천히 돌아가는 바퀴가 자꾸 시야에 들어온다.
어제 누나와 재미 삼아 타로점을 봤을때, ‘운명의 수레바퀴’라는 카드를 뽑았었다.
공교로운 일이지.
나는 차량이 주차를 할 때까지 물끄러미 바퀴만 쳐다보았다.
오늘 있을 마지막 일정.
그건 정말로 새로운 운명의 수레바퀴가 될지도 모른다.
“아는 분 차량이세요?”
나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한다.
아 씨.
깜짝이야.
어느 틈에 마리아가 내 뒤에 서 있었다.
나는 머쓱하게 웃으며 조금 옆으로 비켜 앉았다.
마리아가 옆에 앉자 싱그러운 봄의 향기가 코끝을 자극한다.
“아니요. 생각이 많다 보니까 자꾸 멍 때리게 되네요.”
“천해선 헌터님도 생각이 많을 때가 있어요?”
“……그동안 꽤 단순한 사람처럼 보였나 보네요.”
“아, 아니에요. 저는 단지…….”
눈을 빠르게 깜빡거리던 마리아가 조금은 부럽다는 듯이 말했다.
“헌터님이 하는 말과 행동에 항상 확신이 깃들어 있으니까요. 매사에 전전긍긍하는 저에게는 찾아보기 힘든 모습이거든요.”
“확신이라…….”
분명 누군가의 그늘 밑에서만 활동했던 마리아에게는 부족한 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그녀에게도, 이제는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그런 분치고는 오늘 엄청난 선언을 하셨던데요.”
마리아는 그동안의 수수한 모습과 달리 격조 높은 차림으로 나타나 이적을 천명했다.
내가 글로리 길드를 혐오하는 건 맞지만, 솔직히 상상이 가지 않는다.
G 배지를 떼고 다른 길드에서 활동하는 마리아의 모습이 말이다.
감히 어느 길드가 그녀를 품을 수 있을까?
아니, 그걸 떠나서.
그녀가 그런 결심을 한 계기가 도대체 뭘까?
“천해선 헌터님의 말씀을 곰곰이 생각해 봤어요.”
“예?”
“화풀이를 하려거든 몸에다 하지 말고 마음에다 하라고 하셨잖아요.”
“그랬…… 죠?”
“제가 성찰을 하는 공간에서, 더 이상 몸에 피를 흘리지 않고 마음을 할퀴어 봤어요.”
“…….”
“너무 괴로워서 당장에라도 그만두고 싶었어요. 할퀸 마음은 몸처럼 금방 치유되지 않았거든요. 오히려 헤집으면 헤집을수록 고통이 늘어났어요.”
그렇겠지.
애써 외면해 오던 치부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건 누구에게나 괴로운 일이다.
“그때 느꼈어요. 몸을 상처 입히는 행위는 내가 나에게 주는 면죄부에 지나지 않는구나. 실제로는 아무런 대가도 치르지 않는 기만 행위에 불과하구나. 하는걸요.”
하늘의 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눈망울로 마리아가 나를 빤히 쳐다본다.
“마음에 화풀이를 할수록 모든것이 명확해졌어요.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헌터가 됐는데, 내 마음이 편하지 않다면 ‘구하는 방식’이 잘못되었다는걸요.”
“구하는 방식이라……. 혹시…….”
“네. 제가 속해 있던 ‘길드’가 잘못되어 있던 거예요. 그래서 제 마음이 가는 곳으로 이적하려는 거구요.”
마리아의 의지는 굉장히 확고해 보였다.
표정은 평온했지만, 그 평온함에서 태산과도 같은 굳건함이 보였다
몇 차례 그녀를 봐 왔지만 이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문제는, 그녀의 변화를 이끈 시발점이 상상도 못 한 곳이었다는 점이다.
‘미친. 내가 한 말 때문이었다고?’
솔직히 말하자면, 좋은 마음에서 건넨 조언도 아니었다.
각성 전, 몬스터 포이즌에 중독되었을 때.
나는 불치병 환자처럼 신체가 불안정했고, 수많은 밤을 끔찍한 고통 속에서 보내야 했다.
절망과 좌절만이 가득한 고통이 언제나 내 곁에 머물렀다.
그런데 마리아는 그런 신체의 고통을 단순히 면죄부로 사용했다.
심지어, 지는 금방 나을 거면서.
‘그래서 한 말이었는데.’
진정으로 대가를 치르고 싶다면 마음에다 화풀이를 하라고 했다.
그래야 더 진한 상흔이 남으니까.
그래야 글로리 길드의 과오가 씻겨 나가지 않을 테니까.
적어도 마리아는, 구건이와 달랐으면 했으니까.
그런데.
그게 이런 결과가 되리라고는 정말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갑자기 머릿속에 구건이의 극대노한 모습이 떠오른다.
지금까지 일어났던 일만 종합해 봐도 구건이는 나를 불구대천의 원수로 여길 것이다.
근데 그것도 모자라, 마리아의 이적을 결심하게 부추긴(…….)사람이 나라는 걸 알면?
강현이 아닌 또 다른 살인 청부업자가 날 습격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쉽지 않아요.”
마리아가 한숨을 쉬며 수십 장의 팸플릿을 가방에 쑤셔 넣는다.
“어떤 길드가 좋은 길드인지 파악이 잘 안 돼요. 오늘 이 자리에 나오기 전까지 여러 길드의 이력과 기사를 훑어봤는데……. 아직까지 마음에 드는 곳이 보이지 않아요.”
“그거야 당연한 일이죠.”
“네?”
“몇 년간 몸담은 길드도 이제 와서야 손절할 결심이 섰는데, 다른 길드를 금세 파악하기가 쉽겠어요?”
마리아가 고운 입술로 쓴웃음을 짓는다.
“맞는…… 말씀이세요. 하지만, 설령 다른 곳을 정하지 못하더라도 글로리 길드에 계속 있지는 않을 거예요.”
휘잉.
차갑지도, 그렇다고 따듯하지도 않은 미풍이 불어온다.
앞으로 예고된 변화 때문에 예민해진 걸까.
뱅글뱅글 돌아가던 바퀴도, 불어오는 바람도 모두 새삼스럽게 느껴진다.
어쩌면 변화의 중심에 있는 사람은 나만이 아닐지도 모른다.
마리아.
깨끗한 마음이 지나쳐 결벽증처럼 느껴지는 여자.
사람들을 완벽히 구하지 못할 때마다 스스로 피 칠갑을 만들어 버리는 힐러.
보유한 능력을 떠나, 볼 때마다 마음을 뒤흔들어 버리는 사람이다.
“정해진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아무도 밟지 않아 본 길도 있습니다.”
“네?”
고혹적으로 뻗어 나간 눈매가 동그래진다.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눈동자를 향해, 나는 빙그레 웃어 보였다.
“곧 알게 되실 겁니다. 앞으로 제가 하려는 일에 대해서.”
* * *
헌터 자격 시험은 축제인 동시에 좌절의 장이다.
누군가에게는 부와 명예를 얻을 수 있는 신분 상승의 기회요, 누군가에게는 다년간의 노력이 수포가 되는 낙인의 장소다.
하지만 자격 시험의 마지막 행사만큼은 온전히 축제라 불릴 만하다.
탈락자들은 자리를 떠나고, 새로이 자격을 인정받은 신규 헌터들만 남아 수여식을 거행한다.
“감회가 새롭겠습니다.”
“아, 오셨어요.”
수여식 일정에 맞추어 육철완이 시험장을 찾았다.
본인은 처음부터 함께하겠다 했으나, 비수는 시험장에 가 있고 나 또한 심사자 역할을 하다 보니 함께해 줄 사람이 없었다.
[어차피 합격은 따 놓은 당상인데, 그냥 수여식 시간에만 맞춰 오세요! 아 근데, 그때쯤이면 제가 너무 인기 스타가 되어 있어서 곤란하실지도?]놀랍게도(한편으로는 아니꼽게도) 비수의 말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육철완은 비수를 발견했지만 가까이 가서 아는 척을 하지 못했다고 했다.
‘S’랭크를 수여받은, 눈이 번쩍 뜨일 만한 미녀의 에스퍼.
게다가 세상에 몇 없는 ‘버프’ 스킬까지 가졌으니, 화려함이라는 측면에서 이보다 더한 신인이 없었다.
강정현이 나오지 않았다면 그녀는 오늘 모든 스포트라이트를 뒤집어썼을 것이다.
“벌써부터 콧대가 좀 높아진 것 같지 않나요? 월클병에 걸리면 곤란한데.”
“하하. 코는 원래도 오똑하지 않았습니까.”
“그랬나.”
“포이즌 던전에서 만났던 말괄량이 아가씨가 S랭커가 되다니. 제가 다 뿌듯하군요.”
이미 던전에서 생사를 함께했던 사람들이다.
육철완은 삼촌 아저씨 같은 얼굴을 하고선 비수를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수여식 한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비수가 육철완을 발견하고는 앉은 자리에서 방방 뛴다.
그녀도, 그리고 육철완도 모두 귀에 입꼬리가 걸려 있었다.
입술 끝이 당기는걸 보니 나도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S’랭크 에스퍼 비수.
그녀가 어떤 길을 걷든 대한민국은 그녀를 보물로 취급해 줄 것이다.
“……이상으로 헌터 자격 수여식을 마치겠습니다.”
비수가 S랭크를 상징하는 배지를 달고서 이쪽을 향해 고개를 쳐든다.
음.
아무래도 저 콧대를 억지로라도 눌러 줘야 할 것 같군.
당장이라도 단상에 올라가서 엄지손가락으로 콱콱 눌러 주고 싶지만, 그전에 확인해야 할 것이 있다.
앞으로 다가올 변화의 바람.
아니, 이 정도면 대격변이라고 해야 할까.
“흠흠.”
응시생들이 다 내려가고, 이제는 단상에 단 한 명만이 남았다.
신규 헌터 협회 부회장 배정대.
내가 내건 조건 중 마지막 조건이, 이제 그의 입을 통해 발현될 시간이다.
“이 자리에 계신 모든 헌터 관계자분들께 공지할 내용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