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ison-Eating Healer RAW novel - Chapter (87)
87화
헌터 협회에서 주관하는 길드 총회가 없는 것은 아니다.
두 달에 한 번꼴로, 메이저 길드의 관계자들이 한데 모여 이런저런 의견을 나눈다.
하지만 별다른 일이 없는 날에도 관행상 모이는 경우가 잦다 보니, 대부분 대표가 아닌 부대표나 그 아래 실무자를 보낸다.
아이러니하게도, 길드의 대표자가 가장 많이 등장하는 날은 총회가 아니다.
바로 헌터 자격 시험일.
그 누구도 오라 한 사람이 없지만, 대표자들이 직접 발 벗고 나서서 우수한 인재를 찾아 나선다.
반대로 이야기하자면, 앞으로 있을 ‘중요한 공지’를 발표하는 데 있어 전혀 문제가 없는 날이라는 의미였다.
어지간한 길드 고위 관계자들이 모두 이곳에 나와 있으니까.
“이 자리에 계신 모든 헌터 관계자분들께 공지할 내용이 있습니다.”
배정대의 두꺼운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말에 장내가 술렁인다.
부회장이 직접 공지할 사항이라면 필경 가벼운 내용은 아닐 터.
배정대는 행사가 끝난 뒤 떠나가려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전부 돌려놓았다.
그의 눈길이 길드 관계자석 한 곳을 향한다.
“협회는 최근 들어 헌터 한 분에게 큰 빚을 졌습니다. 그분이 누구인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아실 겁니다.”
그러자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천해선에게로 향한다.
그는 따가운 시선을 묵묵히 견디며 단상을 응시할 뿐이었다.
‘이 자리에서 천해선을 언급한다고?’
오리온 길드의 대표, 유세혁의 눈매가 가늘어진다.
새로운 헌터의 탄생을 알리는 경사스러운 자리.
그러나 천해선과 관련된 일은 ‘경사’와는 안드로메다만큼의 거리가 있었다.
“제가 부회장으로 취임한 뒤 곧바로 착수한 일이 몇 가지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천해선 헌터님과 관련된 기록들이었습니다.”
유세혁은 물론이요, 고위직 간부들의 시선이 어지러이 교차한다.
천해선에게 꽂혔던 시선이 배정대에게 돌아갔다가, 이내 한 명의 남자에게로 모아진다.
글로리 길드의 수장, 구건이.
그의 얼굴은 프라니움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딱딱히 굳어져 있었다.
“협회는 고 유지원 헌터와 관련된 일에 일정 부분 은폐를 했습니다. 고 유지원 헌터를 제압한 영웅은 천해선 헌터였지만, 당시 관계자들은 이를 침묵했습니다.”
다시 한번 모든이들의 시선이 ‘관계자’에게 날아와 꽂힌다.
“게다가 전 부회장이 저지른 행동은 협회의 근간을 흐트러트리는 이적 행위였습니다.”
“……!!”
“그러나 천해선 헌터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사려 깊은 영웅이었습니다. 그는 본인이 해결한 사건이 은폐되는 것을 봤을 때도, 또 생명의 위협을 받은 뒤에도 섣불리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협회에서 해명을 해 줄 때까지 기다려 주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배정대의 말에 의협심 강한 헌터들이 탄성을 터트렸다.
“오오……!!”
“세상에, 나 같으면 협회를 뒤집어 놨을 텐데.”
“묵묵히 포이즌 던전을 처리할 때부터 비범하다 생각했다마는……!!”
“역시 고귀한 헌터라는 별명이 괜히 생긴 게 아니로군!!”
“참을성이 대단해. 이 정도면 부처나 성자 수준이야……!!”
그리고 천해선은 슬며시 고개를 숙였다.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저 두꺼비 아저씨, 생각보다 약을 잘 파네.’
배정대 부회장이 열심히 포장을 하고 있지만, 실제 천해선의 행동은 정반대였다.
당장이라도 ‘헌터를 때려치우겠다’며 지랄발광을 떨었으니까.
그때 안절부절못하며 진땀을 빼던 배정대의 모습을 떠올려 보니, 도저히 입꼬리를 컨트롤하기가 어려웠다.
반면 구건이는 옆에서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얼굴 근육이 경직되어 있었다.
유지원과 관련된 일은 글로리 길드의 일이기도 하다.
수많은 헌터 관계자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글로리 길드의 명성이 먹칠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실드를 치키는커녕 치부를 들춰내다니.
그동안 글로리 길드가 협회와 쌓았던 친분을 생각하면 믿을 수 없는 처사였다.
“협회는 적지 않은 시간 동안 고민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협회와 천해선 헌터와의 틀어진 관계를 봉합할지에 관해서 말입니다. 해서, 우리는 천해선 헌터가 보여 준 영웅적인 행보에 어울리는 특별한 제도를 마련했습니다.”
‘제도’라는 말에 모든 대표들의 귀가 쫑끗 섰다.
한 사람을 위한 제도라니.
그런 건 본 적도, 들어 본 적도 없는 일이었다.
“우리는 천해선 헌터에게 ‘이레귤러(irregular)’ 자격을 부여하기로 했습니다.”
“이레귤러?”
“그게 뭐지?”
수변의 술렁임을 감지하며 배정대가 크게 심호흡을 했다.
며칠 밤을 새워 가며 고민한 일이다.
정말 이렇게 하는 게 맞는 일일까.
하지만 이왕 결심한 일.
천해선의 제안을 받아들인 이상, 어차피 돌이킬 수도 없다.
못 먹어도 고다.
“이레귤러(irregular)는 천해선 헌터와 그가 공인한 헌터들이 구역의 허가와 상관없이 활동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입니다. 앞으로 이레귤러 팀은 대한민국 영토 내의 모든 던전과 게이트에서 몬스터들과 싸울 것입니다.”
“!!!!!!!!!!!!!!!!!”
“뭐라고??”
“이런 미친……!!”
누군가는 눈을 치켜뜨고, 누군가는 입을 떠억하니 벌렸으며, 누군가는 자신의 귀를 탁탁 두드렸다.
‘관할 구역’은 길드의 정체요 권력이라 할 수 있는 개념이다.
지금 이 시각에도 대한민국의 길드들은 허가 구역을 늘리기 위해 아귀다툼을 벌인다.
그런데, 특별한 허가 없이 자유롭게 몬스터들을 처치할 수 있는 팀이 생기다니.
이레귤러(irregular)는 말 그대로 초법적인 집단이라 할 수 있었다.
“그건…… 너무 불공정한 일입니다.”
항의는 ‘청검’ 길드 대표 김승환에게서 나왔다.
천해선 헌터와 친분을 다지기 위해 갖은 애를 썼던 인물이라는걸 감안하면, 다소 의외라고 볼 수 있는 일.
한편으로는 그만큼 천해선에게 주어지는 특혜가 어마 무시하다는 반증이었다.
“특정 집단에 모든 구역을 풀어 주는 일은 길드의 설립 근간을 위협하는 일입니다. 길드는 던전과 게이트를 통해 수익을 올리지만 그에 상응하는 세금과 회비를 납부합니다. 소속 헌터들의 인건비나 각종 비용도 물론이구요. 만약 이레귤러들이 대한민국 구역 전체에 상주한다면…….”
“그건 지나친 걱정입니다.”
배정대가 김승환의 말을 잘라 들어갔다.
“당연히 이레귤러의 비중을 확대할 생각은 없습니다. 팀의 정원은 10인 이하가 될 것이고, 그것은 천해선 헌터도 동의한 부분입니다.”
“하지만……!”
“설마하니, 청검처럼 유능한 길드가 10인 이하의 집단보다 열세라고 생각하시지는 않으시겠지요?”
……그럴지도 몰라, 미친놈아.
천해선은 괴물이라고!!
김승환은 그 말이 목젖까지 치솟았지만 차마 발설할 수 없었다.
소속 길드만 백여 명에 달하는 청검 길드가 천해선와 떨거지들(…….)보다 못하다는 말을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그것도, 수많은 길드의 대표들이 모여 있는 이런 자리에서……!!
“그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 아무리 천해선이 있다고 하지만 10명이서 뭘 하겠어?”
“안 그래도 제 시간에 도착 못 해서 허리가 휠 지경인데……. 우리 구역에서 알바나 뛰었으면 좋겠군.”
이레귤러(irregular)에 인원 제한을 둔다는 말에 대표들의 험악한 인상이 점차 수그러든다.
도리어 자신들의 구역에서 일손을 거들었으면 좋겠다는 여론이 형성될 지경이었다.
수군거림이 멎어 들고, 일부는 고개를 끄덕거리기까지 한다.
배정대 부회장은 더 이상의 반론이 나오지 않을 것임을 직감했다.
‘모든 것이 저놈이 생각한 대로 이루어지는군…….’
배정대는 꼼짝 않고 앉아 있는 천해선을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헌터를 때려치우겠다고 날뛸 때에는 천둥벌거숭이 같았다.
그가 내건 세 번째 조건, 이레귤러(irregular)를 처음 들었을 때에도 세상 물정 모르는 애송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조목조목 조건과 이유를 붙여 갈 때만큼은, 그 어떤 길드의 대표보다도 심계가 깊어 보였다.
[정말 그걸로 되겠습니까. 길드에게 있어 관할 구역은 그 무엇보다 민감한 사안입니다.] [문제없다니까요. 그 꼰대들은 체면 때문에라도 반발하지 못할 거예요. 자기들이 데리고 있는 수하들이 몇 명인데 고작해야 10명이 무서워서? 반대하는 쪽이 비웃음을 살걸요?]정확히 그 대화처럼 되어 버렸지 않은가.
볼멘소리를 내다 입을 다문 김승환을 비롯해, 이레귤러(irregular) 제도에 대해서 더 이상 문제 삼는 이가 없었다.
체면.
그까짓 게 뭐라고 자신이 가진 빵 일부를 떼어 준단 말인가.
배정대는 그들을 향해 통렬하게 비웃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다.
협회 부회장인 자신조차 밥 먹듯이 반복했던 일이기 때문이다.
그 ‘체면’을 지키기 위해 했던, 불합리한 행동들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대중들이 천해선에게 가진 이미지가 너무나도 좋았다.
묵묵히 남들이 기피하는 던전을 소탕하며, 불합리한 처사에도 굴하지 않고 제 갈 길을 걷는 투사.
여기서 천해선의 행보에 반기를 드는 인물은 그날로 세상 사람들의 안줏거리가 될 것이다.
보라.
지금 이 순간 그 누구보다 지랄 발광을 떨어야 할 남자조차 가만히 앉아 있지 않은가.
“…….”
주변 사람들이 슬금슬금 엉덩이를 움직여 피할 만큼, 구건이의 전신에 노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이미 귀화가 피어오른 지 오래.
마리아가 다른 길드로 이적하겠다고 돌아다니는 것만 봐도 기절할 노릇인데,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서 글로리 길드가 욕보이고, 급기야 협회에서 천해선에게 ‘프리패스’권을 쥐여 주겠다고 나섰다.
이런 기분은 산전수전 다 겪은 구건이로서도 처음 겪는 것이었다.
글로리 길드가, 아니 자신이 천해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협회도 능히 알고 있을 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해선에게 이런 편의를 봐준다는 건, 글로리 길드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있다는 의미다.
물론 배정대가 협회 전체의 의견을 반영하는 인물은 아니나, 예전에 유인원 부회장이 부임했을 때와 비교하면 정말 상전벽해가 아닐 수 없었다.
‘다 갈아 죽여 버리고 싶지만…….’
구건이는 가슴이 터질 것 같았지만 간신히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었다.
내키는 대로만 일을 처리해 왔다면 지금의 대표직도, 글로리 길드도 없었을 터.
협회가 잘못된 과거를 먼저 언급함으로써 천해선에게 명분이 주어졌고, 지금의 분위기는 어느 누구도 반기를 들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게다가 자신은 문제의 주범이었던 글로리 길드의 대표.
여기서 손을 들기엔 너무나 낯뜨거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차라리 협회의 다른 인물과 함께 후일을 도모하는 게 나을 것이다.
구건이는 그렇게 자신을 끊임없이 억눌렀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구건이는 알지 못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마침내 백회혈(百會穴)마저 뚫어 버리면, 몸이 저절로 움직인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시간이 머지 않았음을 말이다.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요.”
천해선이 자리에서 슬쩍 일어나 주변을 둘러본다.
언뜻 보면 조곤조곤히 하는 이야기였으나, 어쩐 일인지 그 목소리가 사방에 뚜렷이 들렸다.
‘이건……?’
음성에 에테르를 담아 보내는 능력.
보통은 상대방을 제압하는 방식으로 쓰이지만, 지금처럼 군중들을 휘어잡을 때에도 효과적인 스킬이다.
‘사자후’.
천해선은 자신의 목소리에 ‘사자후’ 스킬을 담아 보냈고, 그건 일부 헌터에게 기경할 만한 일이었다.
‘에테르를 컨트롤하는 능력이 저 정도까지 발전했다는 말인가……!’
기량이 뛰어난 헌터라면 나이트와 에스퍼를 가리지 않고 목소리에 에테르의 힘을 섞을 수 있다.
하나 그건 가진 힘뿐만 아니라 노련한 컨트롤이 필요한 스킬이다.
나이로 치면 아직 미성년자에 불과한 천해선이 그런 고급 스킬까지 사용할 수 있다니.
구건이를 비롯한 길드의 수장들이 즐겨 쓴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더 크게 느껴졌다.
“혹시 지금 저와 함께하고 싶으신 분은 나오셔도 좋습니다.”
“??”
“!!”
그야말로 밑도 끝도 없는 제안이었다.
천해선이 앞으로 이끌게 될 ‘이레귤러’의 합류.
그 영입 제안을 당장 이 자리에서 하게 될 것이라고는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다.
‘무슨 생각이야?’
상당히 충동적이고 괴짜 같은 발언이었다.
천해선을 향해 모든 이들의 시선이 날아와 꽂혔으나, 그는 태연히 웃을 뿐이었다.
“5분 드리죠.”
“……!”
과연, 누가 그 제안에 응하게 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