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ison-Eating Healer RAW novel - Chapter (97)
97화
강태풍과 대련을 마친 뒤, 구건이는 미세하게 떨리는 자신의 양손을 맞잡아 눌렀다.
‘하마터면 죽일 뻔했다.’
주먹이 교차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는 자신의 변화를 똑똑히 파악할 수 있었다.
몸놀림이 경쾌해지고, 힘은 불어났으며, 상대의 움직임이 훤히 들어왔다.
하지만 가장 큰 변화는 따로 있었다.
살의(殺意).
그건 상대를 이기고자 하는 ‘투지’ 같은 게 결단코 아니었다.
당장이라도 강태풍의 목을 비틀어 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그에게 아직 남아 있는 이성이 필사적으로 살의를 억눌러서 망정이지, 하마터면 글로리 길드는 핵심 전력 한 명을 잃을 뻔했다.
암흑 물질(Dark matter)의 실험은 성공적이었다.
0.1%라는 극미량부터 시작해 지금 구건이의 몸 안에는 채취한 암흑 물질의 1%가 투약되어 있었다.
길드 연구소장이 또 한 번 코피를 터트려 가며 그의 몸 상태를 체크했고, 성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구건이의 에테르 수치가 30%나 증가한 반면, 특별한 후유증은 나타나지 않았다.
고작 1%를 집어넣었을 뿐인데 30%라니.
암흑 물질(Dark matter)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가치를 가진 물건이었다.
‘더 많은 양이 필요하다.’
이미 강태풍과 엄청난 격차를 벌렸음에도 구건이는 만족하지 않았다.
자신이 타깃으로 삼은 ‘그놈’을 잡기 위해서는 아직 힘이 모자란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
순간적인 살심에 몸이 제멋대로 움직일 뻔했지만, 자신의 이성은 그것을 참아 내었다.
정신력을 굳건히 한 채 더 많은 암흑 물질(Dark matter)을 흡수한다면, 천해선을 반으로 잡아 뜯어 버릴 수 있을 것이다.
‘아니, 굳이 정신력을 유지할 필요가 있을지도 의문이군.’
다 죽여 버리면 그만이 아닌가?
구건이의 가슴속에서 애써 눌렀던 살의가 다시 피어오른다.
그동안 익히 알고 있었지만, 다시 한번 뼈저리게 느끼게 된 진리.
힘이 곧 법이요, 모든 것이다.
압도적인 전력을 갖추었을 때는 설설 기던 사람들이, 한번 허점을 보이니 하이에나처럼 달려들고 있었다.
협회에서는 다음 해 관할 구역의 축소가 불가피하다는 공문을 보내왔고, 이번 신입 헌터는 사상 초유의 최저 영입률을 기록했으며, 안 그래도 좋지 않았던 길드 선호도 여론 조사가 바닥을 기었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중요한 변화.
마리아가 글로리 길드를 떠났다.
모든 것이, 힘이 부족해서 나타난 결과다.
정해진 모든 일정을 마쳤음에도 불구하고 구건이의 다음 행선지는 자택이 아니었다.
그는 강남 연구소로 곧장 복귀해 암흑 물질(Dark matter)을 조금 더 투약할 계획이었다.
성과가 눈에 보이니 마음이 급해진 것도 있지만, ‘일정’을 맞추기 위해서라도 서두를 필요가 있었다.
‘헌터 랭킹전.’
강해진 무력을 보여 주기에는 더없이 적절한 행사가 아니던가.
대련을 마쳤음에도 체력 소모는커녕, 구건이의 전신에는 힘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이런 고양감을 느껴 본 적이 대체 얼마 만인지.
구건이는 자신도 모르게 점점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 * *
던전을 나오고 휴대폰을 켜자 두 개의 알람이 떴다.
하나는 부재중 전화였고, 하나는 문자 메시지였다.
[긴히 드릴 말이 있습니다. 통화 가능하실 때 연락 부탁드립니다.]둘 다 표혁규 감독관에게서 온 것들이었다.
‘이번엔 또 뭔 일이래?’
표혁규와 관련된 일은 크게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헌터 협회의 일.
그리고 그가 속한 ‘별도의 집단’과 관련된 일.
현재로서는 어느 쪽인지 확인할 길이 없었다.
게다가 지금은, 표혁규보다 더 급한 문제가 있었다.
“이걸 어떻게 나누지…….”
던전을 나온 뒤 우리는 적당한 공터에 가서 가방을 내려놓았다.
통 안에 담긴 이쑤시개들처럼, ‘베놈 비’의 벌침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예전에도 함께 던전에 들어간 적은 많았지만, 이렇게 다섯 명이 다 같이 움직인 적은 없었다.
전투만 잘 이끈다고 리더가 아니다.
어쩌면 리더십에 있어 전투보다 더 중요한 게 ‘배분’이라 할 수 있었다.
“그냥 자기가 양팔에 들 수 있을 만큼 가져가기로 하죠.”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냐.”
나의 제안에 비수가 이맛살을 찌푸린다.
그리고는 다소 의외의 발언을 한다.
“나는 조금만 가져갈게. 내 몫은 최소로 해 줘.”
“와. 이게 웬일이냐. 돈 좋아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사람이. 해가 서쪽에서 뜨겠네?”
“우씨. 나도 양심이라는 게 있거든?”
하나에 수십만 원을 호가하는 물건.
게다가 그렇게 무게가 나가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비수와 마리아는 한 손에 잡힐 정도로만 벌침을 가져갔다.
“게다가, 우리는 벌침보다 훨씬 더 좋은 걸 얻었잖아.”
이번 던전의 생선 대가리…… 아니, 보스 몹이었던 ‘스콰마’.
녀석의 몸에서 추출한 비늘은 세계적인 배우들조차 구하지 못해 안달인 물건이었다.
돈보다 더 중요한 물건을 이미 가져서인지, 물욕에 있어서 둘째가라 할 인물이 기꺼이 한발 물러선다.
비수가 회심의 미소를 지은 채 마리아에게 눈짓을 보냈고, 그녀는 쑥스러운 웃음과 함께 고개를 숙였다.
솔직히 외모만 보면 더 이상 레벨업을 할 필요가 있나 싶은 사람들인데, 헌터들이 끝없이 ‘강함’을 추구하는 것처럼 아름다움도 마찬가지인가보다.
“큰일이군요. 안 그래도 부인에게 가끔씩 타박을 받는데.”
육철완이 익살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타박이요?”
“네, 천해선 헌터님.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리따운 두 명의 헌터와 일을 함께하고 있지 않습니까. 일터에 나가는 게 얼마나 행복하겠냐고 핀잔을 주더군요.”
“하하. 집에서 말조심하셔야겠네요.”
“저 같은 유부남이야 한사람에게만 잘 보이면 되지만, 천해선 헌터님은 큰일입니다.”
“저요? 제가 왜…….”
“천해선 헌터님이 창설한 ‘이레귤러’에 두 여신이 따라온 것이 아닙니까. 관련 기사들 댓글창을 보면 난리도 아닙니다. 그렇게 모든 걸 다 가져야만 속이 후련하겠냐며 성토를 하고 있지요.”
“그게 무슨 소리예요? 그냥 같은 목적을 가지고 일을 하는 동료인데.”
“흐하하. 헌터님. 물론 헌터님은 그렇게 생각하실 수 있겠지만,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심플하게 바라보지만은 않습니다.”
육철완은 무엇이 그리 재밌는지 연신 웃음을 터트렸고, 나는 뚱한 얼굴로 가만히 서 있었다.
흠.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단 말이지.
하기야 내 눈에도 비수와 마리아의 외모는 탁월한 수준이었다.
마리아는 말할 것도 없고, 최근에는 비수를 찬양하는 팬클럽도 생겼다는데.
당연한 말이지만, 나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다.
지금 내게 닥친 현안을 살피는 것도 바빠죽겠는데, 청춘 스토리 같은 건 내게 어울리지 않는다.
게다가 내게는 마리아보다 비수보다 더 아름다운 사람이 있다.
우리 누나.
평생을 그 예쁜 얼굴을 보며 살았는데, 마리아와 비수를 봤다고 해서 홀라당 넘어갈 리가 있겠는가.
나는 육철완의 말을 뒤로 넘긴 채 생각을 정리했다.
“음……. 그럼 벌침의 배분은 이렇게 하죠. 철완 아저씨와 정현이가 30%씩. 비수와 마리아가 15%. 내가 10%.”
그 말에 모든 멤버들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엥. 나랑 언니보다 더 적게 가져간다고?”
“헌터님. 그건 너무 불공평합니다. 제일 고생하셨는데…….”
비수뿐만 아니라 말수가 적은 강정현마저 나를 만류한다.
착한 동시에 모지리인 사람들 같으니.
자기 것들을 더 챙겨가도 모자랄 판에.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힘든 던전이었어요. 되게 위험한 순간도 많았고. 결과를 떠나 이레귤러의 리더로서 미흡한 부분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의 배분은 그 사과의 의미로 받아 주세요.”
“오오…….”
육철완의 얼굴에서 신앙의 빛이 보인다.
강정현이야 원래부터 나를 동경하던 인물이었으니 말할 것도 없고.
특히나 ‘스콰마’의 비늘을 챙겼음에도 더 많은 양을 가져가라는 말에, 비수의 눈이 하트로 변했다.
“역시. 널 따라 온 건 최고의 선택이었어!”
와락 끌어안으려는 비수의 팔을 잽싸게 피한다.
그런 가식적인 인사를 받아 줄 만큼 내 ‘독보’는 호락호락하지 않다.
“어디 갔지? 우리 리더?!”
“평소에나 그렇게 리더 대우를 해 주시지.”
두리번거리는 비수의 뒤에서 나는 벌침을 한 움큼 뽑았다.
제법 이타적인 리더 행세를 했지만, 사실상 이번 던전의 최대 수혜자는 나다.
8성 보스 몹 ‘스콰마’의 몸에서 추출한 블랙 코어.
녀석을 흡수하고 나자, V1이 뜻밖의 선물을 주었기 때문이다.
블렉 에테르가 1,056BA 상승했습니다.>
스콰마의 고유 스킬이 사용자의 블랙 에테르와 융합됩니다.>
신규 스킬 생성 : 독무(毒霧)>
* * *
“전 딱히 생각이 없는데요.”
“그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습니다.”
내 심드렁한 대답에 표혁규 감독관이 쓴웃음을 짓는다.
‘이레귤러’를 창설하기 전이라면 모를까, 굳이 다른 헌터들과 대결해 내 강함을 증명할 이유는 없다.
뭐, 구건이를 다시 만나서 제대로 밟아 주고 싶은 마음이 있긴 한데.
그것만으로 랭킹전에 참가한다는 건 우스운 일이다.
난 그렇게 한가하지 않다고.
“아셨다면서 굳이 여기까지 오신 이유가 뭔가요?”
표혁규는 집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랭킹전에 관심이 없다는 걸 충분히 알고 있었을 텐데, 그럼에도 여기까지 왔다는 건 분명 다른 내용이 있다는 거다.
“배정대 신임 부회장이 차도 살인을 계획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차도 살인?”
“네. 천해선 헌터님이라는 칼을 이용해, 글로리 길드의 세력 약화를 도모하려는 것 같더군요.”
“흠.”
나와 글로리 간의 악연을 이용해서 판을 키운다?
나름 영리한 생각이긴 하다.
하지만 그런 사사로운 악감정에 치우칠 만큼 내가 어린놈…… 어리긴 하지만 바보는 아니다.
“되려 그 말을 들으니까 더 나가기 싫어지네요.”
“맞습니다. 사람이란 본래 그냥 하려던 일도 누가 시키면 반발심이 생기는 법이니까요.”
“어디랍니까?”
“네?”
“배정대가 뒤에서 밀고 있는 길드가요.”
표혁규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동요의 빛이 떠오른다.
잠시 눈동자가 흔들리더니, 이내 탄식에 가까운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거기까지 내다보셨을 줄은 몰랐습니다. 헌터님을 볼 때마다 항상 드는 생각이지만, 나이를 어디다가 숨겨 두고 다니는 것 같군요.”
“조금만 생각해 보면 답이 나오는 일이죠. 제가 부회장이라면 기존의 세력과 친하게 지낼 생각부터 하지, 억지로 척을 지고 끌어내려고 하지 않거든요. 그건 이쪽에도 리스크가 있는 행동이니까.”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기존의 강자를 견제하는 이유.
다른 길드를 키우기 위함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정확하십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조사해 보니, 배정대 부회장의 가족과 특정 길드가 혈연관계로 이어져 있는 상태입니다.”
요컨대 칼은 내가 휘두르고, 글로리 길드가 휘청거리는 틈에 다른 길드를 키운다.
그것이 배정대가 숨기고 있는 또 다른 한 수였다.
“헌터님이 응하지 않을 거라 했지만, 꿍꿍이가 있어서인지 뜻을 굽히지 않더군요.”
그래서, 표혁규는 배정대에게 제안했다고 한다.
천해선을 랭킹전에 끌어들일 만한 당근이 필요하다고.
“당근?”
“일 년에 한 번씩 열리는 세계 헌터 포럼이 있습니다. 지난 수년간 글로리 길드 수뇌부들이 참석하던 곳이지요.”
“아. 저도 들어 본 적 있어요. 각 나라에서 가장 큰 길드가 대표를 맡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기준이야 바꾸면 그만 아니겠습니까.”
“오호?”
이 정도면 꽤나 달콤한 당근이라 할 수 있었다.
지금이야 한국에서 잘나가는 헌터겠지만, 해외로 눈을 돌리면 국내와는 차원이 다른 강자들이 수두룩할 거다.
그들의 강함을 옆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적지 않은 도움이 된다.
게다가 포럼에 나가게 되면 최근 들어 증가한 이상 현상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키릴과 관련한 정보도.
“단, 포럼에 나가기 위해서는 랭킹 1위를 거머쥐어야 하겠지만요.”
“하하. 감독관님까지 절 도발하시는 거예요?”
“천해선 헌터님이 포럼에 나가는 것. 그건 저희의 바람이기도 합니다.”
‘저희’가 헌터 협회는 아닌 것 같고.
굳이 나를 그곳으로 보내려는 걸 보니, 어쩌면 표혁규가 속한 집단이 한국에 국한된 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거나 눈앞에 있는 남자의 말처럼, 랭킹 1위를 하지 못하면 의미가 없는 이야기다.
과연.
지금의 나는 대한민국 정상이라는 자리까지 성장했을까?
나는 표혁규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까짓거 한번 해 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