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tion is flowing from the water purifier in my house RAW novel - Chapter 110
우리집 정수기에서 물약이 흐른다 111화
32. 멸망용의 분노(5)
“……뭐? 7팀이 전멸했다고? 도대체 무슨 일이야!”
“그게…… 아마도 미확인 마물로 인한 습격 같습니다…….”
최측근의 보고에 허핑 길드장, 왕 첸은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 주저앉았다.
균열 너머의 탐사에 나갔던 전투원들이 실종되기 시작했다.
하나같이 습격 직전에 무전조차 못 할 정도로 순식간에 말이다.
돌아온 것은 최초의 실종 사건 때 돌아왔던 6팀의 전투원 한 명뿐.
현재 허핑 길드는 6팀, 7팀, 8팀.
세 개의 전투조들을 잃었다.
각 조의 전투조장이 섞인 그룹일지라도 예외는 없었다.
말 그대로 소대 규모의 인원이 사라진 것이다.
그것은 길드에게 있어서 크나큰 타격이다.
전투원들이 얼마나 있느냐에 따라 그 길드의 전투력 자체가 정해지는 거나 다름없으니까.
‘이상해.’
분명히 작업에 착수하던 초기에는 이런 일이 없었다.
아무리 균열 너머가 미지의 세계라지만, 이렇게 갑작스럽게 상황이 일변할 리는 없다.
잠시 생각에 빠진 왕 첸이 곧이어 말했다.
“……5팀 이상의 정예들을 투입해.”
“예? 하지만 그곳에 정예는…….”
“두 번 말하게 해야 하나?”
“아, 알겠습니다!”
5팀부터는 허핑의 핵심 인력이다.
만약 잃는다면 보충 자체가 불가능할지도 모를 만큼의 정예.
측근이 나가고 혼자 남게 된 왕 첸의 등 뒤로 아주 작은 균열이 열리더니, 그곳으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때, 생각해 봤어?
몇 번이고 들려온 매혹적인 목소리.
왕 첸은 더 이상 이것을 무시할 수 없단 걸 깨달았다.
“……조건은 무엇입니까?”
-한낱 인간인 네가 감히 나한테 조건을 묻는 거야?
단순한 음성에 불과했지만, 왕 첸은 온몸이 굳어져 가는 것을 느꼈다.
균열 너머의 작업에 착수할 수 있던 것도 전부 이 정체 모를 존재 덕분이었다.
그것의 대가로 인간으로서 해서는 안 될 짓을 했지만, 왕 첸은 개의치 않았다.
다만, 그는 느끼고 있었다.
이자를 더 이상 가까이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그럼에도 왕 첸은 이자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와서 포기하기에는 균열 너머의 세상은 너무나도 매력적이었으니까.
“……제 영혼이라도 원하시는 겁니까?”
-뭐? 흐흣. 그래, 그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너만큼 탐욕스러운 인간은 보기 드무니까.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해. 더 많은 인원이 필요하거든.
더 많은 인원.
인신 공양이라도 바치라는 뜻일까.
-하핫. 그건 신한테 바치는 행위잖아? 유감스럽게도 나는 그딴 역겨운 놈들이 아니거든.
왕 첸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 존재는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를 말해주었다.
그것을 들은 왕 첸이 분노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이서진……!’
어렴풋이 생각했던 것이 진실이 되었다.
사사건건 자신의 계획을 방해하는 가증스러운 놈!
더 이상 멋대로 날뛰게 할 수는 없었다.
이곳에서만큼은 자신은 왕이 되어야 했으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사후의 일도, 그로 인해 바쳐질 사람들도 알 바 아니었다.
왕 첸은 목이 찢어져라 소리쳤다.
“바치겠습니다. 제 모든 것을 바치겠습니다! 제가 죽고 나서 그 영혼마저도 당신께 넘기겠습니다!”
-음음. 좋아. 도와주도록 할게. 기회는 딱 한 번뿐이다?
그놈을 찢어 죽이는 것에는 한 번이면 충분하다.
“당신의 존함은 무엇입니까.”
신은 아니라고 했다.
그렇다면 악마.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아니었다.
-날 그까짓 잡종들이랑 비교하지 말아 줄래?
“죄, 죄송합니다!”
-그래, 너희 인간들한테는 어떻게 불리더라…….
균열 너머의 존재는 이내 색욕을 불러일으키는 감미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스모데우스.
* * *
박준호와 균열과 현실을 오가게 된 지도 꽤 시간이 흘렀다.
“다녀왔어.”
“어서 오십시오. 성자님.”
나를 맞이하는 루비와 익숙한 건물의 풍경을 보고 나서야 현실로 돌아왔단 느낌이 들었다.
원래대로라면 현실과 돌아올 때, 균열이 열리는 위치를 임의로 정할 수는 없다.
모두 같은 거로 보이지만, 하나같이 다른 균열이었으니까.
하지만 내가 만든 균열은 다르다.
애초에 내 마기를 이용해서 생성한 거였으니까.
넘어갈 때도, 돌아올 때도 똑같은 위치에서 만들어진다.
“그럼 내일 보도록 하지.”
“예. 수고하셨어요.”
“아이고. 수고하고 있는 건 아는 모양이구먼. 크하핫!”
정말로, 박준호의 도움이 컸다.
신체 강화의 물약을 먹은 그의 몸놀림은 엄청났으니까.
그가 없었다면 일이 꽤나 복잡해졌을 수도 있었겠지.
우선은 샤워부터 하고 싶었기에, 옥탑방으로 향했다.
계단을 오르려는데, 루비가 내 앞을 막아섰다.
얼굴을 내 몸에 가까이 대더니 갑자기 냄새를 맡는다.
……강아지인가?
마치 제 주인이 맞는지 냄새를 맡는 강아지가 떠오르는 행동이다.
그런 생각과는 다르게 루비는 진지했다.
“……피 냄새가 납니다. 혹시 어디 다치신 겁니까?”
당장에 내 몸을 뒤적거리려 하는 루비를 진정시키고,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아…… 내 피는 아니고, 마물의 피야. 걱정하지 마. 나는 다친 곳 없으니까.”
“……그렇습니까. 별일 없으셨다니, 정말로 다행입니다. 성자님.”
루비는 알 것이다.
이것이 마물의 피가 아니라 사람의 피 냄새라는 것을.
하지만, 내 피가 아닌 것을 확인한 루비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듯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심한다.
건물의 옥상에 도착하자 안쪽에서 문이 확 하고 열렸다.
이제는 아주 제집처럼 우리 집에 드나드는 이유지가 내게 달려들었다.
자연스럽게 내게 안기려는 그녀의 이마에 손가락을 올려 막았다.
……여긴 고양이가 있었네.
“서진아! 그건, 그건?”
“……넌 방금 돌아온 사람한테 그게 할 말이냐?”
“아잉~ 물론 우리 서진이 걱정도 이~ 만큼 했지요~”
혀를 내밀며 내게 손가락 하트를 날린다. 나는 작게 한숨을 쉬며 손바닥을 위로 향하게 폈다.
-끄앙!
내 손바닥에서 나타난 꼬물이.
약간은 축축한 그 입을 뒤적거리며 꽃 하나를 꺼냈다.
“웁!”
그걸 이유지의 입에 그대로 쑤셔 넣었다.
“으윽…….”
맛 자체는 그렇게 좋지 않은지 얼굴을 잔뜩 구겼지만, 금방 표정이 풀어지며 헤실거린다.
“그렇게 좋냐?”
“물론이지! 이 세상에 있는 어떤 미용제품도 이거 하나만 못할걸?”
이유지가 먹은 것은 불로초.
균열 너머에서밖에 발견되지 않는 희귀 약초다.
원래라면 저렇게 소 풀 뜯어 먹듯 먹을 게 아니다만…….
“너, 그게 네가 내는 월세보다 훨씬 비싼 거란 건 알지?”
“에이~ 어때서 그래~”
내 앞에 있던 이유지의 머리에서 귀여운 두 귀가 튀어나오더니 순식간에 모습이 사라졌다.
아무래도 균열 너머에서 현실로 돌아오면 신체가 조금 둔해질 수밖에 없었기에, 접근을 허용해 버렸다.
아니, 어차피 알고도 모른 척해줬을 테지만.
내 몸을 끌어안은 이유지의 단발머리를 살짝 쓸어내렸다.
……그나저나 아직 씻지도 않아서 냄새날 텐데.
내 가슴팍에 얼굴을 비비던 이유지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배시시 웃은 그녀가 묘한 애교를 섞으며 지저귀었다.
“어차피 저걸 먹어서 내가 젊음을 유지하면 너한테도 좋은 거잖아?”
“뭐래. 이 유지야.”
“흐얏!”
쫑긋거리는 두 귀를 살짝 잡아당기자, 기겁을 하며 떨어진다.
진심을 낼 때 돋아나는 꼬리와 귀가 약점이라니. 참 알다가도 모르겠단 말이야.
두 손으로 머리를 잡은 이유지가 내게 표독스러운 눈빛을 보내더니 이내 미안한 듯 눈웃음 지었다.
“고생했어. 정말로. 그리고 미안. 원래대로라면 나도 같이 있어야 하는 건데…….”
“됐거든. 어차피 박준호 씨가 전부 다 해줘서 별로 힘들지도 않아.”
“그으~ 래? 그럼 됐고!”
애초에 많은 사람이 돌아다니면 들킬 확률이 높다.
나와 박준호면 충분하다.
애초에 이 두 사람은 그곳에서의 활동이 자유롭지 못 했으니까.
‘아니, 사실은 다 핑계일 수도 있겠지.’
저곳만 가면 어째선지 성격이 조금 변하는 것 같았다.
그게 내 모습이 아니란 건 아니다.
오히려 그곳에서의 나는 지나칠 정도로 차분했다.
“응? 왜?”
“아냐.”
“흐응…… 그렇게 웃으면서 보는 건 쪼오끔 반칙 같은데…….”
그러니까 작은 욕심이다.
주변 사람들은 내 좋은 면만을 봐주었으면 한다.
“그래도 이제는 어느 정도 같이 갈 수 있을 거야. 슈트가 완성됐다고 하거든.”
“뭐야, 정말?”
그래도 저 너머가 궁금하긴 한가 보다.
잔뜩 신이 난 이유지가 건물의 아래로 순식간에 내려갔다.
“빨리 와!”
곧바로 나도 내려가려는데, 뒤에서 루비가 내 옷깃을 붙잡았다.
그것이 무슨 뜻인 줄 알았기에 피식 웃으며 두 손을 벌렸다.
“자.”
“……실례하겠습니다.”
루비는 수줍은 움직임으로 내 품에 아주 잠시 안겨들더니 이내 헛기침을 하며 서둘러 계단을 내려갔다.
나는 그 뒷모습을 보다가 중얼거렸다.
“걱정하지 마. 어차피 이제 곧 끝나니까.”
* * *
“하하핫! 뭐야, 이거. 진짜 재밌어!”
네 명이 이렇게 발발이를 타고 달리는 건 처음이다.
나는 박준호에게 눈빛을 보냈다.
그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우리가 이곳에서 활동한 지도 꽤나 시간이 흘렀다.
박준호의 주목적은 균열 너머의 탐색이었지만, 나는 다르다.
이곳에 설치된 허핑 길드의 전진 기지.
그곳을 무너뜨리기 위해 그동안 작업을 했다.
두 손으로 셀 수도 없을 만큼의 인원을 간접적으로 살해해 왔다.
그것에 대한 죄책감이 들지는 않았다.
오히려, 더욱 확실하게 할 생각만 들 뿐이었다.
“그러니까, 저기에 있단 말이지?”
“……저곳이로군요. 성자님을 귀찮게 구는 벌레들이 있는 곳이.”
먼 곳에서 한보경이 제작한 특제 고글을 끼고 동태를 확인했다.
전진 기지 외부에 움직이는 사람은 없었다.
오늘 하루 돌아다녔지만, 허핑 길드의 전투원은 보이지 않았다.
수가 그만큼 줄어든 만큼,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제는 잔가지가 아니라, 나무를 노릴 차례가 되었다.
저들이 이곳으로 넘어올 수 있는 균열이 저곳에 있을 것이다.
최우선 목표는 그것의 파괴다.
“일단 오늘은 돌아가자.”
아무리 스미스가 만든 슈트일지라도 완벽한 것은 아니다.
만반의 준비를 하고 내일 찾아오는 것이 좋겠지.
균열을 열고, 우리는 차례대로 그곳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유지, 박준호, 루비 그리고 나.
“성자님께서 먼저…….”
“아니, 먼저 들어가.”
균열을 여닫는 것은 나만 할 수 있었기에 내가 마지막에 가는 것이 맞다.
그때, 갑자기 균열 근처가 뒤틀리는 것이 보였다.
미래시다.
나는 반사적으로 루비를 균열 안쪽으로 밀었다.
“성자……!?”
균열이 닫혔다.
최대한 그곳에서 멀어지며 건틀릿의 힘을 최대치로 개방했다.
내 팔다리가 웨어울프의 신체로 변화하고, 주변 정보를 받아들이는 감각은 극도로 예민해진다.
곧바로 허리춤에 묶어 놓았던 커튼을 내 몸에 둘렀다.
혹시나 하는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미리 생각해 둔 행동이었다.
균열은 열리지 않는다.
무언가에 의해 방해받고 있는 것이다.
‘누구지.’
허핑 길드장.
그가 이런 짓을 할 수 있을 거라곤 생각되지 않는다.
누군가의 습격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내 근처는 지나치게 고요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순둥이를 깨우기 위해서 어깨에 손을 올리는데.
“……어?”
언제나 내 어깨에 자리 잡고 있던 순둥이가 없었다.
“어디 간 거지?”
언제 없어졌는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단순히 무게가 느껴지지 않아서가 아니다.
순둥이가 의도적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숨긴 것이다.
‘대체, 왜?’
콰아앙!!
순둥이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 다급하게 휴대전화를 꺼내는데, 저 멀리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허핑 길드의 전진 기지가 있는 곳이다.
그곳으로 전력을 다해 달렸다.
이윽고 그곳에 도착한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게 뭐야.”
거대한 흑색의 첨탑이 하늘 높게 솟아 있었다.
* * *
전진 기지 내부.
균열 너머에서 활동하기 위한 전투복을 입은 수십 명의 장정들이 한곳에 모여 있다.
하나같이 살벌한 기세를 내뿜는 실력자.
허핑 길드의 기둥이라고 부를 수 있는 전투 2, 3, 4조였다.
이 근처에 있을 이서진을 죽이라는 명령을 받고 한곳에 모인 것이다.
“잠시 이곳에서 대기. 신호가 올 경우, 곧장 이서진의 토벌을 시작한다. 실수는 없다.”
“예!”
허핑의 전투 3조장, 양지엔이 자신의 앞에 놓인 수많은 조원들을 보며 말했다.
시선을 돌렸다.
멍한 표정으로 땅을 쳐다보고 있는 또 다른 조장을 노려보았다.
“리우 펑. 대체 언제까지 그럴 속셈이지?”
“……무슨 소리야.”
“그때, 이유를 알 수 없는 철수를 명령한 이후로 계속해서 이상한 행동을 보이고 있잖아?”
북한에 있는 미친 과학자의 연구소.
그곳의 침입자를 제거하려던 그들은 리우 펑의 돌발 행동으로 인해 마지못해 철수하게 되었다.
그것뿐만 아니라, 리우 펑의 명령으로 길드장에게까지 그 정보를 은폐해 버렸다.
평소라면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았겠지만, 그의 모습이 이상했다.
허핑의 전투 2조장, 리우 펑.
전투 1조장을 제외한다면 길드 내 최강의 실력자라고 볼 수 있는 인물이다.
잔인하고, 살육에 미친 미치광이 살인마.
‘그렇게 겁에 떤 모습이라니…….’
그곳에 돌아오고 나서도 리우 펑은 무언가에 겁먹은 듯이 틀어박혔다.
도대체 그곳에서 무엇을 보았기에 저렇게 된 걸까.
그의 옆에 있는 왕뢰화 또한 그런 모습이 낯설기는 매한가지였다.
리우 펑이 바닥을 보며 중얼거렸다.
알 수 없는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한 발버둥이었다.
“후우…… 그래. 진정하자. 난 리우 펑이다. 내가 죽이지 못할 존재는 없어. 그래, 전부 착각일 뿐이야. 잘못 본 게 분명하다고. 그 괴물은 이곳에 없어. 그러니까 괜찮아.”
그것을 한심하게 바라보던 양지엔에게 신호가 왔다.
부웅!
제 길드장이 어떠한 방법을 사용해서 그를 현실로 도망치지 못하게 만들면, 우리는 그를 추격해서 죽이면 된다.
“그럼 추격을 시…….”
“히이익!!”
“그만 좀 하라…… 고?”
다시 발작 증세를 일으키는 리우 펑에게 소리를 치려던 찰나.
그들의 앞으로 누군가가 나타났다.
“……꼬마?”
이런 위험한 곳과는 어울리지 않는 밀짚모자를 쓴 귀여운 소녀였다.
그들은 전투의 엘리트다.
곧바로 침입자의 주변을 둘러쌌다.
밀짚모자의 소녀가 고개를 들어 양지엔을 응시했다.
그제야 양지엔은 리우 펑이 왜 그랬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의 몸이 미칠 듯이 떨리기 시작했다.
두 조장들이 사살 명령을 내리지 않아 조원들이 당황하고 있을 때.
밀짚모자를 쓴 소녀가 그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깊고 어두운 안광이 그들을 훑는다.
웃음 같은 것은 일절 없는 무표정이었다.
소녀는 잠시 눈을 감고 누군가를 떠올렸다.
-순둥아. 괜찮아.
세상에 태어나, 하나뿐인 아빠를 만났다.
행복한 나날을 보내기도 잠시.
그것을 방해하는 존재가 나타났다.
소녀가 보기에는 한낱 벌레보다도 못한 존재다.
손짓 한 번이면 간단하게 눈앞에서 치울 수 있는 먼지 같은 놈들.
언제나 제 아빠는 ‘괜찮다’라는 말을 했다.
너는 나설 필요 없다고.
너는 착한 어린이니까, 이런 더러운 일을 할 필요는 없다고.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아빠의 말이었으니까.
그들로 인해 제 아빠가 괴로워할지라도 참고 견뎠다.
하지만, 이 균열 너머로 온 후로 생각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마치 억압되어 있던 무언가가 풀려 나듯이 감정의 변화가 일어났다.
소녀에게는 낯선 감각이었다.
두근!
마음속에 아주 작게 남아 있는 멸망용의 본능이 이 땅에 있는 모든 존재를 파멸시키라 말하고 있었다.
“그런 게 아니야!”
소녀는 고개를 저었다.
이서진.
자신에게 순둥이라는 애칭을 지어준 자.
멸망용의 부모라기에는 터무니없이 순한 사람이다.
소녀는 그 모습이 좋았다.
-내가 너의 아빠가 되어줄게.
태어나 처음으로 자신을 받아들여 준 존재.
알고 있다.
그가 진짜 부모가 아니라는 사실쯤은.
상관없었다.
“순둥이는 아빠가 세상에서 제일 좋은걸.”
멸망용으로서의 본능 같은 것이 아니다.
제 아빠가 자신을 지켜줬듯, 자신 또한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아빠를 지켜주고 싶은 것뿐이니까.
이것은 제 아빠가 가르쳐 준 소중한 사람을 지키기 위한 분노였다.
“순둥이, 화났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