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tion is flowing from the water purifier in my house RAW novel - Chapter 112
우리집 정수기에서 물약이 흐른다 113화
33. 이미 끝난 싸움(1)
균열 너머.
지구라는 행성을 침공하는 마물들의 고향이자, 아직 그 누구도 개척하지 못한 미지의 공간.
그 옛날 이곳에 들른 어떤 사람에 의해 ‘이계’라고 이름 붙여진 이 세계에는 특별한 존재들이 살고 있다.
그들은 각각 나눠진 영역을 지배하고 있으며 서로 간의 침범을 주의하며 살아간다.
“헤에.”
메마른 황야를 다스리는 한 지배자가 어떤 것을 보며 눈을 좁혔다.
“인간들이 이곳까지 오게 될 줄은 정말로 몰랐는데 말이야.”
제 앞에 놓인 수정을 바라보며 여인이 빙그레 웃었다.
수정 너머에는 ‘인간’이라고 불리는 하찮은 생명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자신의 영역을 침범한 잡것들은 단숨에 찌그러뜨려야 했지만, 여인은 그러지 않았다.
“인간들은 욕심이 참 많단 말이야.”
저들이 넘어올 수 있던 것은 온전히 여인 덕분이었으니까.
지구에 있는 한 탐욕스러운 존재와 계약을 맺고, 이곳으로 넘어올 수 있는 균열을 만들어주었다.
“걔네들이 알면 화내려나~?”
지구에는 관여하지 않는다.
일곱 명의 존재들과 맺은 약속을 어긴 여인이었지만, 별 대수롭지 않다는 듯 제 다리를 꼬았다.
그 어떠한 남성일지라도 홀릴 만큼 매혹적인 백옥 빛깔의 허벅지와 종아리가 허공에서 부드럽게 춤을 췄다.
여인의 밑에서 누군가의 앓는 소리가 들렸다.
“흐읏!”
“어머. 요즘에는 의자가 말도 하나 보네?”
여인은 자신이 앉아 있는 의자를 내려다보았다.
“조금 쓸 만한가 싶더니, 역시 인간들은 내구도가 낮다니까.”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 중 최고의 포식자.
그곳을 침공하는 이계의 마물들을 토벌하는 강인한 전사들.
그런 자존심을 모두 버리고, 누군가의 의자로 전락해 버린 한 인간 청년은 자신을 경멸스럽게 쳐다보는 여인의 눈빛에 침을 흘렸다.
눈의 초점은 흐릿했으며, 몸의 곳곳에 흑색 반점이 존재했다.
이미 마기에 온몸이 침식당한 것이다.
그럼에도 고통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는 듯 쾌락에 가득 찬 표정으로 제 주인을 응시한다.
“흐흐흐…….”
“처음에는 좀 귀엽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까 좀 별로인 것 같단 말이지.”
청년의 등에서 일어난 여인이 가볍게 손짓했다.
그러자 청년의 몸이 부풀어 오르더니 이내 터졌다.
청년이 있던 자리에는 여인의 머리색만큼이나 진한 보랏빛의 꽃들이 피어나 있었다.
그것을 하나 꺾고는 냄새를 맡은 여인이 옅은 숨을 내뱉었다.
“역시 하찮은 생명체라 그런지, 그다지 좋은 향기는 아니네.”
흥미롭던 눈동자로 수정을 바라보던 여인은 금세 따분한 표정이 되었다.
그토록 자신만만하기에 무슨 모습을 보여줄까 했더니, 고작해야 길가에 널린 꽃 몇 개나 주워가는 모습이라니.
하찮은 생명체답게 몸 또한 허약한지 이곳에 오래 머물지도 못한다.
“차라리 이쪽이 더 나을 지경이잖아?”
또 하나의 인간이 제 몸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며 마물을 때려잡고 있다.
방금 보았던 그 머저리들과는 달리, 이곳 환경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모습이다.
“저놈이라면 꽤 그럴듯한 향기가 날까?”
당장에라도 잡아 오고 싶었지만, 오랜만의 장난감이었기에 조금 더 지켜봐 주기로 했다.
그러는 사이 장난감은 균열 너머로 돌아가 버렸다.
그러나 며칠 후, 그 인간은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게 된다.
혼자가 아닌, 또 다른 인간을 데리고 말이다.
“……헤에. 더 재미있는 인간이 왔잖아?”
힘의 총량은 옆에 있는 이상하게 생긴 인간보다 보잘것없었지만, 좀 더 특별한 기운이 느껴졌다.
어떤 것은 익숙했고, 어떤 것은 역겨웠다.
그 힘은 이곳에는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될 종류의 것이었다.
“겨우 인간의 몸속에 두 가지 힘이 공존할 수 있다고? 하핫!”
원래대로라면 있을 수 없는 그 현상에 여인은 흥미 가득한 눈빛으로 그 청년을 보았다.
균열을 자유자재로 여는 것뿐만 아니라, 어딘가에서 튀어나온 마물이 그의 명령을 듣는다.
여인이 웃음을 멈추었다.
“……흐음. 설마 아니겠지?”
요즘 들어 조금 많이 조용하다 싶었는데, 설마 그놈도 인간 세계에서 뭔 짓을 하고 있는 걸까?
“역시 약속은 지키는 놈이 손해라니까?”
오랜만에 재미있는 인간을 만났다.
지금 가지고 노는 놈보다 더욱 탐욕스러워 보이는 남성.
입맛을 다시는 듯 여인의 매혹적인 붉은색 입술 사이로 혀가 날름거린다.
당장에라도 가지고 놀고 싶다.
오랜만에 뜨거워지는 제 몸을 느끼며 저 인간의 앞으로 가려는 순간.
“……!”
황야 한가운데에 하늘 높이 치솟은 흑색의 첨탑을 보면서 여인이 입을 벌렸다.
그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대한 에너지.
이계에서 살아가는 자라면 모를 수가 없는 존재의 힘이었다.
“그, 그 녀석이 대체 왜! 왜 하필 내 영역에?”
그곳에서 느껴지는 힘은 이곳에 살아가는 자들에게 있어서 공포의 상징이나 마찬가지인 것이었다.
풍겨져 오는 힘이 다소 약하기는 했지만, 분명히 그 존재의 것과 매우 흡사했다.
“며, 멸망용!”
명백한 침입자임에도 여인은 아무런 조치도 취할 수 없었다.
잠시 후, 흑색의 첨탑이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한다.
그 자리에서 나온 것은 이제까지 노리고 있던 매력적인 인간과 자그마한 헤츨링 하나.
고작 헤츨링이라기엔 품고 있는 내력이 무시할 수 없을 정도였다.
확실하다.
저건 멸망용의 새끼다.
“……그렇다면 저게 그년이라고?”
폴리모프.
그 가능성을 고려해 봤지만, 그 포악한 드래곤이 저런 하찮은 생물로 변신할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인간과 멸망용.
결국, 여인은 한 가지 결론에 이르렀다.
“서, 설마!”
멸망용이라고 할지라도 새끼는 새끼다.
그런 존재가 따르는 것은 제 부모뿐이다.
그렇다면 저것은…….
“……그 자존심 강한 멸망용이 인간을 배우자로 받아들였다고? 하핫! 하하하핫! 뭐야? 이게 말이 돼?”
눈앞에 보이는 현실은 이것이 진실이라 말한다.
이것은 기회일지도 모른다.
온갖 고고한 척은 다 하는 그 재수 없는 낯짝에 한 방 먹여줄 절호의 찬스.
두 세계의 힘을 가진 인간.
멸망용의 배우자.
“흥미로워.”
멸망용이 점찍은 사내.
위험하다는 것은 알았지만, 오히려 욕심은 점점 더 커지기만 할 뿐이었다.
여인, 아스모데우스는 이서진이 균열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수정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제 영토에서 발생한 일이다.
정보를 은폐하는 것쯤은 간단하다.
아스모데우스는 다른 자들이 이 사실을 알아챌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인의 예상과 달리 이 사건을 알아챈 또 다른 존재가 있었다.
이계 깊은 곳에 있는 검은 숲.
그 어떠한 생명체도 살아갈 수 없는 멸망용의 거처에서 깊은 잠에 빠져 있던 드래곤이 천천히 눈을 떴다.
마치 파충류의 그것처럼 위아래로 길게 찢어진 동공이 저 너머를 응시했다.
“거기 있었구나. 도둑놈.”
* * *
신성 길드를 만나기 위해 각 나라에 있는 대형 길드에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재빠르게 만남이 성사될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그들은 큰 벽을 마주하게 되었다.
‘……한국에 있기에는 아까운 실력자였어.’
성기사단장, 신백준.
신성 길드장의 대리자.
감히 신의 방패를 자칭하는 자였지만, 그의 풍채를 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서진과의 만남을 주선하는 그는 각 나라의 대형 길드장들도 무시할 수 없을 만큼 강한 각성자였다.
단순한 각성자가 아닌, 굳센 전사라고 부르는 게 맞으리라.
신성 길드에서 제작한 물건들에만 관심이 있었지만, 어느새 그들은 신백준에게 은근한 권유를 하고 있었다.
그 어떤 장비를 착용한다고 해도, 결국 그걸 사용하는 것은 각성자 본인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어떤 조건을 내밀더라도 신백준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신성 길드의 조건이 그렇게 좋은 건가……?’
아니면, 이미 다른 길드에서 선수를 친 걸 수도 있다.
어떻게든 이번 방한 동안에 그의 마음을 돌릴 무언가를 찾을 것이다.
“여기가 한국이군.”
러시아의 대형 길드 ‘파라곤’의 길드장,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 이바노프는 한국의 풍경을 둘러보았다.
제 나라와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좁은 나라다.
영토의 크기는 각 나라에 존재하는 던전의 차이로 이어진다.
던전의 차이는 곧 각 길드의 자본과 힘의 차이다.
당연히 한국의 길드와 각성자들은 보다 불리한 환경일 수밖에 없다.
위잉!
위잉!
갑작스럽게 울리는 사이렌 소리.
근처에 균열 혹은 던전이 나타났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익숙하다는 듯 관계자의 안내에 따라 질서정연하게 대피하고 있었다.
“통제가 잘 돼. 위급 상황에 대한 대처 또한 확실한 것 같고.”
특히 군인, 경찰, 각성자들이 서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처럼 보였다.
당장에 러시아뿐만 아니라, 각 나라에서는 길드와 나라 간의 이권 다툼이 끝나지 않았기에 이런 모습은 볼 수 없다.
대한민국은 정부보다 길드의 힘이 더욱 강력하다.
대형 길드가 한 국가를 좌지우지하는 나라.
그럼에도 정부와 길드는 서로 간의 협력을 아끼지 않는다.
“……역시 직접 오길 잘했어. 한 번쯤은 눈으로 보고 싶었는데 말이야.”
이미 대한민국은 던전과 균열의 위협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났다.
그런 말에 각 나라의 길드장들은 쉽사리 믿을 수 없었다.
그게 얼마나 허무맹랑한 소리인지 아니까.
하지만 지금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것이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란 걸 인정할 수 있었다.
“혹시 그동안 들려왔던 소식들이 전부 진짜는 아니었을까요?”
“그거까진 아니겠지. 만약 그런 것들이 전부 가능하다면 이곳은 유토피아나 다름없는 곳일 테니까.”
제 옆에서 속닥거린 최측근의 말에 알렉세이는 코웃음 쳤다.
멀지 않은 과거.
대한민국에서 마석병이 유행했던 적이 있다.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확산에 대한민국을 여행 위험 국가로 지정해야 한다는 말도 나왔었다.
한국의 정부에서는 공식적으로 마석병에게서 해방되었다고 밝혔지만…….
“말도 안 되는 거지.”
애초에 마석병의 완치를 주장했던 사람들은 많았다.
단기적으로는 효과가 있을지라도 결국에는 완치는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뿐만 아니라, 치료제의 가격 또한 문제였다.
기본적으로 물약의 단가가 높은 것과도 연관이 있었다.
일반인들이 병의 증상을 약화시키기 위해서는 물약이 필요했고, 치료제라고 나온 것들도 결국엔 그것을 응용해서 만든 것이었으니까.
일반인이 그러한 가격을 지속적으로 지불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으아아앙!”
대피 중에 한 아이가 넘어졌는지, 무릎이 까진 상태로 서글프게 울고 있었다.
알렉세이는 제 옆에 서 있는 수행원을 보았다.
아닌 척하지만, 넘어져 있는 어린아이가 꽤나 신경 쓰이는 모양이었다.
그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자네가 원하는 대로 하게나.”
“……그래도 되겠습니까?”
“여기는 본국도 아니지 않나. 자네가 사용하는 힐링 한 번이 얼마만큼의 가치가 있는지 저런 꼬마가 알 리가 없겠지.”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알렉세이의 수행원, 나타샤는 천천히 아이를 향해 다가갔다.
그러나 그녀보다 먼저 넘어진 꼬마에게 다가간 사람이 있었다.
그 꼬마와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소년이었다.
그 소년은 제 손에 들고 있는 것의 뚜껑을 열더니 꼬마의 무릎에 그것을 천천히 붓기 시작했다.
“……무슨!”
혹시 괴롭힘이라도 되는 걸까.
당장에 그 행동을 말리려던 나타샤는 믿기 힘든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꼬마의 무릎이 점점 아물어져 가는 것이다.
저런 현상은 하나밖에 없다.
나타샤가 충격적인 표정으로 소년을 향해 걸어갔다.
“어떻게 이런 어린아이가 물약을 들고 다닐 수 있는 거지……?”
“응? 와! 예쁜 누나다!”
고작 넘어진 것에 불과한 상처에 저 귀한 물약을 붓다니…….
그 어떤 자비로운 사람이라고 해도 쉽사리 할 수 없는 행동이다.
저 물약의 가치가 얼마나 되는 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은 알 것이니까.
그러한 행동을 저런 어린아이가 했다.
그녀는 잠시라도 ‘은혜를 베푼다’라고 생각했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나타샤는 제 품에서 물약을 꺼냈다.
길드 내에서도 고품질의 물건.
만약을 대비해서 항상 챙기고 다니는 목숨과도 같은 것이다.
“엑! 이걸 왜 저한테 줘요?”
세 살 먹은 어린아이에게도 배울 점이 있다고 했나.
그 말에 깊게 공감하며 나타샤가 물약을 내밀었다.
“이것은 네 것이다. 자애로운 성인聖人은 받을 자격이 있어.”
“예? 뭐라는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누나!”
소년은 자신의 앞에서 뭐라 말하고 있는 서양인 누나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대신, 그녀가 손짓으로 가리키는 제스처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아~ 이거요? 저 보고 마시라고요?”
“……!”
소년은 자신이 먹던 것을 놔두고 나타샤가 건넨 물약을 한 입 마셨다.
그것은 곧바로 소년의 입을 타고 바닥에 질질 흘렀다.
“웩! 겁나 맛없어!”
그 충격적인 광경에 나타샤의 뇌가 정지했다.
“전 역시 이거나 마실래요. 제 일주일치 용돈 털어서 겨우 산거란 말이에요!”
맛있어 죽겠다는 듯 아까 꼬마의 무릎에 뿌려주고 남은 것을 마신다.
“얼마 안 남았잖아!”
나타샤가 주변을 휙휙 둘러봤다.
길거리에 다니는 사람들 대부분이 방금 보았던 그것을 벌컥벌컥 마시고 있다.
어디 하나 다친 곳은 없는 사람들이다.
……한국의 사람들은 전부 대부호라도 되는 것인가?
Sacred Strawberry.
특이한 이름의 물약이다.
대체 어디서 제조한 것이길래 모든 사람이 저걸 마시고 있는 것일까.
여전히 입을 벌리고 있는 나타샤를 보며 소년이 이제야 알았다는 듯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누나도 이거 마시고 싶다는 뜻이었구나! 진작 말하시지. 이거 편의점 가면 파는 건데. 어! 저기 봐요, 저거!”
소년의 손짓에 나타샤는 멍하니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자신들이 그토록 만나고자 했던 인물이 거대한 스크린 너머로 환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럴 리 없겠지만, 나타샤는 화면 속 사내와 눈이 마주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웃음이 그들에게 말했다.
한국에 온 것을 환영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