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tion is flowing from the water purifier in my house RAW novel - Chapter 122
우리집 정수기에서 물약이 흐른다 123화
35. 그림자들의 도시(6)
이서진이 나가자, 방 안은 고요한 적막만이 이어졌다.
“하아…….”
누군가의 한숨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침묵이 깨졌다.
안환재, 이유지, 전진우.
제각각 다른 모습을 한 도플갱어들을 하나씩 마주보며 정해연의 모습을 한 그녀가 입을 열었다.
“정말 이걸로 괜찮은 거지?”
“쯧. 이런 건 괜히 떠올라서 사람 마음 약해지게 만들어.”
“어……. 저희 사람 아니지 않나요?”
“넌 조용히 하라고 했지?”
“네에…….”
잔뜩 주눅 든 전진우의 모습을 보며 그녀는 신기하다는 감정을 느꼈다.
‘분명히 연회에서는 저런 모습이 아니었는데 말이야.’
순간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에게 놀랐다.
이것은 자신이 경험한 기억이 아니었으니까.
그렇다면 지금 떠오르고 있는 이 감정은 타인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란 말이다.
‘이렇게나 생생한데 말이야.’
손을 들어 자신의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그에 따라 푸른 머리카락이 좌우로 흔들린다.
현실 세계의 정해연이 붉은 머리를 하고 있는 것과는 정반대의 색깔.
도플갱어는 타인의 모습을 완벽히 복제한다.
그렇다면 대체 왜 정해연의 복제품인 자신은 이런 색상을 가지게 되었을까.
“……저희 진짜 집에 안 가요? 저 내일 약속 때문에 바쁠 거 같은데…….”
“죽는다, 진짜. 내일 여기가 멸망할지도 모르는데, 그까짓 봉사가 중요해?”
“아니, 그래도 약속은 약속…… 죄송합니다…….”
‘이 사람들도 그래.’
제각각 현실에 있는 사람들과는 그 성격이 달랐다.
겉으로 티 내고 있지는 않지만, 현재 그들은 어떠한 괴리감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윽. 내가 그런 행동을 했다는 게 진짜 믿기지가 않네. 그, 그렇게 혀를 배배 꼬며 애교를 부린다니……!”
갑자기 소름 돋는다는 듯 제 팔뚝을 쓸어내리는 이유지.
머릿속으로 흘러들어 온 본체의 기억 때문이리라.
잠시 눈을 감았다.
동시에 그녀의 머릿속으로 어떤 기억이 흘러들어 왔다.
분명히 며칠 전까지만 해도 부분 부분 비어있던 곳이 많았다.
그러던 기억이 어느 순간부터 생생하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다 그 녀석 때문이야.”
“에. 저는 그분 좋던데요. 저랑 친구 했으면 좋을 텐…… 아니, 이건 전부 공감하시는 거잖아요…….”
“쯧.”
“그래, 다 그 사람 때문이지.”
말투는 사나웠지만, 그 안에 담긴 감정은 원망 같은 것이 아니었다.
이서진.
현실 세계에서 온 진짜 사람이자, 그들과 연관이 깊은 인물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이끌리기라도 하는 걸까.
그림자의 도시에서 그를 만난 이후로 갖가지 기억이 샘솟고 있었다.
누군가에게는 그 누구보다 소중한 동업자였고.
누군가에게는 단순한 악연을 뛰어넘은 악우였으며.
또 누군가에게는 대가 없는 선행이란 것이 존재한단 걸 알려준 대단한 사내였다.
-……부럽네요.
무심코 했던 말이다. 어째서 그런 말을 뱉었을까.
인간은 기억을 떠올릴 때, 그 당시에 겪었던 다양한 감정들이 솔솔 피어오른다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도 인간이라는 걸까.’
더 이상 마물의 삶을 살고 싶지 않아서 그림자 속에 도시를 만들었지만, 무언가 삐걱거리기만 할 뿐 제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자신의 존재를 자각하지 못하는 다른 그룸 및 도플갱어들은 모르겠지만, 모든 진실을 알고 있는 그들로서는 평범한 삶을 보낼 수 없었다.
애초에 그들로서도 갑작스럽게 자유가 찾아온 것이기에 이 모든 상황이 당황스러웠다.
그저 본능에 의해 살아가던 도플갱어들은 어느 순간 존재를 얽매고 있던 것으로부터 해방되었다.
‘그것 또한 그자와 관련이 있을까?’
“꼬, 꼬리를 그렇게 만지면은 조금 예민한데……!”
“예? 뭐라고요?”
“한참 좋을……! 너한테 한 말 아니니까, 좀 닥쳐!”
“아니…… 여기 저희 말고 누가 있다고…….”
눈을 감은 상태로 무언가를 떠올리던 이유지의 꼬리가 이리저리 흔들린다.
그걸 보면서 정해연이 피식 웃었다.
이러나저러나 더 이상의 고민은 무의미하다.
어차피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것도 오늘 밤이 마지막일 테니까.
끼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다들 피곤할 텐데, 안 들어가고 뭐 하고 있나?”
이서진에게 거주지를 안내해 주고 온 안환재가 안쪽으로 들어왔다.
“그냥요. 이렇게 모여 있는 것도 오랜만이잖아요.”
“오랜만이라기보다는 그날 이후로 처음 아닌가?”
“그 날이라……. 이곳에 온 지도 벌써 일 년이 지났군.”
자연스럽게 의자에 앉은 안환재 또한 상념에 빠졌다.
현실에 있는 안환재의 기억이 아닌, 도플갱어로서의 자신의 기억이다.
그림자들의 도시.
이곳을 만드는데 꽤나 많은 힘이 들었다.
어떤 곳은 현실과 조금 달랐으며, 그곳에는 있는 게 이곳에는 없기도 했다.
일평생 누군가의 것을 완전히 따라 하기만 하던 그들로서는 처음 시도하는 행동이었다.
어딘가 엉성한 곳이 많은 공간이지만, 그들에게는 이제 꽤나 애착이 가는 곳이기도 했다.
“어쩐지 제 길드 하우스가 조금 작다 싶더라고요……!”
“넌 길드 하우스를 만들어준 것만으로 고마워해야 할 거야.”
“예?!”
평범하게 대화하고 있는 그들을 보며 안환재의 입가에 아주 작은 미소가 번졌다.
그들은 현실에 있는 실력자들에게 기생한 도플갱어.
당연히 그들의 본신 또한 평범한 마물과는 궤를 달리한다.
고작 하룻밤을 샌다고 해서 전혀 문제 될 체력은 아니었다.
창밖을 보았다.
그림자 세계에서 달은 떠오르지 않는다.
그럼에도 어째선지 창문에 빛이 비취는 것 같았다.
어디선가 나타난 술을 한 모금 삼키며 그가 중얼거렸다.
“꽤나 긴 밤이 되겠군.”
* * *
아침이 밝았다. 그들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평소와 같은 인공적인 빛이 아니었다.
현실과 다름없는 태양이 저 높이 떠올라있었다.
이 그림자들의 도시가 현실과 이어지고 있다는 증거였다.
“햇빛…….”
도플갱어로서는 그다지 달갑지 않을 태양빛이었지만, 그들은 그것이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 그럼 다들…….”
“뭔가요. 살아서 보자니, 뭐니 그런 얘기를 하려는 건 아니죠?”
“아니, 그런 오글거리는 말을 하려는 건 아니고…….”
지금 하려는 말도 꽤나 낯간지러운 것일까. 제 볼을 긁적이던 이유지가 중얼거렸다.
“한 번 끝까지 저항해보자고. 인간답게.”
“……인간답게.”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말이었지만, 이 중에서 그 말에 태클을 거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요. 꼴사납지 않게. 저희답게. 화려하게 가보자고요.”
“오. 역시 내 친구다워.”
자신 앞으로 내밀어지는 주먹.
푸른 머리의 정해연이 그것에 자신의 주먹을 마주 대었다.
“어어. 저도요!”
“자자, 갈 땐 가더라도 한 마리라도 더 잡고 가는 거다? 너 뱀처럼 꽁지 빠져라 도망가면 안 돼?”
“저 못 믿으세요? 스네이크의 부 길드장, 전진우라고요!”
“아니, 그래서 못 믿겠다는 건데.”
“엑…….”
세 개의 주먹이 맞닿고, 그들은 각자의 구역으로 이동했다.
“전부 갔군.”
오직 안환재만이 마지막 안내를 위해서 남아 있었다.
잠시 후, 이서진이 그가 있는 곳으로 찾아왔다.
“나머지 사람들은요? 마지막 작별 인사라도 하고 싶은데.”
어제 그런 취급을 받았음에도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그런 말을 했다.
아주 잠깐이지만, 다른 선택을 떠올리기도 했던 안환재가 입을 열었다.
“흠. 현실에서도 워낙 바쁘던 사람들 아닌가. 이곳이라고 별다를 것은 없겠지.”
상대방을 배려하기 위한 선의의 거짓말이었다.
마물이 할 법한 행동은 아니었다.
안환재는 이서진을 어떠한 장소로 인도하기 시작했다.
저 너머의 존재일지라도 쉽사리 알아채지 못하게 공들여 만든 대피소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이자는 타인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는 것 같으니까.’
“궁금한 게 있는데요.”
“뭔가?”
“이곳에 있는 균열에서 건너오는 마물들은 정체가 뭔가요?”
꽤나 예리한 질문이었다.
곧 있으면 이곳에 들이닥칠 재앙과도 연관이 있는 내용이기도 했다.
균열 너머의 있는 어떤 위대한 존재들이 이곳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균열에서 튀어나오는 것은 그들의 휘하에 있는 마물.
야생에 있는 것들과는 달리 무력도 월등하고, 움직임도 체계적이다.
평소에는 그림자에 철저하게 숨어있었기에 위치가 쉽게 노출되지 않았지만, 이서진이 온 후로 어째선지 그들에게 쉽사리 발각되었다.
현실과 연결되는 일식을 틈타 이곳으로의 침공이 시작될 것이다.
그러한 말들을 하는 대신 안환재는 간단하게 말할 뿐이었다.
“마물에게 별달리 정체가 어디 있겠나. 인류를 위협하는 괴물일 뿐이지.”
이것은 아무리 그래도 화제를 돌리는 것이 티가 났는지, 이서진이 납득하지 못하겠단 표정을 짓는다.
그런 그에게 안환재가 간단하게 질문했다.
“자네는 우리의 적이 누굴 것 같나?”
그림자의 적.
곰곰이 생각한 이서진이 말했다.
“강렬한 빛?”
“빛은 우리가 있을 곳을 만들어주는 이로운 것일 뿐이지. 우리가 경계해야 할 건 그림자마저도 집어삼킬 깊은 어둠이야.”
“……어둠.”
고작해야 마물의 말.
흘려들을 수도 있겠지만, 진지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생각해주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자니 어떠한 감정이 떠올랐다.
‘만약 이 자가 우리를 인도해준다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이곳은 이계의 절대자들이 호시탐탐 노리는 곳이다.
일개 인간일 뿐인 그가 이런 곳을 감당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애초부터 그림자 세계의 인물과는 만날 일조차 없었을 존재다.
‘이 자는 현실로 돌아가고, 우리는 이곳에서 끝을 맞이한다.’
그동안 마물로서 살아온 죗값이라고 본다면 받아들이지 못할 것도 없었다.
현실로 돌아갈 방법을 알려주고 난 후, 안환재는 급히 동료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당신의 이름은 뭡니까?
마지막에 나눈 대화가 계속해서 머릿속에 맴돌았다.
일부러 알려주지 않은 것이 아니다. 정말로 도플갱어에게는 이름이 없었다.
그저 그 당시에 의태하고 있던 자의 이름으로 매번 바뀌어 갈 뿐이다.
“……일식이 시작됐군.”
달이 태양을 완전히 가리는 순간, 현실과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이곳으로의 침략이 시작될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벌써부터 곳곳에서 균열이 일어나고 있었다.
하나 같이 이계의 절대자들의 휘하에 있는 마물들이다.
그들의 목적은 하나. 도플갱어로의 성장이 가능한 그룸들의 납치.
현실에 있는 막강한 각성자들이 있어도 승산을 확신할 수 없을 텐데, 이 도시에 제대로 된 전력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림자들의 도시.
이제야 마물의 굴레에서 벗어나 또 다른 가능성이 피어오른 갓난아기들을 모아둔 공간일 뿐이다.
“그들에게 다시 마물의 삶을 살게 할 수는 없지.”
안환재의 몸 근처로 마물조차 감당하지 못할 짙은 마기들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도시에 있는 모든 인원이 중앙으로 대피하였다.
그로 인해 도시 외곽에 생성된 균열에서 빠져나온 마물들이 한곳으로 모여든다.
그저 벌벌 떨고만 있는 그림자들의 앞에 푸른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싸우고 있는 도플갱어 하나가 있었다.
콰앙!
정해연의 손에서 만들어진 얼음의 창들이 도시를 침공하는 마물들의 머리 위에 내리꽂혔다.
“……끝이 안 보이네요.”
“그치? 그나마 지금은 외곽에만 나타나니까 버틸 만하지만…….”
“사람들은 전부 대피한 거 맞겠죠?!”
그녀의 옆에 있는 두 도플갱어가 제각각 걱정이 담긴 말을 한다.
하나 같이 자신의 걱정 같은 것은 아니었다.
“역시 대단하네.”
“그렇겠지. 아마도 이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도플갱어니까.”
안환재의 그림자에 기생한 도플갱어.
그림자들의 도시의 수장이라고도 볼 수 있는 존재다.
그가 묵직한 대검을 휘두를 때마다 마물들이 추풍낙엽으로 떨어져 나간다.
가까이 다가서기만 해도 그 무엇이라도 태워버릴 사나운 마기는 뒤에 있는 존재들을 지키기 위해 빛나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길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당연하다.
저 강대한 세력은 한낱 마물들의 집합 따위가 당해낼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만약 저들에게 맞설 방법이 있다면 단 하나뿐이다.
그들 또한 누군가의 수하로 들어가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제야 찾게 된 자유로운 삶이다.
도플갱어들은 단순히 누군가의 하수인으로 살고 싶지 않았다.
문득 한 사람이 떠올랐다.
“……잘 갔겠죠?”
하늘을 올려다본 이유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달이 태양의 대부분을 가렸다.
이서진은 현실과 연결된 그림자 속으로 뛰어들어 이곳에서 벗어났을 것이다.
“응. 애초부터 우리와는 다른 세계의 사람이었으니까.”
“그래도 조금 정도는 더 얘기를 나눠봤으면 좋았을 것 같아요.”
“어차피 다 머릿속에 들어있는 거 아니야?”
“아뇨. 단순히 본체의 기억을 떠올리는 게 아니라 제가 직접 그 사람과 대화를 하고 싶었어요.”
전진우의 말에 이유지의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마지막의 마지막에 가서야 제 마음에 솔직해질 수 있었다.
“하핫. 그러게……. 조금 정도는 덜 퉁명스럽게 대했으면 좋았을 텐데.”
더 이상 막을 수도 없을 만큼 강대한 마물들이 몰려오는 것을 지켜보던 그녀의 귓가로 누군가의 말이 들려왔다.
“뭐야, 그러면 그동안 일부러 틱틱거린 거야? 이유지 아니랄까 봐, 그런 부분에선 꽤나 비슷하네.”
“응? ……어?!”
“우와! 저랑 친구 해주러 돌아오신 거 맞죠?!”
그림자들의 한가운데에서 현실 세계의 주민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좋은 아침.”
* * *
세 사람 다 눈은 붕어 같이 떠졌으며, 입은 떡하니 벌어져 있었다.
저렇게 일관된 리액션을 보여주니 커튼을 이용해서 몰래 다가온 보람이 있었다.
“이, 이서진! 대체 여긴 왜?!”
“아니, 까먹은 게 있어서 말이야. 그냥 가기엔 조금 그래서 직접 전해주러 왔지.”
내 말에 더 이상 어이없을 것도 없다는 듯 눈을 굴리던 이유지가 버럭 화를 냈다.
“야, 이 멍청아! 지금이 무슨 상황인지 알고나 하는 소리야?! 이곳에 있으면 너도 죽는다고!”
그 말을 들으며 씨익 웃자, 답답해 죽겠다는 듯 곡소리를 낸다.
사납게 몰아붙이는 저 말이 제 딴에는 날 걱정해서 하는 말이란 걸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얼른……!”
화나듯 솟아 있는 꼬리를 왈칵 잡았다.
“흐얏?! 너! 이런 상황에서 그런 장난이……!”
“지금 화내고 있는 건 과연 너일까, 현실의 이유지일까.”
“……어?”
난데없는 그 말에 이유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그들의 몰골을 보았다.
하나 같이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서 상처 입은 몸이다.
저 앞에서 싸우고 있는 안환재도 그랬다.
지금 그가 하고 있는 행동은 본인이 선택한 결과다.
비록 진짜가 아닐지라도, 그 마음은 단순히 가짜로 깎아내리기엔 너무도 소중했다.
“진짜 같은 가짜. 가짜 같은 진짜. 다 무슨 상관이겠어. 자신이 올바르다고 생각한 일을 흔들림 없이 따라가기만 한다면 누구든 빛날 수 있어.”
저 너머로 균열이 보인다.
이전에 허핑 길드장을 마무리할 때 보았던 기운과 비슷한 것들이 그 너머로 쭉 이어져 있었다.
균열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하나가 아니었다.
각각의 균열에서 나온 마물들은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 이곳으로 달려오며 서로를 물어뜯고 있었다.
마치 제 주인에게 가장 먼저 이들을 바치겠다는 듯한 행동이다.
제집에서 뛰어놀듯이 아주 난장판을 피우고 있었다.
“아직 집주인이 없으니까, 이렇게 날뛰나 본데…….”
아름다운 바다가 보이는 곳도 좋고.
산들바람이 부는 어느 초원 또한 괜찮았을 것이다.
“미안하지만, 나는 이곳이 마음에 들었거든.”
하지만 나는 이 투박하고 어색한 도시가 좋았다.
내 보금자리.
나의 스윗 하우스.
두 번째 집은 어디가 좋을까.
그런 고민을 많이 했지만, 굳이 건물 한 채에 국한될 필요는 없었다.
고작 하나만 가지기에는 불만스러웠다.
내가 가지고 싶은 모든 것을 내 손에 두고 싶었다.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나와 소중한 사람들의 공간으로 만들고 싶다.
이것은 내 욕심이자 탐욕이었다.
두근!
그러한 내 마음에 반응하듯이, 손에 들린 스위치가 진동하고 있었다.
“이건…….”
“이전에 우리를 억눌렀던 그 힘……?”
“아니, 하지만 전혀 억압하려는 느낌은 들지 않아. 오히려…….”
온몸에 마나 대신 마기가 흐르기 시작한다.
그때처럼 나 자신을 제어할 수 없는 것이 아니었다.
그동안은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기운이 내 몸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 무엇이라도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열띤 고양감이 내 몸에 깃들었다.
마물을 컨트롤하는 스위치. 이것은 평범한 물건이 아니었다.
마물魔物.
그 어떤 것보다 마에 물들었으며,이 세상의 모든 것을 제 품에 두기 위한 탐욕스러운 물건이었다.
언젠가는 제 주인조차도 집어 삼킬 저주받은 물건이었지만, 이것은 내게 복종하고 있었다.
마치, 내게 복종을 위한 ‘맹세’라도 한 것처럼.
아주 조금이지만, 균열 너머의 존재들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달이 태양을 가리고, 그림자들의 도시가 암흑 속에 휩싸였다.
“아빠, 순둥이가 쪼오끔 도와줄게!”
“끄앙! 끄앙!”
도시 전체를 덮어버린 암흑 같은 것은 단번에 집어삼킬 짙은 어둠이 내 몸에서 빠르게 퍼져 나갔다.
시간이라도 멈춘 듯이 고요한 순간.
저 너머에서 이곳을 보고 있을 침입자들에게 선포했다.
“내 집에서 당장 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