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tion is flowing from the water purifier in my house RAW novel - Chapter 124
우리집 정수기에서 물약이 흐른다 125화
36. 한 사람만의 연금술사(1)
내가 그림자들의 도시에 머무른 지 10일이 흘렀다.
혹시 각 세계의 시간이 다르게 흐를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일은 없는 모양이다.
“그러니까, 조금 떨어지지?”
“싫어.”
오랜만에 집에서 먹는 밥이다.
저곳에서 먹은 것들은 뭐라고 해야 할까.
음식의 형태를 하고 있긴 했지만, 정작 제대로 된 만족감이 들지 않았다.
그들은 음식을 먹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으니, 구색이라도 맞추고자 만든 것이겠지.
그림자를 이용해서 만들기라도 한 건가?
문득 꼬물이의 입에서 나오던 수정을 생각했다가 재빨리 지워냈다.
“……밥을 못 먹겠거든?”
“그게 문제였어? 자, 아~”
내 입으로 단숨에 쑤셔 들어오는 숟가락.
나는 별말 없이 그것을 오물오물 씹었다.
옆을 보자 눈이 퉁퉁 부은 이유지가 있었다.
‘울음은 그쳤네.’
집에는 또 어떻게 들어왔는지, 현실로 돌아오자마자 마주치게 된 이유지는 아주 그냥 세상이 떠나가라 오열을 했다.
도중부터는 내 가슴을 내리치는 손이 점점 변화하기에 정말 온 힘을 다해 그녀를 달래줘야만 했다.
그 결과가 이거다.
꾸욱-
내 오른팔은 이유지의 품에 붙잡혀 있다.
덕분에 젓가락도 못 들고 꼼짝없이 밥이 먹여지는 중이고.
식사하는데 이렇게까지 붙어 있을 필요가 있는 것일까.
마치 음식으로 유인당해 마음껏 만져지는 길고양이가 된 기분이다.
“길고양이도 이렇게 만지작거리면 도망가 버리겠네.”
“걱정하지 마. 도망 못 가도록 아주 꽉 잡고 있으니까.”
저 꼬리는 나날이 사용법이 늘어만 가는 걸까.
내 허리를 완전히 감싼 상태로 놓아주질 않는다.
“벨트라도 맨 기분이야, 아주.”
“그거 좋네. 아주 그냥 벨트처럼 네 허리에 찰싹 붙어 있을까? 도망 못 가게?”
정말로 그렇게 할 것 같았기에 더 이상 농담을 하지 않았다.
내가 가만히 식사를 하자, 이유지는 볼멘소리와 함께 제 불만을 늘여 놓는다.
“그래서, 좋았어?”
“뭐가.”
“누가 나 혼자 두고 너희들끼리 여행 갔다오라고 했어. 아주 그냥 물 좋은 곳에서 쉬고 오니까 좋았지? 응? 나한테는 말도 없이!”
여행은 무슨…….
그렇게 피곤한 게 여행이라면 집에 박혀 있는 게 더 휴가다운 휴가가 될 것이다.
‘거기다가…….’
따지고 보자면 그곳에서 가장 오랜 시간 같이 보낸 사람은 이유지다.
“뭐? 그게 무슨 소리야?”
“넌 몰라도 돼.”
고개를 갸웃거리는 모습을 보자니 정말로 그곳의 이유지와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이유지가 다른 인물이란 걸 체감할 수 있었다.
“짜증 나, 진짜.”
이유지는 내게 질문하는 걸 포기하고 타깃을 변경했다.
가만히 계란말이를 조물조물 씹고 있는 루비에게 이유지가 으르렁거렸다.
“……흐응. 아주 여유롭네? 평소에 내가 이렇게 바짝 붙을 때는 심기 불편하다는 티를 팍팍 냈으면서.”
“무슨 소리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너도 같이 갔잖아? 어디 갔는지도 말 안 해주고, 대체 둘이서 뭘 한 거야?”
힐끗.
루비가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이유지 몰래 입을 잠구는 모션을 취했다.
아무래도 또 다른 자신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여러모로 복잡한 기분이 들지도 모르니까.
“비밀입니다.”
“뭐?”
“성자님과 저 둘만의 비밀입니다. 유감스럽게도 외부인에게는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하핳. 순둥이도 아는데!”
“뭐야! 뭔데! 왜 나만 모르는 건데!”
안지윤과 안지훈은 이곳에 없었다.
내가 없던 열흘 동안 수호 길드에서는 새롭게 나타난 4층 던전의 공략에 들어간 모양이다.
그곳에 안지윤과 안지훈이 공략 인원으로 차출 된 것이다.
‘별걱정은 없겠지.’
평소에는 허당 같은 면모를 보여주는 둘이지만, 이곳에서 열심히 훈련하던 모습을 지켜봤으니까.
헤븐 길드장, 박준호 또한 시도 때도 없이 이곳 훈련실로 놀러와 두 남매의 훈련을 도와주기도 했고.
달그락. 달그락.
식사에 집중하지 못하는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순둥이의 옆에 앉아 있는 까망이는 이곳에 오고부터 줄곧 나를 쳐다보고 있는 중이다.
제 볼에 밥풀이 묻은 것도 모르고 내 눈치만 본다.
“까망아.”
흠칫!
내가 볼에 묻은 것을 닦아주려고 몸을 가까이하는데 반응이 꽤나 격렬하다.
“미안. 놀랐어? 이거 떼어 주려고 그런 거야.”
“아…….”
아?
내 손가락에 있는 밥풀을 멍하니 보던 까망이의 입에서 분명히 소리가 나왔다.
분명히 말을 못 하지 않았나……?
[감사합니다.]
그러나 까망이는 그런 적 없다는 듯 옆에 있는 스케치북을 들어 그곳에 감사 인사를 적어서 내게 보여줬다.
“…….”
무엇 때문일까. 까망이는 매우 불안해 보였다.
평소에 나를 쳐다보던 시선과는 조금 달랐다.
까망이라고 부를 때마다 힘을 주며 적던 ‘아저씨’라는 말도 없었고.
“누나가 없는 동안 외로워서 그런 게 분명해! 순둥이가 밥 다 먹고 재밌게 놀아줄게!”
그 말에 얼굴이 새하얘지는 까망이.
짚이는 것은 있었지만, 지금은 가만히 놔두기로 했다.
무엇보다 순둥이가 평소와 다름없이 까망이를 대하고 있으니까.
휴대전화를 확인하는데, 내게 온 전화와 문자의 수를 도저히 셀 수가 없었다.
우선 가장 먼저 길드 하우스로 향하기로 했다.
그곳에서는 무직이었지만,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으니 길드장으로서 최소한의 행동은 보여야 할 테니까.
“야아아! 떨어지기 싫단 말이야아아!”
끝내 화장실까지 따라오려는 이유지를 떼어내고 준비를 끝마쳤다.
* * *
신성의 길드 하우스. 저쪽 세상에는 없던 곳이다.
혹시나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다행히도 멀쩡히 잘 있었다.
“하하. 그래서 말이죠, 제가…….”
그곳으로 들어가자마자 보인 것은 안내 데스크에 앉아 웃고 있는 신미란이었다.
“……저 사람은 여기 왜 있는 거야?”
그리고 그 앞에서 작업이라도 걸듯이 한 손에는 커피를 들고 온갖 폼을 잡으며 대화를 하고 있는 한 남성.
“오! 이거 우리 서진이 아니야! 이야, 오랜만이네!”
소성환은 마치 여기가 제 길드라도 되는 듯 자연스럽게 내게 손을 흔든다.
길드 하우스 내부 곳곳에 경계를 서고 있는 성기사들이 내 쪽을 쳐다본다.
신호라도 보내는 순간, 당장에라도 소성환을 밖으로 쫓아 낼 기세다.
……이거 아무래도 한두 번 온 게 아닌 거 같은데?
“어서오세요. 길드장님. 길드 하우스엔 오랜만이시네요. 그동안 많이 바쁘셨나 봐요.”
“흐흐. 그렇지. 우리 형이 워낙 인기가 많잖아. 뭐, 나랑은 친해서 말 한마디면 당장에라도 만나줄 테지만 말이야.”
“정말이요? 길드장님이랑 그렇게 친하세요?”
“아! 물론이죠! 그렇지, 서진아?”
소성환이 내게 어깨동무를 하며 옆구리를 살며시 찌른다.
왜 이러나 했더니, 아무래도 신미란에게 관심이 있나보다.
내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절박한 표정으로 내게 입 모양으로 ‘제발’이라고 말한다.
‘다음에 형이 부르면 무조건 튀어나갈 테니까, 제발!’
기어코 복화술까지 마스터한 소성환을 위해서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예, 뭐. 그렇죠. 동생이 부르면 형이 된 도리로서 만나줘야죠.”
“……형이요?”
“아, 그런 거죠! 비록 동생이지만, 워낙 멋진 놈이지 않습니까. 겉모습, 나이가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제가 존경할 만한 인물이면 누구든 저보다 형이죠!”
내가 본 소성환 중에서 가장 그럴듯한 말이었다.
그렇지만 그런 걸로 치면 소성환은 순둥이한테도 형이라고 불러야 한다.
아니, 이 경우에는 누나라고 불러야 하나?
물론 소성환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온다면 당장에라도 무릎을 걷어찰 것이다.
“조장은 이런 곳에 마음대로 있어도 됩니까?”
평소대로라면 정해연의 눈치를 보면서 황혼에 붙어 있던 양반이다.
“흐흐. 정해연이라면 지금 미국으로 출장 갔거든. 뭐, 어떤 계약 때문에 갔다고는 하는데. 그러고 보니 조금 늦는 거 같기도 하고…….”
길드장이 부재중이라면 사실상 소성환이 황혼의 총책임자라는 뜻이다.
황혼에는 부 길드장이 따로 없었으니까.
그런 사람이 제 길드장의 행적도 제대로 모른다니…….
“미란 씨 조심하세요. 이 사람 겉으로 보는 것과 같이 속이 엄청나게 음흉합니다.”
“그, 그런가요?”
“뭐? 혀, 형! 이, 이러는 게 어디 있어!”
나와 소성환의 사이를 흰 갑주를 입은 장정들이 막아섰다. 기존에 길드에 있던 성기사들은 아니다.
“오…… 그래도 이제는 좀 그럴 듯해 졌는데?”
이유지의 말대로다.
이들은 그녀가 팀장으로 속해 있던 곳의 덩치 형님들이었으니까.
아직 길드에 속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아무런 위화감이 없었다.
“형님, 오셨어요?”
“넌 왜 저거 안 입고 있냐?”
“하하…… 봐주세요. 형님. 전 저거 입었다간 죽을 지도 모릅니다.”
눈 밑에 쭉 내려온 다크서클과 퀭한 눈동자.
조금 미안하긴 하지만, 저 모습이 이태영과 가장 어울린다.
이태영이 내 옆에 있는 이유지를 째려본다.
이유지가 내 등 뒤에 사사삭 하고 숨었다.
“말도 마세요. 형님 없는 동안에 누님이 어떤 히스테리를 부린지 아세요? 저한테 찾아와서는 당장 애들 풀어서 형님을 찾으라니 뭐니…….”
“내, 내가 언제 그랬어!”
“저한테 선배 일까지 전부 도맡아 하게 했잖아요!”
“그, 그건. 나는 서진이의 개인 경호원이니까. 돌아올 때까지 대기하는 게 내 일이란 말이야! 그치? 서진아?”
나는 그들을 가볍게 무시하며 신백준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오셨습니까, 길드장님.”
투구도 벗은 상태로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는 신백준.
꿀꺽.
나도 모르게 목으로 침이 넘어간다.
……혹시 루비랑 사라졌던 것 때문에 저렇게 심각한 건가?
―수녀님은 제게 있어서 딸 같은 분이십니다.
하지만 내 예상과는 다른 말이 나왔다.
“안쪽에 길드장님을 찾아 온 손님이 계십니다.”
“손님이요?”
“……원래대로라면 돌려보냈겠지만, 그가 한 말이 조금 신경 쓰였습니다.”
안쪽에 있는 인물이 불쾌하다는 듯 잠시 얼굴을 구긴다.
언제나 나와 루비 앞에서는 이웃집 아저씨처럼 웃는 신백준이 아니라, 우리를 지켜주던 성기사단장으로서의 모습이었다.
“정해연 님을 언급하시더군요. 자신을 만나지 않으면 길드장님께서 반드시 후회하실 거라 말했습니다.”
“……해연 씨요?”
내 손목시계가 없더라도 상대방의 의중을 정확하게 꿰뚫어보는 신백준이다.
그가 이렇게 말하는 거라면 헛소리는 아니란 뜻이다.
접객실 안으로 들어가자, 한국에서는 보기 드문 금발의 서양 남자가 앉아 있었다.
다리를 꼬고 차를 홀짝이던 그는 나를 발견하더니 씨익 웃었다.
“당신이 신성 길드장?”
꽤나 신기했다.
내가 이 자리를 맡게 된 후 저렇게 노골적인 태도를 보이는 사람은 없었으니까.
“역시, 정해연 그 년이 한 말은 거짓말 같네. 전혀 그런 걸 만들 사람으로는 안 보여.”
나는 그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일단은 이야기를 들어야 했기에 얌전히 있어주기로 했다.
“여긴 어쩐 일로 오신 거죠?”
“뭐야, 다 아는 거 아니야? 정해연, 걔가 이미 다 얘기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무슨 얘기를 말하는 걸까.
사실 내용 같은 건 그렇게 궁금하지 않았다.
저런 사내의 입에서 정해연의 이름이 오르내리는 게 불쾌할 뿐이다.
“하여간. 딱 보니 잔머리 굴리고 있는 것 같은데. 그래 봤자, 자기만 손해라는 걸 왜 모를까. 멍청한 년.”
딱 거기까지였다. 나는 그의 눈을 직시하고 말했다.
“제게 자세한 내용을 말해주시죠.”
“뭐? 내가 왜…….”
“네가 정해연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을 내게 말해.”
손목에 있는 시계가 반짝였다.
상대방은 마치 이것이 당연하다는 듯 내게 사실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림자들의 도시에서 영역을 선포함과 동시에 내 몸에 흘러들어온 이질적인 힘 덕분일까.
이전에는 이 능력을 사용하면 몸이 무언가에 잠식되는 기분이었는데 전혀 그런 기색이 없었다.
이야기를 전부 들은 나는 의자에 등을 젖혔다.
에이든 버틀러.
미국, 프론티어 길드.
그리고 그들과 정해연이 맺은 불공정 계약.
“계약. 계약이라…….”
“……어? 내가 왜 그런 말을……?”
황혼은 정해연이 스무 살 무렵에 설립한 길드다.
고작해야 몇 년 안에 한국에서 그만한 입지를 다지기 위해서는 어떠한 내막이 있을 거라 생각하긴 했다.
분명히 그녀는 저들에게 마땅한 대가를 지불했겠지.
저들은 황혼의 성장세를 보고 욕심이 나 저런 행동을 하는 것이고.
‘어떻게 할까.’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힘을 이용한다면 간단하게 해결할 수도 있는 문제겠지만, 정해연은 그런 걸 바라지 않을 것이다.
만약에 그렇게 한다면, 나와 그녀는 확실한 상하관계가 이루어지게 되겠지.
예전처럼 나를 불편해하며, 어색하게 대할지도 모른다.
“그건 안 되지.”
그것은 내게도 해당된다.
그동안 받은 것만 있고, 정작 해준 것은 별로 없었기에 약간의 도움을 주는 것 정도는 괜찮을 것이다.
차우 길드 때도 그랬고.
북한의 영토로 향했을 때도 그랬고.
언제나 그녀가 나를 위해 뒤에서 따로 작업을 하고 있단 건 진작 알고 있었으니까.
“간단한 편지 한 통 정도를 보내는 것쯤은 괜찮겠지.”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금발의 사내를 방치하고, 균열을 열었다.
건너편에 보이는 것은 이계가 아니라, 우리 집이다.
텔레비전의 특수 능력 ‘채널 고정’을 이용해서 우리 집에 균열의 좌표를 고정시켜 놓은 것이다.
언제든지 집으로 귀환할 수 있는 이동 수단이다.
내 방을 뒤적거리다가 종이 하나를 찾았다.
볼펜을 들고 그것에 무언가를 적어 내려간다.
“이거면 됐겠지.”
“빨강이한테 보내는 거야?”
“응.”
“순둥이도 뭔가 적을래!”
쾅!
마치 도장이라도 된다는 듯 헤츨링 상태로 자신의 앞발을 종이에 내리 찍는다.
신기하게도 순둥이의 발자국이 종이에 큼지막하게 남았다.
이거는 ‘적는다’고 말할 수는 없었지만, 순둥이의 마음은 대충 전해질 것이다.
그것을 전자레인지에 넣었다.
위치는 미국에 있는 정해연.
띵!
소리와 함께 전자레인지에 들어 있던 종이가 사라졌다.
이대로 기다린다면, 정해연은 분명히 자신의 일을 극복해 내고 이곳으로 돌아오겠지만…….
‘그동안 일만 하느라 조금 피곤하기도 하니까.’
“순둥아, 여행 가고 싶지 않아?”
“응! 맛있는 거 잔뜩 먹고 싶어! 빨강이도 데리러 가자!”
자고로 어렸을 때부터 가족끼리 자주 여행을 가주는 편이 좋다.
* * *
“…….”
미국에 위치한 프론티어의 길드 하우스.
그곳의 길드장인 자신의 큰오빠를 만나러 간 정해연은 현재 하우스의 어느 방에 갇히게 되었다.
정해연 본인의 능력이라면 이런 곳쯤은 단숨에 불태워버릴 수 있지만, 제 몸에 있는 마나가 말을 듣지 않았다.
“마력 억제 장치…….”
언제 이런 걸 발명한 것일까. 그 동안은 생각치도 못한 기술이다.
아마도 그 이서진이라고 할지라도 그렇겠지.
제 품에 있는 물약병들이 달그락거린다.
마나를 증폭할지라도 그것을 사용하지 못하면 쓸모가 없다.
언제나 이랬다.
똑똑한 척, 온갖 도도한 척은 다 하면서 막상 중요한 부분에선 엇나가곤 했다.
―정해연. 정말로 그 때 맺은 계약 하나 때문에 네게 그런 제약이 생겨난 줄 아는 건 아니겠지?
에이든과 맺었던 계약.
당연히 그것 때문인 줄 알았다.
그래서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미국에 있는 큰 오빠에게로 찾아왔다.
에이든과는 달리, 그녀가 미국에 살던 당시에 유일하게 ‘가족’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정도로 자신에게 잘 대해주던 인물이었으니까.
한편으로는 기대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가족이니까.
피는 이어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특별한 인연이니까.
아니었다.
―네가 이곳에 처음 왔을 때가 생각나네. 그 때는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얼굴로 내 말을 따르곤 했지.
새로운 가족과 살게 되었다며, 기뻐하던 어린 시절의 순수한 정해연에게 새겨진 어떠한 말.
―가족의 구성원들을 위해 평생을 헌신할 것.
당연하다. 가족이라면 마땅히 그래야 하니까.
한 치의 의심조차 없었다.
다만, 그것이 정해연에게만 해당될 뿐이다.
이것은 이곳에 온 어린 시절부터 걸려 있던 특별한 계약인 것이다.
고작 에이든과 나누었던 말 때문이 아니었다.
정해연은 이곳의 구성원이 됐을 때부터 강력한 속박에 걸린 것이다.
“……정말 한심하네.”
그들은 자신을 단 한 순간도 가족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
피는 이어지지 않았지만, 자신의 가족이라고 부를 수 있는 자들이 떠올랐다.
황혼의 멤버들.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똑바로 쳐다볼 수 없을 지도 모르는 위대한 연금술사.
그와 나란히 서기 위해서 해왔던 것들이 물거품이 되려 하고 있었다.
“……차라리.”
어떠한 다짐을 하려하는 정해연의 앞으로 무언가가 일렁였다.
이 방은 마나 자체가 차단된 공간이다.
이곳에 무언가가 개입될 리가 없다.
“아니, 하지만…….”
그렇다면 저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설마…….”
만약 이 현상이 그녀가 생각하는 것이라면…….
허공에서 나타난 것은 신체를 강력하게 하는 물약이 아닌, 한 통의 편지였다.
정해연은 그것을 열었다.
“이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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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진(이하 ‘갑’이라 칭한다)과 황혼 길드 길드장 정해연(이하 ‘을’이라 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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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그에게 건넸던 계약서와 비슷했다.
당장에라도 그를 붙잡고 싶어서 내밀었던 불공정 계약.
이 한 장의 종이에는 그 당시에 자신이 적은 것이 아닌, 이서진이 직접 쓴 터무니없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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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을은 갑이 만남을 요청할 때마다 언제든지 응해야 하며…….
2) 을은 갑이 원할 때마다 따뜻한 차 한 잔과 케이크를 제공해야 하며…….
…….
…….
…….
10) 을은 자기 혼자 짊어지려 하지 말고 도움이 필요할 경우 언제든지 갑에게 말할 자격이 있다.
11) 그러니까, 잠시만 기다리고 있어요. 해연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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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계약이 어디 있어요. 서진 씨.”
종이의 마지막에 어떤 생명체의 아담하고 귀여운 발자국이 보인다.
화르륵!
정해연의 손에서 화염이 넘실거렸다.
마력의 억제가 풀린 것이다.
평범한 종이로 보이지만, 이것은 마력 억제 장치조차 무력화 할 힘이 있었다.
어떤 것을 제압하기보다, 억제된 것을 해방시키는 것이 더욱 어려운 법이다.
역시 위대한 연금술사라고 부를 수 있는 인물이다.
그렇다면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다.
“반드시 옆에 나란히 설 수 있도록 노력할게요.”
정해연의 화려한 불꽃이 실내를 가득 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