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tion is flowing from the water purifier in my house RAW novel - Chapter 141
우리집 정수기에서 물약이 흐른다 142화
40. 너의 이름은(2)
세상이 일변했다.
그러한 격변 속에서 가장 큰 변화를 맞은 것은 지구의 최상위 포식자‘였던’ 인류.
대부분의 인류가 각성자가 되었다.
모든 사람들이 바라 마지않던 현실이 이루어졌지만, 막상 그것이 찾아오자 그들은 기뻐할 수 없었다.
“위험이 너무 많아…….”
세상은 두 번째 대격변 이전보다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위험했고, 더욱 위태로웠다.
하루에도 셀 수 없이 많은 던전이 등장했으며, 새로운 유형의 마물들 또한 대거 나타났다.
―걱정하지 말거라. 너희들을 굽어 살필 신이 있으니.
그런 인간들을 위해서 신들은 힘을 내려주었다.
그럴수록 그들은 점점 더 신에 의존하게 되었다.
발버둥 칠수록 더욱 깊게 빠져드는 거미줄처럼, 인간들은 그렇게 신이라는 존재를 숭배하며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이거 큰일이군.”
물론 대부분의 인류와는 다른 고민을 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대한민국.
그곳에 존재하는 길드들이 그러했다.
“누가 보면 배부른 소리라고 욕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 결국엔 가면 갈수록 불리한 건 우리가 되겠지.”
아니, 대형 길드뿐만이 아니라 한국에 존재하는 모든 헌터와 각성자들은 크나큰 고민을 가지게 되었다.
결국, 각성자와 헌터라는 존재는 마물을 토벌할 때 의미를 갖는다.
“이렇게 될 줄은 상상하지 못했어.”
모든 던전이 폭주하는 던전 브레이크.
위험 요소가 되는 던전들을 하나같이 철폐시키는 것까지는 좋았으나, 그 이후가 문제였다.
애초에 그들이 그러한 행동을 한 것에는 앞으로도 던전이 나타날 것이라는 전제가 있었다.
“단 하나의 던전도 나타나지 않다니…….”
그렇다.
세상이 던전과 마물로 인해 고통받고 있을 때.
단 한 곳, 대한민국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평화를 누리고 있었다.
“지금이야 사람들은 좋다고 하겠지만.”
“그것도 잠시뿐이겠죠.”
결국, 포식자는 사냥할 수 있는 피식자가 있어야 되는 법이다.
평화로운 세상 속에서 호랑이의 이빨은 점점 무뎌질 수밖에 없다.
그것은 훗날 우리들에게 있어서 큰 독으로 다가오겠지.
“이런 상황 속에서 가장 난처한 건 신성 길드장, 자네가 되겠군.”
“……아무래도 대한민국 물약의 과반수를 책임지고 있는 길드니까요.”
마물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것은 곧 물약을 생산할 수 있는 마석의 보급이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물론 정수기에서 물약이 나온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 그들에게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어줄 뿐이었다.
‘결국은 이 사태의 해결 방안을 마련하긴 해야겠지.’
언제까지고 해양에서 밀려오는 마물들로만 의존할 수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평화로운 세상 속에서 사람들은 마물이라는 위험을 원하고 있었다.
애초에 길드라는 것 자체도 마물이 있어야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니까.
대형 길드의 길드장인 나도 꽤나 곤란한 입장이다.
“이 건에 관해서는 다음에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지.”
“예. 급하게 처리해야 할 다른 문제들도 많으니까요.”
새로 탄생한 헌터들의 자격에 대한 문제도 있었고.
마물들로 인해 파괴 된 건물에 대한 보수 작업도 한창이었다.
“아, 서진 씨는 잠시 저랑 함께해 주실 수 있으실까요? 단 둘이 긴히 상담할 문제가 있거든요.”
아마 정해연의 도플갱어와 관련된 것일 거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려 하는데, 옆에서 조용히 있던 루비가 말했다.
“성자님. 오늘은 따로 해야 할 일이 있으시지 않으십니까.”
“……아, 그랬나?”
“예. 정해연 님께는 죄송하지만, 다음으로 미루도록 하시지요.”
언제나 내 비서를 자처하는 루비였기에 가끔 이렇게 스케줄을 말해주곤 했다.
……그런데 뭐가 있었지?
내가 곰곰이 할 일을 생각하고 있는데 뜨거운 시선이 느껴졌다.
‘응?’
정해연이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내가 아니라, 바로 옆에 붙어 있는 루비에게로 시선이 가 있다.
언제나 내 뒤에 한 발자국 떨어져 서 있던 그녀였지만, 요즘 들어 이렇게 옆에 앉곤 했다.
“루비 씨?”
“예. 해연 님. 말씀 하시지요.”
“혹시, 그 날 일을 기억하시나요?”
“그 날이라면 서울에서의 일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예.”
갑자기 뭘 물어보나 했더니 정말 뜬금없었다.
고작해야 며칠 전 일이 아닌가.
루비 또한 별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잊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 날은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날이기도 했으니까요. 그렇지 않습니까, 성자님?”
“어어…… 그렇지?”
여러모로 의미가 있는 날이었다.
많은 것이 바뀐 순간이기도 했다.
“그게 아니라, 제가 물어보고 싶은 건 그 안에서 벌어졌던 일을 말하는 거라고요!”
답답하다는 듯 다시 한번 말하는 정해연.
……안에서 일어난 일?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아무래도 내가 기절해 있는 사이에 던전 안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그런 궁금증을 안고 루비를 보는데, 순간 내 몸이 굳었다.
“안에서, 말입니까.”
양 볼과 두 귀가 눈에 띄게 붉어지더니, 손가락으로 느릿느릿하게 입술을 훑는다.
지금 입고 있는 수녀복과 다소 어울리지 않는 제스처.
그 몸짓이 어쩐지 평소와는 달라보였기에 나도 모르게 침이 넘어갔다.
고개를 갸웃거린 루비가 답했다.
“글쎄요. 루비는 잘 모르겠습니다.”
“에? 아, 아니. 그러면 성기사 분들이 그런 행동을 할 리가……!”
“정해연 님.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만.”
루비는 조심스럽게 입술에서 손을 떼더니 내 쪽으로 슬며시 밀착했다.
그 상태로 정해연의 두 눈을 똑똑히 쳐다보더니 차분한 목소리로 말한다.
“그곳에서 루비와 성자님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
“혹,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것인지요?”
“아, 아니. 그건…….”
정해연이 크게 당황한 듯 말을 더듬는다.
……뭐지?
루비가 무언가 이상했다.
평소보다 말이 많은 것은 물론이고, 어쩐지 분위기도 달랐다.
툭-
이윽고 내 어깨에 루비의 머리가 닿는다.
나와 완전히 밀착하게 된 그녀가 속삭였다.
“어쩐지 머리가 조금 어지러운 것 같습니다. 성자님. 잠시 이대로 있어도 되겠습니까?”
“응? 괜찮아?”
“예. 조금만 있으면 괜찮아질 것입니다. 성자님이 걱정하실 정도는 아닙니다.”
뭐라고 해야 할까.
평소에는 순한 강아지가, 제 입에 물린 장난감을 뺏으려는 상대가 나타나자 으르렁대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제대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꽤 복잡한 감정이었다.
“아무래도 저는 조금 있다가 가야 할 것 같네요. 해연 씨 먼저 일어나세요.”
“……예. 알겠…… 에에?”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나던 정해연이 방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괴성을 내질렀다.
“다, 당신! 방금 저한테 무, 무슨……!”
루비를 보며 경악하는 정해연.
나 또한 그녀의 손짓에 따라 시선을 돌렸지만, 루비는 눈을 감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군요. 당신도. 당신도 그렇게 한다 이거죠…….”
정해연이 무언가 분한 듯 두 주먹을 쥐고 그대로 나갔다.
고요함이 감도는 방안에 나와 루비만이 남았다.
아니, 사실 하나 더 있긴 하다.
사람들이 없어지자 투명화를 풀고 나타난 순둥이.
“하�K. 솜뭉치 대담해애!”
“순둥아, 테이블 위에 올라가면 안 된다고 말했잖아.”
“그렇지만 여기가 딱 좋은걸!”
“응?”
순둥이가 헤실헤실 웃으면서 다가오더니 내게 얼굴을 들이민다.
쪽.
볼에 닿는 그 귀여운 감촉에 웃음이 나온다.
“순둥이도 아빠랑 뽀뽀할 거다! 츄~”
피식.
언젠가 사춘기가 다가오면 징그럽다면서 이런 것도 안 해주겠지.
기왕이면 어렸을 때 자주 애정표현을 해주는 게 좋겠지.
나도 순둥이의 토실토실한 볼에 뽀뽀해 주자 두 손으로 제 눈을 가린다.
“헤헤. 부끄러워어! 응! 솜뭉치는 대단하네에!”
솜뭉치.
순둥이가 부르는 루비의 애칭이다.
그런데 왜 아까부터 솜뭉치 이야기가 나온대?
“앗! 쉿! 아빠, 이건 비밀이래! 그러니까 말하면 안 되는 거야! 그치?”
이번에는 놓치지 않았다.
옆에 있는 루비가 순둥이를 따라서 손가락으로 입을 막는 시늉을 한다.
물론 내가 시선을 돌리자, 재빠르게 내리고는 다시 눈을 감는다.
‘뭐 하는 건진 모르겠지만.’
최근에 맘고생을 많이 했던 둘이다.
이렇게 밝은 모습을 보자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계속 웃을 수 있도록 힘을 내야겠지.
―분명히 나를 필요로 하는 순간이 찾아올 거야. 왜냐면, 당신도 이제 우리와 같아졌으니.
미국에서 만났던 또 다른 이계의 초월자.
이런 상황까지 예견한 걸까.
잘 모르겠지만, 그 여인의 말대로 나는 그를 필요로 하게 된 것은 사실이었다.
휴대전화에 까망이의 위치 정보가 나타나지 않는다.
前탐욕의 마왕, 그리드.
그와 같은 초월자인 아스모데우스라면 그가 어떻게 된 것인지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바이바이. 아저씨.
큰 각오를 다지고 떠나갔던 까망이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나는 그를 놔줄 생각이 없었다.
“뭐, 요즘 같은 때엔 입주민 찾기도 힘드니까.”
밀린 월세를 내지 않고 도망친 세입자를 찾으러 갈 시간이다.
* * *
기본적으로 이계로 향하기 전에는 철저한 준비를 해야 한다.
특히 이전과는 많은 것이 달라졌다.
‘탐욕의 마왕.’
아직도 실감이 가지 않지만, 몸속에서 느껴지는 이 거대한 힘은 내가 그 호칭의 주인이라는 것을 확실히 말해주었다.
‘이계는 그런 존재들이 있는 땅이니까.’
평범한 인간의 몸이었을 때, 그곳으로 갔던 것과는 조금 상황이 다를 것이다.
당장에 그때 보았던 아스모데우스도 그렇고, 저 반대편에는 나 말고도 다른 마왕들이 있겠지.
만약에 그런 존재를 이계에서 맞닥뜨리게 된다면 어떨까.
지나다니는 개미를 신경쓰는 사람은 없지만, 그 개미가 인간과 같은 크기가 됐다면 경계 할 이유는 충분하다.
나는 아직 이 힘을 활용하는 방법을 잘 알지 못한다.
그곳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에 대응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하고 갈 생각이다.
휘잉!
“역시 여긴 좋네.”
현재 내가 있는 곳은 아무도 없는 허허벌판이다.
물론 진짜로 그런 곳에 온 건 아니고, 내 꿈속이다.
이전에도 느꼈던 거지만, 이곳은 훈련을 위한 장소로는 최고였다.
공간뿐만 아니라, 시간마저도 내 뜻대로 조종할 수 있었으니까.
“이번엔 따로 사용하지 말고 조합해보자.”
까망이에게서 받은 힘을 기존에 가지고 있던 마나와 결합해 볼 생각이다.
내 왼손에서 푸른색의 마나가 떠올랐고, 오른손에선 검은색의 마기가 떠올랐다.
그것을 서서히 한곳으로 뭉치고 있을 때.
“……?”
내가 있는 장소가 서서히 변하기 시작한다.
드넓은 들판은 사라지고, 세상이 보라빛과 핑크빛으로 물들기 시작한다.
이곳저곳에 꽃이 피었으며, 허공에는 안개가 가득 낀다.
익숙한 라벤더 향이 내 코끝에 감돌았다.
그제야 이 소동을 누가 벌인 것인지 알 수 있었다.
“꺄악. 낭군님 오랜만이야~?”
이전에 현실에서 보았던 때처럼 과감한 복장이다.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여인의 등 뒤로 돋아난 두 짝의 날개.
여인의 보랏빛 머리와 어울러져 상당히 요염한 분위기를 뽐낸다.
“아스모데우스.”
“뭐야~ 이름 기억해 준 거야? 평범한 인간이 그랬다면, 당장에 죽였을 테지만. 우리 낭군님이 그러니까 엄청 기쁜데?”
내가 저곳에서 만나고자 했던 마왕 중 한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내가 말했지?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될 거라고.”
“그랬지. 그런데 내가 만나러가게 될 거라고 하지 않았나?”
“응응! 기억하고 있었구나! 그게 말이지. 원래는 성안에 갇힌 공주님처럼 조신하게 기다리고 있으려 했는데 말이야. 생각이 조금 바뀌었어.”
그녀의 손짓에 꽃으로 된 의자 하나가 나타났다.
그곳에 앉아 다리를 꼰 아스모데우스가 나를 보며 눈웃음을 짓는다.
“설마 그리드 그 멍청한 녀석이 그런 행동을 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거든. 소꿉놀이에 빠져들어 탐욕의 근원마저도 모조리 넘겨줄 줄이야.”
탐욕의 근원.
까망이가 직접 내게 넘긴 그 힘이다.
“거기다가 우리 낭군님. 꽤나 스펙이 화려하더라고? 각 마왕들이 호시탐탐 노리던 그림자들의 주인까지 되다니.”
“그래서, 할 이야기가 뭔데?”
“하핫. 성질 급하긴. 내가 그때 말했지? 다시 만나면 훨~씬 기분 좋은 걸 하자고.”
내 몸은 어느새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양 팔과 다리가 포박된 채로 움직이지 않는다. 몸의 윤곽이 전부 드러나는 네글리제를 입은 아스모데우스가 서서히 내 쪽으로 다가왔다.
“별건 아니야. 그냥 우리 낭군님이 허튼 생각을 하면 안 되니까. 음~ 안주인 되는 입장으로서 아주 약간 족쇄를 채우려는 거지.”
“…….”
“족쇄라고 해서 너무 무서워하지는 마? 그냥 나를 좀 더 사랑하고, 애정하게 되는 것뿐이니까.”
아스모데우스의 기다란 손가락이 내 목을 훑는다.
내 귀에 입술을 가져다 댄 여인이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색욕의 마왕, 아스모데우스. 몽환 세계의 지배자이자, 서큐버스들의 여왕. 저항할 생각은 하지 마. 이곳은 내 영역이니까. 가만히 있으면, 그동안 겪어본 적 없는 천국을 선사해 줄게.”
“……그래?”
“응. 그야 내 낭군님이니까. 특별히 봉사하는 거야?♡”
가만히 듣고 있자니, 내가 저쪽으로 넘어가서 자기한테 무슨 해코지를 할지도 모르니까, 사전에 이곳으로 와 개수작을 부리겠다 이건데…….
“몽환 세계의 지배자라고 했나?”
“응. 그러니까 벗어나려고 해도 소용없어.”
자신의 홈그라운드에서 상대방을 확실하게 짓누른다.
완벽한 전략이었다.
물론 그것이 내가 아니었다면 말이다.
파직!
“……응?”
내 손발을 포박하고 있던 쇠사슬이 풀어진다.
동시에 거대한 침대는 사라지고, 아름다운 꽃들은 점차 시들어간다.
그 동안 겪어본 적 없을 이상 현상에 당황한 아스모데우스가 뒤로 물러났다.
“으, 응? 갑자기 이게 무슨……?”
호박이 넝쿨째 들어왔다는 표현이 이런 것일 거다.
상대가 몽환 세계의 지배자라면 나는 꿈속 세계의 주인이었으니까.
거기다 지금은 타인이 아닌, 내 꿈속.
저쪽이 아니라, 이쪽의 홈그라운드다.
이곳에서 날 이길 수 있는 존재는 없다.
“아하하…… 낭군님~? 아무래도 다음에 다시 와야 할 것 같네~? 앗!”
연기처럼 스르르 사라지려 하던 아스모데우스의 몸이 허공에서 나타난 쇠사슬에 의해 포박된다.
“어디 가려고? 좀 더 기분 좋은 걸 하자며?”
“그, 그게 낭군님? 눈빛이 좀 무서운데에…….”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짓는 여인에게 웃으며 말했다.
“잊지 못할 밤을 만들어줄게. 아스모데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