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tion is flowing from the water purifier in my house RAW novel - Chapter 153
우리집 정수기에서 물약이 흐른다 154화
42. 수많은 가능성(3)
‘G20 정상회의였나.’
예전에는 세계 주요 20개국의 대통령들이 모여 정상회의를 가졌다고 한다.
던전이 나타난 이후부터는 점차 그 모임은 뜸해지기 시작했고, 2차 대격변에 이르러서는 존재 자체가 유명무실해진 국제기구.
갑자기 이런 얘기를 왜 하는가 하면은…….
‘지금 상황이 얼추 비슷한 것 같단 말이야.’
내 방에 둘러앉아 있는 자들의 면모를 살폈다.
겨우 대통령이라는 직위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강대한 존재들.
“후훗. 낭군님의 방은 올 때마다 기분이 좋아진단 말이야. 정말이지. 이왕이면 나도 여기에서 같이 지내면 좋을 텐데.”
아스모데우스의 말에 맞은편에 있는 검은 머리의 소년이 반응했다.
“건방진 소리 하지 마. 지금 네가 이 집에서 머무를 수 있는 이유는 아저씨의 배려 덕분이니까, 아스모데우스.”
“어머. 그리드? 나 신경 써 주는 거야? 고마워라. 항상 틱틱대기만 했으면서. 조금 감동일지도. 아, 맞다. 미안해? 이제는 까망이라고 했었지?”
이계의 초월자.
마계라고도 불리는 균열 너머에서 군림하는 자.
색욕의 마왕, 아스모데우스.
탐욕의 마왕, 그리드.
물론 이제 탐욕의 근원은 내게 있었지만, 오랜 기간 동안 탐욕으로서 살아온 까망이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네 입으로 그 이름을 부르지 마.”
“후훗. 부르면 어쩔 건데?”
아스모데우스는 더 이상 까망이가 힘이 없단 것을 알았기에 속을 박박 긁어댔다.
그런 행동에 까망이는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그저 어린아이답게 제 누나에게 고자질을 했을 뿐이다.
[순둥이 누나. 저 못된 박쥐 혼내주세요.]
“찍찍이! 까망이 괴롭히지 말라고 했잖아! 순둥이 동생이란 말이야!”
“어, 어머. 누, 누가 괴롭혔다고 그래?”
방금까지 여유가 넘치던 아스모데우스가 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 순둥이에게 날아갔다.
“손!”
“저, 저기. 보, 보는 눈이 많은데 나중에 하면 안 될까아?”
“손!”
“……여기 손.”
마치 애완동물이라도 되듯이 순둥이의 손바닥 위에 손을 얹는 아스모데우스.
그런 그녀의 머리를 순둥이가 해맑게 웃으며 쓰다듬었다.
“잘했어요! 착한 찍찍이한테는 순둥 스티커 하나를 지급할게요!”
“저기 그 찍찍이란 것 보다는 다른 애칭으로 안 될까……? 아무리 그래도 조금 별로 같은데…….”
“박쥐처럼 날아다니니까 찍찍이야!”
“……박쥐는 쥐가 아닌데.”
분명히 전에 베르니아 앞에서는 어린아이의 호감을 사는 것은 식은 죽 먹기니 뭐니 했던 것 같다만…….
“정말 이상해! 어째선지 저 순둥이라는 꼬마의 말을 거역할 수가 없어. 분명히 종속의 맹세를 한 것은 낭군님인데…….”
이것에 관해서는 나도 잘 모르겠다.
“거기다 특히 저 꼬마한테서는 낭군님의 에너지가 농후하게 느껴진단 말이야.”
매일같이 안고 잔 것과 연관이 있을 수 있다.
‘아니면, 시스템상으로 순둥이와 나를 동일시하는 걸 수도 있고.’
근본적으로 따지자면 마왕의 권능 또한 고유 능력이나 다름없다.
언뜻 보면 본인의 힘만으로 능력을 사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은연중에 그것을 보조하는 것이 존재한다.
상태창.
각성을 할 경우 눈앞에 나타나는 신비로운 현상.
내 만물의 주인도 그렇고, 능력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그 시스템의 보조를 받을 수밖에 없다.
“자아. 까망이! 자꾸 앞머리가 흘러내리니까. 특별히 순둥이 누나가 머리핀을 빌려줄게!”
순둥이가 제 머리에 있는 달걀 모양 머리핀을 까망이에게 달아주려 했지만, 좀처럼 떼어지지 않았다.
“힝. 달걀이가 안 떨어져! 대신에 꼬물이 2호를 달아줄게!”
―끄앙?!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흑발의 여인이 입을 열었다.
“꼴이 상당히 우습구나.”
이곳엔 마왕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세상을 파멸시킨다고 알려진 존재.
멸망용, 베르니아.
멸망용, 이서율.
마왕과 마찬가지로 두 명의 고대룡이 자리하고 있었다.
베르니아가 아스모데우스를 보며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어째선지 한쪽 입꼬리가 올라간 것처럼도 보였다.
“분명히 이 집에서의 서열이 어쩌구 했었지. 아무리 보아도 네놈의 서열은 애완동물 그 이상도 미만도 아닌 것 같다만.”
“어머, 파충류는 발정기에 돌입하면 할 말 못 할 말을 구분하지 못하는 걸까? 누가 발정 난 짐승 아니랄까 봐.”
“아까도 말했지만, 그것은 단순히 반려자의 육신에 드래곤 하트를 안착시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한 행동일 뿐이다.”
“후훗. 그래? 그렇게 자신 있으면 아까 그 장면, 다시 한번 봐볼까?”
탁!
아스모데우스가 손가락을 튕기자, 그녀의 옆으로 외눈의 박쥐가 나타났다.
“아까 그 장면 전~부 다 녹화된 상태거든. 자, 그러면 영화 시작할게요~?”
베르니아의 눈동자가 황금빛으로 물든다.
동시에 외눈의 박쥐가 펑 하고 터져 버렸다.
“아무래도 네년과의 길고 긴 악연의 끝을 봐야 할 때가 온 것 같구나.”
“웃겨. 그렇게 말하면 누가 물러설 줄 알고?”
아스모데우스의 보랏빛 눈동자와 베르니아의 황금빛 눈동자가 서로를 노려보았다.
“으아…….”
그리고 앞선 초월자들과 비교하자면 다소 초라해 보이기도 하는 두 명의 ‘인간’도 있었다.
“……저기 있지. 서진아, 정말로 저대로 둬도 괜찮은 거야?”
옆자리에 있는 이유지가 내 귀에 속삭였다.
“미쳤냐. 무조건 말려야지.”
“그렇지? 내 상식이 잘못된 건 아니지?”
“성자님의 말이 맞습니다.”
……얜 왜 여기에 있데.
또 하나의 인간은 양반 다리를 하며 생긴 빈 공간에 앉아 있었다.
마치 쿠션이라도 되듯이 루비가 내 몸에 등을 기댔다.
“아까 베르니아 님께서 그러시지 않았습니까. 현재 성자님이 불안정한 상태니 최대한 밀착하라고 말입니다.”
그거야 같은 드래곤 하트를 가진 자끼리 공명한다는 의미에서 그런 거고.
루비가 가지고 있는 것은 드래곤 하트가 아니라 그냥 하트다.
‘뭐, 그래도 마음이 차분해지는 것 같기도 하네.’
“박쥐 같은 네놈과 어울리는 동굴 속에 평생 묶어두도록 하겠다.”
“기대해. 네 가죽이란 가죽은 다 벗겨서 인간들한테 헐값에 팔아주도록 할게.”
진짜 유치해 죽겠네.
정해연이랑 이유지도 그렇고.
그토록 위엄 가득했던 사람들이 왜 나랑 엮이면 저렇게 되는 건지 모르겠다.
“일단 둘 다 그만하시고. 애들 앞에서 부끄럽지도 않습니까?”
물론 그 애들엔 나도 포함된다.
저들이 살아온 세월에 비교하자면 나라는 인간은 신생아나 다름없었다.
“용에게 살아온 세월 같은 건 중요하지 않은 법이다. 거기다가 이 몸은 오랜 기간 잠이 들어 있기도 했으니.”
“꿈속에서의 시간은 느리게 흐린다고들 하잖아? 낭군님을 만나기 전까지의 세월은 전부 다 꿈으로 칠 거니까 실제 나이는 얼마 되지 않아.”
아, 예.
“그보다 이제 슬슬 말씀해 주시죠.”
“무엇을 말이냐.”
내 입으로 말하기에는 조금 낯간지러운데…….
“이제 저는 용인 겁니까?”
드래곤 하트는 용만의 전유물이다.
그것이 내 몸에 만들어졌다는 건 내 종족 자체가 바뀌었단 뜻은 아닐까.
하지만 조금 걸리는 것이 있었다.
단순히 드래곤 하트가 생겼다고 종족이 바뀌었단 게 아니라, 종족 변화의 ‘가능성’ 이 생겨난 것이다.
“애초에 인간의 몸에 드래곤 하트가 만들어진다는 것부터가 불가능한 일이다. 이 몸이 그동안 살아온 세월 전부를 합치더라도 일어난 적 없는 일이야.”
베르니아의 황금빛 눈동자가 날 응시했다.
이전에는 낯설게 보이던 것이 이제는 더없이 익숙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반려자, 넌 가능했다. 그렇다는 건 종족을 바꾸는 것도 불가능한 건 아니라는 것이겠지. 정말로 터무니없는 몸이로구나.”
너무 갑작스러웠다.
아마도 인간들 중에서 이런 헛웃음 나올 고민을 하는 사람은 나뿐이겠지.
“고민할 게 뭐가 있느냐. 인간이라는 하찮은 종족으로부터 탈피해 용이라는 최상위 종족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고민하는 내게 베르니아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언령.
그 울림에 힘이 담겨 있었다.
“그 누구도 바라마지 않을 기적이나 다름없단다. 순둥이와 같은 종족이 되는 것이야.”
“잠깐.”
살랑.
보랏빛 꽃잎이 내 눈앞에 흩날렸다.
기분 좋은 라벤더 향과 함께 아스모데우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만히 보고 있으려니까, 이게 용언까지 사용하면서 우리 낭군님을 빼내려고 하네.”
아스모데우스의 손바닥에 색욕의 권능이 깃든다.
갑자기 공격을 한다거나 하는 건 아니었다.
두근!
내 안에 있는 탐욕이 아스모데우스에게 반응했다.
그녀와 마찬가지로 내 손바닥에도 탐욕의 권능이 깃들었다.
“그까짓 공명. 나는 못 할 줄 알고? 애초에 우리 낭군은 마왕의 자질을 타고 난 인간이야. 레어에 처박혀 있는 용보다는 마계의 왕으로서 군림하는 게 훨씬 멋지잖아?”
시스템은 딱히 내게 용족으로의 변화 가능성만을 말한 것은 아니다.
각 마왕을 대표하는 칠죄종의 권능.
“예. 지금의 아저씨라면 분명히 진정한 마왕의 좌에 앉을 수 있을 거예요. 저와는 다르게 좀 더 따뜻한 왕이 되어주실 수 있겠죠.”
까망이 또한 내심 내가 그 자리를 이어받길 바라는 모양이다.
“제가 그때 말씀드렸죠? 저 하늘에 있는 자들과 맞서기 위해서는 깊은 지하의 심연이 되라고.”
그랬다.
지금 당장 이걸 고민하고 있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물론 성좌들을 골탕 먹이는 것 정도는 지금도 할 수 있었지만, 언제까지 그들이 가만히 있을 거란 보장이 없었다.
하늘에서 신을 자칭하는 자들.
그들에게 유의미한 타격을 주기 위해서는 평범한 인간이어서는 안 된다.
“그래, 잘 말했어. 역시 우리 까망이라니까.”
“……아스모데우스. 지금은 시답잖은 소리를 할 때가 아니니 넘어가겠습니다.”
“후훗. 고마워?”
나는 옆을 돌아보았다.
이유지가 날 보더니 뻘쭘한 듯 제 뺨을 긁었다.
“뭐, 나는 예전부터 인간이라 부르기엔 조금 무리가 있었지.”
생체 실험을 통해 웨어울프의 종족 특성을 받아들인 인간.
한때 자신을 괴물이라고 생각하며 사람과의 인연을 피하던 그녀다.
“예전에는 지독하게도 싫었는데, 요즘은 또 그렇지도 않은 거 같아. 이 모습을 좋아해 주는 사람이 생겼으니까.”
배시시 웃으며 꼬리를 살랑살랑 흔든다.
보통의 인간과는 다르지만, 이유지에게 빠뜨릴 수 없는 매력이기도 했다.
“흐음~ 그럼 삼 대 일이네? 어찌 보면 쟤도 마물이나 다름없잖아?”
“아니, 나는 기권. 인간이기도 하고 마물이기도 한 몸이니까. 우리 서진 옵빠야한테 맡길게?”
루비를 보았다.
이곳에서 가장 동떨어진 존재라고도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신의 종자.
현재의 적이나 다름없는 존재의 축복을 받은 인간.
사실상 이곳에 평범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여전히 내게 몸을 기댄 채로 루비가 덤덤하게 말했다.
“성자님이 제 곁에 있어주신다면, 겉모습이 어떻든, 종족이 어떻든 그런 것은 아무런 상관없습니다.”
“뭐야, 또 기권이야?”
의외로 순둥이가 말이 없었다.
평소대로였다면 분명히 ‘우와아! 이제 아빠도 용이야!’ 하면서 기뻐했을 것 같은데.
“으응. 아빠는 순둥이 아빠니까! 거기다 나는 솜뭉치도 냥냥이도 전부 좋아하는걸!”
처음 태어났을 땐 인간에 대해 이해하지 못했던 순둥이.
어느새 종족에 대한 고정관념 따위는 신경 쓰지 않을 정도로 의젓하게 자랐다.
“역시 우리 서율이는 반짝반짝거리네.”
“엣헴! 당연하지! 순둥이 방금 씻었어!”
그 어떤 미래가 올지라도 함께할 것이라고 했었다.
그것은 순둥이에게 있어서도 다를 것 없던 모양이다.
“어머. 그럼 이 대 일로 마왕 당첨이네? 빠밤~ 낭군님 축하드려요~?”
“축하는 무슨. 처음부터 투표로 정한다고 말하지도 않았거든.”
그리고 처음부터 투표는 필요 없었다.
“굳이 한 가지를 선택할 필요가 있겠어?”
멸망용.
마왕.
인간.
마왕의 권능을 소유하고, 드래곤 하트를 품에 지닌 인간.
그 모든 가능성을 굳이 포기할 필요가 없었다.
“전부 다 가지고 갈 거야.”
내 말에 이곳에 있는 전원이 웃었다.
“그야말로 탐욕스러운 생각이시네요. 예. 아저씨라면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요.”
“원래라면 불가능하겠지만, 그 특이한 몸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구나.”
“단순히 마왕으로는 만족하지 못한다는 거지? 꺄악. 역시 이래야 내 낭군님이지!”
신들은 인간으로서는 닿을 수 없는 위치에 있다.
그런 자들에게 유효한 데미지를 주기 위해서는 그들과 같은 하늘에 서거나, 신마저도 집어삼킬 수 있을 정도로 깊은 심연이 되라고 했었다.
―끄앙?!
“우와! 이상하고 동그란 거다!”
“성자님, 이것은…….”
꼬물이의 입에서 튀어나온 수정이 내 앞으로 날아왔다.
조심히 손에 쥐자 내게는 아직 낯선 힘이 느껴진다.
그것은 이내 드래곤 하트, 탐욕의 권능과 어우러져 공명하기 시작했다.
신성 길드에 처음 방문했을 당시에 루비가 보여줬던 작은 수정 하나.
[‘□□□ □□‘을 □수하□습니다!]그곳에서 흘러나온 빛이 내 몸으로 흡수되며 이해할 수 없는 문장이 나타났었다.
그때는 대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었지만 이제는 알 수 있었다.
보이지 않던 단어들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런 놈들도 신이라고 자칭하는데, 나라고 못 할 것은 없었다.
“신 같지도 않은 신들은 자리에서 끌어내려 주는 게 맞겠지.”
단순히 맞서 싸우는 정도로 끝낼 생각은 없다.
신들과 같은 하늘에서 깊은 지하의 심연이 그들을 집어삼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