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tion is flowing from the water purifier in my house RAW novel - Chapter 173
우리집 정수기에서 물약이 흐른다 174화
46. 어느 옛날이야기(7)
붙잡은 흔적을 따라서 더 깊은 과거로 향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저 회귀자라는 녀석도 과거에 그렇게 많은 개입을 할 순 없는 듯 했다.
“하긴 그랬다면 그냥 과거에 있는 모두를 죽이면 됐을 테니까.”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만한 신력이 없는 거겠지.”
기껏해야 과거의 굴레 중 아주 작은 부분을 뒤틀어놓는 것이 끝일 것이다.
원래대로라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위협적이겠지만, 신들도 내가 과거로 향할 수 있단 사실은 알지 못했겠지.
“거기다가 나는 놈들보다 훨씬 행동이 자유롭고.”
나는 신력을 이용해서 과거로 온 것이 아니다.
나만이 사용할 수 있는 특수한 능력을 이용해서 온 것이지.
휙휙-
시간의 파도를 재빠르게 헤엄쳐가던 도중 잠시 한곳에 멈춰 섰다.
고민을 하던 나는 어느 시간대에 잠시 내려오게 되었다.
“알고 있어.”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평소에 보았던 밝은 표정은 아니었다.
철창에 갇힌 채 웅크리고 앉아 있는 있는 상처 입은 짐승.
‘이게 이태영이랑 같이 있었던 실험실인 건가.’
마음 같아서는 이곳을 전부 날려버리고 탈출이라도 시키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이곳은 내가 알고 있는 이유지가 태어난 장소.
정해연과는 경우가 다르다.
이 순간을 건들게 된다면 그녀라는 존재 자체가 뒤바뀌게 된다.
-서진아. 만약에 과거에서 날 만나게 된다면 말이야.
“쯧.”
이미 한 차례 과거로 오기 전, 이유지와 약속했다.
절대로 이 과거를 건드리지 말라고.
“그런데 내가 언제부터 네 말을 들었냐.”
-날 만나게 된다면.
보이지 않으면 그만 아닌가.
나는 투명화 된 상태로 철창을 통과해 안쪽으로 들어갔다.
쫑긋!
제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이유지가 사방을 휙휙 둘러본다.
‘……이때도 감이 좋긴 했네.’
괜찮았다.
어차피 보이지만 않으면 누가 뭔 짓을 했는지 모를 테니까.
온몸에 가득 자리 잡은 짙은 상처들.
나는 품에서 물약 하나를 꺼냈다.
조르륵.
“……!”
상처 입은 몸에 천천히 부어지는 어떠한 액체.
차가운 감촉이 기분 나쁜지 곧바로 자리를 벗어나려고 한다.
나는 이유지의 머리 위에 잠시 손을 올렸다.
뚝 끊어질 듯 푸석푸석한 감각. 상관하지 않고 천천히 쓰다듬었다.
“…….”
자리를 벗어나려던 이유지가 그대로 멈췄다.
‘그렇지. 착하네.’
“몸이…….”
그녀의 몸이 실시간으로 치유되고 있었다.
미친 과학자에게 들키면 여러모로 골치 아플 테지만,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쿵!
지면이 흔들린다.
실험실이 붕괴되고 있는 것이다.
미친 과학자의 욕심이 만들어낸, 기회의 순간이었다.
촤악!
물론 그런 건 이유지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철창을 부순 그녀는 밖으로 나가기 전,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언뜻 보면 그녀가 그동안 갇혀 있던 곳을 보는 것 같았지만…….
‘큰일 날 뻔했네…….’
정확히 내가 있는 쪽을 보고 있었다. 물론 시치미를 떼면 그만이었다.
아주 잠시, 오랫동안 열리지 않던 입술이 달싹거린다.
“고마…….”
쿠웅!
물론 큰 소리가 들리자마자 그녀는 겁먹은 고양이처럼 곧바로 튀어나갔다.
‘이거로 된 건가.’
저 뒤로 그녀가 보내게 될 시간들은 분명히 고통스럽겠지.
이미 스쳐 지나간 그 세월들에 내가 하나하나 관여할 수는 없겠지만.
“다시 만나면 꼬리라도 만져줄 테니 열심히 해라. 유지야.”
* * *
‘축축해.’
무언가 알 수 없는 액체가 몸을 적셨다.
벽에 맺힌 물이었던 걸까. 평소보다 몸이 훨씬 가벼웠다.
‘기회야.’
실험실이 평소와 다르다.
매일 같이 틈을 노리고 있던 그녀는 이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촤악!
촤악!
탈출을 위한 시간을 벌기 위해 보이는 모든 철창들을 부쉈다.
-크어어어!
동시에 안쪽에 있는 마물들이 튀어나온다.
그녀는 신경 쓰지 않고 출구를 향해 달렸다.
“…….”
발이 멈춘다.
어느 철창 안에 웅크리고 있는 꼬마가 보였다.
문을 부쉈음에도, 안쪽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원래대로라면 신경 쓰지 않을 생각이었다.
제 한 몸 챙기기도 벅찬 순간이다.
밖은 분명 위험할 것이다.
저런 짐을 들고 갔다가는 둘 다 죽을지도 모른다.
“저기 말이야.”
하지만 어째선지 입이 열렸다.
그녀에게 뿌려졌던 이상한 물이 메마른 입술마저 적신 탓일까.
그게 아니면, 정신이 오락가락한 나머지 느껴졌던 그 따뜻한 손길 때문일까.
‘상관없어.’
그저 하고 싶은 일을 할 뿐이었으니까.
이유지는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같이 갈래?”
소년이 고개를 들었다.
짐승처럼 돋아난 두 귀와 꼬리.
무섭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누구보다도 인간답다는 생각을 할 뿐이었다.
“응.”
소년, 이태영이 내밀어진 손을 붙잡았다.
* * *
‘……그냥 갈걸.’
나는 지금 마주한 상황에 한숨을 쉬었다.
“왜 말을 안 하시는 건가요? 혹시 제 말을 모르시는 걸까요? 그렇다면 역시…….”
지상으로 내려오는 순간을 어느 꼬마에게 들키고 말았다.
분명히 아무도 없는 골목에 착륙한 것인데, 구석에 숨어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당신은 천사님인 거군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흑발이지만, 초롱초롱하게 빛나는 두 눈은 푸른색으로 특이했다.
“아냐.”
“분명히 제가 똑똑히 봤는걸요! 날개도 봤어요! 천사님은 천사님이 맞아요!”
처음에는 못 알아봤다.
내가 알고 있는 그녀는 백발이었으니까.
하지만 저 특이한 성격과 앳되면서도 어렴풋이 보이는 익숙한 외모는 내게 확신을 주었다.
“……루비.”
“맞아요! 천사님은 뭔가 루비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것 같아요!”
이루비.
언제나 내 옆에 있어 주던 작은 수녀가 눈앞에 있었다.
‘하필이면 본인한테 들키냐.’
이대로 모른 척하는 건 조금 힘들 것 같았다.
“저기 말이야. 난 천사 같은 게 아니라…….”
“아니에요?”
금방이라도 울어버릴 것 같이 되묻는다.
나는 재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천사 맞아. 그러니까 남한테 말하면 안 된다.”
“진짜요?!”
두 눈을 빛내며 내게 다가오던 그녀가 돌연 한숨을 푹 쉬었다.
“거짓말.”
푸른 눈동자가 탐색이라도 하듯 나를 응시한다.
“이 세상에 천사는 없는 걸요. 저희 아빠가 천사는 하늘에 있는 존재라고 했어요! 엄마가 그렇대요!”
“하하…….”
“아저씨는 완전히 거짓말쟁이네요!”
적응을 못 하겠다.
어릴 적의 루비는 사람을 마구 휘어잡는 장난꾸러기였다.
“저한테 거짓말하셨으니까, 같이 놀아주셔야 해요. 혼자 있어서 엄청 심심했단 말이에요.”
“어린 애가 처음 보는 어른 함부로 따라오는 거 아니야.”
“처음 보는 어른 아닌데.”
그렇게 말하며 루비는 두 손을 한데 모았다.
기도라도 하듯 눈을 감고는 장난기 가득한 웃음과 함께 외친다.
“천사님이잖아요!”
“……그래. 그래.”
어쩔 수 없이 놀아주기로 했다.
호기심이 많은 어린이.
내가 별 볼 일 없는 사람이란 걸 보여준다면 재미없다며 다른 곳으로 가버릴 것이다.
“자, 그럼 뭐 하고 놀까. 우리 놀이터에 가서 그네라도 타고 놀까? 어때, 재밌겠지?”
“놀이공원 가고 싶어요!”
“…….”
참으로 적극적인 아이다.
많은 부분이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변하지 않는 것도 있는 모양이다.
“천사님도 버스 같은 걸 타네요! 아까 보았던 날개는 사용 안 하시나요?”
“쉿. 쉿.”
“앗. 비밀이었네요. 죄송해요.”
평범하게 버스를 타고, 평범하게 티켓을 끊으며 놀이공원에 도착했다.
“딸이 되게 귀엽네요.”
“감사합니다!”
당연히 남들 눈에는 우리 둘의 관계가 아빠와 딸로 보일 것이다.
오늘 처음 만난 꼬맹이랑 놀이공원에 왔다고 하면 믿어주기라도 할까…….
“어때요? 엄청 잘 어울리죠!”
곧바로 놀이기구라도 탈 줄 알았던 그녀가 찾아간 곳은 기념품 가게였다.
머리띠를 착용하고는 제자리에서 돌며 내게 자랑한다.
누가 보아도 사달라는 제스처였다.
“자, 아저씨도요!”
꼬마 루비가 내게 씌어준 것은 악마의 뿔이 달린 머리띠였다.
“천사님이 이런 걸 쓰고 있으면 이상할 것 같았는데, 은근히 어울리네요!”
역시 어린 애들은 감이 좋은 걸까.
나는 피식 웃고는 머리띠를 사주었다.
“놀이기구는 안 타?”
“오늘은 사전답사예요. 다음에 엄마 아빠랑 왔을 때 같이 탈 거예요. 이건 그걸 위한 연습.”
루비의 부모님에 관해선 아는 게 없었다.
그녀 자신도 어린 시절을 기억하고 있지 않아서였다.
지금 나는 루비도 모르는 과거를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아빠가 그랬어요. 엄마는 천사라고. 제가 착하게 굴고 있으면 언젠가 꼭 찾아온다고 했어요. 앗! 그러고 보니 아저씨도 천사셨죠! 저희 엄마 아세요?”
“당연하지. 엄청 착하신 분이야. 항상 신세 지고 있지.”
“당연하죠! 저희 엄마인 걸요!”
입을 가리며 배시시 웃는다.
이런 귀여운 꼬마의 어머니라면 정말로 천사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지금 이런 곳에 와 있는 걸 알면 아빠가 걱정하시진 않을까?”
“괜찮아요. 아빠는 매일 늦게 들어오시거든요.”
왜 이런 어린 애 혼자 그런 곳에 숨어 있나 했더니, 심심해서 숨바꼭질이라도 하고 있던 모양이다.
“놀이가 아니거든요? 천사님들의 흔적을 찾고 있던 거예요. 봐요. 결국, 이렇게 찾아냈잖아요!”
“그래. 그래.”
“진짠데.”
순진한 웃음을 보이며 앞으로 걸어나가던 루비의 몸이 돌연 앞으로 쏠렸다.
나는 곧바로 쓰러지는 그녀의 몸을 잡아주었다.
“……하하. 죄송해요. 저 몸이 조금 안 좋거든요.”
뻘쭘한 표정을 짓는 루비에게 나는 말없이 등을 돌렸다.
“자.”
“업혀도 돼요? 저 무거울지도 모르는데.”
무겁기는 무슨.
본인이 미래에서 들고 다니는 철퇴의 무게를 알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천사님 등은 따뜻하네요. 뭔가 푹신푹신한 게 덮고 있는 것 같아요. 이거 날개 맞죠!”
“예리하네. 어떻게 알았어?”
그녀는 농담이 통했다는 듯 웃고 있었지만, 정말로 투명화된 날개가 그녀를 덮어주고 있었다.
“저기 있죠.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요.”
“물어봐. 천사님이 다 말해줄 테니까.”
“하하. 자기가 자기보고 천사래.”
내 등에 업혀 있는 루비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진짜로 신님이 있어요?”
이걸 어떻게 답해줘야 할까.
나로서는 상당히 곤란한 질문이었다.
수녀, 루비에르트.
그녀는 신을 모시는 종자였으니까.
“글쎄.”
“에이. 천사님도 모르는 거예요?”
루비를 괴롭혔던 그놈들을 신이라고 부르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건 왜?”
“정말로 신님이 있으면 기도라도 해보려고요. 엄마도 빨리 만났으면 좋겠고, 이 허약한 몸도 고쳐달라고 할 거예요.”
진심이 우러나오는 말이었다.
무거운 중압감을 가진 종자가 아닌, 순진한 어린애다운 생각이기도 했다.
그런 루비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기에, 나는 조금 다른 걸 말해주기로 했다.
“신은 잘 모르겠고, 비슷한 건 아는데.”
“정말요? 뭔데요?”
“성자라고 있어.”
“성자요?”
나는 등 뒤에 업혀 있는 루비에게 동화를 들려주었다.
성자와 수녀의 이야기.
아주 조금, 동화와는 다르게 현실적인 부분도 있는 내용이었다.
“수녀가 그렇게 간절하게 찾는 걸 보면, 성자라는 분은 정말로 좋은 사람일 것 같아요. 저도…… 만나보고…… 싶어…… 요.”
꾸벅꾸벅.
졸린 듯 중얼거리던 루비는 잠이 들었다.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온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분명히 제집 근처에서 놀고 있었을 것이다.
한두 번 이러는 것도 아닌 것 같으니, 아빠가 찾으러 오겠지.
“이, 이상하다. 분명 여기서 놀고 있을 텐데.”
아니나 다를까, 놀이터에서 누군가를 찾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나는 내 등에 업혀 자고 있는 루비를 흔들어 깨웠다.
“자자. 얼른 일어나서 집에 가야지.”
“으응……?”
“아빠가 너 찾으러 왔어.”
“진짜요?”
루비가 저 멀리 있는 아빠를 보고는 소리치며 달려갔다.
“아빠!”
“우리 딸! 잘 놀고 있었어?”
“응! 천사님이 나랑 놀아줬어!”
“하하. 엄마가?”
“아니, 진짜 천사님이야! 저기 봐!”
루비가 내가 있는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 이상하다? 분명히 저기 있었는데!”
“그래, 그래. 우리 딸. 재미있게 놀았어? 이제 집으로 돌아갈까?”
곧바로 투명화를 했기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천사님. 바이바이! 다음에 또 봐!”
나는 피식 웃으며 마주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나저나 저럴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직접 마주하게 되니, 조금 신기하긴 했다.
거구의 사내가 불편하게 허리를 숙여 가며, 딸의 손을 잡고 이야기를 들어주고 있다.
“행복해 보이시네.”
얼굴 전체를 뒤덮은 화상 자국은 아직 없었다.
성기사단장이 아닌, 아버지의 얼굴을 한 신백준을 보다가 나는 걸음을 옮겼다.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었다.
* * *
“잠들었네.”
신백준은 새근새근 자고 있는 제 딸을 내려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우리 딸. 아빠가 미안해. 같이 놀아줬어야 했는데.”
그 미소에는 깊은 죄책감과 미안함이 담겨 있었다.
“음냠…… 천사님…….”
부웅. 부웅.
진동이 울린다.
아주 잠시, 딸의 잠자는 얼굴을 지켜보던 신백준은 조용히 밖으로 나왔다.
“예. 전화 받았습니다.”
일과 관련된 전화였다.
이번에 새로 발견된 던전에 짐꾼으로 갈 생각이 없냐는 말이 들려왔다.
“…….”
민간인이 던전에 들어가는 것은 불법이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당연히 위험하기 때문이다.
“예.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는 그런 걸 신경 쓰진 않았다.
“이제 얼마 안 남았어.”
아내를 일찍 떠나보내고, 그에게 남은 유일한 보물.
제 딸의 허약한 몸을 치료하기 위해 돈을 모았다.
이제 곧 있으면, 딸은 건강해지고, 자신 또한 그 옆에 있어 줄 수 있게 될 것이다.
“전부 잘될 거야.”
신백준은 두 손으로 기도했다.
신이 아니라, 집 안에 있는 제 딸에게 하는 것이었다.
“들어가자.”
제 딸의 곁으로 돌아가려던 순간이었다.
화르륵!
난데없이 눈앞에 있는 건물이 불에 타기 시작했다.
폭발이 일어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아, 안 돼!”
신백준은 곧바로 저 안에 잠들어 있을 딸을 구하기 위해 불 속으로 뛰어들었다.
“크윽!”
평범한 불이 아니었다.
마치 존재 자체를 갉아먹듯, 흰색의 불꽃이 그의 몸을 불태우고 있었다.
얼굴이 점차 타오른다.
그럼에도 물러설 수 없었다.
저 안에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물이 있었다.
“제발…….”
그런 마음과는 다르게, 발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 신백준의 옆으로 누군가가 다가왔다.
연기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지만, 말은 들을 수 있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신백준 씨.”
어딘가 안심이 되는 그 목소리에 신백준은 곧바로 정신을 잃었다.
“이때였구나.”
신백준을 안전한 곳에 내려둔 이서진이 불타는 집을 보았다.
언젠가 꿈속에서 보았던 그 순간이다.
저 안에 루비가 있다.
“개자식들.”
신력이 담긴 불꽃.
누가 이런 짓을 했는지는 뻔했다.
제 몸을 파고들려는 불을 무시하며, 이서진은 안쪽으로 들어갔다.
“누가, 누가 도와주세요…….”
화염이 가득한 방 안에서 한 소녀가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으고 있었다.
당장에라도 이곳에서 꺼내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신이시여…….”
[나는 네가 그토록 찾던 신이다.]
[지금부터 너는, 신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다. 루비에르트.]
소녀의 머릿속에서 어떠한 메시지가 들려오고 있었다.
자신을 신이라고 자칭하는 어떤 자의 말이었다.
그 한 마디 한 마디가 들릴 때마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아아…….”
소녀의 머리색이 서서히 바뀌어간다.
신에 의해 자아가 잠식당하고 있는 것이다.
이서진의 눈이 가라앉았다.
‘오랜 시간 있으면 위험해.’
지금 신에게 정체를 들키게 된다면, 미래가 바뀔 것이다.
성좌들 또한 시스템을 이용해 지상을 내려다본다.
시스템은 저 하늘에서 이곳을 보고 있을 신에게서 아주 잠시 시야를 뺏었다.
“고마워.”
그 정도면 충분했다.
이서진은 천천히 소녀를 향해 다가갔다.
“……천사님?”
많은 것을 할 수는 없었다. 어떠한 말을 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 대신, 그녀에게 어떤 선택지를 줄 수는 있었다.
“아…….”
이서진은 한 손에 들린 자물쇠를 소녀의 머리 위에 올렸다.
더 이상 신의 목소리가 침입할 수 없게 머릿속에 자물쇠를 건다.
어릴 적의 추억은 떠오르지 못하겠지만, 이걸로 신에게 잠식당하진 않을 것이다.
“남은 건 네 선택이야, 루비야.”
마지막으로 신이 내린 선물이라도 되듯, 이곳에 한 가지를 남기기로 했다.
특별한 건 아니었다. 지니고 있으면 마음이 편해지는 물건.
부웅.
두 손에 가득 찬 신력을 이용해 작은 수정을 만들어냈다.
이 수정에는 ‘지친 심신을 치유하는 방석’의 효과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이게 대체 뭔가 했더니.”
익숙한 형태의 수정을 소녀의 앞에 두자, 이서진의 몸이 스르르 사라졌다.
* * *
“헉!”
정신이 든 신백준이 곧바로 몸을 일으켰다. 얼굴이 욱신거렸지만, 재빠르게 집 안으로 뛰어들어 갔다.
이미 불은 꺼진 지 오래였다.
그렇다면…….
“제발, 제발!”
신백준은 간절히 애원했다.
제 딸이 있는 곳까지 그 불길이 퍼지지 않았기를.
“아…….”
하지만 집안은 잿더미밖에 남지 않았다.
제 딸을 지키지 못했다는 슬픔에 무릎 꿇으려는 신백준의 시야에 누군가가 보였다.
“딸……?”
흰색 머리의 소녀.
어딘가 성스럽게 느껴지는 그 장면에 신백준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혹시 저를 아시는 겁니까?”
머리색은 다르지만, 분명히 제 딸이었다.
하지만 말투와 행동이 이상했다.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무언가 낯익은 느낌이 듭니다.”
수녀, 루비에르트는 제 앞에 있는 사람을 보았다.
어째선지 자신을 보며 눈물을 흘리고 있는 중년의 사내.
‘누구일까요.’
신을 위해 행동하라.
머릿속으로 들려왔던 목소리.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본인의 과거도, 그 이름조차도.
혼란스럽다.
그때,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수정?’
잿더미가 된 곳에서 작게 빛나는 수정.
그것을 들어 올린 루비에르트는 마음이 안정되는 것을 느꼈다.
아주 조금이지만, 무언가 떠오를 것만 같았다.
“저는 찾아야만 합니다.”
머릿속에 남아 있는 신의 뜻을 전해 줄 사람.
어째선지 그 존재를 이렇게 불러야 할 것 같았다.
“어딘가에 있을 성자님을 찾아야 합니다.”
그것만이 현재 그녀를 지탱해 줄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
신백준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무슨 행동을 해야 할지는 알 수 있었다.
“제가,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당신은 누구인지요.”
“저는…….”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그저 곁에서 지켜줄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기억을 잃어버린 제 딸에게 신백준은 한쪽 무릎을 꿇었다.
“저는 당신의 성기사입니다. 수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