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tion is flowing from the water purifier in my house RAW novel - Chapter 20
우리집 정수기에서 물약이 흐른다 021화
8. 한 가지 다짐(1)
“전원 대기!”
“대기!”
쾅!
노년의 남성이 대검을 땅에 내려놓는 소리와 함께 집단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저 멀리 거대한 몽둥이를 들고 있는, 우락부락한 육체의 마물이 서 있었다.
3층 던전의 보스, ‘외눈 거인’
단순 육체 계열의 보스인 만큼 공략이 어렵지는 않을 테지만, 그것은 집단으로 공격을 할 때의 이야기다.
“……길드장님 정말로 혼자서 괜찮으시겠습니까?”
“내 몸은 걱정하지 말고, 자네 몸이나 챙기게. 얼마 전에 갑자기 몸이 이상하다느니, 그런 소리를 하지 않았나?”
“제가 그랬습니까? 기억이 잘…….”
“쯧쯧. 나보다 젊은 놈이 치매라도 왔나 보군. 이참에 휴가라도 가는 게 어떤가? 한 달 푹 쉬다가 돌아와.”
“연세도 많으신 분이 이렇게 위험천만하게 다니시는데 제가 어떻게 쉽니까?”
“뭐? 크하하핫!”
그 말에 남성이 크게 웃었다.
다른 누군가가 자신에게 저따위 말을 지껄였다면, 당장에라도 내리쳤을지도 모른다.
“윽?”
“……읏!”
고작 웃음소리에 불과했지만, 정렬해 있던 대열에 뒤틀림이 일어났다.
재빨리 자세를 바로 잡은 수호 길드의 신입 전투원 한 명이 선망의 눈빛을 보냈다.
“저게 철혈의 노장…….”
안환재는 자신의 옆에 있는 사내를 보았다.
오랜 시간 자신을 보좌하며, 온갖 시련을 헤쳐온 측근.
신태웅.
그가 믿는 몇 안 되는 인물들 중 하나였다.
‘제 아비 뒤질 날만 기다리는 자식 놈들이랑은 다르지.’
안환재에게 있어서 낯선 사람보다도 믿어선 안 되는 게 자신의 혈연이었다.
‘쯧. 자식 농사를 잘못한 내 탓이겠지.’
본인이 생각해도 자신은 가정에 충실한 남편은 아니었다.
아내를 일찍 여의고, 길드와 던전에만 미쳐 살았으니까.
‘하지만 그 꼴을 용인할 생각은 없다.’
원래라면 자신이 길드장에서 내려오는 즉시, 신태웅에게 자리를 넘길 생각이었다.
“저로서는 어울리지 않는 자리입니다. 거기다 이제는 적합한 후계자가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 정말 다행이야. 그딴 쓰레기들한테서 그런 애들이 태어나다니, 놀랄 노릇이지.”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둘이다.
분명히 천국에 있는 임자가 힘을 써 준 것이리라.
할아버지같이 강인한 사람이 되겠다며 소리치던 손자, 손녀를 생각하면 진심으로 미소가 지어지곤 했다.
“도련님이 얼마 전에 각성자 등록을 끝마치셨다 했죠?”
“이제 곧 길드의 말단으로 들어온다더군. 마음 같아서는 곧장 부길드장 자리에라도 앉히고 싶은데 말이야.”
“원하지 않으리란 거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하하, 그렇지.”
자신이 자랑할 만한 정직한 사내다.
대한민국에서 5년 만에 나온 각성 등급 S.
모두가 주목하는 ‘슈퍼 루키’가 그의 손자였다.
귀염둥이 손녀딸은 A+를 받았다며 심통이 가득 나 있었지만.
‘이번에 던전 공략이 끝나면 선물이라도 하나 사줘야겠어.’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는 안환재를 향해 신태웅이 말했다.
“그러고 보니 조만간 황혼 길드에서 주최하는 모임이 있습니다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예정대로 거절 의사를 밝힐까요?”
“흠.”
황혼 길드장 정해연.
고작 스물여섯이라는 나이에 대형 길드의 수장 자리에 앉은 굳센 여성.
자신이 손주의 짝으로 점찍어 놓은 인물이기도 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쉽군.’
기껏 4층 던전의 자리를 미끼로 소개팅을 성사시키나 했더니, 어느 순간 물거품이 됐다.
자신의 예상대로라면 충분히 매력적인 제안이었을 텐데.
무언가 다른 요소가 끼어들었다.
안환재는 한 인물을 떠올렸다.
자신에게 잠시나마 ‘확신’을 가지지 못하게 한 사내.
“그자로군.”
“예?”
“아닐세.”
황혼의 길드장과 인연이 있어 보였다.
“모이라고 만든 자리인데, 안 가면 쓰겠나? 그 날 직접 가겠네.”
“……직접 말이십니까?”
그곳에 간다면 다시 만날지도 모른다.
“그래서 진짜로 혼자 가실 겁니까?”
“그냥 가벼운 운동이라고 생각하게. 금방 끝날 테니.”
점점 늙어가는 몸.
치고 올라오는 차세대 각성자들.
새로 발견된 4층 규모의 던전.
안환재는 아직 자신이 전장에 서도 되는지 묻기 위해 이곳에 왔다.
“적어도, 저 안에 있는 놈한테 뒈지지 않을 거란 건 확신할 수 있겠군.”
노장이 검을 들었다.
* * *
“저희 송별회 하죠!”
“송별회?”
“아. 송별회가 아닌가? 그럼 우리 동업자를 위한 감사 파티!”
“그런 거라면 저도 찬성입니다!”
대뜸 이유지가 그런 말을 했다.
이태영도 옳다구나-하면서 받아들였고.
‘아니, 이 사람들 평소에도 먹기만 하더니, 이번에도 먹자판이야?’
물론 나도 찬성이었다.
“자자. 하루 이틀 만난 사이도 아닌데, 빼지 말고!”
“정확히 말하면 이 주 정도 만났지.”
“징그럽게 그걸 또 세고 있어?”
“선배! 균열 관리부 사람들도 부를까요?”
“그래! 다 불러! 다! 오늘은 내가 쏜다!”
“……어차피 선배가 쏘는 게 아니고, 법카잖아요.”
“어허. 그러면 넌 네 돈으로 사 먹던가.”
“선배 최고! 법카 최고!”
고작해야 삼겹살 정도 먹을까 했었는데, 그날 밤 도착한 곳은 유명한 한우 전문점이었다.
입구에서부터 신이 난 이유지가 주먹을 들어 올렸다.
“역시 고기는 소지!”
“자기 돈 아니라고 이러시기는……물론 고기는 소죠!”
미확인 균열에 대한 실마리를 찾게 된 공을 인정받아 이유지가 속한 균열 관리부 1팀 전원이 두둑한 포상을 받은 모양이다.
“오늘만큼은 마음껏 먹어도 별 탈 없을 거야!”
소 한 마리를 통째로 잡아먹을 생각인가.
이유지의 식성이라면 농담이 아닐 것 같다.
돈이야 나도 많았지만, 역시 공짜로 얻어먹는 고기의 맛은 각별했다.
살짝 구운 업진살을 입에 넣자 곧바로 기분 좋은 소리가 나온다.
“크으. 녹는다, 녹아.”
“하핫. 무슨 아저씨 같아!”
미리 소고기를 몇 점 먹고 있자, 이유지의 팀에 속한 관리부 사람들이 등장했다.
“다들 여기예요!”
이태영이 손을 든 곳에는 마치 씨름이라도 할 것 같이 우락부락한 사내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와, 미친.’
“이쪽은 저희 균열 관리부 1팀 사람들이고. 그리고 이쪽은…….”
나도 키는 어디 가서 꿇리진 않는데, 죄다 나보다 크다.
그런 사람들이 동시에 날 내려다보고 있으니 식은땀이 나오려던 차에, 세상이 거꾸로 변했다.
아니, 거꾸로 변한 건 내가 아니라 저들이었다.
“와우. 단체 그렌절.”
“이서진 님!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저희 균열 관리부를 도와주신 것에 대해 정말 감사드립니다!!””
그 모습을 보며 배꼽을 잡던 이유지가 이태영의 옆구리를 젓가락으로 찔렀다.
“야, 너는 안 하냐?”
“예? 선배 제가 왜…….”
이유지가 작게 입 모양으로 뭐라고 했다.
댁글?
뭐라고 말하는 거야.
“아이씨. 하면 되잖아요, 하면!”
“흐히히핫! 장관이다, 장관!”
이곳은 균열 관리부에서 통으로 대여했기에 우리 말곤 아무도 없었다.
줄어드는 고기를 보고 있자니, 저 멀리서 주인아저씨가 흐뭇하게 우리를 바라본다.
벌써 소 몇 마리는 통째로 해치운 것 같다.
먹는 기세는 멈출 생각이 없고.
나는 익지도 않은 고기를 와구와구 먹고 있는 이유지에게 물었다.
“전부터 궁금한 게 있는데.”
양 볼이 빵빵해진 이유지가 젓가락질을 멈추고 나를 돌아본다.
“웅? 머가 궁금한데?”
“너희 팀 이름이 균열 ‘관리’부 맞지?”
꿀꺽-
“그렇지.”
보통의 관리직이 가질 법한 육체를 생각하고 있자니, 이유지가 피식 웃는다.
“말 그대로지, 뭐. 각 팀마다 일정 구역에서 나오는 균열을 관리해. 그러면 여기서 퀴즈!”
“무슨 갑자기 퀴즈래.”
“발견된 균열에는 누가 갈까요~?”
그야…….
균열을 막는 것에는 각성자가 필요하겠지.
“딩동댕~”
“……전에 관리부 사람들은 대부분 탐색계 각성자라고 하지 않았냐?”
“맞아. 저 사람들 전부 다 탐색계 각성자들이야.”
세상에.
들어선 안 될 것을 들은 것만 같다.
“킥. 우리 1팀만 특히 유별난 거지. 다른 곳은 평범해. 정작 나만 봐도 탐색이랑은 쥐뿔도 상관없잖아?”
“그렇긴 하지. 넌 탐색이랑 안 어울려.”
“어쭈.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이야?”
눈을 좁히길래, 얼른 화제를 돌렸다.
화제를 돌리는 데는 이것만 한 게 없지.
“자, 고기에 소주가 빠질 수 없겠지?”
“역시 너 나랑 통하는 구석이 있다니깐!”
수상식에서 같이 찡그리며 사진이나 찍던 사람과 이렇게 잔을 주고받게 된다라…….
‘나쁘지 않네. 아니, 좋아.’
주변이 시끌벅적하니 좋았다.
혼자 먹는 게 아니라서 더 좋았고.
“쨘! 자, 빨리. 한 잔 더. 쨔안~”
한 잔, 두 잔 들어가고 있자니, 관리부 사람들과 잠시 어울리고 있던 이태영이 기겁을 하며 다가왔다.
“미, 미친! 지금 선배 술 마신 거예요?”
“……? 예. 이유지, 얘. 성인 아니에요?”
“아니, 당연히 성인이긴 한데. 선배 술버릇이 워낙 고약…….”
“야아. 이태여엉!”
“허억!”
어느새 엎어져 있던 이유지가 고개를 들었다.
머리는 산발이고, 입가에 침 자국이 생겨 있다.
얼굴이 새빨개진 그녀가 이태영에게 다가간다.
“너, 임마. 선배한테 자꾸 말대꾸하고 말이야. 어! 내가 너보다 나이도 많고오…… 직급도 높은데에!”
“무슨 소리입니까. 선배. 전 언제나 선배를 인생의 모토로 삼고 있습니다.”
“거짓말하지 마!”
“진짜로…… 악! X바…… 아아악!”
입에 발린 말로 넘어가려던 이태영이 이유지에게 잡혔다.
이태영은 모든 걸 포기하고, 우리와의 술자리에 동참했다.
“으허헝. 제 말 좀 들어보세요. 선배가 언제나 저만 괴롭히고…….”
결국, 만취가 된 이태영이 내게 하소연을 한다.
이럴 땐 그냥 고개만 계속 끄덕여주는 게 최고다.
“크흑. 이런 거 어디 가서 말할 데도 없어서…… 거기다 선배도 나 말고는 친한 사람이 없어서…… 나만 괴롭…….”
지금 보니까 이유지는 이곳에 오고부터 지금까지 쭉 우리하고만 어울리는 중이다.
다른 사람과 말을 하지 않는다. 그런 건 아니지만, 존댓말을 사용하며 확실하게 거리를 둔다.
상대방 또한 그랬다.
계속해서 같은 푸념만 반복하던 이태영이 돌연 내게 물었다.
“저도 형님이라 불러도 됩니까?”
“예?”
“그, 뭐냐! 선배랑은 말 놓았잖아요. 저, 선배가 누구랑 친구 먹고 그러는 거 처음 봤습니다!”
크으-
잔 하나를 더 비운다.
나는 냉큼 술을 뺏어서 옆자리에 놓았다.
자세히 보니 이거 각성자들 취하라고 만든 특제 술이다.
내일 고생 좀 하겠네.
“좋아요. 그러죠, 뭐.”
“진짜죠? 말 편하게 하세요! 저 이래 봬도 스물두 살이니까!”
“……뭐?”
……고생을 좀 많이 하긴 했네.
흰머리가 가닥가닥 나고, 다크서클이 턱까지 내려오는 외견에 당연히 나보다 나이 많을 줄 알았지.
“으어어…… 형님…… 죄송해요…… 사실 그 댓글 저예요……!”
“으으…… 솜사탕이…… 하나……둘…….”
결국, 두 사람 다 뻗었고, 나는 바람이라도 쐬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밤하늘을 보고 있자, 이유지와 만나며 생겼던 퀘스트가 다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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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퀘스트-
「균열 관리부 소속 이유지, 이태영을 도와 미확인 균열에 대해 조사하십시오!」
보상: 개방된 물체에 대한 새로운 사용법. 선택 개방권.
현재 조사 된 균열 :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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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확인 균열에 대한 조사.
세상을 좀 더 평화롭게 만든다느니, 그런 거창한 이유로 시작하게 된 건 아니었다.
……물론 처음에는 이유지의 돌진에 나도 모르게 끄덕거린 건 맞지만.
알의 정화를 위한 부산물들.
마음이 잘 통하는 두 사람에 대한 호감.
선택 개방권.
이것들도 조사를 하게 된 이유 중 하나였지만, 메인은 따로 있었다.
‘개방된 물체에 대한 새로운 사용법이라…….’
벌써 몇 개나 되는 물건들의 능력을 개방해 왔지만.
아직 나는 이 능력에 대해 긴가민가했다.
앞으로도 나올지 모르는 퀘스트를 클리어하며, 단순히 물건을 개방하는 거로도 충분할지 모르지만.
새로운 사용법을 알려준다는데, 먹지 않을 이유가 없지.
퀘스트 자체가 그렇게 어려웠던 것도 아니고.
솔직히 말하면 거저다, 거저.
“후우…….”
아직 퀘스트 완료 문구는 나타나지 않았다.
궁상맞게 저것이 뭘까 생각이나 하고 있자, 이유지가 걸어 나왔다.
“여기 있었네에~?”
이유지는 헤실거리며 내 옆으로 다가왔다.
그녀를 보자니 아직 해야 할 과제가 하나 남아 있었단 게 떠올랐다.
피식-
솔직히 텔레비전에서 이게 나왔을 때는 깜짝 놀랐지.
결국 이것 때문이었구만?
나는 술기운으로 강아지처럼 실실 웃고 있는 그녀에게 말했다.
“너, 내일은 표정 관리 진짜 잘해야 할 거다.”
“으응? 표정 관리이?”
“그래. 웃으라고.”
“……우서어?”
뭔 소린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이유지.
뭐, 나는 말해줬으니까.
* * *
다음 날.
인터넷을 통해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그 미래를 확인했다.
심각한 것은 아니었다.
아, 심각하다면 심각한가.
포털 사이트 메인에 대문짝만하게 사진 하나가 박혀 있다.
“크흐흑. 표정 대단하네.”
사진 속 이유지는 첫날 보았던 표정보다도 훨씬 죽을상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