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tion is flowing from the water purifier in my house RAW novel - Chapter 25
우리집 정수기에서 물약이 흐른다 026화
9. 별들의 연회(4)
정해연의 이해할 수 없는 말.
그것에 집중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자신들의 주변으로 열린 균열들.
아직은 균열에서 마물이 나오지 않았지만, 나오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이다.
강당은 지나치게 고요했다.
비명 소리가 들린다거나, 패닉에 빠진 사람도 없었다.
아니, 없는 것은 아니다.
“대, 대체 무슨 일이야!”
각성자가 아니면서도 초대장을 받은 고위 계층들이 혼란에 빠졌다.
일반인을 제외한 나머지 각성자들은 자리를 지키고 현 상황에 대해 분석하기 시작했다.
‘성과 발표를 진행하던 도중 갑자기 균열이 나타났다. 곧장 출입구로 달려야 할까? 아니, 흩어지는 것은 위험해.’
던전 속에서 언제나 긴장을 풀지 않는 각성자들에게 있어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상황이 나아지는 건 아니었다.
‘……균열의 수가 너무 많아.’
그에 반해 이쪽은 일반인을 낀 것도 모자라, 각성자의 수도 적었다.
이곳은 각 길드를 대표하는 사람들이 모인 발표 자리.
각 조직의 수장급들만이 존재한다.
수행원들은 전원 다른 곳에서 대기 중이었다.
‘사태를 알아챈다면 곧장 달려올 테지만…….’
이곳에서도 그런데 딴 곳이라고 안전할까?
“입구가 막혔어!”
대기업의 오너 한 명이 빠르게 출구로 달려갔으나, 문이 막혀 있었다.
균열이 마물을 뱉으려는 징조가 보인다.
자리를 이탈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판단한 길드 랭킹 12위, 더스트의 길드장 송대호가 소리쳤다.
“다들 자리를 지킵시다!”
그 말대로 전원 구석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일반인들을 가운데에 놓은 반원형 배치.
-그르르.
-그어억!
때마침 균열에서 빠져나온 마물들이 각성자들에게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균열에서는 소수의 마물만 나온다는 상식을 깨부수듯이, 그곳에서는 끊임없이 마물이 튀어나오고 있었다.
이런 사태가 벌어졌으니, 외부에서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조금만 버티면 곧 지원군이 올 것이다.
하지만 끝없이 밀려오는 마물들의 파도에 각성자들은 서서히 지쳐갔다.
이럴 때 수호 길드장이라도 있으면, 그만큼 든든한 게 없을 테지만 그는 이미 어딘가로 사라진 후였다.
“다들 뭐 하고 있는 거야? 이러다 전부 다 죽겠어!”
‘입만 털 줄 알고 아무것도 못 하는군.’
정치인 한 명의 말에 잠시 울컥했으나, 그럴 시간조차 없었다.
송대호는 자신의 허리춤에 달려 있는 물약을 보았다.
체력이 많이 소진되었다.
싸움을 이어가려면 당장에라도 물약을 마시는 게 좋겠지만…….
‘지금 상황에 먹는 건 자살이나 마찬가지야.’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은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순도가 높은 황혼 길드의 물약이다.
순도는 69%
하지만 기본적으로 물약은 전투가 시작되기 전 혹은 끝난 후에 먹어야 한다.
물약을 먹으며 일어나는 신체 회복.
물약이 온몸으로 퍼지며 신체에 녹아든다.
다만, 최대한 정화했음에도 남아 있는 마기로 인해 회복이 진행되는 동안 신체 능력이 일시적으로 저하된다.
그래서 물약을 먹을 때는 믿을 만한 동료와 서로 교대를 하면서 마시는 것이다.
서걱!
송대호의 칼질에 아가리를 벌리고 달려들던 마물 하나의 목이 떨어졌고.
곧바로 그 자리를 다른 마물이 채웠다.
“끝이 보이질 않아.”
촘촘하게 짜인 포지션.
교대로 물약을 마신다든가 하는 속 편한 소리를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런 소리를 하는 사람이 있었다.
“안쪽에 계신 분들은 지금 상자에 있는 포션 꺼내서 열어주세요.”
현재 상황에서 물약을 마시는 건 말이 안 되었다.
다만 그 말을 하는 것이 황혼의 길드장인 것이 문제였다.
“……지금 물약을 마신다면 몰려드는 마물들한테 집어 삼켜질 겁니다.”
정해연 또한 구르고 구른 각성자다.
이 말의 뜻을 모를 리가 없다.
그렇기에 저리 완고하게 포션을 섭취하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이상했다.
“괜찮습니다.”
정해연이 몸소 시범을 보여주겠다는 듯, 마물을 베어내고 잠깐 사이에 물약을 마셨다.
하지만 정해연은 신체 능력이 저하되기는커녕, 이전과 다를 바 없는 몸놀림을 보여주고 있었다.
“무슨…….”
나머지 인원들도 물약을 마시고서야 정해연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바, 반동이 전혀 없잖아?”
“신체 회복 속도가?”
신체 능력이 그대로일 뿐만 아니라, 회복 속도가 기존의 물약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이거라면…….”
지치지 않고 계속해서 싸워나갈 수 있다.
상처가 생겨도 아무런 부작용 없이 회복된다.
싸움 도중에 물약을 섭취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생존율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진다.
마음의 여유가 생기고서야 각성자들은 주변을 둘러볼 수 있었다.
하나같이 고위 각성자들.
각각의 능력도, 움직임도 보통의 각성자와는 궤를 달리한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존재가 있었다.
‘……저게 황혼 길드장이라고?’
‘저런 몸놀림이 가능한 사람이었나?’
정해연의 칼에서 화염이 넘실거리며, 차례차례로 마물을 불태워갔다.
마치 춤을 추는 무희와 같이 가벼운 몸놀림.
일렁이는 불처럼 정해연의 볼에 홍조가 나타나 있었다.
‘이게 서진 씨가 말한 특별한 물약……!’
노란색의 물약을 마시자마자 이것이 무엇인지 알아챌 수 있었다.
이미 옛적에 이것에 대한 정체를 본 적이 있었으니까.
균열 앞에서 마물에게 여유롭던 이서진의 모습.
「신체 강화의 물약」
그중에서도 신체 속도와 관련된 효과.
날아갈 듯 가벼운 이 몸을 보자니 그야말로 ‘신속’의 물약이라고 불러도 되리라.
‘아아……드디어……!’
전투가 한창 벌어지고 있음에도, 정해연은 이 흥분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지금은 아직 하급입니다.’
처음 그분과 만났을 때 들었던 말이었다.
너와의 관계는 아직 이 정도일 뿐이니, 앞으로 관계에 대해서는 지켜보겠다는 말.
아침에도, 밤에도 혹시라도 관계가 끊기는 것 아닐까 하는 걱정을 했었다.
하지만 그분은 자신에 대한 믿음을 가져주셨다.
정해연은 신호를 보내고, 곧바로 사라진 이서진을 생각하자 얼굴에 미소가 담겼다.
그녀는 이 감정을 기억하며 점점 페이스를 끌어올렸다.
흥분.
희열.
-크르르륵!
-크아아아!
상대는 아직 많이 남아 있다. 자신이 할 것은 이 물약의 효과가 어느 정도인지 확인하는 것뿐이다.
“확실하게 테스트하겠습니다.”
정해연의 눈이 붉게 물들었다.
* * *
“아직 발표가 진행 중인데, 이런 곳에 부른 이유가 뭔가?”
“딱히 이유랄 것은 없습니다. 그저 길드장님과 술 한잔하고 싶은 마음이었죠.”
“뭐라?”
“어차피 발표에는 관심이 없지 않으셨습니까.”
“하하. 날 너무 잘 아는군. 그런 소꿉장난에는 관심이 없긴 하지. 소기의 목적은 달성하기도 했고.”
“……목적 말씀이십니까?”
“아닐세.”
안환재는 가죽 의자에 자신의 몸을 앉히며 생각했다.
황혼 길드장과 연을 맺은 이서진이라는 남자.
다시 만난 그는 이전에 보았던 것과는 조금 달랐다.
그때, 자신을 가지고 놀 듯 위협하던 그 불길한 마나는 전혀 느낄 수 없었다.
혹시나 싶어서 마나를 이용해 조금씩 그를 자극했지만, 역으로 침식하기는커녕 그에게서 마나 자체를 느낄 수 없었다.
‘숨기고 있군.’
“한 번이면 족하다는 건가.”
더욱 자세히 파악해 보고 싶었거늘.
안환재가 잠시 눈을 감고 누워 있자, 신태웅이 와인 하나를 잔에 따라 그에게 가져왔다.
“한 잔 어떠십니까.”
“와인이라…… 나는 소주가 더 입맛에 맞다만.”
“이런 곳에 왔으면 한 잔은 해줘야 예의 아니겠습니까.”
“그렇긴 하지.”
자신과 같은 위치의 사람일 경우, 남이 주는 것에 대해 긴장을 풀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이 와인을 건넨 사람은 신태웅이다.
자신의 오른팔과도 같은 사내.
와인 잔을 입에 가져다 대는 순간.
방금 있던 일이 떠올랐다.
-때로는 가까운 사람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도 좋으실 겁니다.
왜 그런 말을 한 걸까.
철혈의 노장이라 불릴 정도로 오랜 시간 전장에서 살아온 그다.
그만큼 위기에 관한 본능만큼은 누구보다 예리하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왜 그러십니까?”
안환재가 신태웅을 보았다.
평소와 다름없는 자신의 우직한 우군.
자신의 길을 같이 걸어주는 친구와도 같은 존재.
당연히 고작 몇 번 만난 정체 모를 사람보다도 신뢰하는 사람이지만.
아주 약간, 안환재의 감각이 꿈틀거렸다.
‘…….’
“건배라도 하시겠습니까?”
“됐네. 그러고 보니 우리가 만난 지 얼마나 되었는지 아나?”
안환재가 와인 잔을 잠시 내려놓았다.
“글쎄요. 벌써 20년쯤 지나지 않았습니까.”
“그랬지. 오랜 시간 동안 자네는 내 곁에서 많은 일들을 해줬어.”
“제가 한 게 뭐가 있겠습니까. 전부 다 길드장님께서 이룩하신 일이지요.”
“되고자 한다면, 한 길드의 수장조차 될 수 있는 자네가 왜 내 곁에 머무는 걸까. 한때는 그런 생각도 했었지.”
안환재가 자신의 우군을 보며 물었다.
그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약간의 떨림이 있는 목소리였다.
“혹시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했던 그 약속, 기억하나?”
“흠…… 너무 오래된 일 아닙니까. 아무래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군요, 하하. 그런 게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그 말에 안환재가 눈을 감았다.
신태웅과 했던 말들이 주마등처럼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길드명은 수호 어떠십니까.
-그 누구도 다치지 않게, 길드장님과 저희들이 모두를 지키는 겁니다.
-이것은 약속입니다. 저희가 죽을 때까지 잊지 않을 목표이자 맹세.
앞으로도 잊지 않을 그 말들을 떠올리며 안환재가 천천히 눈을 떴다.
방금과는 확연히 다른 눈빛이 된 그가 말했다.
“……언제부터 그렇게 된 건가?”
“무슨 말씀이신지?”
“그때였군. 자네가 밤에 갑자기 자신의 몸이 이상하다며 전화를 걸었을 때. 고작 아프다는 이유로 나에게 말을 할 리가 없지. 자네는 지독하게도 강인한 사내니까.”
“자꾸 무슨 말을 하시는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길드장님.”
안환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곳에 자신의 애검은 없다.
벽에 걸려 있는 검 하나를 빼고는 손에 쥐었다.
“다시 한번 묻지. 자네의 목표는 무엇인가.”
“…….”
평정을 유지하던 신태웅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마치 광인의 그것과도 같은 표정이 된 신태웅이 소리쳤다.
“나이도 드셨는데, 이대로 편하게 가셨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
“제 목표 말씀이십니까? 당연히 제가 믿는 신의 말을 섬기고, 몸종으로서 최선을 다하는 것 이외에 무엇이 있겠습니까!!!”
안환재의 양복 안에 이서진이 건네준 유리병이 출렁거렸다.
자양강장제.
그렇게 말하기는 했지만, 분명 이 상황을 위한 무언가를 준 것이겠지.
안환재는 그것을 마시지 않았다.
다만, 검을 두 손으로 꽉 쥐며 자신의 친우를 바라볼 뿐이었다.
“먼저 가 있게나. 머지않아 따라갈 테니. 그곳에서도 우리의 오랜 약속을 위해서 미리 터를 잡아놓게나.”
“아아, 신님!”
“자네가 길드장인 것도 좋겠지. 이번에는 내가 자네 곁에서 열심히 보필해 주도록 하겠네.”
“제게 이 어리석은 자를 구원할 힘을!”
“고마웠네. 친우여.”
까득- 까드득-
신태웅의 몸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는 동시에 안환재가 검을 내질렀다.
* * *
군영철.
균열을 소환하는 기이한 힘을 얻게 된 자.
그는 완성되어가고 있던 퍼즐에 이상이 생겼단 걸 알아챘다.
“……무언가 잘못되고 있어.”
오랜 시간 준비해 온 작업이다.
지금쯤이면 수많은 균열들에서 나온 마물들로 인해 각 길드의 수장들이 목숨을 잃었어야 했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에 들어오는 정보는 마물들의 비명 소리뿐이었다.
군영철은 신속하게 자리를 이탈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이만한 규모를 위해서는 직접 올 수밖에 없었다.
즉, 몸이 노출되었다. 육체는 일반인과 다를 바 없는 그였기에, 되도록 하지 않는 행동이었다.
‘다시 하면 된다. 이곳에서 빠져나가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다시 시작할 수 있어.’
현재 이곳에 있는 사람들의 정신은 전부 갑작스레 나타난 균열로 몰려 있는 상태였다.
자신을 신경 쓸 사람 같은 것은 아무도 없다.
원래대로라면 그랬다.
“이 자식. 여기 있었네.”
“커헉!”
뒤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충격.
군영철이 바닥을 굴렀다.
누군가가 자신의 머리를 잡고 들어 올리고 있었다.
대체 누가? 그런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 찼을 때.
서로의 얼굴이 마주쳤다.
의문의 사내가 미소 지었다.
“내가 그 잘난 얼굴 한번 본다고 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