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tion is flowing from the water purifier in my house RAW novel - Chapter 40
우리집 정수기에서 물약이 흐른다 41화
15. 빛이 있으라(4)
“농담이었습니다.”
겉으로만 보면 고지식함의 극한으로 보이는 사람인데…….
의외로 장난도 칠 줄 안다.
“진짜 신이시라면 이렇게 고생하고 있을 일은 없지 않겠습니까.”
“그건 그렇죠.”
손 몇 번 휘둘러서 위기 같은 것은 금방 해결할 수 있겠지.
최상위 각성자들이 있다는 것 하나만 믿고 방심하다가 화를 당하는 일도 없었을 테고.
“이서진 님이라고 불러도 되겠습니까?”
“편하게 불러주세요. 말은 안 높이셔도 되고.”
“하하. 그럴 수는 없죠. 저희 길드장께서 극존칭을 사용하는 분 아닙니까.”
그것도 그런가.
그렇다면 루비한테 말을 놓으라고…….
……이것도 안 될 거 같네.
“전 어떻게 불러드리면 될까요? 성기사단장님?”
“어감이 그렇게 좋진 않군요. 미천한 종 어떻습니까.”
“…….”
“신백준이라고 불러주시죠. 제 이름입니다.”
신백준.
기억해 뒀다.
사람 놀리는 걸 좋아하는 사람으로.
그는 날 보며 웃다가 이내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서진님께서는 길드장님을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어떻게 생각하냐라…….
저쪽이 날 대하는 태도와는 다르게, 내가 루비를 보고 떠올리는 것은 단 하나뿐이다.
외동으로 살아왔고, 어린 나이에 가족을 여의어서 그런지 그녀는 나에게 없던 귀여운 여동생으로만 보였다.
내 의견을 전하고 나서야 혹시 실수가 아닐까 생각했다.
그들 입장에서는 모시고 있는 길드장이니까.
신백준이 웃었다.
“저 또한 그렇습니다.”
“예?”
“수녀님께서는 아직 어리시지 않습니까. 고작해야 열아홉. 길드장이라는 직위를 맡기에도, 던전에 들어오기에도 미숙한 나이입니다.”
수녀님이라고 부르는구나.
설마 했는데 진짜 스무 살도 안 될 줄은 몰랐네.
던전엔 어떻게 들어온 거야?
“저 같은 아저씨한테는 여동생이라기보다는…… 딸…… 이라고 말하는 게 더 어울리겠군요.”
신백준은 잠시 눈을 감고, 벽에 등을 기대었다.
딸.
그렇게 말했을 때, 그에게서 어떠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내가 부모님을 떠올릴 때와 비슷한 종류의 감정이었다.
“사실 궁금했습니다. 그렇지 않을 거라고 믿지만, 혹시나 수녀님께서 믿는 분이 악인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 있었거든요.”
난 그렇게까지 착한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악인이냐고 물으면 그것 또한 아니었다.
만약 내가 악인이었다면 어쩔 생각이었지…….
“하하. 아니시잖습니까. 그렇다면 굳이 알 필요는 없을 것 같군요.”
그의 옆에 세워져 있는 전투 망치가 유독 커 보였다.
애써 무시하며 그에게 말했다.
“그래서 제 답변은 마음에 드셨습니까?”
거짓말 하나 없이 순수하게 느낀 점을 내뱉었다.
그는 대답 대신이라고 하듯, 일어나더니 내게 한쪽 무릎을 꿇었다.
“무리한 부탁일지도 모르겠지만, 수녀님의 좋은 오빠가 되어주셨으면 합니다.”
“예.”
……저건 신성 길드 특유의 인사 같은 건가.
그가 고개를 들었다.
‘성기사’라기보다는 이웃집 아저씨가 떠오르는 능청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제야 이 행동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이 양반. 일부러 이러는 거였네…….’
정정하자.
사람 놀리는 걸 아주 많이 좋아하는 이웃집 아저씨로.
* * *
교대로 쪽잠을 자서 그런지, 살짝 머리가 찌뿌둥했다.
물약을 한 모금 마시니 그나마 살 것 같다.
저 아저씨는 잔다는 말만 하고, 안 잔 것 같은데 왜 저렇게 쌩쌩하지…….
해가 뜨자마자 계속해서 이동한 덕분인지, 정해연과의 거리를 점점 좁힐 수 있었다.
이제는 거의 다 따라잡았다.
그런 생각이 들었을 때, 신백준과 내 밑으로 포탈이 나타났다.
2층의 조건이 클리어되어서 다음 층으로 이동한다는 의미였다.
“신백준 씨!”
그것을 보자마자 나는 그의 몸을 와락 안았다. 다시 한번 무작위 워프를 한다면 진짜 망한다……!
마치 이것이 생명줄이라도 되는 듯, 아주 꽉 쥐어 잡았다.
손을 놓지 않은 상태로 잠시 시간이 흐르고, 눈을 뜨자 주변에서 수십 개의 기척이 느껴졌다.
마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미래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것은 위기 같은 것이 아니었으니까.
“……여긴?”
“조건 클리어한 게 누군진 몰라도 감사합니다아!”
제각기 환호의 소리를 내지르는 마흔 명의 각성자들.
우리는 다시 한곳에 뭉치게 되었다.
그들은 곧장 식량을 찾기 시작했다.
“무, 물부터 줘!”
“배고파 죽는 줄 알았네!”
나는 곁눈질로 신백준을 보았다.
그는 다시 투구를 착용한 상태라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다들 알아서 잘 먹고 있을 거라면서요?
신백준이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중에서도 압권은 소성환이다.
온몸에 진흙이 묻은 채로 옷을 벗고 있었다.
“야이씨…… 하필이면 이럴 때 워프 되고 난리냐…….”
그는 다급하게 바위 뒤로 숨더니 진흙을 대충 닦아내고 옷을 입었다.
어디 진흙탕에서 마물이랑 질펀하게 놀기라도 했나 보네.
“성자님! 성자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각성자들 사이로 조그마한 생명체가 ‘뿅’ 하고 튀어나왔다.
식은땀까지 흘리고 있는 모습이 꽤나 애처로워 보인다.
“어…… 안녕?”
저 모습을 보고 있자니, 딱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서 손을 들어주었다.
푹- 하고 무언가가 내 가슴팍에 안겨 들어왔다.
“성자님……성자님……죄송합니다. 전부……전부 다 루비가 부주의한 탓에 벌어진 일입니다…….”
얘 왜 이런다냐.
이거 진짜 당황스럽네…….
신백준에게 도움을 청하는 눈빛을 보냈으나, 그는 두 손을 들어 어떤 행동을 취할 뿐이었다.
……머리라도 쓰다듬으라고요?
손을 머리 위에 올리자, 미칠 듯이 떨던 루비의 몸이 점차 진정되기 시작했다.
이야, 인간 방석 이서진이 여기서 사용될 줄은 정말 몰랐는데.
어느새 다가온 정해연이 내 앞에 섰다.
나는 그녀에게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무사하셔서 다행이에요. 서진 씨.”
“예. 해연 씨도요.”
사실 저쪽은 걱정 안 했다. 워낙에 강한 사람들이어야지.
근데 그런 것치고는 정해연 얼굴이 꽤나 피곤해 보이는데.
“여러 가지 일이 있었습니다. 예…… 아주 많은 일이 있었죠…….”
아무래도 마물한테 많이 시달렸나 보다.
2층의 조건이 클리어된 것도 정해연 쪽이 마물을 많이 잡아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안환재는 이쪽을 한번 보더니 길드원들을 수습하기 위해 앞으로 나섰다.
꽤나 복잡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모두들 주목해 주시길 바랍니다.”
이 공략조의 대표라고 부를 수 있는 안환재가 각성자들에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앞으로의 공략을 위한 행동 방침을 듣고 있자니 안겨 있던 루비가 꼬물거렸다.
“이제 괜찮아?”
“……죄송합니다, 성자님. 부끄러운 꼴을 보이고 말았습니다.”
얼굴이 살짝 붉어져 있는 게 정말로 창피한 모양이다.
이런 표정은 처음이네.
……정해연의 표정은 또 왜 저래?
“……정말로. 서진 씨가 이곳에 있어서 다행입니다.”
도움은 하나도 안 되고 있다만,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네.
이후로 공략이 재개되었다.
안환재의 방침대로 각자 5인 1조로 움직이게 되었다.
“조금은 떨어지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
“안 됩니다, 성자님. 언제, 어느 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아예 내 옆에 찰싹 붙어 있는 루비에게 그렇게 말해봤지만 소용없었다.
“비석입니다!”
비석.
그 소리에 모두 얼굴을 찡그렸다.
곧바로 탐색계 각성자가 앞으로 나가, 클리어 조건을 확인했다.
이번엔 절대 안 당하지.
1층과 같은 조건이었다.
그렇다는 건…….
진짜 던전이 어디서 오고, 누가 만든 건지는 모르겠는데.
내 앞에 있다면 한 대 쥐어박기라도 하고 싶다.
“기, 길드장님! 열쇠의 색깔이 여러 개입니다!”
“비석 뒤에 무언가 적혀 있습니다.”
“……시계 방향? 열쇠를 순서대로 꽂으라는 건가?”
아무래도 3층을 돌아다니면서 이 비석에 대한 힌트를 얻어야 하는 방식인가 보다.
문제는 2층에서도 느꼈지만, 이곳 내부가 더럽게 넓다는 것이다.
“……흩어져서 찾아보는 수밖에 없나?”
나는 정해연에게 저 비석에 꽂아 넣을 열쇠들의 순서를 말해주었다.
“그걸 서진 씨께서 어떻게 아시는 거예요?”
“저 이래 보여도 탐색계 각성자잖아요.”
“……그거 진심으로 하신 말씀이셨어요?”
각성자 등록을 끝마친 날.
현수막을 들고 온 정해연에게 해줬던 말이었다.
정해연은 앞으로 가 안환재에게 내 말을 전해주었다.
그는 곰곰이 생각해 보다가 방침을 정했다.
“확신할 수가 없으니, 몇 개의 힌트를 더 찾아보고 결정하도록 하지.”
당연한 말이었다.
이곳에서 저 숨겨진 정보를 볼 수 있는 것은 나뿐이었고.
그것을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은 마땅치 않으니까.
“찾았습니다!”
두 시간을 돌아다닌 결과.
첫 번째 힌트를 찾았다.
6시 방향에 주황 열쇠.
내가 말한 정보와 일치했다.
“하나만 더 확인하지.”
세 시간이 지나고, 다시 또 하나의 비석을 찾았다.
12시 방향에 빨강.
두 개의 힌트.
그때가 되어서야 안환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번째 힌트가 적힌 비석은 어느 동굴 안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나머지 힌트 또한 우리가 찾기 힘든 으슥한 곳에 숨어져 있겠지.
‘누가, 네 뜻대로 행동할 거 같냐.’
두 개면 충분하다. 두 개면.
마물의 사체에서 나온 열쇠를 비석에 순서대로 꽂았다.
그리고.
“각자 손을 잡도록!”
우리는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각자 손을 잡았고.
2층과는 달리, 다 같은 장소로 워프할 수 있었다.
“하…… 마지막 층이네. 재빠르게 잡고 얼른 이 빌어먹을 곳에서 나가자고.”
공감이다.
「블랙 와이번의 허름한 둥지」
우리는 이 던전의 보스가 있을 곳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오랜 시간이 걸릴 줄 알았으나, 의외로 빠르게 발견했다.
-끼에엑!
블랙 와이번이 둥지 위에서 허공을 향해 포효했다.
……역시 던전의 보스.
느껴지는 포스가 보통이 아니었다.
곧바로 돌입하지 않는다.
던전의 보스인 만큼 만반의 준비를 하기로 했다.
“이건 뭐지?”
“노란색?”
각성자 한 명당 물약 하나씩을 분배해 주었다.
신속의 물약.
“……자양강장제가 아니었군.”
어쩐지 이상하다 싶더라니.
안환재가 작게 중얼거리며 그것을 마셨다.
나머지 각성자들도 그것을 들이키자마자 제각기 놀란 반응을 보인다.
“뭐, 뭐야!”
“미친! 몸이 날아갈 것 같잖아?”
“황혼에서 개발한 물건인가?”
“이건 혁명이야!”
“연금술사 길드장의 결과물인가?”
흥분할 만도 하다.
고유 능력으로 육체 강화를 가진 각성자도 있다.
그런 특수한 힘을 고작 물약 하나로 재현해 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일전에 저에게 주셨던 그 성수로군요. 성자님을 제대로 보필해드리지도 못했는데, 제가 이런 걸 받아도 될는지…….”
아니다. 이 수녀야. 그냥 평범한 물약이다.
“이 물약, 수호 길드에 따로 판매할 생각은 없나?”
“아쉽게도 아직 판매 가능한 물건이 아니라서요. 제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기도 하고요.”
“……그 말은 이 물약의 제조를 황혼에서 한 게 아니란 말이군.”
안환재의 눈빛이 잠시 나를 스쳤다.
“일단 나중에 자세히 이야기하도록 하죠.”
“이 물약에 정해진 이름이라도 있나?”
“이것을 만드신 분께선 ‘신속의 물약’이라고 이름 지으셨습니다.”
“신속의 물약…….”
안환재는 자신의 몸을 한 번 살펴보고는 고개를 돌려 블랙 와이번을 직시했다.
“확실히 그렇군.”
자신들의 몸에 생긴 변화.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는 각성자들에게 안환재가 선포했다.
“지금부터 블랙 와이번의 공략을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