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tion is flowing from the water purifier in my house RAW novel - Chapter 42
우리집 정수기에서 물약이 흐른다 43화
15. 빛이 있으라(6)
“……뭐지?”
모두가 하늘을 바라보았다.
전투 중이라면,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행동 중 하나였지만.
갑작스럽게 내리쬐는 그 새하얀 빛에 도저히 그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것은 태양 빛인가……?’
아니, 다르다.
던전에서 비추던 그 인공적인 빛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 찬란한…….
“……어?”
잠시 그것을 바라보던 각성자 한 명이 자신의 몸에 생긴 변화를 알아차렸다.
“몸이……?”
계속되는 전투로 인해 깎여나간 체력과 상처들.
그것들이 실시간으로 치유되고 있었다.
어떻게……?
물약을 마시지도 않았는데.
혹시 저 빛 때문에?
열세에 처해 있던 각성자들의 몸에 힘이 점점 돌아오기 시작했다.
“으랴앗!”
소성환의 맹렬한 도끼질에 블랙 와이번의 살이 떨어져나왔다.
처음과는 달리 지친 기색의 모습.
각성자들에게 당한 크고 작은 상처들.
그것을 보자마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저것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네놈들한테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는 모양이네.”
소성환이 씨익 웃었다.
지금이라면 혼자서라도 널 썰어버릴 수 있을 거 같아.
그가 곧장 블랙 와이번에게로 달라붙었다.
“기회다! 지금 당장 몰아붙여!”
안환재와 수호 길드의 전투원들이 거센 기세로 블랙 와이번의 몸에 수많은 자상을 남기기 시작했고.
“신의 가호가 함께한다!”
지쳐 있던 성기사들이 적들을 향해 무자비한 징벌을 내리기 시작했다.
‘……이건.’
정해연은 잠시 와이번의 상대를 소성환에게 맡겨두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빛으로 인해 눈부셔서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히 하늘에는 누군가가 떠 있었다.
계속해서 바라보자, 점점 눈이 빛에 익숙해지며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것은 정해연에게 있어서 익숙한 인물의 형상이었다.
‘……서진 씨?’
비행형 마물의 위에서 위태롭게 자세를 잡고 있는 이서진의 모습.
마물이 그를 떨어뜨리기 위해 이리저리 몸을 흔들더니 이내 지상으로 하강하기 시작했다.
“서진 씨!”
정해연이 추락 지점으로 달려가려 했지만, 그보다 한 발 더 빠르게 행동한 사람이 있었다.
공략이 시작되고, 단 한 순간도 이서진을 시선에서 놓친 적 없던 그의 충실한 수녀.
이루비.
자신이 가는 길목을 막는 마물들을 뛰어넘으며 정해연 본인조차 낼 수 없는 속도로 한 곳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성자님!”
“떨어진다! 떨어져!”
온갖 폼을 다 잡았건만, 역시 낙하의 공포는 어쩔 수 없었는지 꼴사납게도 이서진은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아아악!”
이내 잡고 있던 마물을 놓친 이서진이 땅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키엑?
이루비의 작은 신체가 도약했다.
가볍게 마물의 머리를 밟은 그녀는 다시 한번 공중에서 날아올랐다.
“죽…….”
그녀의 손이 앞으로 뻗어진다.
“나 죽는…… 다?”
아슬아슬한 순간.
이루비의 자그마한 두 손이 공중에서 이서진의 몸을 받았다.
성인 남성의 무게를 제 새끼 잡듯이 가뿐하게 잡은 이루비가 백색의 머리를 흩날리며 땅으로 착지했다.
‘이게 공주, 아니, 왕자님 안기인가…….’
그런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틀린 말도 아니었다.
왜냐하면, 지금 이루비가 이서진을 바라보고 있는 눈빛은 동화 속의 존재를 직접 만난 어린아이와 같은 반짝임이었으니까.
“성자님…… 성자님……!!”
이루비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녀는 정말로 할 말이 많은 듯이, 이서진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나오는 말은 성자님. 단 하나뿐이었다.
-키…….
콰앙!
“…….”
그 와중에도 다가오는 마물의 기척은 놓치지 않고, 단숨에 제압해 버린다.
가녀린 겉모습과 대비되는 그 살벌함에 이서진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뭐라도 해줘야 할 거 같지만…….’
지금은 아직 전투 중이었다. 지금은 우세하지만, 언제 상황이 다시 뒤집힐지 모른다.
그는 손전등을 확인해 보았다.
방금 한 번으로 손전등에 충전되어 있던 모든 힘이 소진되었다.
손전등이 꺼졌음에도, 여전히 하늘에는 찬란한 빛이 지상을 비추고 있었다.
저것의 지속시간은 그렇게 길지 않을 것이다.
그 안에 승부를 봐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루비의 전력이 꼭 필요했다.
“수녀님. 이곳은 제가 지키겠습니다. 다녀오시죠.”
“……단장님.”
신백준이 이서진과 이루비가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이서진의 곁에 서, 쾅! 하고 전투 망치를 바닥에 내려놓은 그가 말했다.
“절대로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하게 하죠. 맹세하겠습니다, 수녀님.”
그 말에 이루비가 작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성자님께서 만드신 절호의 기회이지 않습니까.”
이서진이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야 이루비는 빠른 속도로 전장을 향해 달려갔다.
한 번의 공격을 막는 게 전부였던 이서진에 비해, 그녀는 철퇴를 휘두르는 족족 마물을 하나씩 죽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이서진은 눈을 좁혔다.
“……아무래도 평범한 오빠 행색은 무리일 거 같은데요.”
수준 차이가 너무 심하잖아.
작게 한숨 쉰 이서진의 말에 신백준이 투구 속에서 작게 미소 지었다.
신백준은 여전히 이서진에게 등 돌린 상태로 전투 망치를 바닥에 꽂은 채 전방을 주시했다.
‘맹세하겠습니다.’
이서진은 알지 못했지만, 그 말은 단순하면서도 특별한 의의를 지니고 있었다.
성기사가 ‘맹세한다’라는 말을 꺼낸다는 건 단 하나의 뜻을 의미한다.
자신의 한 몸을 바쳐 그 사람을 지키는 방패가 된다.
수녀, 루비에르트.
성자, 이서진.
‘……모실 사람이 하나 더 늘어버렸군.’
* * *
상황이 역전되었다.
“황혼 길드장!”
“못 도망가게 둘러싸세요!”
-키에에엑!
-끼에엑!
날갯짓을 할 때마다, 떠오르지 못하도록 집요하게 달라붙는 각성자들.
두 마리의 블랙 와이번이 한곳에 모였다. 그들을 지키던 정예 마물들은 이제 더 이상 없었고.
몰려드는 마물들은 스무 명의 각성자들이 진을 펼쳐 이곳으로의 접근을 막고 있었다.
“이놈들만 남았군.”
블랙 와이번을 포위한 안환재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방금까지 보였던 지친 기색들은 보이지 않았다.
‘아까 그 빛은…….’
전투 중이던 안환재 또한 그 빛 너머를 바라보았다.
남들보다 더욱 발달 된 시력으로 인해 그 정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서진. 그가 이 빛을 만들었다는 건가?’
그와의 첫 만남이 떠올랐다.
자신을 옥죄어오던 그 불길한 기운의 마나.
만약에 그가 이 상황을 위해 무언가를 한다면, 그때 보았던 그 마나를 이용할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방금 그가 하늘에서 행한 것은 그것과는 정반대되는 신성한 마나를 담은 빛이었다.
마치, 어린양들을 따스하게 보듬어주는 듯한.
단순한 빛이 아니었다.
날이 갈수록 쇠약해져 가는 자신의 몸이 지금만큼은 그 누구보다 강인해져 있었으니까.
당연히 버프 형태의 고유 능력은 존재한다.
하지만 이렇게 광범위하고, 효과적인 것은 그로서는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각성자의 고유 능력은 개인의 역량에 따라 그 활용과 세기가 달라진다.
‘그렇다는 것은…….’
블랙 와이번과의 전투에 드디어 확신이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와는 정반대로 그에 관해서는…….
그때, 그들의 옆으로 누군가가 튀어나왔다.
-키엑?
눈앞의 각성자들을 경계하고 있던 블랙 와이번 중 한 마리가 자신의 안면에 가해진 공격에 비명을 질렀다.
안환재가 가벼운 몸놀림으로 나머지 블랙 와이번의 공격을 이리저리 피해내고 있는 인물을 보았다.
‘신성 길드장…….’
“우리도 합류한다!”
“블랙 와이번을 토벌하라!”
꺼져가던 정해연의 불꽃이 다시 격하게 타올랐다.
깃털을 불태우며 검을 내리그었다.
달라붙은 불은 꺼지지 않았다.
온 힘을 다한 휘두름.
분노에 빠진 블랙 와이번의 부리 공격에 정해연이 노출되는 순간.
콰앙!
루비에르트의 공격이 들어갔다.
끔찍한 고통에 다시 와이번의 관심이 돌아갔고.
서걱!
정해연이 곧바로 검에 힘을 실어 날개 한쪽을 잘라내는 데 성공했다.
그 모습을 보며 주변을 둘러싼 각성자들이 기겁했다.
저들이 각 길드의 길드장이란 것은 알고 있지만 대체 저 무위는 무엇이란 말인가?
“……무슨.”
“우리가 끼어들 틈이 없는데……?”
한 마리의 보스급 마물을 두 명의 여성이 완벽하게 제압하고 있었다.
한쪽이 공격을 넣는 순간에 다른 한쪽이 완벽한 타이밍으로 적의 시선을 끈다.
마치 몇 년이고 서로 합을 이뤄본 듯한 움직임이었다.
누군가 본다면 서로의 생각을 읽고 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빈틈없는 협동.
‘이 감정은 대체…….’
실제로 정해연은 묘한 감각에 빠져 있었다.
무희의 움직임처럼 불꽃의 춤을 추던 그녀에게로 어떠한 상념이 흘러들어왔다.
환희, 기쁨, 희열, 존경심 그리고 행복감.
무시무시한 마물을 상대하고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플러스 감정이었다.
정해연이 루비에르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웃고 있었다.
마치, 이 상황이 너무나도 행복해서 자신의 감정을 주체할 수 없다는 듯이.
그제야 정해연은 자신에게 흘러들어오는 이 감정이 루비에르트의 것이란 걸 알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게, 이 감정이 향하는 방향은 오직 한 사람만을 가리키고 있었으니까.
‘이것도 빛의 영향인가?’
마치 서로의 정신이 연결된 것처럼 느껴진다.
이서진.
그 누구도 달성하지 못한 위대한 업적을 이룬 연금술사.
‘이번이 두 번째구나…….’
직접적으로 그의 아티팩트를 체험하게 된 것이.
그 빛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그가 만들어낸 비장의 물건 중 하나일 것이다.
그때 앉았던 방석의 효과와 비슷했다.
거센 공격이 자신의 앞을 스쳐도, 마음은 더욱 차분해졌고.
지쳐가던 몸은 전투가 진행됨에 따라 오히려 회복된다.
곁에 있는 루비에르트가 어떻게 행동할지 어렴풋이 알 수 있었기에, 움직임에 막힘이 없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저 정해연도 루비에르트와 같이 미소를 짓고 블랙 와이번에게 달려들었을 뿐이었다.
안환재를 필두로 한 각성자들 또한 나머지 블랙 와이번을 완벽하게 제압하고 있었다.
-키에에에엑!!
거대한 날개가 잘린 와이번에게선 더 이상 이 던전의 보스 같은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살려달라고 요동치는 마물일 뿐이었다.
안환재가 반대편을 보았다. 합이 맞는 그들 사이로 끼어드는 것이 오히려 방해였기에, 기어코 두 명이서 보스급 마물을 쓰러뜨리는 데 성공했다.
그제야 그들을 비추던 빛이 하늘에서 사라졌다.
“클리어!”
“이쪽도 클리어!”
각성자들의 근처로 바깥으로 나가는 포탈이 생성되었다.
하지만 아직 할 것이 남았다.
근처에 있는 마물도 전부 제압되고, 모든 각성자들이 한곳으로 모였다.
“대체 아까 그 빛은 뭐였던 거야?”
“분명히 하늘에 누군가 떠 있었던 거 같은데…….”
“너네 혹시 들었…….”
그들이 먼저 꺼낸 주제는 4층 던전에 걸맞지 않은 난이도의 보스 이야기가 아닌, 전투 도중 하늘에서 터져 나온 신비로운 빛에 관한 내용이었다.
“서진 씨!”
“성자님!”
그들에게로 거대한 체구의 성기사 한 명과 그에게 안겨서 정신을 잃은 이서진이 다가왔다.
“서, 서진 씨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요?”
“단순한 마나 탈진입니다. 걱정하지 마시지요.”
신백준은 평평한 바위 위에 그를 눕혔다.
정해연과 루비에르트가 곧장 기절한 그에게로 다가가 옆을 지켰다.
빛은 이미 사라지고 없는데도, 어째선지 두 사람의 마음이 편안해져 갔다.
‘…….’
그런 둘의 모습을 복잡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안환재가 소리 높여 외쳤다.
“4층 던전, 블랙 와이번의 허름한 둥지 공략을 여기서 종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