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tion is flowing from the water purifier in my house RAW novel - Chapter 49
우리집 정수기에서 물약이 흐른다 50화
17. 신성 길드장(3)
황혼의 길드하우스는 평범한 회사 같았고.
수호의 길드하우스는 견고한 철벽 같았다면.
신성의 길드하우스는 말 그대로 성지(聖地)라도 온 기분이었다.
마치 노트르담의 성당과 같이 스테인드글라스로 된 수많은 창문들이 신비로움을 더해주고 있었다.
저기에 한 번에 빛이 들어온다면 그야말로 장관일 거 같은데…….
“선택받은 분을 어떻게 맞이할까 고민하면서 여러 가지를 참고하였습니다.”
특정 종교가 있는 건 아니었구나.
루비 나름대로의 노력이라고 볼 수 있었다.
실내에는 이전에도 보았던 성기사들이 서 있었다.
누가 보면 예술 작품이 아닌가, 착각할 수도 있겠지만.
엄연히 저건 사람이었다.
‘되게 답답할 거 같은데.’
길드 하우스 내에서도 저런 식으로 풀 무장을 하고 있는 줄은 몰랐다.
이제는 익숙한 덩치의 성기사가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수녀님. 외출은 즐거우셨는지요.”
“성자님과 함께하여 아주 뜻깊은 시간이었습니다. 성기사단장님.”
투구에 가려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뭔가 흐뭇하게 웃고 있을 아저씨의 모습이 상상이 갔다.
“서진 님도 안녕하십니까.”
“……예. 신백준 씨도 건강히 지내셨어요?”
“하하. 제가 고생한 게 뭐가 있겠습니까. 기절할 정도로 노력하신 건 서진 님이지요.”
하여간.
잠시 접객실로 들어가서 차라도 한 잔 마시기로 했다.
“나 졸려.”
하루 종일 뛰어노느라 지쳤는지, 순둥이가 눈을 비볐다.
솔직히 이전의 모습들을 보자면 지칠 리는 없겠지만, 그냥 아직 어린 애라 잠이 좀 많다.
“자고 있어. 순둥아.”
“응.”
순둥이를 무릎에 눕히고 조심스럽게 차를 마셨다.
신백준 또한 쓰고 있던 투구를 벗었다.
“……성기사단장님. 괜찮으시겠습니까.”
“예. 괜찮습니다.”
이전에도 보았지만, 엄청난 화상 자국과 흉터들이다.
궁금하다고 생각했는지, 신백준은 웃으면서 말했다.
“단순한 화상일 뿐입니다. 평소에는 투구로 가리고 있으니, 남에게 보일 걱정도 없지요.”
평범한 화상.
그렇다면 물약으로 충분히 치료가 가능한 것이다.
신백준도 그 사실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신성 길드나 되는 곳이 물약이 부족할 리는 없을 테니까.
그런 거라면 내가 무한정으로 지원해 줄 수 있었다.
“혹시 따로 치료하실 생각은 없으세요?”
신백준이 고개를 저었다.
“제 나름대로의 다짐 같은 거라서요. 지금 당장은 이대로 놔둘 생각입니다.”
루비 또한 드물게 안타까운 표정을 짓는다. 루비가 따로 명하거나 한 건 아닌 거 같은데.
나는 모르는 어떠한 사정이 있는 모양이다. 깊게 파고들지는 않기로 했다.
신백준이 화제를 바꿨다.
“그래서 오늘은 무슨 일을 하셨는지, 들어 볼 수 있을까요?”
“놀았습니다.”
“예?”
“그냥 놀았어요.”
내 말에 엉뚱한 표정을 지은 신백준이 이내 크게 웃었다.
“하하! 그렇죠. 젊은 두 분이 같이 만나서 논다. 그게 당연한 것이겠죠.”
그럼 뭐라고 생각한 거래.
하도 성자, 성자 그러니까.
하루 종일 기도라도 하고 온 줄 아셨나.
“제게 있어서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시간들이었습니다.”
루비는 신백준 씨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조곤조곤 설명해 주었다.
루비 본인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지만, 이야기를 하는 내내 얼굴에 옅은 홍조가 자리 잡아 있었다.
‘웃고 계시네.’
신백준은 마주 보고 앉아 학교생활에 대해 이야기해 주는 딸을 보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전에도 말했었다.
딸과 같은 존재라고.
“…….”
단순히 놀았을 뿐인데, 자랑할 게 그리도 많은 것인지 이야기를 계속하던 루비가 순간 정신을 차렸다.
“……죄송합니다. 저 혼자서 흥분을 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아쉽네.
보기 좋았는데.
“그래서 보여주고 싶은 게 이 길드 하우스야?”
확실히 누군가에게 자랑할 만한 퀄리티였다.
“아닙니다. 보여드리고 싶은 것은 따로 있습니다.”
순둥이를 소파에 눕혀두고 우리는 어느 장소로 이동했다.
“여긴?”
“평소에 제가 머무는 곳입니다.”
한창때 소녀의 방.
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정도로 휑한 곳이었다.
조금 어두운 것 같기도 했고.
“저것입니다. 성자님.”
방의 한가운데에 보관되어 있는 작은 수정 하나.
“제가 계시를 받았을 때 나타났던 신비로운 물건입니다.”
……계시란 건 진짜였던 건가.
사면이 투명한 유리로 된 케이스에 고이 들어 있었다.
별로 신비할 것도 없어 보이는데.
“성자님께서 나타나신다면 특별한 반응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여,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수정이라고 하니까 아이기스의 방패가 떠오르네.
혹시 저것도 내 몸에 흡수되면서 무언가 능력이라도 주는 건가?
“열어봐도 돼?”
“성자님이 원하신다면, 얼마든지.”
신백준이 조심스럽게 케이스를 제거했고, 나는 좀 떨어진 곳에서 구슬을 지켜보았다.
“음…….”
……예상외다.
이런 곳에서 또 능력의 한계를 경험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4층 던전에서 보았던 비석을 해석하지 못했던 것과 비슷하다.
아무래도 루비가 말한 대로 평범한 구슬은 아닌 모양이다.
“성자님?”
혹시 몰라서 손전등을 켜 이리저리 비춰보았지만, 무언가 정화된다던가 하는 낌새는 없었다.
“아, 미안.”
결국, 만져보는 수밖에 없나.
나는 구슬에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는 동안에도 딱히 변화라 할 건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구슬이 내 손에 닿았고.
“……?”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음…….”
“딱히 별다른 변화는 없군요.”
“그러게…… 요?”
그 순간, 구슬에서 어마어마한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런 미친. 시간차 공격이었냐?
“성자님!?”
“뒤로 물러서!”
신백준과 루비가 다급하게 나를 뒤로 잡아끌었다.
구슬에서 나오던 빛은 이내 한곳으로 응축되더니, 어딘가로 향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 어딘가는 나다.
이거 튀어야 하나……?
“성자님!”
하지만 막을 수 있는 그런 게 아니었다.
구슬은 가로막는 두 사람을 그대로 통과하고, 내 가슴속으로 쏘옥 하고 들어왔다.
내 몸에 무언가 들어오는 건 이걸로 두 번째다.
……이야. 아주 내가 꼬물이가 된 기분이야. 이러다 몸에 온갖 것이 가득 차겠는데.
“성자님! 괜찮으십니까!”
“어어. 별 이상 없는 거 같은데……?”
능력을 얻었다던가 하는 알람은 없었다. 대신이라고 하듯, 이상한 상태창이 나타났다.
“……무슨 하나도 안 보이잖아?”
“예?”
“아니야. 진짜로 이상 없는 거 같아.”
뭔 수?
당장 떠오르는 건 ‘흡수’했다는 것뿐인데.
문제는 뭘 흡수했는지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이게.”
구슬을 톡톡 건드려보았으나, 다시 빛이 나오는 경우는 없었다.
“역시 성자님이십니다! 성자님이 손을 댄 물건에선 전부 다 빛이 흘러나오는 거군요! 그 손으로 부디 이 루비의 머리를!”
루비의 눈에서 빛이 나오고 있긴 하다. 신백준이 구슬을 경계하며 내 앞에서 말했다.
“어떻게 된 것입니까?”
“글쎄요…… 저도 뭔지 모르겠는데요.”
두다다다!
아기자기한 발자국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달려왔다.
“아빠!”
놀란 표정의 순둥이가 내 품으로 안겨들었다.
“순둥아. 왜 그래?”
“응? 이상하다아…….”
고개를 갸웃거리던 순둥이가 까치발을 들어 수정을 만지려 한다.
“순둥아. 안 되지. 장난감 아니야.”
“괜찮습니다, 성자님. 원래부터 성자님에게 건네 드릴 물건이었습니다. 다만 저것이 해를 끼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그래?”
이리저리 수정을 살펴보고, 별다른 이상이 없는지 확인했다.
혹시 몰라 신성 길드에서 보유 중이던 우리 집 정수기표 물약도 끼얹어 보았고.
색의 변화는 없다.
딱히 오염됐다거나 그런 건 아닌 거 같은데.
아까 그 빛도 내게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
오염되었다고 말하기에도 무언가 익숙한 빛이었고.
결국, 순둥이에게 수정을 건넸다.
“우와! 이상하고 동그래!”
수정을 보면서 방실 웃던 순둥이가 구석에 쪼그려 앉아 무언가를 하고 있다.
자세히 보니, 그림자 속에서 꼬물이가 얼굴을 내밀고 있다.
“아암~ 아~ 해야지. 꼬물아.”
-끄아앙~
……아니, 잠깐. 꼬물이가 수정을 먹고 있는 거 같은데?
내게 이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루비가 이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저로 인해 성자님이 위험에 빠진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 빛은 위험이라기보다는 성자님이 보이시던 그것과 비슷하더군요.”
루비가 재차 진지한 모습으로 내게 물었다.
“역시 성자님은 제게 있어서 성자님이십니다. 아까의 제안. 다시 한번만 더 생각해 주실 수 없으시겠습니까?”
오늘 하루 동안 실컷 평범한 나를 보여줬음에도, 루비의 마음에는 변동이 없었다.
오히려 더욱 확고해진 눈빛을 하고 있다.
‘……아무리 그래도 길드장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것 같았다. 신백준이 내 표정을 보고는 말했다.
“일에 관한 거라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원래부터 길드에 관한 일이라면 대부분 제 쪽에서 해결했으니까요.”
“……부끄럽습니다. 루비가 부족한 탓에.”
요즘은 그렇지 않지만, 전에는 외부로의 노출이 없다시피 한 루비다.
대부분의 일은 성기사단장, 신백준 씨가 맡아서 했단다.
그가 진짜 길드장이 아닌가 하는 말도 꾸준히 나오는 모양이고.
‘어쩐다…….’
신백준도 은근히 내가 그 자리를 맡아줬으면 하는 눈치다.
신성 길드에 있는 성기사들은 전부 내게 호의적이었고.
대체 왤까.
이곳은 마음에 들었다. 기본적으로 길드의 형식을 취하고 있었지만.
타 길드와 비교해서 대중에게 비치는 이미지가 압도적으로 좋았다.
신성 길드가 담당하는 구역은 다른 지역에 비해 치안도 좋았고, 평상시에도 기부나 봉사 같은 것들을 밥 먹듯이 했으니까.
언뜻 보면 무서울 수 있는 흰 갑주는 이제 사람들에게 있어서 영웅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거기다 이곳은 단순한 조직이 아니라, 마치 가족 같았다.
‘내가 그런 곳의 수장이 될 자격이 있을까?’
애초에 내가 없어도 충분히 돌아가는 곳이다.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서진 님은 서진 님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만약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언제라도 저희가 한 몸 바쳐 도와드리겠습니다.”
“…….”
진지한 표정을 하던 신백준이 그 날 보았던 아저씨 같은 미소를 지었다.
“하하. 이렇게 무게 잡았습니다만, 사실은 단순한 욕심입니다. 길드장이 중요한 게 아니라, 같은 곳에 소속된다면 수녀님이 서진 님을 자주 만나 뵐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에요.”
“서, 성기사단장님!”
“수녀님은 이곳으로 돌아오실 때마다 성자님, 성자님 하면서 이야기를 많이 하십니다. 이전에는 방 안에만 계셨는데 말이죠. 이제 와서 말하지만, 사춘기 딸을 대하는 것 같았다니까요. 하하.”
“……부끄럽습니다. 그만둬 주세요!”
루비의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부끄러워하는 표정은 처음 본다.
두 사람의 모습에서 장난스러운 아버지와 딸의 모습이 그려졌다.
그럼 나는 신백준의 아들 역할이려나?
‘하하…….’
그 모습을 보자니 쓸데없는 고민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내 마음 가는 대로.
혹시 모를 위협들과 내 근처에 있는 소중한 것들을 지키기 위해서도 좋은 기회겠지.
“예. 할게요.”
“정말입니까? 성자님!”
“잘 생각하셨습니다.”
미소 지은 신백준이 어딘가로 나를 안내했다. 수십 명의 인원을 수용 가능한 강당.
그곳에 신성 길드에 있는 성기사들이 단체로 나열했다.
“……꼭 해야 합니까?”
“일종의 의식 같은 겁니다. 얌전히 받아주시죠.”
……이거 제대로 낚인 거 같은데?
내 앞에 서 있는 철의 군대를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주눅 들게 된다.
‘이럼 안 되지.’
중요한 순간이다.
그도 그럴 게, 내가 처음으로 정규직(?)이 되는 순간이니까.
성기사들 사이로 루비가 걸어 나왔다. 방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루비의 찰랑거리는 은발은 아까 보았던 그 빛보다도 더욱 성스러워 보였다.
그녀가 두 손을 제 가슴에 모았다.
“수녀, 루비에르트. 성자님을 이 한 몸 바쳐 모시겠습니다.”
“성기사단장, 신백준. 성기사들의 대표로서 길드장님을 이 한 몸 바쳐 모시겠습니다.”
그와 동시에 모든 인원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던전 앞에서도 겪었던 순간이지만, 역시 익숙하지 않았다.
눈시울이 붉어져 있는 루비에르트, 이루비를 보면서 최대한 표정 관리를 위해 애썼다.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첫 취직이었다.
* * *
“……피곤하다.”
“집이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맨바닥에 뻗었다. 몸보다도 정신력이 바닥이 났다.
그동안 많은 일을 겪은 만큼, 웬만한 거엔 내성이 생겼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리 그래도 오늘 겪은 일은 한계치를 넘어섰다.
“나도!”
순둥이가 내 옆에 누워서 곧장 텔레비전을 튼다.
“순둥아. 손 씻고 와야지.”
“네에~”
……나도 씻어야 하긴 하는데.
귀찮아 죽겠네.
그러고 보니 오늘 텔레비전을 틀은 적이 없다.
가끔씩 빠뜨리는 때도 있고…….
아무래도 미래를 보는 텔레비전에서 쓸 만한 정보가 나오지 않는 것이 컸다.
“이제는 오히려 미래시가 메인 같단 말이지…….”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그래도 채널도 겨우 두 개고 얼마 안 걸리니, 순둥이가 오기 전에 확인해 두기로 했다.
혹시라도 도움이 되는 정보가 나올 수 있으니까.
“……길드에 도움이 될 만한 내용이면 좋겠네.”
이제는 나도 책임감을 가져야 하니까.
기대감에 부푼 채로 텔레비전을 틀었다.
과연 무엇이 나올까.
기대 어린 눈빛을 보냈지만.
두 채널에서 연이어 나오는 미래에 점차 내 눈이 가라앉았다.
심각한 표정으로 소식을 전하는 앵커.
[Ch.2] [보영아 미안하다…… 엄마 미안해…….]비관적인 말을 뱉으며 난간에 매달려 울고 있는 사람들.
두 채널이 말하고 있는 공통점이 있었다.
내게는 그 무엇보다 익숙한 것이다.
내 인생을 송두리째 뺏어 갔던 빌어먹을 마석병.
그것이 전국적으로 발생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