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tion is flowing from the water purifier in my house RAW novel - Chapter 58
우리집 정수기에서 물약이 흐른다 059화
21. 망나니를 사용하는 방법(1)
“어, 뭐야. 그레이트 그레이프 없어요?”
“예에. 그게 워낙 인기가 많은 터라. 지금 있던 건 전부 다 나갔습니다.”
“아~ 나 그거 없으면 공부도 안 되는데.”
평소에는 음료수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그였으나, 그레이트 그레이프를 접한 후로는 일상이 달라졌다.
마약을 한다면 이런 기분일까.
마실수록 또 마시고 싶고, 중독성이 심한 음료수였다.
매일 같이 그것을 마시는 낙으로 살아왔다고 해도 무방하다.
입맛을 다시는 그에게 옆에 있던 친구가 다른 음료를 가리켰다.
“야. 이거 먹어보는 건 어떠냐?”
“엑. 더럽게 비싸잖아! 이걸 누가 사 먹어!”
“왜. 먹어 봐. 나도 먹어 봤는데, 저거보다 훨씬 낫더만.”
“……그래?”
“어. 거기다가 이거 광고하는 모델이 진짜…….”
“아~”
제 또래들 사이에서는 이미 퍼질 대로 퍼진 이야기다.
난데없이 등장한 정체불명의 신예.
포털 사이트에 쳐도 그 흔한 프로필조차 나오지 않았으며, 그 광고를 제외하고는 다른 활동이 일절 없는 신기한 인물이었다.
다만, 그 광고 하나만으로도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 불을 지피는 데에는 충분했다.
“……진짜 성녀님 같았지.”
“그 성녀님이 몸소 홍보하는 음료수를 안 마신다고?”
“아. 마신다, 마셔!”
음료수 한 캔에 무려 오천 원.
떨리는 손으로 카드를 내밀은 그가 이내 뚜껑을 따 살짝 한 입 마셨다.
맛있으면 얼마나 맛있겠냐.
그런 생각이 들었었는데, 막상 마셔보니 생각이 확 달라진다.
“오…… 이거 되게 괜찮은데? 끝 맛에서 느껴지는 은은한 딸기향이 예술이야.”
“그렇지? 난 요즘 이거만 먹는다니까.”
“거기다가 이상하게 몸에 활기가 도는 거 같기도 하고.”
“나도 체대 쪽 지망하고 있는 형한테 들은 건데, 지금 운동하는 사람들도 죄다 이 음료수만 찾는데.”
“뭐? 에너지 드링크는 왜 내버려 두고?”
“그런 거보다 이게 더 효능이 좋으니까 그러지!”
“……이게 그 정도로 좋다고?”
다시 한번 홀짝이니 지친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 든다.
요즘 들어서 꽉 막힌 것 같던 가슴도 뻥- 하니 뚫리는 거 같다고 해야 하나…….
“아. 여기 한 상자 남아 있었네요!”
진열대에 올라간 그레이트 그레이프를 보면서 친구가 어깨를 툭툭 친다.
“야, 네가 죽고 못 사는 거네. 저거 안 사냐?”
“음…….”
벌써 절반이나 마셔버린 음료수를 곁눈질하던 그는 결국 그레이트 그레이프도 하나 구매했다.
익숙한 손놀림으로 뚜껑을 깠고.
입에 들어가자마자, 자기도 모르게 바닥에 뱉어버렸다.
“욱! 뭐야, 맛이 좀 이상한 거 같은데?”
“뭐? 어제까지만 해도 그거 못 먹으면 열이 난다느니 그런 소리를 해놓고 무슨…….”
“아, 그러게. 이상하네…….”
“야. 그건 다 마셨냐? 안 마실 거면 나 줘라.”
“어딜.”
“아 치사한 새끼!”
“너도 사 먹던가.”
그가 절반 정도 남아 있는 세이크리드 스트로베리를 원샷 했다.
속을 씻어내듯이, 감미로운 맛에 그가 자기도 모르게 감탄사를 흘렸다.
“역시 이 맛이야.”
뭔가 거부감이 적다고 해야 하나?
이걸 먹기 전까지는 분명히 저 음료수가 최고였는데.
이제는 오히려 이것 외에는 다른 음료수는 생각도 안 난다.
“……쩝. 하나 더 살까?”
“거봐. 내가 맛있다 했잖아. 그런데 그건 어쩌게?”
“몰라. 버려야지. 맛대가리도 없는 거.”
그렇게 사람들 사이에 이서진의 특제 음료수가 본격적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 * *
“오늘 좋은 시간 함께해서 즐거웠습니다.”
“아뇨. 저야말로.”
차우 길드장, 박재한은 대형 길드장 한 명에게 웃으며 인사했다.
그가 사라지자마자 얼굴을 확 구긴 그가 중얼거렸다.
“원하는 건 더럽게 많군.”
한국에 터를 잡은 지 고작해야 3년.
차우 길드는 그 시간 동안 가파르게 성장해 대형 길드의 반열에 들어가는 데 성공했다.
그런 일이 가능한 것은 당연히 그가 가지고 있는 뒷배 덕분이었다.
중국의 허핑 길드.
당연히 저들이 자신에게 이토록 집요하게 관심을 가지는 것도 그런 뒷배와 연을 맺고 싶어서였다.
별로 마음에 들진 않았다.
자신이 아니라, 다른 곳에 관심이 있다는 것이니까.
‘이 모든 건 전부 다 내가 이룩한 건데.’
당연히 중국 본토에 있는 허핑 길드의 지원이 아니었다면, 꿈에도 꾸지 못했겠지만.
그는 자신이 아니었다면, 이 길드가 단기간 만에 이렇게 클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도 잘 진행되고 있으니까.”
마석병의 유행.
처음부터 그런 일이 있을 거란 걸 알고 있었다는 듯, 수천 개의 물약을 무상으로 뿌린 차우 길드.
당연히 대중의 관심은 차우 길드 쪽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차우 길드의 대중적 이미지는 나날이 높아져만 갔고, 덩달아 그레이트 그레이프의 소비 또한 많아졌다.
‘그게 제 살 갉아먹는 짓인 걸 모르고 말이야.’
이 음료수의 정체를 아는 사람이라면, 죽어도 입에 대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그렇게 욕하고 있는 마석병의 발생 원인이었으니까.
그것도 모르고 애꿎은 길드들만 욕하고 있는 꼴이란.
박재한은 제 손에 놀아나는 사람들을 보는 것이 즐거웠다.
‘이번에 출시하게 될 물건이라면…….’
그레이트 그레이프의 상위 버전.
당연히 음료수에 있는 마기의 비율을 더욱 높였다.
이것이라면 미약하게나마 각성자들에게도 영향을 끼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마기가 높아질수록 거부반응 또한 일어날 수 있었지만…….
‘그걸 위해서 밑 작업을 해온 거니까.’
이미 주기적으로 음료수를 마시며 마기에 침식당한 사람들의 몸은 별 무리 없이 그것을 받아들일 것이다.
그렇게 쌓이고 쌓이다 보면 언젠가 자신의 길드가 최강의 자리에 우뚝 서게 되겠지.
“그때가 되면 본토에서도 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거야.”
제조 및 배포 과정에도 미리 손을 써뒀기에 걸릴 위험도 없었다.
어차피 시간은 자신의 편이다.
“근데 거슬리는 게 있단 말이지…….”
신성 길드장.
별로 대단할 것도 없다고 생각한 인물이었건만, 예상을 벗어나도 한참을 벗어난 행동을 하고 있었다.
난데없이 음료수라니.
차우 길드가 승승장구하는 걸 보고 따라 하기라도 한 건가?
거기다가 내건 슬로건도 이상했다.
마치 그레이트 그레이프를 저격하기라도 하는 것 같지 않은가.
실제로 사람들 사이에서 자사의 음료수와 비교되기도 했고.
‘뭐, 착각이겠지.’
그렇게 큰 타격은 없었으니까.
그보다 더욱 그의 관심을 끄는 것은 역시 그때 신성 길드장 옆에 서 있던 소녀였다.
회의실에서 내내 보였던 그 날카로운 분위기는 어디 가고, 광고 속에서 화사하게 웃고 있는 그녀를 보자니 더욱 가지고 싶었다.
신성 길드가 폭삭 망하기라도 한다면, 자신에게 오지 않을까?
‘못 할 것도 없지.’
미래를 꿈꾸며 연신 웃고 있는 그에게 문자 한 통이 도착했다.
사적으로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만 사용하는 휴대전화.
문자를 확인한 그의 얼굴이 찡그려졌다.
[길드장님. 큰일 났습니다!]
“웬 호들갑이야?”
문자의 내용은 간단했다.
국가가 움직였다.
당연한 것이다.
이런 상황이 됐는데도 위쪽에서 움직이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한 거니까.
정부 쪽 사람에게도 따로 뇌물을 먹여놨으니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이것이 박재한의 생각이었으나, 현실은 달랐다.
[그…… 그레이트 그레이프가 전량 압수 조치되고 있습니다!]
“……뭐?”
정부가 차우 길드를 향해서 칼을 빼 들었다.
* *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야. 그만 웃어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사진] [사진] [사진] [앜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우리 모델님. 소감 한마디 해주시죠!] 미친 듯이 날아오는 문자 폭탄.물론 나한테 이런 짓을 할 사람이라곤 딱 한 명뿐이다.
……하필이면 얘한테 걸리냐.
이유지가 올린 사진에는 광고 속에서 최대한 산뜻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내 얼굴이 올라와 있었다.
저거, 감독님이 제일 강조하던 표정이다.
차마 거울 앞에서도 짓지 못할 상쾌함에 내 얼굴이 붉어진다.
[제발 지워.] [싫은데. 싫은데. 싫은데~ㅋㅋ] 물 만난 물고기처럼 신이 나서는 문자를 보낸다.
저번에 이유지의 사진으로 놀릴 때가 생각난다.
……이거 막상 당해보니까 진짜 짜증 나네.
[그러게, 누가 그런 사실을 감쪽같이 숨기래? 친구 섭섭하게.] ……뭐, 그건 할 말이 없긴 하다.
[말해주려 했는데, 딱히 시간이 안 나서. 문자로 이야기할 것도 아니잖냐.] [흐응. 말은 잘하셔.] 문자가 끊기고, 난데없이 전화가 걸려왔다.
받자마자 이유지의 실실 웃는 목소리가 들린다.
-히히. 그럼 이렇게 전화로 하면 되잖아?
“……전화로도 좀 그렇지.”
-그러면 다음에 한 번 만나. 그 뭐냐, 순둥이도 데리고 오고. 요즘 스트레스를 너무 받아서. 맛있는 거라도 먹고 풀어야겠어. 우리 술도 마실까?
“……너 술은 진짜 좀 자제해라.”
얘가 또 사람 잡을 일 있나.
뭐, 그래도 저번 일에 대한 보답도 있고 만나서 밥 한 끼 거하게 사주는 것 정도는 괜찮을 것이다.
이 사건이 끝나고 나면 그래도 조금은 여유가 생기겠지.
아무것도 안 하던 백수 시절이 그리워질 줄은 몰랐는데.
그래도 근래 심각한 일들만 마주하다가, 이런 식으로 농땡이 피우니 기분이 썩 나쁘지만은 않네.
……이유지가 이래서 땡땡이를 자주 치는 건가?
-그러니까 누가 그런 자리를 넙죽 받으래? 누나가 요즘 너~ 무 바빠서 이것도 겨우 시간 내준 거니까, 고마운 줄 알아. 역시 나밖에 없지? 응? 응?
“뭐래. 이태영한테 문자 오면 숨겨달라고 전화한 거겠지.”
-윽…….
또 어디서 땡땡이나 치고 있을 것이다.
거기다가 누나는 또 뭐야? 전에는 오빠 어쩌구 하더니.
당한 것이 억울해서 전화를 끊자마자, 사진 하나를 보냈다.
[헹. 그때 그 사진이라면 이미 당할 대로 당해서 소용 없지롱.] 미안하지만, 이건 아직 쓰지 않은 신상이다. 두 볼을 잡혀 이상한 입 모양이 된 이유지의 사진을 보내고 폰을 집어넣었다.
연신 울려대는 진동을 무시하고, 잠시 스튜디오에서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내부에서 밀고자가 나올 줄은 몰랐는데.’
음료수에 대한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내부 고발자가 필요 없는 것은 아니었다.
광고 모델인 그녀가 그 음료수에 대한 발언에 힘을 실어준다면, 진실을 알리는 데 힘이 될 테니까.
‘욕은 좀 먹겠지만.’
그녀도 협박당하고 있었다 하니, 별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거대한 세력에 일개 연예인인 그녀가 취할 수 있는 행동은 없었을 테니까.
오히려 나한테 사실을 전하는 것만으로도 대단했다.
그녀에게 있어서 나는 생판 남이었으니까.
대다수의 내부 고발자가 좋지 못한 최후를 맞이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더더욱.
‘괜찮겠지.’
현재 신미란 및 그의 하나뿐인 동생은 신성 길드 하우스 내부에서 보호 중이다.
자신은 상관없었지만, 제 동생이 해코지라도 당할까 봐 걱정이 컸던 모양이다.
신성 길드에 머무는 자들은 내가 보았던 그 어떤 사람들보다도 강인한 성기사들.
밖으로 나갈 때도 그들과 함께할 테니 문제 될 것은 없을 것이다. [당신의 몸에 있는 노폐물을 밖으로! 세이크리드 스트로베리!]
“……어우. 쟨 뭔데 저렇게 웃고 있냐? 징그러워 죽겠네, 진짜…….”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광고에 다급하게 채널을 돌렸다.
하지만 채널을 돌려도 여전히 내가 나온다.
몇 번을 보아도 익숙해질 수가 없는 광고였다.
결국, 텔레비전을 꺼버렸다.
현재 세이크리드 스트로베리의 평판은 상당히 좋았다.
마석의 제거를 위해서는 꾸준한 섭취가 필요한 만큼, 아직 제대로 된 효능은 나오지 못했겠지만.
“기본적으로 몸에 활력이 도니까.”
박X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현재 저 음료수는 피로회복제로도 점점 유명해지고 있었다.
다소 비싼 가격으로 인해 불만을 토하던 사람들도 이제는 납득한 표정으로 그것을 사 먹는다.
대형 길드가 쩨쩨하다느니, 그런 말을 뱉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뭐 어쩌겠는가.
“솔직히 공짜로 풀어도 나한테는 전혀 타격이 없기는 한데.”
원래 이런 건 처음부터 제대로 정하고 가야 한다.
공짜는 안 된다.
애초에 지금 가격대도 최대한 이윤을 남기지 않는 방향으로 정한 거고.
애초에 내가 따로 조치를 취할 필요도 없었다. 내 역할은 여기까지. 나머지는 정부에서 할 일이다.
“이제는 슬슬 폭로할 때도 됐어.”
지금까지는 그에 대한 별다른 대책이 없었기에 놔둘 수밖에 없던 것이었고, 이제는 다르다.
그레이트 그레이프보다 중독성 있으면서, 맛있고, 몸에 좋은 음료수가 나왔으니까.
내가 만들진 않았지만, 이서진 특제 음료수다.
-그에 관해선 잠시만 기다려 주게나.
수호 길드장, 안환재의 말이었다.
정부 측에서 따로 나한테 연락이 왔었다. 정말로 그 음료수가 마석병을 해결할 수 있냐고.
나는 그것을 증명해 줬고, 그들은 좀 더 자세한 대화를 하길 원했다.
그에 관해선 안환재에게 맡겨뒀다.
상대는 전문가다.
나 같은 초보자보다는 그가 상대하는 게 훨씬 노련할 테니까.
뭐, 그들로서도 마땅히 방법이 없던 차에 뜬금없이 해결법을 제시한 사람이 나타난 거니깐, 웬 떡이냐 싶었겠지.
냉큼 버스에 올라탔을 것이다.
길드에 밀려 무능한 정부라는 타이틀이 붙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이곳은 국가다.
차우 길드의 범법 행위를 가만히 놔둘 생각은 없을 것이다.
그 첫 시작이 차우 길드에 대한 확실한 견제.
시민들은 난데없는 그 행동에 당황하고 있었지만, 원래라면 더 일찍이 이루어져야 할 작업이었다.
손목시계를 바라보았다.
T 그리고 F.
“그놈 과연 오늘 나올까?”
오늘 이 사태에 관한 길드장들의 두 번째 회의가 진행된다.
* * *
‘안 나왔네.’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궁금했는데, 결국 차우 길드장은 불참을 선택했다.
사태 파악하느라 아마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겠지.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차우 길드장은 어디 간 거고?”
회의실 안에서 각 길드장끼리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하나같이 이전에도 보았던 사람들이다.
대부분이 차우 길드장과 같이 나가던 자들.
“다들 조용.”
수호 길드장, 안환재의 말에 모두가 침묵했다.
“대충 사태 파악은 됐을 거라 생각하네. 각자 소식통 하나씩은 있을 것 아닌가.”
“…….”
그들이 아무 말도 안 하는 것이 그 증명이었다.
아직 제대로 공개한 것이 아니기에, 확실하지는 않았지만, 그들도 알고 있을 것이다.
차우 길드장이 이 일과 연관이 있을 거라고.
그렇지 않으면, 갑자기 정부가 난데없이 그들을 타겟으로 삼을 리가 없지 않겠는가.
“흠. 혹시나 해서 묻는다만, 차우 길드장과 깊은 연을 맺는다던가, 그런 행동을 한 자는 없을 거라고 믿네.”
“……무, 물론입니다!”
……저 양반.
왜 다른 길드장들에게는 말하지 않았는지 알 거 같다.
처음 회의에 모였을 때도, 안환재를 중심으로 이 그룹이 형성되었지만.
지금은 그보다 더 심했다.
모두가 수호 길드장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옆에 있는 우리의 눈치도.
대형 길드의 랭킹은 쉽게 변동되지 않는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길드가 힘을 가지는 나라.
앞으로 무슨 일이 생겨서 다시 회의가 열리더라도 대부분 이 멤버라는 이야기다.
안환재는 이번 건을 계기로 좀 더 그들에 대한 발언권을 확실히 챙기겠다는 속셈이겠지.
‘진짜 무섭네…….’
안환재가 나를 보더니 살며시 웃는다.
뭐, 나한테 잘 대해주는 사람이 힘을 얻는다면 좋으니까.
사실 회의랍시고 모였지만, 이야기를 나눌 것도 없었다.
이미 대책은 신성, 황혼, 수호에서 전부 마련해 놨으니까.
이곳은 저들에게 그 결과를 보여주기 위한 자리일 뿐이다.
“저, 신성 길드장…… 혹시 이후에 시간 있으신지요?”
“긴히 할 이야기가…….”
“아뇨. 제가 좀 피곤해서. 배가 아프기도 하고.”
“그, 그렇군요…….”
미안하지만, 다른 버스를 타기에는 이미 늦었습니다.
박쥐를 기르는 취미도 없고.
그들이 힘없는 발걸음으로 회의실 밖으로 나갔다.
“대단하군. 신성 길드장. 이렇게까지 완벽하게 준비할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해연 씨 덕분이죠, 뭐.”
“아, 아니에요!”
회의실에 남은 사람들의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이제 시간만 들인다면, 이 사태는 천천히 정리가 될 것이니까.
물론 회의실에 있는 모두가 화기애애한 건 아니었다.
오늘도 묵묵히 홀로 앉아 있는 전진우가 그 증거였다.
그가 일어나더니, 우리에게는 눈길도 안 주고 밖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잘 보이려고 붙어볼 만도 한데, 하여간 자존심 하나는 강한 놈이다.
‘어떻게 할까.’
사건 자체는 이렇게 종지부를 찍겠지만, 아무래도 그 재수 없는 얼굴을 생각하자니 그냥 넘어가기가 싫었다.
“……?”
루비를 바라보자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이번에 광고를 찍으면서 느낀 점이다.
나 같은 것보다 훨씬 강한 애지만, 역시 루비한테는 그런 식으로 일상을 즐기게 해주고 싶다고.
내가 당장에 차우 길드장을 잡으라고 시킨다면, 그녀는 군말하지 않고 따르겠지.
신성 길드의 사람들도 그렇다.
내가 내리는 어떤 명령이라도 행하려 할 것이다.
하지만.
‘굳이 그런 더러운 일을 내 식구들한테 시키고 싶지는 않지.’
그렇다고 생판 남한테는 또 시키기 그랬다.
적당히 고집 있으면서도, 순종적이지 않고, 자신의 이익을 계산할 줄은 아는 놈.
싫어하는 게 티 나면서도, 약속은 지키는 미련한 놈.
마침 여기 있었네.
“야. 전진우. 밥 먹었냐?”
“……저번에도 말했지만, 내가 어째서 네놈과 밥을 먹는…….”
“아니, 진짜로 밥 먹잔 게 아니고, 잠깐 이야기 좀 하자는 뜻인데. 그것도 모르냐?”
“쯧. 그 이상한 광고를 찍더니 정신머리가 이상해지기라도 했나?”
몸이 긴장한 게 보이는데, 할 말은 또박또박한단 말이지.
역시 저놈이 적당할 거 같아.
“들어봐. 아마 너한테도 좋은 이야기가 될 테니까.”
스네이크의 망나니, 전진우.
원래 쓰레기를 상대하는 법은 저런 놈이 더 잘 아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