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tion is flowing from the water purifier in my house RAW novel - Chapter 7
우리집 정수기에서 물약이 흐른다 008화
3. 불공정 계약(3)
“흐흐흐흥.”
토요일 오후. 복권판매점을 하고 있는 윤판성은 밀려오는 손님에 바쁘게 움직였다.
매주 토요일은 로또 번호를 발표하는 날.
당연히 그 날은 많은 사람들이 몰린다.
“내가 보기엔 이번엔 2, 15, 19가 유력해.”
“아니라니까 그러네. 내가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말이야…….”
‘하하. 다 부질없지.’
자칭 로또 전문가들을 보면서 윤판성은 웃었다.
로또에 전문가가 어디 있겠는가. 그저 맞춘 사람은 천운이 따랐을 뿐이다.
막말로 로또에 당첨됐다면 이런 곳에서 죽치고 있는 게 아니라, 진작에 다른 곳으로 놀러 갔을 터.
‘뭐. 다 절박하니까 그런 거 아니겠어.’
“만 원. 자동이요.”
“예.”
많은 사람들이 로또를 사는 만큼 방식도 제각각 다르다.
그저 운을 믿고 자동으로 하는 사람도 있으며, 꿈에서 봤다고 수동으로 하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이런 부류도 있다.
‘이번에도 있구만.’
같은 번호의 로또를 여러 장 사는 것이다.
이 20대 중반의 사내가 내민 로또 용지도 그랬다.
‘좋은 꿈이라도 꿨나 보네.’
이미 당첨이라도 됐다는 듯이 찢어지게 웃고 있는 남성.
그는 로또를 제 품에 간직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 * *
“아주머니. 여기부터 여기까지 다 주세요.”
“아이고, 총각. 다 못 먹어.”
“괜찮으니까 주세요!”
“난 말렸어.”
나는 흐뭇한 표정으로 로또 용지를 보았다.
돈이 생긴다면 이런 걸 꼭 한번 해보고 싶었다.
비록 당장은 돈이 없으니 김밥X국에서 전 메뉴를 시켜보는 것밖에 못 했지만.
음식이 차례차례 상 위에 놓인다.
‘음…… 역시 다는 못 먹겠지?’
“애들아. 너희들 이거 먹을래?”
“우와! 형, 정말 그래도 돼요?”
“그래. 먹고 싶은 거 다 골라가.”
“대박!”
옆 테이블에서 김밥 한 줄을 여러 명이 나눠 먹는 꼬마들에게 음식을 양보했다.
나는 참치김밥의 꽁다리 부분을 한 입 먹으면서 흐뭇한 표정으로 로또 용지를 보았다.
‘이거면 대체 얼마냐.’
저번 로또 1등 당첨금이 25억이었나.
똑같은 번호로 다섯 게임을 샀으니 받는 비율도 상당할 것이다.
조사해 보니 5장까지는 같은 번호로 사는 사람들도 많다고 하길래 나도 그렇게 구매했다.
아마 별다른 의심은 받지 않을 것이다.
세상 살면서 로또 5등조차 당첨된 적이 없었는데.
막상 1등에 당첨된다니 손이 떨리긴 했다.
‘국물에 떨어질라.’
조심스럽게 품속에 있는 주머니에 넣었다.
물약을 팔면 수익이 나올 테지만.
아무래도 실제로 돈을 받기까지 시간이 걸리니까.
“끄윽. 계산이요.”
“21만 4천 원입니다.”
“……할부는 안 되죠?”
막상 계산하려고 하니 손이 떨렸다.
하지만 흔쾌히 카드를 내밀었다.
오늘은 기분 좋은 날이니까.
집으로 돌아가는 길.
오랜만에 시내 구경이라도 할까 싶어서 돌아다니는데 땅이 쿵쿵거리며 울리는 소리가 난다.
“뭐야?”
지진이라도 났나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흰 갑주를 입은 일단의 무리가 오와 열을 맞춰 나란히 걸어오고 있었다.
“신의 기사들이 가는 길을 막는 자, 누가 있는가.”
그들이 걸을 때마다 길에 있던 사람들이 옆으로 갈라진다.
“어우. 저놈들 또 저러네.”
“이 날씨에 무슨 갑옷이야. 쟤넨 덥지도 않나?”
“왜 난 멋지기만 하구만.”
갑주를 입은 무리가 내 앞에 서서 날 내려다보았다.
“거기 청년. 길을 비키시오.”
덩치가 무슨 내 2배는 되는 것 같다.
갑옷을 입었다고는 해도 비정상적인 크기다.
위압감 장난 아니네.
어느새 내 몸은 자연스럽게 옆으로 빠져 있었다.
“고맙소.”
갑주를 입은 20명의 사람들이 저렇게 돌아다니니 땅이 울릴 만도 하다.
‘저 사람들이 성기사인가 뭔가 하는 사람들인가.’
꽤나 유명한 사람들이기에 나도 알고 있다.
이런 찜통에 저런 갑옷을 입을 사람들은 흔치 않으니까.
자신들이 신의 기사라며 성기사라 자칭하는 집단.
길드, ‘신성’의 길드원들이다.
이름만 들으면, 이리저리 신비한 힘을 사용할 것 같은데.
막상 성스러운 힘 같은 걸 사용하는 사람은 없다고 한다.
“하긴 그런 힘 같은 게 없어도…….”
저런 갑옷을 입은 사람들이 단체로 덮치면 못 잡을 마물이 어디 있겠냐.
애초에 성스러운 힘.
신성력이라는 것이 존재하는지도 애매하다.
마법이랑 다를 게 없는 것 아니냐고 각성자들은 말하는데.
그들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젓는다.
때가 되면 나타난다나 뭐라나.
“뭐, 나랑은 관계없는 사람들이지.”
내가 저 갑주를 입는 상상을 해보았다.
입는 건 둘째 치고 움직이지도 못할 거다.
그렇게 생각하니 내 저질 체력에 암울해졌다.
“일단 체력을 기를 필요는 있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게 현대 사회다.
저번처럼 길 가던 도중에 균열이라도 나타나면 어쩌겠는가.
내 고유 능력인 만물의 주인.
특별한 물건을 만들어줄 뿐, 내 몸을 강화한다거나 하는 요소는 없다.
“그럼 내가 직접 뛰어서 기를 수밖에 없지.”
나는 가방을 열어 물약이 가득 든 페트병 하나를 꺼냈다.
이렇게 언제나 하나쯤은 가지고 다닐 생각이었다.
내 예비 목숨과도 같은 거니깐.
“밖에서 물약을 못 얻는 게 아쉽단 말이지.”
음식점에서 확인해 본 사실이다.
그곳에 있는 정수기에선 평범한 물이 나왔다.
“뭐, 집에서 받고 다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
지금은 그걸로 만족하기로 했다.
물약을 마시며 집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저번에도 느낀 거지만 참으로 사치스러운 짓이다.
뛰면 뛸수록 물약을 마시는 주기가 길어진다.
체력이 조금씩 늘고 있는 것이리라.
“첫 목표는 일단 일반인 정도의 체력…….”
일부러 운동도 할 겸 평소와는 다른 코스로 돌아갔다.
빌라 앞에 도착하자, 이런 곳에는 어울리지 않는 고급 세단이 주차되어 있었다.
“누가 이런 곳에 이런 차를 세워놨대.”
지나가다 긁기라도 했다간 대참사가 일어날 것이다.
조심스레 집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차에서 누군가 내렸다.
“이서진 씨. 맞으십니까?”
“예, 예?”
아니. 저 안 긁었는데요?
“황혼 길드장, 정해연 님께서 만나고자 하십니다.”
“아아.”
계약 건으로 곧 부른다더니 오늘이었어?
고작 하루 지났을 뿐인데.
의외로 성격이 급한 사람인 모양이네.
휴대폰을 확인하니, 부재중 전화와 문자가 와 있었다.
무음이라서 그런지 확인을 못 했네…….
“제가 운동을 하고 와서 그런데 잠시 기다려 주실 수 있나요?”
“예. 그럼 이곳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비즈니스 관련으로 가는 건데 이런 복장은 아니다.
땀 흘려서 냄새도 나고.
나는 빠르게 샤워를 끝마치고는 그나마 정상적인 옷 몇 벌을 꺼냈다.
그래 봤자 평범한 슬랙스에 흰 셔츠였지만.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얼른 가시죠.”
“예.”
이런 차는 처음 타는 거라서 긴장된다.
오오. 역시 시트가 대중교통이랑은 다르구나.
푹신푹신하고, 잠이 솔솔 온다.
나도 모르게 엉덩이가 들썩거린다.
“크흠.”
너무 주책이었나.
부끄러운 마음에 운전석의 사람을 보는데 눈이 마주쳤다.
그는 작게 미소 짓고는 다시 운전에 집중했다.
‘에이, 쪽팔리네.’
몸을 뒤로 파묻자, 푹신한 감각에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 * *
“도착했습니다.”
도착한 곳은 서울에 있는 한 고층 빌딩이었다.
일명 황혼의 길드 하우스라고 불리는 곳.
대한민국의 10대 길드 중 하나인 황혼인 만큼 가히 대기업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크기다.
‘정신 차리자. 이서진. 기죽지 마라.’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들었지만, 금방 털어내었다.
오늘은 이곳으로 면접이 아니라, 대등한 계약을 맺기 위해 온 것이니까.
일반인은 출입할 수 없는 게이트를 지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간다.
작아져 가는 밖의 풍경을 보고 있자니 곧이어 최상층에 도착했다.
길드장에 어울리는 화려한 방.
자리에 앉아 있던 정해연이 일어나고는 나에게 웃으며 다가왔다.
“먼 길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이서진 님.”
“아뇨. 덕분에 편하게 왔어요. 이야, 역시 고급 시트라 그런지 잠이 솔솔 오던데요. 우리 집에 있는 싸구려 방석이랑은 달라.”
분위기를 돌릴 겸 너스레를 떨었다.
하지만 정해연은 그 소리를 듣자마자 곧장 얼굴을 굳혔다.
“……죄송합니다. 다음에 모시러 갈 때는 절대 그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매우 좋았다는 말입니다!”
굳어진 얼굴은 펴지지 않았다.
‘그냥 입을 다물고 있어야겠다.’
분위기를 좋게 하려 할수록 뭔가 이상해진다.
계약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그나마 숨이 트였다.
“혹시 예의 그 물약을 가지고 오셨는지요?”
“그럴 것 같아서 하나 챙겨왔어요.”
앞으로 판매하게 될 상품이다.
다시 한번 보고 싶어 할 거라고 생각해 미리 하나 챙겼다.
페트병에 있는 거로 가져오기는 그래서 대충 근처에서 산 1ℓ짜리 보온병에 담아왔다.
‘무슨 음료수 팔러 온 잡상인 같네.’
그렇게 피식 웃었으나. 정해연은 시종일관 진지한 표정이었다.
“……이렇게 많은 양이라니. 거기다가 이 병. 겉으로 보기에도 특별한 기운이 느껴집니다. 역시라고 할 수 있겠군요.”
“아뇨. 그냥 집 근처에서 산 건데.”
신비하다느니, 역시 감각이 있으시다느니. 그런 소리를 뱉던 정해연이 순간 몸을 멈췄다.
“그, 그러시군요. 혹시 저희 측에서 전용 용기를 보내드릴 테니 앞으로는 그곳에 담아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저야 좋죠.”
고급스러운 병 같은 걸 인터넷에서라도 찾아봐야 하나 고민했는데 잘 됐다.
“그럼 한 달에 전용 유리병을 스무 개. 이서진 님의 댁으로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예? 그건…….”
“역시 너무 많으십니까? 하긴 이만한 물건이라면 제조 과정이 쉽지 않겠죠. 한 달에 열 개면 충분하겠군요.”
“아니. 턱없이 부족해서요.”
“……부족하다고요? 혹시 물약의 생산량이 얼마나 되는지 알려주실 수 있습니까?”
현재 최대치가 4.5ℓ고 시간당 1ℓ 회복되니까.
“대충 20ℓ는 넘을 거 같은데요?”
“2, 20ℓ! 한 달에 그 정도나 되는 물량을 확보할 수 있단 말입니까?”
한 달이 아니라 하루다.
거기다 마나 물약까지 합하면 거의 40ℓ다.
하지만 충격받은 모습을 보자니 그 말은 아껴두기로 했다.
“마, 말도 안 돼.”
정해연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리다가 이내 두 손으로 자신의 뺨을 찰싹 쳤다.
뭐야. 저거 무서워.
“역시 범상치 않은 인물이시란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던 그녀가 비장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정도나 되는 물량을 저희 쪽에 맡겨주신다는 말이죠?”
“예. 그렇죠.”
내가 무슨 인맥이 있겠는가.
아는 사람이라곤 황혼 길드장뿐이다.
인맥이라고도 할 수 없는 단순한 비즈니스 관계.
“부끄럽게도 제가 아는 사람이 정해연씨밖에 없어서요.”
“……!”
그런 말을 전했는데, 몸을 전율하면서 눈을 크게 뜬다.
또 왜 저래?
“그렇군요. 믿을 사람이 저밖에 없다. 이 말씀이시군요. 절대로 실망시키지 않게 노력하겠습니다.”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주먹을 불끈 쥔다.
저번에도 생각했던 거지만 정해연에 대한 소문은 전부 헛소리가 틀림없다.
이렇게 착한 사람이 그런 음해를 듣는다니 팬클럽 N호인 나로서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이것이 저희 측에서 내미는 조건입니다. 혹시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으시다면 부디 말씀해 주세요.”
“예.”
본디 계약서란 한 글자, 한 글자 꼼꼼하게 읽는 거라고 배웠다.
내가 계약에 대해 뭘 알겠냐만 그래도 대충 볼 생각은 없었다.
‘정신 차리자, 이서진. 여기서 코 꿰일 수가 있는 거야!’
아무리 친절해 보여도 그 속은 흉할 수가 있는 법.
나는 뚫어져라 계약서를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확히 5분 뒤.
“……저기. 이 계약이 진짜 맞나요?”
“역시 그거로는 성에 안 차시는 모양이군요. 다시 해오겠습니다.”
“아뇨! 그게 아니라…….”
공정한 계약.
그것만을 위해서 여기까지 왔건만 내가 보게 된 것은 살면서 보아온 어떤 것보다 ‘불공정 계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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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진(이하 ‘갑’ 이라 칭한다)과 황혼 길드 길드장 정해연(이하 ‘을’ 이라 칭한다) 은 ‘갑’이 제조한 물약을 위탁 판매함에 있어서 다음과 같이 계약을 체결한다.
1) 갑은 을이 물약을 판매하도록 일정한 기준에 따라 을에게 물약을 위탁하며…….
2) 갑이 을에게 위탁한 물약은 규정에 따라 갑이 을에게 반환을 요구할 수 있고, 을이 갑의 반환 요구에 응하지 않을 경우 해당 물약의 시장 가치의 10배의 금액을 지불한다.
3) 을은 갑이 위탁한 물약이 판매되었을 경우 갑의 요구에 따라 판매자의 정보를 공유하여야 한다.
4) 갑은 원하는 때, 원하는 물량을 을에게 공급할 수 있다.
5) 갑은 언제든지 계약을 해지할 수 있으며, 을은 그에 대한 거부 행사를 할 수 없다.
6) 을은 갑에게 물약 판매 금액의 전액을 지급하며, 해당 금액의 10%를 추가 지급한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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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이런 내용이 쫘르륵 있었다.
이게 뭐냐는 듯한 눈빛으로 정해연을 쳐다봤으나.
그녀는 마치 비에 젖은 강아지 같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마, 마음에 안 드십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