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tion is flowing from the water purifier in my house RAW novel - Chapter 78
우리집 정수기에서 물약이 흐른다 079화
26. 보잘 것 없는(2)
“……업그레이드를 하던가 해야지, 원.”
“성자님! 괜찮으십니까!”
“야, 너 괜찮아?”
당장에 내게 들이닥쳤던 위협보다 이전부터 놀리듯이 안 보이는 저 메시지가 더 거슬렸다.
“응. 그냥 자기 혼자 가버리더라.”
“…….”
그렇게 말하고 나니 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아…….
이 두 사람은 그 촉수한테 날아갔었지.
“……또 성자님에게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자신에게 화가 난다는 듯 주먹을 부들부들 떠는 루비.
“아니야. 별일 없었는데, 뭘.”
일단은 그 괴상한 것이 다시 나올지도 모르니까 재빨리 이곳부터 정리하는 게 우선이었다.
이상 현상에 당황했던 덩치 형님들도 빠르게 이곳에 있는 물건들을 입구로 나르기 시작했다.
그사이에 우리는 철창에 갇힌 것들을 보았다.
―크르르륵
철창에 갇혀 있는 그룸은 총 세 마리. 이곳에 그놈이 안 온 지 몇 개월은 족히 지났으니, 그동안 이대로 방치되어 있던 건가.
‘좀 불쌍한데.’
이놈들은 마물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 안 된단 걸 알고 있었지만, 순둥이와 매일 놀아주는 꼬물이를 생각하니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그룸들을 보며 이태영이 말했다.
“이놈들 전부 여기서 죽일까요?”
“……아냐. 내가 처리해도 될까?”
“형님이요? 제가 해도 되는데…….”
“넌 저분들이나 도와드려.”
“예. 그럼 그렇게 할게요. 형님.”
이 방 말고도 다른 곳이 많았기에 이유지 또한 다른 곳을 둘러보러 갔다.
루비도 내가 무언가 하려는 걸 알아챘는지, 잠시 뒤로 물러났다.
―크아아앙.
―그아아앙.
내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사라지고나자 역시 아까 보았던 것처럼 울음소리가 달라졌다.
익숙한 목소리다.
나는 바로 앞에 꼬물이를 소환시켰다.
―끄앙!
기껏해야 손바닥만 한 크기의 그룸인 꼬물이와 철창에 갇힌 2m가량의 거대한 그룸들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끄앙! 끄아앙! 끄아아앙!
―크아앙!
―그아앙!
‘……얘네 뭐 하는 거야?’
무언가 대화를 하고 있는 건가.
무슨 내용인지는 모르겠으나, 꼬물이가 이쑤시개 같은 손을 이리저리 흔들면서 무언가를 설명하는 것처럼 보였다.
재밌는 광경이다.
시무룩해져 있던 순둥이도 그 모습을 보면서 방실거렸다.
‘우와아…… 꼬물이들 대따 크다!’
저놈들을 어떻게 해야 할까.
아마 저놈들이 내게만 다른 반응을 보이는 것은 이 스위치 때문일 것이다.
‘주인이 바뀌었다고 했나.’
이전에는 스위치를 들이대어도 누르기 전까지는 적대감을 표출했었는데.
이제는 완전히 내게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그때 했던 것처럼 스위치를 누르면 이 녀석들도 꼬물이처럼 작아지는 걸까.
―끄앙!
이야기가 끝이 났는지, 꼬물이가 뒤를 돌아 나를 쳐다보았다.
철창 안에 있는 그룸들 또한 나를 응시했다.
그들이 내게 무엇을 원하는지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들어갈게.”
나는 철창의 문을 열고 그룸들의 앞에 섰다.
내 행동을 본 루비가 급히 다가왔지만, 손을 들어 안심시켰다.
세 마리의 그룸들이 나를 둘러쌌다.
이러고 있자니 은행에 갔을 때가 생각난다.
그 당시에도 이런 식으로 그룸들이 내 주변을 둘러쌌었지.
상황은 완전히 달랐다.
그때는 날 죽이려고 했지만, 지금은 이것들에게서 그런 의도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무릎을 꿇는다는 표현은 이상한가.
내 앞에 일제히 나열한 그룸들을 하나씩 둘러보다가 스위치를 눌렀다.
스위치에서 빛이 남과 동시에 세 마리의 그룸이 그 안으로 빨려 들어왔다.
잠시 후.
꼬물이의 옆에 있는 그림자에서 꼬물꼬물하고 무언가 꿈틀거리더니 뿅! 하며 작고 귀여운 것들이 튀어나왔다.
고작해야 손가락 두 마디만 한 크기의 작은 그룸들.
처음 꼬물이가 등장했을 때와 똑같은 크기였다.
―끄앙!
세 마리의 신참 꼬물이들 앞으로 손바닥 크기의 대장 꼬물이가 걸어 나왔다.
그리고는 제 딴에는 위엄 있는 포즈랍시고 두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나머지 꼬물이들도 두 손을 번쩍 들면서 외친다.
―끄아앙!
그 합창은 오래가지 않았다.
내 어깨 위에서 내려온 순둥이가 그들을 단숨에 낚아챘기 때문이다.
“우와아! 새 꼬물이들이다아!”
―끄앙! 끄아앙!
―끄아악앙!
―끄악!
―끄아앙!
순둥이의 두 손에 잡혀 비명을 지르는 꼬물이들을 보다가 피식 웃음을 지었다.
우리 순둥이, 친구가 더 늘어난 거 같네.
* * *
탐색을 끝낸 이유지가 내게 다가왔다.
“다른 곳은 어때?”
“…….”
내 질문에도 이유지는 답하지 않았다.
입술을 깨물고 있는 그녀의 표정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얼마나 세게 물었는지 입술에서 피가 흐른다.
나는 품에 있던 손수건을 꺼내 이유지의 입술을 닦았다.
“흣! ……뭐야?”
“뭐긴. 네 입술에서 피난다.”
눈치 있는 꼬물이가 꺼내준 물약의 뚜껑을 열고는 이유지의 입에 가져갔다.
“입 벌려.”
“으, 응?”
내가 병을 기울일 때마다 이유지의 목울대가 꿈틀거린다.
마치 아기 고양이를 품에 안고 이유식을 먹이는 것처럼 조심스럽고, 흘리지 않게.
그러고 있자니 헛! 하고 정신을 차린 이유지가 병을 낚아챘다.
“나 혼자서도 먹을 수 있거든!”
“……잘만 마셔놓고.”
그러나 이미 전부 마신 상태였다.
이유지의 입술에서 나던 피도 금세 멎어 있었다.
“이제 좀 진정됐냐?”
뭘 보고 왔는지는 모르겠으나, 꽤나 충격을 받은 모양이다.
“……응.”
“뭘 봤길래 그래?”
이유지는 말없이 다른 방으로 나를 이끌었다.
‘확실히…….’
그곳에도 철창들이 가득 있었다.
철창 안에 있는 것들은 어디선가 보았던 마물들.
그러나 그중에 살아 있는 생물은 없었다.
당연하겠지.
마물이라고 하더라도 아무것도 먹지 않고 살 수는 없는 법이니까.
아사당한 마물들의 모습은 처참했다.
나는 그것들을 보지 못하게 순둥이를 가슴팍에 안았다.
철창을 만져보았다.
특수한 재질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 평범한 창살이다.
마물들의 완력이라면 충분히 뚫고 나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마물들은 이곳에서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고 죽는 것을 선택했다.
아까 보았던 그룸도 그렇고, 스위치를 이용해서 명령이라도 내렸던 건가.
내 입장에서는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저것들이 밖을 돌아다녔으면 누군가 위험에 빠졌을지도 모르니까.
“…….”
분명히 이유지도 그렇게 생각하겠지. 그런 것치고 표정이 좋지는 않았지만.
‘뭐, 좋게 볼 광경은 아니지.’
억지로 감금되어 쓸쓸하게 죽어갔으니까.
이 마물들을 보고 무슨 감정을 느끼고 있는 걸까.
본인은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지만, 어느새 이유지의 뒤쪽으로 기다란 꼬리가 뻗어 나와 있었다.
마치 눈표범의 꼬리를 연상시키는 귀여운 얼룩무늬.
나는 조심스럽게 다가가서는 그 꼬리를 살짝 움켜잡았다.
“히얏?”
이상한 소리를 낸 이유지가 내게서 거리를 벌리고 갸르릉- 소리를 내며 나를 노려보았다.
“무슨 짓이야!”
표독스러운 눈빛.
평상시에 알고 있던 이유지다.
역시 쟤는 저렇게 사나운 게 재미있단 말이지.
나는 내 몸으로 철창을 가리며, 이유지의 앞에 서고는 히죽 웃었다.
“저번에 약속한 거 오늘 지키려 하는데, 시간 되냐?”
“……약속?”
“같이 밥 먹기로 했잖아.”
“아…….”
그 말에 멍하니 나를 쳐다보던 이유지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미리 말해두지만, 나 엄청 비싼 거 먹을 건데?”
“걱정하지 마라. 이 오빠가 돈이 많아서 네가 아무리 먹어도 전혀 타격이 없으니까.”
“하! 오빠는 무슨!”
옵빠. 거리면서 애교 부릴 때는 언제고.
완전히 기운을 차린 듯 보이는 이유지가 방으로 들어온 이태영의 등을 두드렸다.
“이태영! 이 팀장께서는 중요한 비지니스 약속이 있으니까 고생 좀 해줘!”
평소라면 그녀를 노려보고도 남을 이태영이었지만, 이번엔 반응이 조금 달랐다.
철창을 한 번 둘러본 이태영이 씁쓸한 표정을 짓더니 말한다.
“알겠어요. 여긴 제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어디 가서 맛있는 거라도 먹고 오세요. 선배.”
“……뭐야. 재미없게. 우리 너 빼고 맛있는 거 먹을 건데?”
“전 아까 밥 먹고 와서 괜찮아요.”
이유지의 어깨를 한 번 두드린 이태영이 내게로 다가오더니 작게 속삭였다.
“저희 선배 잘 부탁드릴게요.”
언젠가 들어본 말을 하며 이태영이 문밖으로 나갔다.
시선을 돌리니 이유지가 발로 애꿎은 바닥을 차고 있었다.
“흥. 내가 선배인데. 온갖 폼은 다 잡는다니까. 짜증 나. 진짜.”
“야야. 바닥 긁힌다.”
“긁히면, 뭐!”
“……그냥 그렇다고. 먹고 싶은 거라도 있냐?”
“으으. 단 거! 혀가 녹아버릴 정도로 단 걸 잔뜩 먹고 싶어!”
……그런 걸 먹으면 진짜로 혀가 녹지 않을까.
그래도 저번 약속도 있으니, 오늘은 얘가 좋아하는 거로 맞춰줘야겠지.
“그러고 보니, 그때 약속은 순둥이도 같이 가자고 하지 않았나? 오늘은 안 보이네?”
이런 위험한 곳에 평범한 애를 데려올 리가 없었지만, 이유지는 당연하다는 듯이 순둥이를 찾는다.
‘하긴, 워낙 촉이 좋은 애니까.’
내 다리 뒤에서 인간 모습의 순둥이가 빼꼼하고 고개를 내밀었다.
“나 여깄는데!”
갑자기 나타난 어린 소녀.
이상한 게 분명한 상황이지만, 이유지는 그런 순둥이를 보며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오! 오랜만이야, 순둥아! 잘 지냈어? 이 약골 아빠가 서운하게 해준 건 없고?”
“아빠랑 고기 이~ 만큼 먹었어! 엄청 맛있었어!”
“으구. 그랬어요? 우리 그럼 이번에도 맛있는 거 잔뜩 먹으러 갈까?”
“맛있는 거! 순둥이가 좋아하는 거!”
“언니도 좋아해.”
순둥이의 볼을 만지작거리며 이유지가 활짝 웃는다.
이전에도 보았지만, 어린 애들을 꽤나 좋아하는 것 같았다.
……그보다 약골이라는 건 부정하지 않는구나.
순둥아, 네 아빠가 그렇게까지 약하지는 않은데…….
“읏차!”
이유지가 순둥이를 들어 올리고 제 품에 안았다.
순둥이가 누군가의 품에 저렇게 자연스럽게 안기는 건 나와 루비 빼고는 드물다.
어린 애들은 선한 사람을 알아본다는데, 순둥이도 그런 걸까.
“으음!”
이유지의 가슴에 얼굴을 기댄 순둥이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왜 그래?”
“다른 인간들이랑 무언가 달라!”
다른 사람의 가슴팍에 머리를 기댈 때면 언제나 고개를 젓고 내 품을 찾는 순둥이다.
뭐가 다르단 건진 모르겠지만, 이번에도 그런 것이리라.
“아니! 그게 아니야! 으응! 설명하기가 어려워!”
두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지끈 싸맨다.
저런 행동은 또 어디서 배웠대.
잔뜩 고민하는 모양새를 보고 있자니 상당히 귀여웠다.
고민하는 순둥이를 향해 이유지가 자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당연히 다르지. 이 언니가 특출나게 더 귀엽지?”
“귀여워!”
“네가 더 귀여워.”
크게 신경 쓸 것은 아니었는지 금세 원래대로 돌아왔다.
순둥이의 정서적인 부분을 위해서라도 이런 곳에 오래 머물고 싶진 않다.
미안하지만 뒷일은 이태영에게 맡겨두자.
“그럼 이만 갈까?”
밖으로 나와 번화가 쪽으로 향하려고 하는데 루비가 내 옷을 조심스럽게 잡아당겼다.
“성자님.”
“응. 루비야, 왜?”
“저는 미리 성지로 돌아가 있어도 괜찮겠습니까?”
“어?”
성지.
우리 집을 말하는 것이다.
그 말에 나도 모르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루비가 내 옆에서 자발적으로 떠난다고 말한 것은 처음이다.
몸이 안 좋기라도 한 걸까.
그런 생각에 루비의 눈을 바라봤지만 그런 게 아니었다.
“……저 자신의 부족함을 느꼈습니다. 아직 전 성자님의 옆에 나란히 서기에는 한없이 약했던 것입니다.”
아까 그 촉수의 공격을 받아내지 못한 걸 아직까지 신경 쓰고 있었구나.
애초에 나도 알 수 없는 힘이었다.
거기다가 별달리 다친 곳도 없으니 괜찮다고 말했음에도 루비는 고개를 저었다.
이유지에게 안겨 있는 순둥이의 머리를 쓰다듬은 루비가 말했다.
“성자님을 부탁할게. 순둥아.”
“응! 솜뭉치도 열심히 해!”
힐끗.
이유지와 루비의 두 눈이 마주친다.
서로 말없이 바라보기를 잠시, 루비는 정말로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
루비가 사라진 곳을 한번 쳐다본 이유지가 내게 말했다.
“쟤가 텔레비전에 나왔던 걔구나?”
“어, 뭐. 그렇지.”
“흐응. 누군지 되게 궁금했거든. 너를 그렇게 따른다니, 꽤나 신기한 사람이잖아?”
“……내가 어때서?”
“으휴. 내 친구는 왜 이렇게 인기가 많은 건지 모르겠네. 이러다 내가 놀아줄 시간도 없어지는 건 아닌지 모르겠어.”
그리 말하며 한숨을 푹 쉰다.
놀아주기는 누가 놀아주냐.
굳이 따지자면 내 쪽에서 놀아주는 것이 맞으리라.
날 선 고양이와 집사의 관계니까.
굳이 말하지는 않았다.
또 갸르릉거릴 게 뻔하다.
그런 속도 모른 채 이유지가 밝은 목소리로 외쳤다.
“당 부족해서 쓰러지겠네. 얼른 가자, 빨리빨리!”
* * *
“……하아. 더워 죽겠네.”
“하핫! 누가 보면 연예인이라도 되는 줄 알겠네! 그 촌스러운 빵모자는 뭐야?”
“……네가 몰라서 그래. 맨얼굴로 다니면 여기저기서 몰려든다니까?”
“이래서 칭찬은 함부로 하면 안 돼요. 으휴. 불쌍한 우리 서진이. 결국, 연예인병이 걸려 버렸구나.”
그렇게 말하며 내 어깨를 토닥거린다.
재밌어 보이는지 순둥이도 똑같이 따라 한다.
이유지가 잘 아는 곳이 있다며 데려온 유명 디저트 카페.
자리마다 천막이 처져 있어서 안으로 들어오고부터는 꽤나 편하게 있을 수 있었다.
말은 저렇게 하지만, 이유지 나름대로 배려한 것이리라.
‘……그럴 거면 자기도 신경 좀 쓰지.’
워낙 털털한 성격의 이유지지만, 길가에 지나다니는 사람들과 비교해도 월등한 외모의 소유자다.
내가 땀을 뻘뻘 흘리며 빵모자를 쓰고 안경을 썼음에도 사람들의 시선은 우리 쪽으로 몰렸다.
정확히는 옆에서 나란히 걷고 있는 이유지를 향해서.
‘귀여운 편이긴 하지.’
가끔씩 튀어나오는 꼬리가 떠오르는 애쉬그레이 색의 단발머리.
언제나 표독스러운 눈빛을 하고 있는 눈동자는 옅은 회색빛을 띠고 있다.
눈 밑에 있는 작은 점 하나 또한 그녀의 매력을 더욱 돋보이게 해준다.
멍하니 얼굴을 구경하고 있자니 남들 앞에서는 사납던 눈매가 초승달처럼 휘어진다.
장난스러운 눈웃음을 지은 이유지가 한 손으로 자신의 턱을 받치며 말했다.
“응? 왜 내 얼굴을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봐? 아하. 우리 서진이. 드디어 이 누님의 외모에 푹 빠져 버린 거구나? 그렇구나, 그렇지?”
“……이거나 먹어라.”
“웁!”
포크로 케이크를 입에 가득 쑤셔 넣어주었다.
이유지는 나를 찌릿- 째려보더니 이내 그 달콤함에 표정이 사르르 녹았다.
“으으음~”
넌 말하지 않을 때가 가장 예쁘다.
그런 말이 있다던데, 얘를 두고 한 말이었나.
‘루비도 케이크 좋아할 텐데.’
이유지가 자신하며 데려온 이유가 있는 곳이었다.
분명히 같이 왔다면 맘에 들어 했으리라.
루비를 위해서 돌아가면서 몇 개 포장이라도 할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휴대전화가 울렸다.
탁자 위에 올려져 있던 휴대전화를 힐끔 쳐다본 이유지의 표정이 구겨진다.
[정해연]
따로 말은 하진 않았지만, 상당히 심기가 거슬리는 모양이다.
저번에 연회에서도 그렇고 둘의 사이가 꽤나 안 좋아 보이던데.
“……지금 엄~ 청 바쁜데, 굳이 받을 필요가 있나?”
“바쁘긴 무슨. 지금 하는 게 케이크 먹는 것밖에 없으면서.”
“완전 다르지! 네 절친한 친구인 이유지와 단둘이 케이크를 먹고 있는 거잖아?”
미안하지만, 정해연도 내게 있어선 친한 친구나 다름없다.
그리고 둘은 무슨.
입가에 생크림이 잔뜩 묻은 순둥이도 이유지의 무릎 위에 있었다.
밖으로 나가서 전화를 받으려 하자 이유지가 내 손을 잡는다.
“그냥 여기서 받아. 나가면 또 사람들이 알아볼 거 아니야.”
그렇지.
그걸 까먹고 있었다.
포크로 케이크를 깨작거리고 있는 이유지를 구경하면서 전화를 받았다.
“늦게 받아서 죄송해요.”
―아니에요! 저야말로 갑자기 연락드려서 죄송해요.
“흥. 죄송한 건 아나 보네.”
이유지의 퉁명스러운 말이 들리지 않도록 살짝 손으로 가리며 통화를 계속했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했는데, 단순한 용건이었다.
―괜찮으면 차라도 한 잔 어떨까 싶어서요. 그…… 오랜만에 순둥이도 보고 싶으니까!
오랜만이라기엔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평소라면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선약이 있는데.’
“아무래도 안 될 거 같네요.”
―……그래요? 아쉽네요…… 사실은 지금 유명 디저트 가게에 와 있거든요. 같이 차라도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면 좋겠다 싶어서 연락해 봤어요. 괜히 방해한 거 같아서 죄송해요, 서진 씨.
“전혀 방해 안 됐어요.”
“완~ 전히 방해였거든요~?”
이유지의 말을 무시하며 방금 대화를 곱씹어봤다.
유명 디저트 가게라.
그러고 보니 여기도 비슷하네.
“정말요? 저도 마침 디저트 가게에 있거든요.”
―네? 누구랑…… 아, 순둥이랑 같이 간 거군요.
“순둥이랑만 온 건 아니고…….”
―루비 씨요?
나는 입이 삐죽 나와 있는 이유지를 보다가 단어를 골랐다.
“친구랑 와 있어요.”
―……아아. 친구랑 계시구나.
아무래도 이유지의 이름을 말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으니까.
“흐흥.”
갑자기 이유지가 기분 좋은 소리를 낸다.
내가 조용히 하라는 의미로 손가락을 입에 가져가자, 똑같이 따라 하며 헤실헤실 웃는다.
“죄송해요. 다음에 만나도록 하죠.”
―아니에요! ……응? 그런데 잠시만요.
“왜요?”
―혹시 제 목소리 들리세요?
당연히 들린다.
계속해서 통화를 하고 있으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무언가 좀 더 가깝게 들리는 듯한…….
여긴가?
그 소리와 함께 우리가 있는 자리를 가리고 있던 천막이 열렸다.
“서진 씨!”
“어, 해연 씨?”
천막을 연 사람은 정해연이었다.
디저트 가게 어쩌구 하더니 설마 같은 곳이었을 줄이야.
정해연의 옆에는 이전에도 보았던 한미나라는 이름의 비서도 있었다.
나를 발견한 정해연의 얼굴에 웃음이 가득 담겼다.
오래전에 헤어진 연인이라도 만나듯이 그녀가 반갑게 인사했다.
“이런 곳에 계셨구나! 진짜 상상도 못 했어요. 아, 맞아. 친구분이랑 같이 계신다고 하셨지…….”
그렇게 말하며 정해연의 시선이 돌아갔다.
어째선지 방금까지 덥다고 느꼈던 실내가 순식간에 추워지는 기분이다.
마치 미래시를 보듯이 세상이 느려졌고.
잠시 후, 내 두 친구의 입이 열렸다.
“……네가 여긴 왜 있어?”
“……당신이야말로 이곳엔 왜 있는 건가요?”
두 여성의 사나운 눈빛이 서로를 노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