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tion is flowing from the water purifier in my house RAW novel - Chapter 80
우리집 정수기에서 물약이 흐른다 81화
26. 보잘 것 없는(4)
“그렇지! 조금만 더, 더 힘내 봐!”
“거, 집중 안 되게! 저리 좀 가 있으세요!”
“흐하하! 이거 미안하군. 아무리 봐도 신기하단 말이야. 나는 몇 번을 해도 저 반응이 안 일어나는데.”
마치 파도가 일어나듯이 마석에 변동이 일어난다.
검은빛의 마석은 내 마나와 뒤섞이더니 서로를 부둥켜안는 것처럼 고루 섞이기 시작했다.
“오오…….”
몇 분 후.
두 손에 쥐고 있던 마석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익숙해진 탓인가, 요즘 들어 이 작업이 더 쉬워졌다는 기분이 든다.
마석을 들어 올린 박명훈이 감탄을 내뱉는다.
“언제 봐도 최고야! 이것만 있으면 무엇이든 만들 수 있다고!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아뇨. 전 잘 모르겠습니다만.
이제는 고정 스케줄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의 일과다.
황혼의 연구소에서 박명훈과 만나고, 그가 만든 발명품을 구경하고, 그것에 대한 토론을 하며, 마석의 정화 작업을 반복한다.
사실 토론이라고 할 것도 없다.
박명훈이 말하는 것들은 내게 있어서 대부분 이해가 가지 않는 것들이었으니까.
다만, 그가 만들어 낸 것들은 그런 이해가 필요 없을 정도로 대단한 것들이었다.
내게 내민 이 배낭도 그랬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디자인의 가방이었지만 그것들과는 가치가 달랐다.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배낭을 보면서 박명훈에게 물었다.
“……이게 가능은 한 겁니까?”
“응? 자네가 그런 걸 물으면 어떻게 하나? 이미 이 기술에 관해서는 자네를 따라올 자가 없지 않은가?”
“……그건.”
자랑이라도 하는 겐가?
그런 말을 하며 툴툴거리는 박명훈을 향해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이전에 한 번 박명훈이 우리 집으로 찾아온 적이 있었다.
정화된 마석을 전부 다 사용했다고 했었나.
그런 것쯤은 전화로 하면 될 건데, 연구를 제외한다면 엉뚱한 면모를 보여주는 양반이다.
근래 하도 우리 집 옥탑방에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서 그런가.
나는 별생각 없이 그를 집으로 들였었다.
―응? 자네 같은 연금술사가 이런 허름한 곳에 살다니 조금 의외로군. 하하!
호탕한 웃음소리를 내며 박명훈이 안으로 들어왔고.
동시에 옥탑방의 내부를 보자마자 큰 충격에 빠진 표정을 지었다.
―이, 이런 게 가능하다니! 대단해! 이건 혁명이야!
연신 침을 튀기며 우리 집 옥탑방에 관한 찬사를 내뱉던 그는 곧장 자신의 연구실에 박히게 되었다.
몇 주가 지나고, 지나치게 잠잠하던 그에게서 연락이 왔다.
―완성됐네.
뭐가 완성됐다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며 찾아온 것이 오늘이다.
그리고 박명훈이 보여준 것은 그동안 내가 보아왔던 그의 발명품들 중에서도 가장 특별했다.
나는 배낭을 열고 안쪽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마치 도X에몽의 주머니처럼 내 몸이 쑤욱하고 들어간다.
“크하하! 어떤가, 자네가 구현한 것에 비하면 보잘것없지만. 꽤 쓸 만하지 않겠나!”
겉으로 보이는 배낭의 크기로는 절대로 있을 수 없는 내부 공간.
좀 더 몸을 기울이니 손이 바닥에 닿기는 했지만 이 정도만 해도 기존 공간보다 훨씬 넓었다.
“자네의 연구실과 비교하자면 부끄러울 지경이군. 이제 와서 생각해 보자면 그런 고정 관념이 문제였어. 겉이 보잘것없다고 해서, 그 내부 또한 별것 없을 거란 생각을 하다니…….”
연구실이 아니라, 평범하게 내가 사는 집이다.
그리고 겉으로만 보자면 우리 집 건물이 보잘것없는 것도 맞고.
“연금술사가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마음가짐인데 말이야. 정작 자네만 보더라도 겉으로 보기엔 그렇게 대단한 연금술사로 보이진 않지 않은가! 그렇군. 그래서 그런 거였어!”
무언가 크게 깨달음을 얻은 사람처럼 연신 놀란 표정을 짓는다.
“그래서 최대한 이것도 외견을 평범하게 만들어봤지.”
……이게 가능한가?
그동안 지구의 기술이 급격한 진보를 이루었다고는 하지만, 이것만큼은 규격 외의 성과다.
“그룸. 그놈들의 수정을 사용해 보았지.”
어쩐지 꼬물이가 생각난다 했다.
자신이 마음에 드는 것을 뱃속에 보관하는 그룸.
그들의 신체 구조는 확실히 평범하진 않았으니까.
생전에 사용하던 특성 및 능력들이 마물들의 몸속에 있는 마석에 남아 있다고 했었나.
마석에서 그것을 추출해 자신이 만든 발명품과 결합시킨다.
혹시나 하고 박명훈에게 설명을 들었지만, 나로서는 도저히 따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쉬워. 수정의 양이 더욱 많기만 했어도 다양한 것을 실험해볼 수 있었을 텐데 말이야…….”
근래 들어서 그룸들이 발견되는 횟수가 아예 없다시피 하긴 했지.
스위치를 누른다고 내게 찾아오지는 않았고.
어디 숨어라도 있는 걸까.
‘……그래도.’
이미 이것만으로도 충분한 성과다.
이름을 붙인다면 뭐라고 해야 할까…….
‘아공간 배낭?’
던전에 장시간 체류하는 각성자들에게 있어서 이것은 획기적인 아이템이 될 것이다.
배낭 외에도 좀 더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할 수 있는 곳이 있겠지.
뭐, 정작 재료가 될 수정을 얻을 곳이 없었지만.
꼬물이의 몸을 뒤적뒤적거리는 상상을 하다가 이내 털어냈다.
순둥이의 소중한 친구한테 그런 짓을 할 수는 없지.
“그럼 이것도 가져가겠나?”
“음…….”
획기적인 아티팩트인 건 맞지만, 나로서는 그다지 필요 있는 게 아니었다.
그룸의 수정을 이용해서 만든 배낭이라 해봤자, 그룸 그 자체를 가지고 다니는 것에 비교할 바가 아니니까.
“하긴. 자네라면 이것보다도 더 훌륭한 걸 가지고 있겠지.”
“해연 씨, 길드장에게라도 건네 드리는 게 어때요?”
“오. 그것도 좋은 생각이군. 소중한 물주님에게 뇌물이라도 바치라는 것인가. 그것 또한 연금술사로서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미덕이지. 이거 또 한 가지 배워가는군.”
……그런 뜻은 아니었는데.
“아, 그러고 보니 부탁이 하나 있는데 들어줄 수 있겠나?”
“무슨 부탁이요?”
세이크리드 스트로베리 때도 그렇고, 여러모로 신세를 진 사람이다. 몇 가지 부탁쯤이야 간단하지.
“어떠한 마석 하나를 구해줬으면 한다만…….”
갑자기 웬 마석?
그보다 그런 건 황혼 길드 쪽에서 구해주지 않나?
“……크흠. 아무리 나라고 해도 근래 사용한 비용들을 생각하니까 가슴에 찔려서 말일세.”
……하긴.
하루 종일 연구에만 몰두하는 박명훈이다.
그가 사용하는 재료들의 양도 어마어마하겠지.
“부탁하네! 그 마석으로 만들어 낸 물건은 자네에게 줄 테니까!”
그렇다면 손해 볼 것은 없었다.
아니, 오히려 마석 하나만 구해주고 그로 인한 결과물을 통째로 얻을 수 있으면 말도 안 되게 이득이지.
“좋아요. 어떤 건데요?”
“오오! 좋아, 좋아. 솔직히 무슨 마석인지 정확하게는 모르고…… 소문에 의하면 매우 희귀한 마물이 발견되었다고 하는군.”
“매우 희귀한 마물?”
“그래. 그것도 보스급 마물의 마석이야. 아무래도 이번에 그 던전을 공략했던 길드 측에서 경매를 연다는 모양이더군.”
“경매라…….”
그동안 필요한 마석들은 전부 정해연 측에서 구해줘서 잘 몰랐는데, 저런 식으로 구하는 것이었구나.
하긴…….
각 던전에서 보스가 나오는 것은 단 한 번뿐이다. 그 정도 되는 놈들의 마석은 하나같이 가격이 비싸다.
질 좋은 물약과 장비의 메인 재료가 될 것이니까.
마석의 비밀을 아는 사람이라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 만하다는 거다.
그런데 정작 아는 사람은 박명훈, 그 혼자 아닌가?
“……아닐세. 나 말고 한국에서 최소한 한 명은 더 알고 있어. 그래서 부탁하는 걸세. 최소한 그놈한테만은 뺏기고 싶지 않거든.”
경쟁자가 있다, 이거구나.
누굴까.
“그 경매라는 게 어디서 하는 건데요?”
“야, 규범아! 어디라고 했지?”
“……그거 꼭 하셔야 하는 겁니까?”
옆에서 마석의 정화를 하고 있던 강규범이 한숨을 쉬며 위치를 적어주었다.
부산.
……좀 머네. 아무래도 금방 갔다 올 거리는 아니었다.
“알겠어요. 경매에 참가하고, 이 물건을 받아오면 되는 거죠?”
“오오, 그래. 그래. 어차피 그것의 진짜 가치를 아는 사람은 몇 되지 않으니까, 그놈들만 어떻게 하면 될 걸세. 특히 그 자식한테만은 뺏기면 안 되네!”
대체 그 자식이 누구길래…….
“그런데 물건을 내놓은 길드는 어디래요?”
혹시라도 내가 아는 곳이라면 미리 찾아가서 손을 쓸 수 있지 않을까.
뭐니 뭐니 해도 현대 사회에서 인맥만큼 중요시되는 건 없으니까.
만약에 스네이크 길드라거나 그러면…….
‘등이라도 몇 번 쳐주면 건네주지 않을까.’
잠시 고민하던 박명훈이 말했다.
“음…… 주최 측에서 공개를 하지 않아서 알 수가 없네.”
“그럼 상관없고요.”
아니, 저 사람은 어차피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나.
“흐흐. 마석이다, 마석. 무엇을 만 들 어 볼 까 요.”
그에게서 조금 거리를 벌린 상태로 인사를 하고는 연구소를 빠져나왔다.
* * *
“경매요?”
“예. 팀장님이 부탁드려서요.”
“누구 팀장님이요?”
“제가 팀장님이라고 부를 사람이 박명훈, 그분 말고 또 있나요.”
“아~”
박명훈은 비밀이라도 지켜달라는 듯이 말했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는가.
곧장 황혼 길드의 하우스로 찾아와 정해연에게 말을 전해줬다.
“음, 굳이 서진 씨가 그런 고생을 할 필요는 없을 거 같은데…… 제가 따로 사람을 보내 놓을게요.”
“아니에요. 솔직히 관심이 좀 있었거든요.”
경매라는 것은 돈 많은 사람들의 전쟁터와도 같은 곳이다.
개인의 무력이 얼마가 되든, 자본만 충분하다면 원하는 것을 손에 넣을 수 있는 장소.
이전의 나와는 연관조차 없던 곳이기에 솔직히 관심이 있었다.
“처음 가보는 곳이기도 하고, 구경이라도 하려고요.”
“……그렇다면야 상관없는데. 언제 가시려고요?”
“아마 내일 당장 가지 않을까요?”
경매 자체가 삼 일 뒤였기에 조금은 서두를 필요가 있었다.
애초에 경매가 열리는 곳이 부산이니까 바로 갈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정해연이 휴대전화를 들더니 누군가를 호출했다.
쾅!
곧이어 문이 호쾌하게 열리며 안으로 사람이 들어왔다.
최소한 황혼 길드에서 정해연의 방을 저렇게 들어 올 사람은 한 명뿐이다.
“뭐야? 갑자기 사람을 부르고. 오! 이거 형 아니야? 오랜만이다!”
역시나 소성환이었다.
“아무래도 혼자 보내기엔 조금 걱정이 되어서요.”
“무슨 걱정이요?”
“사실 서진 씨가 가려는 곳이 그리 평화로운 곳은 아니거든요.”
정해연은 탁자 위에 있는 쿠키를 집어 먹으려던 소성환의 얼굴을 쭉 밀어내면서 내가 갈 곳에 관해 이야기를 해주었다.
「마켓」
랭킹 7위의 리치 길드에서 운영하는 암시장.
아, 암시장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나.
엄연히 공식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곳이니까.
“그런데 그런 걸 정부가 아니라, 길드에서 운영해도 되는 겁니까?”
“정부에서도 별다른 수가 없으니까요. 만약에 허가를 내리지 않는다고 해도, 공식이 ‘비공식’으로 바뀔 뿐이고요.”
그럴 바에는 차라리 눈에 보이는 곳에 두자 이건가.
“대한민국에서 발생하는 모든 던전들의 부산물들이 그곳으로 간다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그게 가능해요? 엄연히 길드인데.”
황혼과 신성같이 서로 우호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는 길드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경쟁자들이다.
한 길드에서 무언가를 독점하다시피 한다면, 말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을 텐데.
“음. 그 길드가 좀 특수한 경우에요. 일단 마켓을 제외하고는 다른 활동을 일절 하지 않거든요.”
길드의 기준이 무엇일까.
잠시만 생각해봐도 알 수 있는 것이다.
던전을 소유하고, 공략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
정해연의 말은 저 리치 길드라는 곳은 소유한 던전이 전혀 없다는 뜻이다.
“거기다가 내부 경비 또한 각각의 길드에서 일정 수만큼의 인원을 차출해서 이루어지고 있고요.”
“……머리 좋네요.”
경비 인원들이 서로 소속이 다르기에 각자 경비 일에만 집중할 수 있다.
길드와 관련된 활동을 하지 않으면서도, 자신들을 길드라고 부르는 곳.
정부와 대척점에 서 있다, 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확실한 어필이다.
그뿐만 아니라, 길드 개인의 전투원 또한 없다.
“길드들 입장에서도 오히려 좋은 거죠.”
확실히 던전의 모든 부산물들을 모아서 관리할 수 있는 곳이라면 정부 혹은 대형 길드뿐이다.
전자는 그들에게 있어서 꺼림칙할 것이고.
후자에 경우 한 길드에게 너무 큰 지분을 안겨주게 된다.
그때, 파격적인 조건을 들고 나타난 게 리치 길드란다.
사실상 리치 길드는 모든 길드들이 담합해서 만든 공동 길드나 다름없었다.
“이렇게 공식적으로 대형 마켓이 이루어진 곳은 아무래도 흔하지 않아서요. 외국에서도 곧잘 찾아오곤 해요.”
개별적으로 길드를 찾아가 이리저리 거래를 하는 것보다는 저게 훨씬 편할 테니까.
“그런데 뭐가 위험하단 거예요?”
“위험하다까지는 아니고. 아무래도 하나같이 다른 길드 소속에 고위 각성자 거기다 외국인까지 섞이다 보니까 예상외의 일이 벌어지기도 하거든요.”
그런 거라면 별로 상관없을 거 같은데. 나 자신의 무력이 그렇게 나쁜 것도 아니고, 내 몸을 지킬 수단은 충분하다.
‘거기다 아마 루비도 따라갈 테니까.’
내 생각을 전하자 정해연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그것 때문에 그러는 거예요.”
“예?”
“부산이잖아요? 거기서 최소한 며칠은 계실 거잖아요?”
“그렇죠? 처음 가는 곳이기도 하고, 관광도 조금 할 거 같은데.”
“아악! 야! 내 머리 부서진다고!”
정해연의 손에 여전히 이마를 밀리고 있는 소성환이 비명을 내지른다.
“……마음 같아서는 제가 가고 싶은데.”
“가기는 무슨. 너 요즘 놀러 다닌다고 밀린 일이 대체 몇 개인 줄…… 악!”
“아무튼, 할 일 없는 이놈도 붙여드릴게요. 조심히 다녀오세요?”
“모처럼의…… 휴가…… 가……!”
눈물을 흘리며 허리가 꺾이고 있는 소성환을 관람하고 있자니, 부웅- 하고 휴대전화가 울린다.
―싸, 싸부! 제발 사부 좀 말려……! 꺄악!
―스승! 이러다 집 다 날아가겠어요! 빨리 오셔……!
전화기 너머에서 들리는 안지윤, 안지훈의 비명을 들으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요 며칠간 익숙해진 긴급 전화였다.
……얼른 집으로 가야지.
* * *
―끄아아앗!
―살려……!
―누가 좀 도와…….
―죽여……줘…….
지옥이라도 온 듯이 여기저기서 비명이 울려 퍼진다.
누구라도 본다면 눈살을 찌푸릴 장면이었으나, 그것을 지켜보는 두 남성의 시선에 딱히 그런 기색은 없었다.
“그래서 날 부른 이유가 뭐지?”
“흐힛! 흐하핫!”
약이라도 취한 걸까.
침을 흘리며 완전히 미친 사람처럼 웃고 있는 검은 가운의 남성을 향해 허핑 길드 소속 전투 4조장, 왕뢰화가 무미건조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오늘 처음 보지만, 소문대로 미친놈이로군.’
불만은 가득했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길드의 위쪽에서 내려온 명령이다.
그렇다면 군말 않고 따라야 한다. 그들에게 윗계급이란 절대복종의 대상이었으니까.
한참을 웃던 남성의 몸이 뚝- 하고 목각 인형이 뒤틀리는 것처럼 멈춰 섰다.
고개만 꺾은 남성의 얼굴에 부자연스러운 표정 변화가 일어난다.
그것이 기분 나쁜 웃음이란 걸 알아챘을 때, 가로로 찢어진 입이 열렸다.
“아? 이런 누추한 곳에 손님이 오셨군요. 환영합니다!”
방금까지 보였던 미친 모습은 어디 가고, 딴 사람이라도 된 듯, 밝은 표정을 한 남성에게 왕뢰화가 입을 열었다.
“의뢰가 있다고 해서 찾아왔다. 용건만 빠르게 말하도록.”
“의뢰……? 아아! 그랬었죠! 그랬었습니다! 이거, 이거. 완전히 까먹고 있었군요!”
어차피 자신은 일 처리만 하고 본국으로 돌아가면 그만이다.
이런 자식이랑 오래 이야기해 봤자 기분만 나빠질 터.
“음. 뭐였더라. 하하. 까먹고 말았습니다.”
“……뭐?”
“까먹었습니다. 하하. 까먹어 버렸어요. 그렇지. 잠시만 기다려 주시죠.”
그런 말을 하고는 옆쪽에 놓여 있던 송곳을 들어 자신의 허벅지를 꿰뚫는다.
“……!”
그 갑작스러운 상황에 왕뢰화가 놀란 듯 눈을 떴다.
그럼에도 그의 행동은 멈추지 않았다. 마치 곤죽이라도 내려는 듯이 몇 번이고 내리친다.
고통이 느껴지지 않는 걸까.
그의 입에서 끝없이 웃음소리가 튀어나온다.
“흐힛! 흐히힛!”
‘……완전히 미쳤군.’
검은 가운에 피가 튄다.
그제야 왕뢰화는 저 가운이 검은색이 아니라, 검붉은색이란 걸 알 수 있었다.
그러기를 한참.
마침내 행동을 멈춘 남성이 왕뢰화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기이한 시선에 그는 자신도 모르게 뒤로 주춤했다.
“생각났습니다.”
‘……그럼 방금 그것이 잊어버린 것을 떠올리기 위해 한 짓이라고?’
“이틀 후. 한국의 마켓에서 진행되는 경매. 그곳에서 한 가지 물건을 가져와 주셨으면 합니다만.”
“뭐지?”
“마석. 웨어울프의 마석입니다.”
예상외로 간단한 외뢰였다.
정말로 심부름이라도 시키려고 부른 듯이.
자신이 고작 그딴 심부름을 할 위치는 아니었지만,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허핑 길드에서 지원하고 있는 미친 과학자.
이미 본국에서도 그가 원하는 것은 전부 들어주라고 했었으니까.
어떤 물건이든.
어떤 사람이든.
경매.
그곳에 어떤 물건이 있더라도 문제 될 건 없었다.
“그것뿐인가?”
“예에. 오랜만에 신기한 물건이 나왔다고 해서 말입니다. 그래요. 꽤나 흥미로운 소재였죠. 겨우 성공한 실험이었는데…… 쥐새끼처럼 빠져나가서는!”
말의 앞뒤가 맞지 않는다.
그가 있는 것조차 잊어버린 듯, 계속해서 어떠한 말을 중얼거린다.
의뢰는 받았다.
밖으로 나가려던 왕뢰화의 뒤로 작은 말소리가 들려왔다.
“아. 혹시 하나 더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뭐지?”
“쥐새끼. 혹시라도 발견한다면, 제게 가져와 주실 수 있으신지요.”
쥐.
대체 무엇을 말하는 걸까.
설명을 요구하고 싶었지만, 더 이상 이곳에 있고 싶지 않았던 왕뢰화는 알겠다는 말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흐힛! 흐하핫! 오늘은…… 어떤 분을 무대로 모셔 볼까요?”
“사, 살려……!”
피로 물든 지하 공동.
그곳에서 끝없는 비명소리와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