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tion is flowing from the water purifier in my house RAW novel - Chapter 85
우리집 정수기에서 물약이 흐른다 086화
26. 보잘 것 없는(9)
집으로 돌아오고, 혹시라도 있을 2차 습격에 대비했지만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거주지와 같은 중요한 곳으로 이동할 때는 몸을 투명하게 만드는 커튼을 이용했다.
우리 집에 같이 살고 있는 사람은 총 세 명.
순둥이, 나 그리고 루비.
원래라면 최대 2명의 인원에게만 사용할 수 있었지만…….
“쟈쟈쟌! 순둥이, 안 보이지!”
“……이게 진짜 되는 거였구나.”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순둥이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곳에 손을 가져다 대자 말캉- 하고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지며 꺄르륵 하는 소리가 들린다.
폴리모프.
모습을 변화시키는 그 신비로운 마법을 봤을 때, 혹시 투명화와 관련된 마법 또한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었다.
세상의 모든 새끼들이 제 부모에게서 세상을 살아가는 법을 배우듯이 용 또한 예외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마법의 마 자도 알지 못한다.
인간 세상에서 살 수 있는 법은 알려줄 수 있지만, 용으로서 살아가는 법은 알려줄 수 없다.
그렇기에 걱정했었다. 과연 내가 순둥이의 보호자로서 적절한 대상인 것일까 하고.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괜한 걱정이었다.
습격 당시, 상대방을 공중에 포박해서 압박하던 그 마법도 그렇고.
대체 누군가에게 배우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이리도 빠르게 마법들을 깨우칠 수 있는 걸까.
‘그렇구나.’
이제야 깨달았다.
순둥이는 그냥 천재가 아니라. 진짜배기 천재였던 것이었구나.
“아빠는 내가 지켜줄게!”
항상 커튼을 몸에 두르고 동화 속 빨간 망토 소녀처럼 내 어깨에 자리 잡던 순둥이는 이제 커튼의 도움 없이도 제 모습을 숨길 수 있게 되었다.
“하핳. 간지러워! 더 해줘!”
내 어깨 위로 올라온 순둥이의 턱을 간지럽히며 속으로 한숨 쉬었다.
‘……한심하네.’
순둥이가 그날 보여줬던 모습.
내가 말리지 않았더라면 나를 습격했던 그놈은 분명히 죽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자결을 통해서 죽기는 했지만, 순둥이가 직접 죽이는 것과는 다르다.
순둥이의 보호자.
아버지로서 귀여운 딸내미가 손에 피를 묻히게 하고 싶진 않았다.
‘……서포터가 너무 강함. 뭐, 그런 거라도 노려야 하나…….’
부스럭-
내 팔뚝에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진다. 옆을 보자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내 몸에 바짝 붙는 흰머리의 소녀가 있었다.
순둥이가 제 몸을 숨길 수 있게 됨에 따라 자연스럽게 2인용의 커튼에는 한 자리가 남게 되었고.
남은 자리의 주인은 당연히 솜뭉치의 것이 되었다.
“성자님. 조금 더, 루비에게 가까이 붙으셔야 합니다.”
……보통 이런 건 내가 말하는 거 아닌가?
항상 같이 다니는 루비였기에 커튼에 관한 능력에 대해서 알려주게 되었다.
―모습을 숨길 수 있다…… 그 말이십니까?
순둥이와 꼬물이에 대해서 알려줬을 때처럼 별다른 반응은 없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루비는 이 커튼에 큰 관심을 가졌다.
―성자…… 아니, 상대방에게 들키지 않고 조심스럽게 접근하는 것 또한 가능하겠군요.
이 커튼을 이용해서 모습을 숨기는 것만 생각했었는데, 몰래 접근해서 유효타를 줄 수도 있겠구나.
물론 기척 자체는 숨길 수 없기에 그 부분을 어떻게 해야 하겠지만.
―……혹시, 제가 이것을 사용할 수 있을는지요.
아무래도 여러모로 쓸모가 많아 보이는 커튼이었기에 본인이 사용하고 싶었나 보다.
애초부터 순둥이의 해츨링 모습을 숨기는 것을 제외하면 별로 사용하지도 않았기에 상관은 없었지만…….
‘결과적으로 개방에 성공한 물체들은 나를 위한 것들이니까.’
정수기, 텔레비전, 시계와 같은 물체들은 하나같이 나 혼자만이 사용할 수 있는 것들이다.
다만 제한적으로나마 개방 된 물체의 특수 능력을 공유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
내가 권유할 경우 그 효과를 누릴 수 있는 심신 치유의 방석.
몸을 투명하게 만드는 커튼 또한 그랬다.
내가 직접 그자에게 씌어줄 경우, 투명화 효과를 적용받았지만, 결국 그것은 내 근처에 있을 때, 효과가 적용된다.
루비가 어떤 용도로 사용하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내 시야에서 벗어난다면 루비에게 있어서 저 커튼은 아무런 능력도 없는 평범한 커튼이 될 것이다.
그에 관해 설명하자 루비는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드물게 아쉬운 표정을 지었지만, 별로 미련을 두지는 않는 모습이다.
그 대신이라고 하듯 양손으로 커튼과 내 옷깃을 꽉 잡고 있을 뿐이었다.
‘진작에 이럴 걸 그랬나.’
길거리에서 알아보는 사람도 없고. 뜨거운 햇빛을 가려주기까지 하니 딱이었다.
황혼 길드의 근처에 도착하고서야 두르고 있던 커튼을 집어넣었다.
입구에 들어서자 안내데스크의 사람이 나를 알아보고는 익숙한 행동으로 누군가에게 연락을 한다.
별다른 검사도 없이 최상층으로 향했다.
“어서 오세요. 서진 씨.”
“예. 밀린 일은 잘 마무리하셨고요?
“……그것에 관해선 묻지 말아 주세요.”
가벼운 인사가 오간 후, 정해연에게 마켓에서 있던 일을 알려주었다.
이미 그녀의 귀까지 들어갔는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만히 있을 수 없겠네요. 마켓으로의 테러는 한국의 대형 길드 전체를 적으로 돌리는 것과 같으니까요.”
미안한 말이지만, 나는 이런 일에 관해서는 젬병이다. 이것과 관련해서는 그들에게 맡기기로 했다.
“……서진 씨는 다치신 곳 없고요?”
방금까지 보았던 고뇌 가득한 표정은 어디로 가고, 걱정이 물씬 느껴지는 눈빛으로 내게 물었다.
근처 인물들 덕분에 다칠 뻔한 적은 없었다. 거기다가 다친다고 하더라도 죽지만 않으면 물약으로 치료가 가능하고.
“상처 같은 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하아……역시 제가 같이 갔어야 했는데…….”
그리 말하며 내 옆에 찰싹 달라붙어 눈을 감고 다소곳이 앉아 있는 루비에게 잠시 시선을 주었다.
“……관광은 하셨고요?”
“예. 그래도 첫날에는 제대로 즐겼으니까요.”
특히 소성환이 미쳐 날뛰었었지. 그렇게 신나는 모습은 처음 봤었다.
“……그랬단 말이죠?”
아, 일에 치여서 길드에만 있었던 사람에게 할 이야기는 아니었나.
무언가 속상한 표정이 되어 있는 정해연에게 말했다.
“여행은 또 가면 되니까요. 그때는 꼭 해연 씨도 같이 가요.”
“……예? 저, 정말이죠!”
“해외는 그렇고. 역시 국내가 좋으려나.”
이번과 같이 어떤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니까. 뭐, 정해연이 있다면 무슨 걱정이 있겠냐만.
“……혹시 단둘이?”
“예?”
“아, 아니에요!”
어디가 좋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어서 말을 못 들었다.
어째선지 얼굴이 붉어진 정해연이 이런저런 곳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누가 봐도 말을 돌리기 위한 행동으로 보였다.
꾸욱-
누군가가 내 옷깃을 잡는다.
옆을 보자, 여전히 눈을 감고 정자세로 앉아 있는 루비가 두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내 옷을 잡고 있었다.
무슨 신호인가. 싶어서 내 쪽에 있던 과자를 그 손가락에 쥐여주니 눈을 뜬 그녀가 고요한 눈동자로 그것을 바라봤다.
과자와 내 얼굴을 번갈아 보던 루비가 땅을 보더니 작게 속삭였다.
“……잘 먹겠습니다. 성자님.”
역시 과자가 목적이었다.
* * *
이번 일의 마무리를 짓기 위해서 박명훈이 있는 연구소로 찾아갔다.
그는 내가 왔다는 말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단숨에 안에서 뛰쳐나왔다.
그에게 대충 사정을 설명하고 웨어울프의 마석이 들어 있는 함을 건네자 미안한 표정을 짓는다.
“정말 고생했네. 내 부탁 때문에 그런 일이 벌어졌다니…….
“딱히 그것 때문은 아니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대신이라고 하긴 뭐하지만, 이것을 이용해서 완벽한 물건을 만들어주지. 절대로 실패는 하지 않아.”
웨어울프의 마석.
그놈들이 노리던 것은 이것이었을까. 아무튼 박명훈이 만드는 아티팩트였기에 여러모로 기대가 되었다.
그 이후로 특별한 일은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대형 길드 전원이 눈을 부라리고 있는 상황에서 움직일 정도로 멍청한 놈들은 아니겠지.
다만, 조금 신경 쓰이는 게 있었다.
[야, 씹냐?]
[야.]
[야.]
[야.]
[야. 이유지.]
[기프티콘]
응답 없는 휴대전화를 확인하면서 한숨 쉬었다.
……이거 씹히니까 진짜 기분 더러운 거구나.
괜스레 반성하게 된다.
부산에 다녀온 이후. 이유지는 내가 보낸 문자에 한 번도 답장하지 않았다.
각성자 범죄 관리부로 찾아가도 그녀는 볼 수 없었다.
대신이라고 하듯 그곳에 있는 이태영에게 그녀의 행방에 대한 이야기를 물어보았다.
“……예. 요 근래 계속해서 외근을 나가고 계셔서요. 아무래도 요즘 저희도 일이 많이 바쁘거든요.”
각성자들이 난리를 치는 것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기에 이해는 갔다.
당연히 일 자체는 바쁘겠지.
하지만…….
“이유지, 걔 어디로 갔는지는 모르고?”
“……예. 작업이 작업인지라, 장소가 그때마다 달라지거든요. 죄송합니다. 형님. 선배가 돌아오시면 꼭 연락하라고 전해드릴게요.”
일이 고된 걸까.
다크서클이 이전과 같이 쭉 내려온 이태영에게서 시선을 돌려 손목에 찬 시계를 보았다.
[F]
손목시계의 시침은 6시를 향해 있었다.
진실과 거짓을 판별하는 손목시계.
이태영의 말에 거짓이 있다.
아마도 이유지가 어디 있는지 모른다는 말.
대체 왜 그런 거짓말을 한 걸까.
구태여 캐묻지는 않았다.
평소와 같이 땡땡이라도 치는 걸까 했지만, 이태영의 태도로 보아 딱히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누구보고 바쁘니, 뭐니 해놓고.’
그날. 부산에 있던 이유지를 떠올렸다.
그곳에서는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무엇을 하려고 했던 걸까.
시설 자체가 파괴되었기에 자세한 건 알 수 없었지만…….
‘그곳을 파괴한 게 이유지란 말이지.’
일을 위해서 갔다기엔 위치가 숨겨져 있었고, 그녀는 팀원들의 도움 없이 그곳에 혼자 돌아다니고 있었다.
“어쩔까.”
이유지의 위치는 당장에라도 알 수 있었지만, 무작정 찾아가기도 뭐 했다.
내게 무언가 숨기고자 한다면, 그 이유 또한 있을 테니까.
걱정이 되긴 하지만, 아직은 모른 척해주는 게 맞는 것 같았다.
매일 같은 일과를 하며 시간이 흘렀고.
아티팩트가 완성 되었다며 박명훈이 나를 불렀기에 연구소로 향했다.
“……쓰읍. 일단 미안하다는 말부터 하지.”
“예? 실패한 거예요?”
“아니. 실패는 아닌데, 정확히는 사용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
무슨 소리지.
사용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마석 자체가 심하게 불안정해. 이미 정화작업은 끝마쳤는데도 말이야. 마치 아직도 살아 있는 것처럼 계속해서 마석에 마기가 생성되고 있네.”
박명훈은 내게 가죽 장갑 두 짝을 내밀었다.
웨어울프의 마석을 이용해 만든 아티팩트.
그것을 만지자마자 박명훈이 무엇을 말하는 건지 알 수 있었다.
‘확실히…….’
정화되지 않은 마석을 만지고 있는 감각과 비슷했다.
일반인이라면 이것을 가지고만 있어도 꽤 큰 문제가 되리라.
“착용해 볼 텐가? 위험할 수도 있네.”
“위험할 거 같으면 바로 벗으면 되겠죠.”
장갑을 두 손에 끼자 내 손에 딱하고 맞는다.
한 여름에 가죽 장갑이라니…….
예상과 다르게 덥지는 않았다.
마치 내 몸의 일부인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호오……자네라면 사용할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지만, 진짜로 될 줄은 몰랐군. ……실시간으로 정화를 하고 있는 건가? 말도 안 되는군.”
내가 딱히 뭔가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이 장갑을 착용하고 있는 나는 느껴졌다.
웨어울프의 마석을 이용해 만든 이 물건이 내가 마음에 든다는 듯 순종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장갑에 떠돌고 있는 마기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내 몸에 침입하려거나 그런 낌새는 보이지 않는다.
‘순종하고 있다고 하면 이상한가?’
본체는 죽고 마석만이 남은 것이지만, 박명훈의 말대로 마치 살아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생전에 사용했던 특성 및 능력들이 마석에 담긴다.
혹시 그것 외에도 다른 무언가가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박명훈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잘 사용하겠습니다.”
“감사하기는 무슨. 자네가 내게 양보해 준 것을 생각하면 오히려 내가 감사해야 할 상황이지. 다음에 또 보세. 아무래도 좀 쉬어야겠어.”
제작 과정이 힘들었는지 박명훈은 꽤나 피로해 보였다.
할 일은 전부 끝났기에 곧장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연구소를 나왔다.
“성자님.”
문 바로 앞에 루비가 있었다. 전에는 한창 훈련실에서 지내던 루비는 부산에 갔다 온 후로 내게서 한 시도 떨어지지 않게 되었다.
집으로 도착해서도 긴장한 표정으로 주변을 경계한다.
부산에서 돌아 온 이후로 줄곧 이랬다.
“편하게 있어도 돼. 루비야.”
“그렇지만 긴장을 풀었다가 성자님이 다시 습격을 당하신다면……!”
나도 만약을 위해서 조치를 한 상태긴 하다.
이 주택 내부로 등록되지 않은 외부인이 침입하려 한다면 곧장 알람이 울린다.
무려 박명훈이 만든 방범 장치기도 하고 테스트도 몇 번 해봤기에 큰 상관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루비는 연신 불안에 빠져 있었다.
“그렇지만…….”
“일로 와.”
“……마음을 놓았다가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싫으면 말고.”
“……싫다고 한 적은 없습니다.”
이전에 체육관에서 부탁했던 것이 떠올라서 소파에 앉은 상태로 내 옆자리를 두들겼다.
……아무래도 무릎에 앉히기는 좀 그렇고.
고민스러운 표정으로 그곳에 안착한 루비가 복잡한 감정이 담긴 숨을 내쉰다.
“순둥이도 앉을래!”
내 무릎에 앉은 순둥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조용한 시간이 흘렀다.
툭- 하고 살포시 내 어깨에 루비의 머리가 기대어진다.
살랑이는 백발을 보고 있자니 루비가 작게 중얼거렸다.
“성자님.”
“왜.”
“……성자님께서는 언제나 제 곁에 있어 주시는 것입니까?”
무언가에 취한 듯이 몽롱한 목소리였다.
작게 떨리는 손을 마주 잡아주자 애절한 목소리로 부탁이라도 하듯이 반복해서 말한다.
“성자님은 죽지 않으시는 거죠?”
“루비에게서 떠나지 않으시는 거죠?”
당연히 죽을 생각 같은 것은 전혀 없다.
하지만 이전에도 그랬고, 루비는 특히나 내 신변에 무슨 일이 생기는 것에 민감한 것 같았다.
이제는 서로에게 있어서 없으면 이상할 존재이긴 하지만, 그녀가 보여주는 모습들은 조금 과한 부분이 있었다.
‘그때, 수상해 보인다는 이유 하나로 난데없이 공격했으니까.’
상대는 모습을 감춘 이유지였다.
루비하고도 만난 적이 있었던 사람. 물론 그런 사실을 그녀는 알지 못했지만, 너무도 성급한 행동이었다.
이후 자신의 행동에 대한 사과를 하긴 했지만.
그것은 그 공격에 관한 것이 아닌, 도중에 내가 말했던 그만두라는 말에 반응하지 못한 것 때문이었다.
“조금은 긴장을 늦추는 건 어때.”
루비는 내 경호원 같은 게 아니다. 나로서는 그녀가 긴장을 풀고 조금은 일상을 즐겨줬으면 한다.
내게 기댄 머리를 살며시 쓰다듬어 주자, 비비듯이 머리를 살짝 갸웃거리던 루비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속삭였다.
“……성자님은 모르십니다. 제게, 루비에르트에게 있어서 당신이란 존재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쓰다듬던 손을 내려놓았다. 어느새 루비는 잠에 들어 있었다.
아무래도 긴장이 풀렸나보다.
‘요 근래 잠도 잘 못 잔 거 같으니까.’
혹시라도 다시 악몽을 꾸고 있진 않을까. 몇 번이고 밖으로 나왔지만, 그때마다 루비는 거실에 있는 의자에 앉아 있었다.
마치 침입에 대비해 경계라도 서듯이.
조심스럽게 루비의 몸을 들어 올리고 침대로 향했다.
순둥이 또한 그 옆에 놓아주었다. 뒤척이던 루비가 자신의 품에 있는 순둥이를 끌어안는다.
그 모습을 보다가 거실로 나왔다.
따릉-
휴대전화에서 벨이 울리기에 다급하게 버튼을 눌렀다.
……이런 시간에 누가 전화한 거지?
발신인을 확인할 틈도 없이, 휴대전화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서진아. 나 지금 집 앞인데 잠깐 나올래?
이유지였다.
* * *
“욥! 오랜만!”
“욥! 오랜만! 은 무슨. 누구보고 바쁘다 할 때는 언제고 남의 문자까지 그렇게 씹어 대냐? 그래놓고 뭐? 갑자기 나오라고?”
“흥. 복수야. 그러니까 누가 평소에 내 문자 씹으라고 했어?”
“…….”
근처에 있는 공원 벤치에 앉아서 서로 맥주 한 캔을 깠다.
그것을 단번에 들이킨 이유지가 크으- 하고 기분 좋은 소리를 낸다.
“넌 만나자마자 하는 게 술 마시는 거냐?”
“크으. 뭐, 어때서. 이 누나가 요즘 너무 힘들어서 그래. 그래서 그런가, 오늘따라 술맛이 좋네! 아니, 내 친구랑 마셔서 그런가!”
술을 들고 있는 것은 오른팔. 왼팔을 보았다. 상처는 없었다.
당연하겠지. 그때 그 상처는 이미 치료가 되고도 남았을 테니까.
“크으!”
마지막 한 방울까지 털어놓은 이유지가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킥킥대며 물었다.
“그동안 뭐 하고 지냈어?”
“나야, 뭐…….”
“그래. 어련히 잘 지내셨겠지. 우리 서진이는 주변에 사람이 넘쳐나서 그런가, 매일 같이 바쁘니까.”
“야. 그동안 연락 씹은 건 너거든?”
“헤. 그러니까 누가 나 빼고 부산에 놀러 가라고 했나?”
난 부산에 갔다고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그렇게 말하자 붉은 얼굴의 이유지가 다급하게 두 손을 흔든다.
“아, 아! 그, 한국에서 놀러 간다면 역시 부산 아니야! 안 그래?!”
“그러니까 놀러 갔단 사실을…….”
“자, 짠! 짠!”
이미 제 손에 쥐어짜듯이 구겨진 맥주캔을 입에 가져다 댄다.
로브로 모습을 가리고 있던 이유지와는 달리 저쪽은 분명히 내 얼굴을 확인했었다.
그런데도 그와 관련된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개인적인 일이기도 해서 그냥 넘어가려고 했지만 역시 안 되겠다.
딱 봐도 피곤해 보이는 모습도 그렇고, 요 근래 연락을 피하던 것도 그렇고.
뭔가를 듣긴 들어야겠다.
“너 말야, 그때…….”
“술 다 떨어졌다! 내가 금방 사 올게!”
도망치듯이 편의점이 있는 방향으로 달려가 버린다.
“하여간…….”
맥주를 홀짝이며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지상을 밝게 내비치고 있는 거대한 보름달.
저렇게 둥근 달을 보는 것은 꽤 오랜만이다. 그것을 멍하니 구경하고 있자니, 갑자기 내 왼손에서 묘한 통증이 일어났다.
“씁!”
내가 착용하고 있는 가죽 장갑이 저 하늘에 뜬 달에 공명이라도 하듯이 은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뭐, 뭐지?”
아직 이 아티팩트의 능력을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다.
웨어울프의 마석으로 만든 가죽장갑.
이것이 저 보름달에 반응하고 있다……?
그 예상이 맞다는 듯 내 왼팔이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손끝을 시작으로 손등, 팔꿈치 그리고 어깨까지 평범했던 내 팔은 어느새 짐승의 그것으로 변해 있었다.
손톱은 길게 늘어나 날카로웠으며, 크기도 거대해져 있었다.
‘이게 이 아티팩트의 능력……?’
언젠가 생각했던 적이 있다. 나도 이런 능력을 가지고 싶었다고.
‘그런데 이건…….’
완전히 변해 버린 내 왼팔을 보고 있자니 누군가가 떠올랐다.
―이게 제 능력이에요.
이유지가 말했던 ‘수인화’ 능력.
그것으로 인해 변화하던 그 팔과 매우 흡사했다.
이것은 웨어울프의 마석으로 만들어진 아티팩트다.
그런데 어떻게 이게 이유지의 고유 능력과 형태가 똑같을 수 있는 거지?
은빛의 털로 뒤덮인 왼팔을 보며 내 눈에 의문이 담겼을 때.
퉁-
앞쪽에서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그것은 바닥을 굴러 벤치에 앉아 있는 내 발 앞에 멈춰 섰다.
아까 마셨던 맥주캔이었다. 방금 사온 듯이 아직 마시지 않은 새것.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는 두 손을 늘어트린 누군가가 서 있었다.
가로등이 꺼져 있어서 그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이유지가 돌아오면 하고자 했던 말들이 있었다.
근래 연락이 안 되었던 이유가 뭐냐.
그날 부산에서 보았던 건 네가 맞냐.
혹시 수인화와 관련해서 자세한 내용을 알려줄 수 있느냐.
…….
…….
내가 도와줄 일은 없을까?
생각해 놨던 그 말들이 입 밖으로 나올 일은 없었다.
어둠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모습이 달빛에 반사되어 서서히 드러난다.
“…….”
언제나 보아왔던 짓궂고 장난기 가득한 미소는 그곳에 없었다.
변해 버린 내 왼팔을 바라보는 이유지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