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tion is flowing from the water purifier in my house RAW novel - Chapter 98
우리집 정수기에서 물약이 흐른다 099화
29. 과거를 마주하는 방법(1)
퓌유-
퓌유-
오늘도 어김없이 내 옆에서 새근새근한 숨소리가 들려온다.
눈을 뜨자 검고 짤막한 꼬리가 내 앞에 보였다.
이유지의 꼬리도 마음에 들지만, 역시 나한테 있어서는 이게 더 편하단 말이지.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꼬리를 만지자 매끄러운 감촉이 느껴진다.
“응야…….”
해츨링 상태의 순둥이가 헤벌쭉 웃으며 잠꼬대를 한다.
“헤헤…… 아빠다.”
무슨 좋은 꿈이라도 꾸는 걸까. 순둥이의 머리맡에 놓여 있는 방석의 위치를 조정해 주고 이불을 덮어주는데 무언가 이불 속에서 들썩인다.
꼬물꼬물-
네 마리의 꼬물이들이 순둥이의 옆에서 나란히 자고 있었다.
제 주인을 지키기라도 하려는 걸까. 동서남북 방향으로 완전히 철통 방어였다.
북쪽.
상석이라고 할 수 있는 순둥이의 품에는 대장 꼬물이가 있다.
‘어째 점점 더 커지는 거 같단 말이야.’
이전에도 느꼈던 거지만, 요즘은 하루가 다르게 커져가고 있다.
꽈악!
―끄아악앙!
지금만 해도 잠꼬대를 하는 순둥이의 품에 꽉 안겨 있었으니까.
‘스위치가 업그레이드되어서 그런가?’
이러다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지면 어떻게 하지.
하지만 그렇게 커진다고 해도 여전히 순둥이한테 잡혀 살 것 같기는 했다.
오늘부터는 다시 바빠질 것이었기에 그만 일어나기로 했다.
식사가 준비될 때까지 좀 더 놔두기로 하고 밖으로 나왔다.
부엌에는 이미 선객이 있었다. 흘러내리는 머리를 뒤로 묶고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었다.
위태위태해 보이는 모습에 말을 걸려고 했지만, 상대는 칼을 들고 있다.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인기척을 냈다.
“큼!”
그럼에도 반응이 없다. 뭘 그렇게 집중하나 했더니, 양파를 썰고 있었다.
……아니, 저거 양파가 맞나?
이미 난도질당한 상태인 양파즙을 보면서 천천히 다가가, 칼을 들고 있는 손을 잡았다.
혹시라도 놀라서 휘두르면 안 되니까.
흠칫!
아침이라 그런지 위로 머리카락이 뻗쳐 있었다. 난데없는 접근에 잠시 몸이 굳더니 이내 더듬이가 살랑살랑 움직인다.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로 루비가 말했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성자님.”
괜한 걱정이었다.
어차피 이 옥탑방에 살고 있는 ‘사람’은 우리 둘뿐이었으니까.
“응. 잘 잤어? 그런데 뭐 하고 있는 거야?”
허리까지 내려오는 화사한 설백색 머리카락을 뒤로 묶어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가느다란 목이 드러났다.
처음 보는 파란색의 앞치마를 동여매고 오른손에는 식칼을 들고 있다.
마지막으로 도마 위에 올라가 있는 처참한 현장을 보고 상황을 이해한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양파로 의태한 마물이구나.’
“요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성자님.”
“요리?”
“예.”
잠시 칼을 내려놓고 뒤를 돌아 내 눈을 마주친다. 묘하게 홍조를 띠고 있는 루비가 말했다.
“언제나 성자님에게는 신세만 지고 있지 않습니까. 거기다 매일같이 성자님께서 손수 요리까지 만들어주시고요.”
예전에는 고작해야 끼니를 때우는 것에 불과했지만, 당장 집 안에 누군가 같이 먹어줄 사람이 있어서일까, 요리가 꽤나 즐거워졌다.
“원래라면 저 루비가 해야 할 일입니다. 성자님께 공물을 바친다, 그것이 옳은 것이니까요.”
“나는 별로 상관없는데.”
어쩐지 평소보다 좀 더 열띤 표정이다. 처음으로 요리를 대접하게 돼서 꽤나 흥분한 걸까.
루비가 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면서 중얼거렸다.
“혹시 성자님께서 불편하시다면…….”
손가락에 무언가 베인 흔적이 보였다. 웬만해서는 상처도 안 나는 애가 무슨 저런 식칼에 베이고 있냐.
그런 말을 하는 대신 그냥 웃어주었다.
“그럼 기대할게.”
“예. 성자님!”
잠시 후, 내 앞에 토마토계란양파볶음으로 추정되는 무언가가 나왔다.
잠에서 깨어난 순둥이가 눈을 비비적거리며 테이블로 오더니 주춤한다.
“수, 순둥이는 배 안 고픈데!”
그토록 밥 먹는 걸 좋아하는 순둥이가 뒤로 슬금슬금 빠졌다.
“……죄송합니다, 성자님. 이건 제가 치우겠습니다.”
그릇을 가져가려는 그 손보다 빠르게 젓가락을 움직였다.
바스락-
“음. 괜찮네.”
씹히는 맛도 있고. 이제껏 먹었던 것에 비해서 새로운 게 나름대로 즐길 구석이 있었다.
쿵쿵!
밖에서 누가 문을 두드렸다.
“싸부, 밥 같이 먹어요!”
“야아아, 서진아! 얼른 나와아!”
나는 루비에게 쉬잇- 하고 검지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내가 먹는 모습만을 바라보고 있던 루비가 이내 어색한 몸짓으로 손가락을 들어 올리고는 배시시 웃었다.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자 퉁명한 표정의 이유지가 있었다.
“뭐야? 왜 이렇게 늦게 일어나는 건데?”
변명이라도 하듯이 하품을 보여주고 있자니, 내 뒤에 있던 순둥이가 어딘가로 달려갔다.
이유지의 뒤에 숨어 있던 소년이 그 기세에 놀란 듯 움츠린다.
“까망이, 안녕!”
이전에는 성숙한 모습을 보이던 소년이 순둥이의 그 말에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받아주었다.
“……정말 까망이로 괜찮은 거야?”
이유지가 못 미덥다는 표정을 지으며 내게 속삭였지만, 나는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순둥이가 그러고 싶다는데 뭘.
거기다가 저 녀석도 함부로 이름을 짓거나 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 ■■ ■■■.
기억하지는 않겠지만, 분명히 원래의 이름이 있을 테니까.
그렇게 나온 게 순둥순둥한 순둥이 같은 애칭이다.
까망이.
순둥이나 꼬물이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칠흑색인 눈동자와 머리 색이다.
순둥이에게 붙잡혀 이리저리 수난을 겪고 있는 까망이가 나를 발견하고는 꾸벅 인사했다.
이제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스케치북에 말을 적는다.
[오늘도 작업하러 가실 건가요?]
작업.
이 녀석이 마물에게 사랑받는 체질이란 것을 이용해 해오던 테이밍을 말한다.
현재 생각하고 있는 계획 중 하나였지만, 오늘은 더 중요한 일이 있었기에 고개를 저었다.
어쩐지 아쉬운 표정을 짓는 까망이에게 말했다.
“걱정 마라. 충분히 도움이 되고 있으니까.”
그제야 안심한 듯 고개를 끄덕인 까망이가 스케치북을 넘겼다.
[잘 다녀오세요.]
미리 써놓은 듯한 그 문구를 보며 나는 피식 웃었다.
“그래. 갔다 오마.”
그대로 지나가려는데 바람이 불더니 스케치북이 한 장 더 넘어갔다.
[아저씨.]
……지금 복수하는 건가?
* * *
“형님.”
이제는 신성 길드의 소속이 된 이태영이 피가 튄 가운을 벗으며 다가왔다.
“배후는 확실하게 밝혀졌는데, 아무래도 정말 자세한 정보는 모르는 것 같아요.”
뒤쪽으로는 곧 죽을 것 같은 사내 두 명이 있었다.
차우 길드장과 이놈을 데려가려고 했던 더럽게 단단했던 놈.
이름이 아마 홍산호였나.
“좀 더 해볼까요?”
마치 산책이라도 갈까요, 라는 어투로 제 손에 들린 송곳을 흔든다.
고개를 저었다.
이미 배후가 밝혀졌다면, 어차피 다른 정보는 필요 없었으니까.
“그럼 이제 얘네들은 어쩔까요?”
살려달라는 말조차 못 하고 죽은 눈을 하고 있는 두 놈을 무미건조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지금 내 주변에 순둥이와 루비는 없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어깨를 두 번 두드렸고, 이태영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순둥이를 안고 있던 루비가 있었다.
나는 그 둘을 오랫동안 쳐다보았다.
몸에 묻어 있던 더러운 기분을 최대한 없앨 수 있도록.
“가볼까?”
* * *
황혼의 연구소에 도착하자 박명훈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정해연이 보였다.
“해연 씨.”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던 정해연이 나를 보자마자 반갑다는 듯 눈웃음을 짓는다.
평소같이 잡담이라도 나누고 싶었지만, 지금은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해연 씨도 알고 계신 거죠?”
“예. 아무래도 저희가 얕보여도 한참을 얕보였나 보네요.”
까득-
정해연의 입에서 무언가 뒤틀리는 소리가 났다.
“설마 진짜로 제 입으로 자신의 배후를 말하는 멍청이일 줄은 몰랐죠.”
기고만장한 표정으로 중국의 허핑 길드의 지원을 받고 있다며 거들먹거리던 차우 길드장이 떠오른다.
“……문제는 막상 알았다고 해서 저희가 할 수 있는 무언가가 없단 거예요.”
실컷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정해연. 그녀의 마음이 이해가 갔다.
온갖 똥은 전부 뿌려놓고 마치 도마뱀이라도 되는 양 꼬리를 자르고 튀어대니, 머리가 터져버릴 것 같겠지.
나도 그랬다.
마음 같아서는 한 번에 확 하고 들이받고 싶지만…….
“그건 그쪽에서 원하는 일이겠죠.”
우리가 공식적으로 따져봤자 모르쇠로 응답할 것이고, 시비를 걸어봤자 옳다구나 하면서 사건을 키우려고 하겠지.
그런 놈들이다. 비겁하고, 저열한 방식으로 살아온 놈들.
이제는 내부적으로 정리가 완료됐으니, 반대로 놈들을 엿 먹일 방법을 찾아봐야겠지.
“……만약 서진 씨가 원하신다면, 제가…….”
정해연이 진지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기에 손가락을 들어 볼을 찔러주었다.
루비와는 볼의 촉감이 다른 게 꽤나 만질 맛이 있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정해연이 이내 볼을 부풀렸다.
“뭐예요. 사람은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하하, 미안해요.”
정해연이 무엇을 하려고 할까. 그런 걸 모를 정도로 바보는 아니다.
하지만 상대 쪽에서 더러운 짓을 했다고 해서 우리 쪽에서도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뭐, 복수는 복수를 낳는다.
이런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단지 그저 그런 더러운 놈들과 같은 수준으로 움직이고 싶지 않을 뿐이다.
“저희는 저희 방식대로 하면 되죠.”
휴게실의 구석에 틀어진 텔레비전에서 뉴스 앵커가 어떠한 소식을 전해주고 있었다.
“다 된 밥에 재 뿌리기. 저희 전문이잖아요?”
내 말의 진의를 파악한 정해연이 피식 웃었다.
경쟁 업체에서 물건을 발표하자마자 보다 업그레이드된 것을 공개한다.
굳이 더러운 짓을 할 필요도 없이, 가장 화려한 엿을 먹일 수 있는 방법이다.
* * *
“그래, 과학자가 죽었다고?”
“예, 예! 그렇습니다!”
고풍스러운 실내에서 새하얀 연기가 피어오른다.
상석에서 연초를 태우고 있는 인물이 자신의 앞에 무릎 꿇고 있는 남성을 내려다보았다.
“분명히 그곳에 대한 정보 통제는 철저히 하라고 말하지 않았나?”
“그, 그게…….”
“쯧. 됐어. 어차피 비협조적인 면이 많은 놈이었으니까.”
깊게 내려앉은 목소리. 화를 내고 있지는 않았지만, 복면의 남성은 그것이 무엇보다 두려웠다.
허핑 길드장, 왕 첸.
조장의 자리에까지 오른 왕뢰화였지만, 도저히 그에 대한 공포심만은 억누를 수가 없었다.
벌벌 떠는 왕뢰화에게서 시선을 끄며 왕 첸이 생각에 빠졌다.
누가 그곳을 파괴했을까.
허핑의 전투 2조장, 리우 펑이 병적인 모습을 보이며 정보 은닉을 명령했기에 반드시 넘어가야 할 정보가 상부로 전해지지 않았다.
그런 사실을 모르는 왕 첸은 그저 자신의 계획 중 하나가 무용지물이 되었다는 사실에 불만을 가질 뿐이었다.
‘차우 길드도 그렇고.’
마석병 발발.
국가를 혼란에 빠뜨리고, 각성자들의 수준을 낮춰 ‘그 기술’의 완성과 함께 실행하려 했던 계획을 위한 발판 중 하나였다.
‘마석병을 치료하는 음료수라고 했나.’
솔직히 말해서 탐이 났다.
그것의 제조법을 위해서 신성 길드로의 잠입을 여러 번 시도했으나, 단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아쉬웠지만, 더 중요한 일이 있었기에 일단은 물러났다.
“그 이상은 위험하기도 할 테니까.”
한국에서 대형 길드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더 이상의 작업은 꼬리를 잡힐 위험이 있었다.
“영단의 양산화 작업은?”
“……그게 아무래도 난항을 겪고 있는 것 같습니다.”
“효과를 낮추는 한이 있더라도 작업에 서두르라고 해.”
“예, 예!”
아무리 효과가 낮다 해도 자신이 있었다.
신체 강화의 영단.
이 세상에서 그런 걸 만들 수 있는 곳은 자신들의 길드뿐일 테니까.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인력과 자본을 쏟아부은 결과물이다.
약간의 부작용은 있을지언정, 그 효과는 확실하다.
영단에 대한 발표 직후, 각 나라에 있는 주요 길드 측에서 그들에게 접근했단 사실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다만, 이상하게도 한국에 있는 길드들은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어차피 그런 소국의 길드와 거래 할 생각도 없었기에 상관없었지만.
“박재한의 생사는 확인했나?”
“아무래도 사망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의 흔적을 한국에서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손수 죽여주려고 했더니, 자살이라도 했나 보군.”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면 하등 가치도 없는 것이었기에 그는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아, 신경 쓰고 있던 것이 하나 더.
“신성 길드장이라고 했었지.”
신비한 물건을 만드는 놈이다. 그렇기에 요주의 인물로 파악해 뒀건만, 그 이후로 특별한 움직임은 없었다.
국가 차원에서 주도하는 작업이다.
만약에라도 그 녀석이 끼어들 구석은 없을 것이다.
“버러지들이 할 수 있는 거라곤 거기까지가 한계겠지.”
만약에 대놓고 항의라도 한다면 집요하게 파고 들어줄 생각이었지만, 그들도 생각이 있다면 그러진 않겠지.
“후우…….”
앞으로의 행보를 생각하며 궐련을 깊게 빨았을 때.
“기, 길드장님!”
소란스러운 울림과 함께 누군가 안으로 들어왔다.
갑작스레 들어오는 빛에 왕 첸이 눈살을 찌푸렸다.
저 무례한 놈을 당장에 죽여라.
눈앞에 있는 왕뢰화에게 그런 명령을 내리려고 하는 순간, 부하의 입에서 예상치 못한 말이 나왔다.
그 말을 천천히 곱씹은 왕 첸이 허무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뭐라고?”
신성 길드가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