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cious Beverage RAW novel - Chapter 108
정도마신 107화
십만대산(十萬大山).
중원의 가장 남쪽에 자리한 거대한 산맥.
그 이름처럼 무수히 많은 봉우리들로 이루어진 십만대산은 매우 신비로운 땅이었다.
어떤 곳은 강이 흘러 화전민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 존재했고, 어떤 곳은 사람은 결코 침범할 수 없을 만큼 험준했으며, 어떤 곳은 중원을 넘어 미지의 땅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이토록 광활하다 보니 같은 십만대산에 있는 마을이라 할지라도 서로의 존재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았고, 중원에서도 멀리 떨어져 있기에 찾아오는 외부인도 극히 드물었다.
그 넓은 십만대산 어딘가에 존재하는 하나의 마을.
그리고 이 마을의 이름은 매우 특이했다.
-진마촌(眞魔村).
참된 마귀의 마을이라니?
그리고 그 이름만큼이나 마을의 형태는 매우 기이했다.
보통 산 중턱에 밭을 일구고 살아가는 화전민 마을은 소규모로 구성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 진마촌은 수백 호의 민가가 존재할 만큼 넓은 마을이었고, 오솔길처럼 생긴 좁은 입구를 제외하면 동서남북이 모두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 형태였다.
바깥세상에서 홀로 동떨어져 있는 듯한 별세계의 마을.
그리고 무엇보다 신비로운 것은 마을의 북쪽에 있는 궁궐(宮闕)이었다.
이런 마을에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기 힘들 정도로 거대한 궁궐은 북쪽은 절벽으로 막혀 있고, 다른 세 방향은 까마득한 높이의 담벼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리고 그 궁궐 앞에는 단 한 사람도 지나다니지 않았다.
대관절 이 산속 마을에 어떻게 이런 궁궐이 존재하고, 또 무엇을 위한 것일까?
그때 동이 트며 날이 밝아졌고, 궁궐 성문 위에 붙어 있는 현판이 드러났다.
-마교(魔敎).
현판에는 어떤 미사여구도 없이 마교라는 글자만이 웅혼한 필체로 새겨져 있었다.
성문 앞에 열 명의 사람들과 함께 나타난 사내는 그 현판을 보며 감탄 섞인 음성을 내뱉었다.
“단 두 글자로 충분하군.”
사내의 말대로였다.
마교.
이곳이 정녕 강호 역사상 최강의 단일 세력이라 불렸던 마교의 본거지란 말인가?
그렇다면 그 어떤 설명도 필요 없는 것이었다.
사내는 낙양에서 만났던 장원의 주인, 왕청위에게 물었다.
“이 마을 사람들도 모두 마교도인가? 무공을 익힌 흔적은 있는데 내공의 기운이 없더군.”
왕청위, 그의 본래 이름은 조위청이며 마교의 사대 호법 중 한 사람이었다.
조위청은 사내의 예리한 감각에 새삼 감탄을 터뜨렸다.
그들이 이곳에 당도한 시간은 이른 새벽이었고, 사내는 마당을 쓸고 있는 몇 명의 주민들을 슬쩍 보았을 뿐인데, 매우 정확하게 그들의 상태를 알아보았다.
“그들은 마촌민이라 부르고, 모두 단전이 파괴된 자들입니다. 교내에서 잘못을 저지르고 형벌을 받은 자들, 바깥세상에서 재주는 뛰어나지만 자신만의 사정이 있는 자들, 그리고 원래부터 이곳에서 태어난 자들입니다. 농사를 지어 교에 필요한 식량을 공급하는 자들도 있고, 생필품을 만드는 자들과 대장장이, 요리사와 의원들도 있습니다.”
사내는 조위청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마교가 오랫동안 세상의 눈을 피할 수 있었던 이유로군.”
“그렇습니다. 외진 곳에서 자급자족을 하니 알려질 턱이 없지요.”
“말썽을 일으키는 자들은 없나?”
“저들은 어떤 일이 있어도 이곳에서 나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진마촌의 규율 아래 살아가지요. 그것을 어기는 자는 불문곡직 참형입니다. 또한 마교도 역시 교주님을 제외하면 그 어떤 신분도 규율을 지키는 마촌민들을 절대 건들 수 없습니다.”
“교의 호법인 자네도?”
그 순간, 조위청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다른 이유가 아니라 ‘자네’라는 사내의 호칭 때문이었다.
사내는 이곳에 오는 동안 조위청에게 줄곧 ‘당신’이라는 표현을 써 왔다.
이 두 가지 호칭은 비슷해 보이지만 그 느낌은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이 사람은 이미 나를 부하로 여기고 있다. 천마동에서 자신이 시험을 이겨 내지 못할 것이라고는 조금도 의심하고 있지 않는 것이다. 대단한 자신감이다. 혹은 오만함이거나.’
결국 이 모든 것은 그가 천마동에서 나올 수 있느냐 없느냐의 결과에 달렸다.
조위청은 공손히 답했다.
“마촌민은 오로지 교주님의 백성입니다. 마촌민을 건드는 것은 교주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과 같습니다.”
“모든 것이 마음에 드는군.”
사내는 흡족한 듯 미소를 지었다.
“빨리 문을 열고 천마동으로 안내해라. 이렇게 훌륭한 술상이 차려져 있으니 참기가 어렵다.”
“예.”
마침내, 천하를 공포의 도가니에 빠뜨렸던 마교가 그 모습을 서서히 드러내고 있었다.
* * *
정도맹은 발칵 뒤집혔다.
밤에 보초를 서는 문지기들이 모두 혈도를 제압당해 잠이 들었고, 그들의 표현으로는 ‘보호’하고 있던 정유문의 문주 설린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정도맹의 임시맹주이자 화산파의 장문인, 천향화검(千香華劍) 연천도는 추격조를 만들어 인근을 샅샅이 살폈으나 설린이 도주한 어떤 흔적도 발견할 수 없었다.
모두들 설린의 실력만으로는 혼자서 이런 일을 벌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연히 정도맹 수뇌부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하나의 이름.
무림공적, 소악마 사완악.
소악마(小惡魔)라는 별호는 사완악이 태산에서 도주한 후에 생긴 별호였다.
사실 별호는 보통 그 사람의 특징에 따서 만들어지기 마련인데, 사완악과 무공을 겨룬 사람들은 아무도 사완악의 무공과 장기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 때문에 사완악의 별호는 그저 사대악인의 공동 제자이며, 정도맹주 양천상을 죽였다는 이유로 소악마라 칭하게 되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사완악의 이름을 떠올리면서도 반신반의했다.
사완악에게 어떤 세력이라도 있으면 모를까.
아무리 대단한 무공을 지니고 있다고 한들, 한 사람이 천하를 상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사완악을 길러 낸 사대악인조차 넷이 힘을 합쳐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기에 강호의 눈을 피해 도망쳤던 것이 아닌가.
설령 사완악이 어떤 이유로 다시 모습을 나타났다고 해도, 미치지 않고서야 어찌 감히 정도맹에 당당히 들어와 무사들을 제압하고 설린까지 데리고 나갈 수 있단 말인가.
만약 진짜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정도맹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된다.
임시맹주 연천도는 사람을 모아 추격조를 더 구성했고, 하북성의 정유문에도 따로 사람을 보냈다.
또한 수많은 인원으로 강호 곳곳에 눈이 있는 개방과 하오문에도 수배를 내렸다.
설린의 능력으로는, 설사 사완악이나 또 다른 누군가가 그녀를 돕는다 한들, 제대로 작심한 정도맹의 눈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정도맹이 착각하고 있는 사실이 한 가지 있었다.
바로 사완악은 굳이 자신의 존재를 감출 생각이 없다는 것이었다.
* * *
“아니, 이 사람아! 이게 얼마 만인가? 이게 얼마 만이야!”
사완악을 보자마자 버선발로 뛰어나와 사완악의 손을 잡고 감격하는 노인은 바로 하북성 정유문의 총관, 황임이었다.
사완악은 특유의 천진난만한 얼굴로 말했다.
“안녕하셨어요?”
이어서 또 다른 중년인이 헐레벌떡 신법을 전개하며 나타났다.
“사 공자! 정녕 무사했군! 하하하, 하긴 이 세상에서 자네를 해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나는 자네를 믿고 있었네.”
그는 설린의 의숙부, 관일성이었다.
설린이 샐쭉한 표정으로 말했다.
“두 분, 눈에 저는 보이지 않으시나 봐요.”
황임과 관일성이 민망한 듯 헛기침을 내뱉었다.
“문주님은 좋은 음식 드시며 잘 지내고 계셨으니…….”
“총관님!”
“허허, 농입니다. 문주님도 별일 없으셨습니까?”
“됐어요. 엎드려 절 받기는 사양입니다.”
설린은 반 년 전쯤, 정도맹의 배려로 호위를 가장한 감시자들과 함께 정유문에 온 적이 있었다.
그 때문에 황임과 관일성은 한 차례 설린과 해후를 풀었고, 그녀가 정도맹에 갇혀는 있지만 귀빈의 대우를 받는다는 사실에 비교적 안심을 할 수 있었다.
반면 사완악과 다른 귀령들에 대해서는 매일 밤낮으로 걱정했었으니, 반응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사완악은 진심으로 반겨 주는 두 사람의 얼굴을 보았다.
그들을 마지막으로 본 것은 정도맹 비무 대회가 시작하기 전이니 약 이 년 만이었다.
고작 이 년 만에 관일성은 눈에 띠게 수척해졌고, 황임은 많이 늙은 듯했다.
그들의 마음고생이 그만큼 심했다는 뜻이리라.
하지만 지금 사완악과 설린을 바라보는 두 사람의 눈동자는 지난 이 년의 고생 따위는 기억에서 잊은 듯 빛나고 있었다.
사완악은 두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말했다.
“저에 대해서는 이미 들었겠군요.”
황임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들었네.”
“상관없으십니까?”
사대악인의 제자.
정도맹주를 시해한 무림공적.
황임과 관일성도 처음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매우 놀라고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사완악은 목숨보다 더 소중한 정유문과 설린의 은인이었고, 사완악이 데려온 귀령들은 매일매일 선행을 베풀러 돌아다니는 누구보다 정의로운 사람들이었다.
또한 설린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전해 들은 두 사람은 오히려 안타까운 마음을 금치 못했다.
황임은 갑자기 사완악의 어깨를 토닥이듯 두 번 치며 말했다.
“자네는 아무 죄가 없지 않은가. 미안하네, 자네가 무림공적이 되고 있는데도 힘이 되어 주지 못해서. 이렇게 돌아올 수 있어서 다행이네.”
“제가 이곳에 있으면 정유문도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그래도 괜찮습니까?”
그러자 관일성이 말했다.
“우리에게 피해를 끼칠까 걱정할 필요 없네. 자네는 정유문의 은인이며 가장 자랑스러운 문도일세. 우리는 정도맹에도 정식으로 항의하는 서찰을 보낸 상태고, 자네에게 어떤 일이 있다면 그것은 곧 정유문 모두의 일이 아니겠는가?”
그 말에 사완악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어떤 문파든 문도를 지키고 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정말 그들의 존폐가 위험하고 목숨이 달려 있을 때, 혹은 정도맹이라는 단체에서 쫓겨나 오히려 적이 될지도 모를 때, 그때도 한 명의 문도를 위해 모든 사람이 함께 할 수 있는 문파가 있을까?
‘기분이 묘하단 말이지.’
사완악이 잠시 어떤 생각에 잠겨 있을 때 황임이 물었다.
“그 친구들은 안 오는가?”
사완악은 황임이 묻는 게 귀령들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들었다.
“제가 시킨 일이 있어서요. 보름 안에는 돌아올 것입니다.”
“하하, 그렇군. 사실 처음에 자네와 문주님이 떠나고 그들과 지내는 것이 영 어색했는데, 있다 없으니까 영 허전하더군.”
“그렇습니까?”
“하하. 정이 가장 무서운 것이라더니 말이야.”
그날 밤, 사완악과 설린의 귀환을 축하하는 술자리가 열렸다.
사완악은 마음껏 술을 마셨지만 조금도 취기가 오르지 않았다.
이제는 내공을 사용하지 않아도 술의 주독(酒毒)이 그의 몸을 침범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완악은 강호에 나온 이래 가장 큰 슬픔을 느끼다가, 좋은 생각이 떠올랐는지 웃으며 내공을 일으켰다.
그리고 내공으로 술의 독성을 함께 운기조식해서 온몸의 혈관과 기혈에 완벽하게 흡수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마침내 사완악은 혀가 꼬일 정도로 취해 말했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은 정이 아니라 이…… 이…… 고기 요리…… 하, 너무 맛있습니다.”
황임도 불콰해진 얼굴로 낄낄 웃음을 터뜨렸다.
“그게 그렇게 맛있나?”
“그럼요. 제가 사령지관을 통과할 때 온몸을 벌벌 떨었다니까요.”
“사령지관? 그건 또 뭔가?”
“시험이지요. 그때 이 요리를 해 주시는 분이 죽었거든요.”
“죽긴 누가 죽나? 꿈이라도 꿨나 보군.”
“하하. 맞습니다. 꿈이라 다행이었지요.”
“실없는 사람 같으니. 그건 그렇고, 그 녀석은 잘 지내고 있었나?”
“그 녀석이요?”
황임이 씁쓸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휘아 말일세.”
“아.”
술을 마시던 사완악의 손이 멈칫했다.
그러고는 다시 한 잔 털어 넘기고는 말했다.
“제가 봤을 때는 무탈해 보였습니다.”
“다행이군.”
사완악은 고개를 갸웃하며 황임을 바라봤다.
“다행이라고요?”
황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마음이 여린 녀석일세. 몸이라도 건강하다니 다행이지.”
“…….”
사완악은 더 이상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새벽이 되자 모두 술에 취해 처소로 돌아가 곯아떨어졌다.
그리고 사완악은 알딸딸한 기분으로 지붕에 누워 달빛을 보며 중얼거렸다.
“가장 무서운 것이 정이라…… 그 양반들은 잘 지내고 있으려나.”
잠시 후.
사완악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잠이나 자자. 내일부터는 어떤 놈들이 찾아올지 모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