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cious Beverage RAW novel - Chapter 110
정도마신 109화
“객잔을 사시겠다고요?”
설린은 사완악의 말에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응. 이름은 정유객잔. 객잔의 주인은 문주님이지. 어때? 황 총관님 말로는 다른 문파들도 객잔이나 포목점 같은 가게를 운영하거나, 땅을 빌려주고 밭을 일구거나 직접 농사를 짓기도 한다던데? 사파 문파들은 기루를 운영하거나 가게들의 보호비를 받기도 하고.”
사완악의 말은 사실이었다.
강호에는 수많은 문파들이 있고, 그만큼 많은 무공과 유파가 존재한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무공을 지닌 문파라 할지라도 피할 수 없는 문제가 바로 재정적인 부분이었다.
사람이 사는 데 돈이 얼마나 중요하고 막강한 위력을 지녔는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는 일.
물론 뛰어난 무공과 고수를 지닌 문파라면 돈은 어느 정도 따라오기 마련이지만, 그것만으로 문파를 유지할 수는 없었다.
예를 들면 구파일방 같은 중원 최고의 명문대파들만 봐도 그랬다.
소림사와 무당파는 황제나 관료들과 복잡하고 긴밀한 관계가 존재하여 막대한 자금을 나라로부터 지원받았다.
또한 돈이 많은 부호들이나 상단들은 소림사와 무당파, 혹은 차선으로 화산파에게 돈을 주고 그 대가로 이름을 빌리거나, 길흉화복에 관계된 부적을 사기도 했으며, 무력이 필요한 일에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다.
특히 고관대작이나 큰 상단의 주인들은 자신들의 부인이나 여식을 보호해야 할 일이 있을 때 소림사나 무당파의 고수를 초빙하고 싶어 했는데, 무공도 무공이거니와 명망 높고 규율이 엄격한 대문파의 승려나 도사가 여러모로 안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개방은 수많은 방도들에게 일정한 세금을 거두어 운영했고, 의외로 여러 가지 사업에 손을 대고 있어서 거지 방파라는 이름과는 대조적으로 부유한 편이었다.
반면, 같은 구파일방이지만 종남파나 점창파, 청성파, 형산파 등은 결코 소림사나 무당파에 뒤지지 않는 절학과 고수를 보유하고 있음에도 갈수록 재능 있는 제자들의 숫자가 줄어드는 형국이었다.
곤륜파나 아미파는 애초에 폐쇄적인 성격을 띠고 있어 이런 문제를 별로 신경 쓰지 않았으니 예외였다.
오대세가 역시 다른 무림세가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재산을 보유했다.
모용세가는 선대로부터 진귀한 금은보화를 물려받았고, 제갈세가와 하북팽가는 황실과 연관이 깊었으며, 사천당가는 사천 땅에 수많은 사업체를 지니고 있었고, 마지막으로 남궁세가는 검제 남궁명조가 등장하기 전까지 무림상가(武林商家)라는 놀림을 받을 정도로 드넓은 농지와 막대한 부를 쌓았던 상단 가문이었다.
이렇듯 한 문파가 성장하기 위해서 돈이란 필수불가결(必須不可缺)한 요소였다.
“그렇긴 한데, 너무 갑작스럽게 말씀하셔서요. 다른 이유가 있으신 것 같은데요?”
이제는 사완악이 어떤 사람인지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설린이었다.
천기자의 정체를 파헤치려는 목표가 있는 사완악이 단순히 정유문의 재정을 위해 객잔을 운영하자고 할 리는 없었다.
“그리고 정도맹의 무인들이 가만히 있지도 않을 걸요.”
아직 소문이 퍼지지 않았을 뿐, 무림공적이 몸담은 문파의 객잔이라면?
하루에도 몇 번씩 사완악을 노리는 무인들이 찾아와 난장판을 벌일지도 몰랐다.
사완악은 설린의 말이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훌륭한 협행이기 때문이지.”
설린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객잔을 사는 게 협행이라고요?”
사완악이 확신에 찬 말투로 대답했다.
“그래, 정유객잔에서는 아주 특별한 행사를 진행할 생각이거든.”
“어떤 행사요?”
“밥을 주는 거야.”
“네?”
사완악은 오전에 만났던 소년, 장호와의 일을 설린에게 말해 주었다.
설린은 사완악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야 그의 생각을 어느 정도 눈치챌 수 있었다.
“혹시 배고픈 사람들이 무상(無償)으로 식사를 할 수 있게 하자는 말씀인가요?”
사완악이 반색하며 말했다.
“바로 그거야. 잡다한 일을 도와주는 것을 사람들은 고마워 하지만, 과연 그 감사한 마음이 얼마나 깊고 얼마나 오래 가겠어? 세상에 알려진다 해도 뭐 대단한 협객이라고 할 수는 없잖아? 물론 큰 위험에 빠진 사람들을 구해 주기도 했지만, 우리가 중원 전체를 돌아다니는 것도 아니고 그런 사람들이 매일매일 나타나지는 않으니까.”
“그야 그렇지요.”
“하지만 생각해 봐. 개나 고양이도 밥을 주는 사람을 주인으로 여기고 충성하잖아?”
설린은 조금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사람들을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조금…….”
“한낱 미물들도 그렇다는 소리야. 나만 해도 지난 일 년 동안 무공 수련이 고될 때면 이곳에서 먹었던 고기 요리가 생각났으니까. 힘들고 배고플 때 먹는 맛있는 밥은 절대 잊지 못하는 법이지, 암.”
“풋. 사 공자님다운 말이네요. 맞는 말이기도 하고.”
“허락하는 건가?”
“그렇게 의미 있는 일을 반대할 수 없죠. 하지만…….”
설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황임과 관일성을 불렀다.
황임과 관일성도 그 이야기를 듣고는 매우 좋은 생각이라고 했다.
하지만 세 사람이 동시에 걱정하는 것이 있었다.
바로 재정.
“다만, 감당이 될까요?”
“나도 그 생각을 했네. 밑 빠진 독에 물붓기가 아닌가?”
설린과 관일성에 이어 황임도 걱정스럽게 물었다.
“자네가 지닌 돈도 한계가 있지 않겠는가? 그리고 자네는 좋은 뜻으로 그런 일을 벌인다지만, 어렵고 힘들지 않은 사람들도 너도나도 모여든다면 그게 과연 협행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세 사람의 물음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물론 그들은 사완악이 지니고 있는 황금 구슬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기에 그런 걱정을 한 것이기도 했지만, 사완악 역시 황임의 마지막 말에는 동의했다.
그리고 이에 대해 사완악은 이미 생각을 해 놓은 듯 말했다.
“제 돈은 많이 쓰지 않을 생각입니다. 그리고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편법으로 식사를 할 수 없는 방법도 있습니다.”
세 사람이 매우 궁금하다는 얼굴로 사완악을 쳐다봤다.
사완악은 차근차근 설명했다.
“무료 식사는 묘시(卯時)와 신시(申時), 하루에 두 번 제공될 겁니다.”
설린과 황임, 관일성은 두 시간대가 특이하다고 생각했다.
묘시라면 아주 이른 시간이었고, 신시는 점심과 저녁 사이의 애매한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사완악은 계속해서 말했다.
“요리는 하나로 통일하고, 좋은 옷이나 사치품을 지닌 사람은 대상에서 제외할 것입니다. 사실 정말 힘든 사람들은 얼굴만 봐도 태가 나지 않겠습니까?”
“그건 그렇지요.”
“또한 재료값은 일정 수준 이상을 넘지 않게 할 겁니다. 충분히 먹을 만한 식사지만, 돈 주고 사 먹는 요리들과는 차별이 있겠지요. 생각해 보십시오. 굶주린 사람들에게는 남이 먹다 남긴 음식이라 해도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식량입니다. 하지만, 충분히 돈이 있는 사람에게 선택권도 없이 값싼 요리를 매일 먹으라고 하면, 오히려 고역이지요. 또한 그런 한 끼를 위해 일부러 해진 옷을 입고 자신의 신분을 속여 가며 이른 아침 시간이나 한참 일해야 할 시간에 찾아올 사람들이 몇이나 있겠습니까?”
세 사람은 듣고 보니 사완악의 말이 매우 그럴싸하게 느껴졌다.
본인들에게 어느 정도의 여유가 있다면, 절대 허름한 옷을 일부러 찾아 입고 시간에 맞춰 맛없는 식사를 하고 싶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반적인 요리 외에 고급 요리와 고급 술을 주문하는 사람들에게는 다른 객잔보다 더 비싼 값에 팔 생각입니다.”
설린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돈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공짜로도 밥을 주는데, 다른 음식들은 오히려 더 비싸게 받는다고요?”
사완악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내는 돈에서 일부를 무료 식사를 위해 사용한다는 말을 해 주는 거야. 그리고 만약 원하지 않는다면 제값을 내도 된다고 말이지.”
관일성은 사완악의 말을 듣고는 문득 깨닫는 바가 있어 크게 감탄했다.
“아! 자네의 그 생각은 정말 대단하군! 그런 고급 요리와 술을 먹는 사람들은 돈보다 체면이 중요한 법이지.”
사완악이 말했다
“맞습니다. 제가 돈이 있어 보니까 알겠는데, 그까짓 몇 푼 더 비싼 건 아무 상관 없거든요.”
황임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동의했다.
“있는 사람들은 뽐내기를 좋아하지. 그들의 돈으로 객잔이 이득을 챙긴다면 반발하겠지만, 가난한 자들에게 도움을 준다고 하면 주변을 의식해서라도 제값을 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겠군.”
“일반적인 수입은 정유문의 것으로 하고, 무료 식사 제공에 모자란 돈은 제가 채울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정유문의 재정과 명성, 두 가지 모두 충족이 되는 거지요.”
정유문의 사람들은 사완악의 계획을 듣고는 혀를 내둘렀다.
중원 어디에도 이런 객잔은 존재하지 않았고, 자신들은 상상조차 해 보지 못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 공자님의 말대로……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협행일지도 몰라.’
배고픈 자에게 밥을 준다.
어쩌면 정유문의 사조이자 그녀의 현조부인 대협 설영충의 수많은 일화들보다 더 빛나는 협행이 아닐까?
설린은 그렇게 생각하며 물었다.
“사 공자님, 이런 계획을 언제부터 세우신 거죠?”
“응? 말했잖아. 아까 그 소년이랑 대화하다 떠올랐다고.”
“그럼 불과 한 시진 전인데. 그사이에 이 모든 생각을 다 했다고요?”
“뭐 얼마나 대단한 거라고.”
사완악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으나, 설린을 비롯한 세 사람은 사완악이 무공에만 천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런데 이때였다.
정유문의 하인이 네 사람이 있는 문주전의 문을 두들겼다.
“문주님, 밖에 나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어떤 이상한 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
설린이 문을 열고 물었다.
“손님이요?”
“네. 허리에 검을 차고 있는 세 명의 남자들입니다. 정도맹에서 나왔다면서 문파의 책임자를 부르고 있습니다.”
설린은 뒤를 돌아 사완악과 눈이 마주쳤다.
사완악은 옅은 미소를 머금으며 감탄했다.
“이야, 며칠 더 걸릴 줄 알았더니 생각보다 빨리 왔네. 가 봅시다, 문주.”
사완악은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설린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밖으로 나갔고, 모두 그 뒤를 따랐다.
마당에는 하인의 말대로 세 사내가 기다리고 권위 있는 눈빛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중앙의 사내는 중년의 나이였고, 양 옆의 둘은 삼십대로 보였다.
중년인은 설린을 보자 크게 놀라고 안색을 굳히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설 문주! 이게 무슨 짓이오!”
설린도 그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곽 부당주님, 오랜만입니다.”
중년인은 바로 정도맹 집법당의 부당주, 철심검수(鐵心劍手) 곽도성이었다.
냉혈판관(冷血判官) 서문석이 가장 신뢰하는 오른팔로, 강직하고 대쪽 같은 성격으로 유명했다.
집법당의 부당주라면 상당히 높은 직위인데, 그가 직접 정유문을 찾아왔다는 건 정도맹이 얼마나 지금의 사안을 중요시 여기는지 보여 주는 것이었다.
“지금 인사치레 따위가 중요하겠소? 정도맹에 있어야 할 설 문주가 어째서 아무 말도 없이 사라져서 이곳에 있느냐 묻는 것이오!”
설린이 그에 대해 막 대답을 하려는 찰나.
뒤쪽에서 사완악의 음성이 들렸다.
“문주님, 내가 대신 말해도 될까?”
설린은 사완악과 눈을 마주쳤고,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세요.”
철심검수 곽도성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갑자기 웬 젊은 청년이 불쑥 앞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너는 누군데 이 자리에 나서는 것이냐?”
사완악은 곽도성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난 사완악이다.”
“사완악? 그게 누구…….”
순간, 곽도성은 물론 양 옆 수하들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