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cious Beverage RAW novel - Chapter 14
정도마신 13화
황무지(荒蕪地).
풀 한 포기 없이 드넓게 펼쳐진 황무지는 근처에 인가는커녕, 지나가는 사람 한 명 없는 곳이었다.
그런데 신비롭게도 이 거친 황무지에 한 대의 고급스러운 마차가 나타났다.
두두두두…….
흙먼지를 가볍게 일으키며 부드럽게 달리는 이 마차는 네 마리의 말이 이끌고 있었고, 왕족이나 탈 수 있을 법할 정도로 호화로웠다.
그 마차 안에는 네 명의 여인이 나란히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정말이에요? 그럼 강호에서는 나이가 많거나 어리다고 해서 방심하면 안 되겠군요?”
네 여인 중 가장 어려 보이는 십 대의 소녀가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그녀의 옆에 있는 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오히려 그런 사람들 중에서 진짜 무서운 자들이 숨어 있지. 하지만 어차피 사람들은 우리를 더 경계할지도 몰라.”
“우리를요? 왜요?”
“호호. 강호에서 가장 조심해야 하는 부류가 바로 우리 같은 미녀들이거든.”
그녀의 말에 십 대 소녀는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가 미녀라고요?”
미녀를 자칭한 여인, 소월(小月)은 왼쪽에 있는 여인을 힐끔 쳐다보고는 말했다.
“진 매(妹)는 대사자(大師姉:사저, 사형과 동일한 뜻. 여자 문도 사이에 쓰는 호칭) 때문에 우리가 못났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대사자가 너무 특별한 거야. 우리도 다른 여인들과 비교하면…….”
이때 가장 오른쪽에 앉아 있던, 어깨가 넓고 눈매가 사나운 여인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을 잘랐다.
“시끄럽다. 둘 다 조용히 좀 해. 소월, 우리는 지금 놀러 나가는 게 아니다.”
소월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
“단 사자는 꼭 저한테만 그러는군요.”
“네가 먼저 모범을 보여야 하니까.”
“아, 네, 네. 단 사자야 무공밖에 모르니까 어련하시겠어요?”
날카로운 눈매의 여인, 단교(但皎)는 더욱 사납게 사매 소월을 노려봤다. 소월은 그 눈빛에 움찔하며 가장 왼쪽에서 조용히 침묵하고 있는 여인을 향해 도와 달라는 듯 바라봤다. 그러자 여인은 소월의 시선을 느꼈는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단 사매, 너무 그러지 마. 청청(淸淸)이는 강호에 나가는 게 처음이고, 소 사매도 겨우 두 번째야. 설레는 게 당연하지.”
“하지만 이번 강호행은…….”
“단 사매도 처음에는 그랬는걸.”
“대, 대사자!”
황급히 말을 자른 단교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그러자 기죽어 있던 소월이란 여인이 절호의 기회를 잡은 사람처럼 빠르게 물었다.
“대사자, 단 사자도 처음 강호로 나갈 때 난리법석을 떨었나요?”
“난리법석은 무슨……!”
대사자라 여인은 양 뺨의 보조개가 살짝 들어갈 만큼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 정도는 아니지만 사부들도, 나도, 사매들도, 누구나 강호를 처음 경험할 때는 설레는 법이지.”
소월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렇죠? 그런데 단 사매는 항상 자기만 진중한 척 잘난 척하니까…….”
여인이 손가락을 튕겨 소월의 코끝을 톡 건드리며 말했다.
“그래도 사자한테 그런 말버릇은 못 써.”
“……네, 대사자.”
단교에게는 한마디도 지지 않고 까불던 소월도 이 여인의 말에는 감히 말대꾸하지 못했다. 단교는 그 모습에 흥, 하고 비웃고는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때, 황무지를 무심코 바라보던 진청청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창밖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엇! 저기 좀 봐요!”
세 여인이 일제히 시선을 돌렸다.
소월이 진청청과 마찬가지로 깜짝 놀라며 말했다.
“어머! 웬 사람이지?”
붉은 옷의 사내.
네 여인이 타고 있는 마차 앞쪽에서 붉은 옷을 걸친 한 사내가 황무지를 가로질러 걸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평소라면 두 사람의 호들갑에 눈살을 찌푸릴 단교도, 눈앞의 상황은 조금 의외인 듯 중얼거렸다.
“이 근방에는 사람이 방문할 만한 곳이 한 군데도 없는데…… 외부인을 보는 건 처음이군.”
진청청이 눈을 반짝였다.
“우리, 저 사람이 누군지 알아봐요!”
단교가 호통치듯 말했다.
“안 돼. 괜한 시빗거리를 만들 필요 없다. 저 사람이 가는 방향은 우리 월궁문(月宮門) 쪽도 아니니까.”
“괜한 시빗거리라니요? 너무 수상하잖아요.”
“수상하긴 뭐가?”
진청청이 사내를 향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붉은 옷을 입고 있잖아요!”
“붉은 옷이 뭐가 수상하다는 거야?”
단교가 황당한 듯 되물었다. 그러나 진청청은 마치 확신에 찬 듯한 표정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에서 붉은 옷을 입고 돌아다니잖아요. 그게 안 수상해요?”
“너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니?”
진청청은 흥분해서 말했다.
“어쩌면 무시무시한 마두(魔頭)일 수도 있어요! 혹은 신비로운 협객일 수도 있죠! 안 되겠다. 양 노(襄老)! 잠시 멈춰!”
“예, 아가씨.”
양 노라 불린 자는 그녀의 말에 곧바로 고삐를 틀어잡았다. 이 마부의 말 다루는 솜씨는 실로 뛰어나서 갑작스러운 명령에도 말들은 침착하게 멈춰 섰다.
“청청!”
단교가 뒤늦게 사매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이 천방지축에 호기심 왕성한 소녀는 이미 마차에서 뛰어내려 붉은 옷의 사내에게 바람같이 달려가고 있었다.
“이봐요!
“이봐요!”
“이봐요오!”
“이봐요!”
헉헉!
“이봐요오!”
붉은 옷의 사내는 뾰족한 음성과 함께 갑자기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소녀를 바라보았다.
“왜 사람이 부르는데 대답을 안 하…….”
사내에게 막 따지려던 진청청은 순간 입을 다물었다.
약관의 나이 정도 될 법한 청년!
자신보다 한 뼘 이상은 더 키가 큰 이 사내의 외모는 실로 묘한 구석이 있었다.
여인처럼 하얀 얼굴에 붉은 입술을 지녔지만 칼처럼 날카롭고 짙은 눈썹과 넓은 어깨는 매우 사내다웠기 때문이다.
묘한 이중성(二重星)을 지닌 미청년(美靑年).
그러나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옷…… 옷이……!”
청년이 입고 있는 옷은 붉은색이 아니라, 본래는 하얀색이었을 무복 전체가 핏물로 물들어 있었던 것이다.
“진 매, 왜 그래?”
뒤늦게 따라온 소월과 단교가 의아한 듯 소녀를 바라봤다.
진청청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는 침을 삼키고 말했다.
“이, 이 사람 옷이…… 피로 물들어 있어요.”
그녀의 말에 소월과 단교가 깜짝 놀라 사내를 바라봤다.
과연 진청청의 말대로였다. 사내의 붉은 옷은 틀림없이 피로 물든 것이었다.
소월과 단교는 진청청의 앞을 보호하듯 가로막으며 사내와 대치했다.
사내는 여전히 무심한 눈빛으로 그녀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진청청은 사문의 언니들이 자신을 막아 주자, 용기를 내어 물었다.
“당신…… 누구죠?”
사내는 그녀의 말이 재밌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너는 누구지?”
“네?”
사내는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갑자기 나타나서 누구냐고 물어보니까. 너는 누구냐?”
“나, 나는…… 월궁문의 삼대 제자 진청청, 어멋!”
나름 당당하게 자신의 이름을 밝히려던 진청청은 별안간 꺅 소리를 지르며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단교와 소월은 너무 깜짝 놀라 본능적으로 각자의 검을 뽑아 진청청을 보호하며 물었다.
“왜, 왜 그래?”
“무슨 일이냐?”
진청청은 양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고개까지 살짝 돌리며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 저 사람…… 아래가…….”
아래?
아래라니, 단교와 소월은 너무나 의아하여 자신들도 모르게 사내를 위아래로 훑었다. 그리고 그들은 곧 진청청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
‘어머……!’
‘흠……!’
사내의 하복부 아래, 그 바지춤 안쪽에서 뭔가가 꼿꼿하게 일어서 있었던 것이다. 단교와 소월은 이십 대의 강호 여인이었기에 진청청보다는 비교적 냉정을 유지했으나, 얼굴이 붉어지는 것은 숨길 수 없었다.
사내 역시 그들이 왜 그러는지 눈치챈 듯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놈이 또 제멋대로? 이봐, 오해하지 마. 여기엔 깊은 사정이…….”
“색마(色魔)!”
“뭐?”
사내는 진청청이 얼굴을 가린 채 소리를 지르는 통에 황당하다는 듯 입을 벌렸다.
“강호에는 여인만 보면 어떻게 하려는 그런 자들이 있다고 들었는데…….”
자신을 쏘아 보는 눈빛에, 사내는 난감한 듯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런 게 아니라니까…….”
“그, 그럼 대체 그건 뭐죠?”
진청청이 자신의 검으로 사내의 아랫도리를 가리켰다.
사내가 꺼림칙하다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야, 기분 이상하니까 칼로 그렇게 가리키지 마라. 그리고 여인만 보면 어떻게 한다니? 지금은 너희가 내 앞을 가로막은 거다.”
진청청이 지지 않고 말했다.
“그건 당신이 수상하니까 그렇죠!”
이때 단교가 진청청을 제지하며 말했다.
“이곳은 사람이 전혀 왕래하지 않는 장소입니다. 실례가 안 된다면 당신은 이곳에 어떤 연유로 오게 되었는지 말해 주시겠습니까?”
사내는 도리어 이상하다는 듯 되물었다.
“그렇게 외진 곳이라면…… 너희는 왜 마차까지 끌고 이곳을 지나치는 거지? 나도 그 연유를 묻고 싶은데.”
단교는 이 사내가 호락호락하지 않은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크게 걱정하지도 않았다. 다행히도 눈앞의 청년은 그리 위협적이지 않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몸은 제법 단련돼 있지만, 깊은 내공은 느껴지지 않아.’
단교는 속으로 안심하며 사내를 다시 살폈다.
그녀는 특별히 시빗거리를 만들거나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지만, 사내의 피로 물든 무복은 확실히 수상한 구석이 있었다.
“그 옷에 묻은 피들은 누구의 것입니까?”
사내의 눈썹이 미미하게 꿈틀거렸다.
“이건 마치 나를 심문이라도 하는 말투로군.”
사내는 어쩐지 조금 달라진 눈빛으로 말했다.
“내가 왜 대답해야 하지?”
소월이 자신의 검을 고쳐 잡으며 말했다.
“당신이 당당하다면 말 못 할 게 무엇이죠?”
“나는 원래 남이 멋대로 명령하는 일에는 반대로 해야만 직성이 풀리거든.”
소월은 황당한 듯 사내를 바라봤다.
하지만 사완악은 여유롭게 미소를 짓고 있었고, 그 순간 소월은 자신도 모르게 그가 너무나 잘생겼다는 생각을 하고는 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이때, 소월의 뒤에 있던 진청청이 말했다.
“하지만 당신은 무척이나 수상해요. 우리를 보자마자…… 막, 막 그러는 걸 보니 색마인거 같기도 하고, 그 붉은 핏물은 설마 살인을 한 것인가요? 그렇다면…….”
“그렇다면?”
“네?”
사내의 태연한 음성에 세 여인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내는 무미건조한 음성으로 그녀들을 바라보며 다시 말했다.
“난 열일곱의 여인을 겁탈하고, 백 명의 사람을 죽인 살인마다. 이게 너희가 마음속에 정해 놓고 듣기를 바라는 대답인가? 좋다, 만약 그렇다면 어쩌겠다는 거냐?”
“그, 그런……!”
세 여인은 일순간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설마 하니 사내가 이렇게 순수하게, 듣는 것만으로도 끔찍한 악행을 인정해 버릴 줄 몰랐던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그의 한마디.
그래서 어쩌겠냐는 말과 함께 사내의 몸에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위엄이 서려 있었다.
사내가 씩 미소를 지었다.
“내가 그런 놈이라 한들, 너희들이 감히 어쩔 거냐고 물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사매들은 그분에게 더 이상 무례를 범하지 말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