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cious Beverage RAW novel - Chapter 171
정도마신 170화
“이 여인을 지키고 싶다면 말이지.”
갑작스럽게 들려온 음성에 뒤를 돌아본 사완악의 안색이 살짝 굳어졌다.
나타난 중년 사내는 평범한 키에 짙은 회색 무복을 입고 있었는데, 그의 손에는 다름 아닌 연비려가 인질로 잡혀 있었다.
연비려는 혈도를 제압당한 듯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모습.
사완악은 안색을 굳히며 물었다.
“네놈 정체가 뭐지?”
사완악의 안색이 굳어진 것은 연비려가 인질로 잡혀 왔기 때문이 아니었다.
우선 첫 번째로는 현재 정도맹의 경계 태세는 매우 삼엄했다.
현종이야 누구도 의심하지 못하는 상황에 내부에서 사건을 저질렀으니 아무도 눈치챌 수 없었지만, 외부의 적이 침입하는 것은 다른 이야기였다.
또한 사완악이 영성옥을 건네받고 현종을 찾아가면서 연비려에게 은밀하게 전음을 날려,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사실을 개방의 용두방주 방욱에게 전달하라고 지시했었다.
지금 같은 만약을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도 연비려가 인질로 잡혔다니?
그뿐만이 아니었다.
사완악이 두 번째로 놀란 이유는 사완악조차 저 중년의 사내가 나타나는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천하 팔대고수들 같은 초절정의 고수들조차 사완악의 예리한 감각을 피하기는 어려운 일이니 상대의 정체가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종천의 음성이 들려왔다.
“놀랄 것 없다. 그는 유령마가의 가주니까. 유령마가의 은신술은 천마신공을 익히지 않은 이상 아무리 너라 해도 알아차릴 수 없다.”
“유령마가? 역시 칠대마가 중 한 곳인가 보군.”
“그럼 다음에 다시 만나도록 하지.”
사완악은 등을 돌리려는 종천을 향해 조소를 머금고 말했다.
“오백 년 만에 탄생한 마교의 교주라는 놈이, 부하를 시켜 인질을 잡으면서까지 도망을 치려는 거냐?”
도발적인 말에 종천의 신형이 멈칫했다.
하지만 그것은 순간이었을 뿐.
“조급해할 필요 없다. 세상에 태양이 두 개일 수 없듯이, 너와 나는 반드시 싸우게 될 테니까. 조만간 우리의 싸움에 걸맞은 장소로 널 초대하마.”
종천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한마디를 남기며 훌쩍 신법을 전개했다.
그리고 그의 신형은 눈 깜짝할 사이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물론 사완악은 그 뒤를 쫓을 수 없었다.
사완악은 고개를 돌려 못마땅한 표정으로 유령마가의 가주에게 말했다.
“다른 칠대마가의 가주들도 그랬지만…… 마교 놈들은 이해가 되지 않는단 말이야. 너희들이 평생 무공을 익혀 왔다는 건, 무공을 익혀서 뭔가 하고 싶은 게 있다는 거잖아? 마교도 사람 사는 곳인데, 연인이든 자식이든 가족이 있는 놈들도 있겠지. 그런데 오랫동안 모셔온 주인도 아니고, 갑자기 나타나 교주 자리를 꿰찬 놈을 위해 이렇게 허무하게 목숨을 바치다니. 그토록 충성하는 이유가 뭐야?”
유령마가의 가주라는 중년인은 잠시 사완악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교주님은 곧 마신의 현현이시다. 음지의 마교를 양지로 이끌어 주시고, 마교 천하를 만들어 주실 위대하신 분이지. 감히 함부로 입을 놀리지 마라.”
“그놈의 마교 천하는. 천하를 얻으면 뭐가 좋다는 거냐?”
“이제 보니 야심도 없는 사내였군. 천하에 대한 야망도 없는 자는 결코 이해하지 못하는 이야기겠지.”
사완악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천하에 대한 야망이라. 그럴듯하게 말을 할 뿐, 사실은 그냥 힘 센 놈 아래 무릎 꿇고 빌붙어서 멋대로 살고 싶다는 거 아니야? 하긴, 그런 놈들이니까 정상적으로 떳떳하게 살지 못하고 쥐새끼처럼 숨어 살았겠지.”
사완악은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차며 말했다.
“어리석구나. 너는 명색이 칠대마가의 가주라는 놈이 고작 교주가 겁먹고 도망치는 시간을 벌어 주기 위해 개죽음을 당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때.
사완악의 눈동자가 뱀처럼 변하며 사이한 녹광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 죽음이 허무하고 억울하지 않느냐…… 만약…… 네가 마교와 교주에 관한 사실을 숨김없이 털어놓는다면…… 네 목숨을 살려 주마. 말하라! 너희들의 본거지는 어디 있느냐? 설린 문주는 어디로 납치했지?”
그것은 사존의 힘을 이용한 탈정미혼공이었다.
유령마가의 가주는 동공이 멍해지며 연비려를 잡고 있던 손에도 힘이 풀려 그녀가 땅에 쓰러졌다.
“나는…… 마교는…….”
하지만 다음 순간.
유령마가의 가주가 머리를 세차게 흔들더니, 곧 그의 눈빛에 다시 생기가 돌아왔다.
“지금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이냐!”
사완악은 자신의 섭혼술이 깨졌다는 것을 직감했다.
“역시 이 정도 수준에게는 무리인가? 아깝군.”
아깝군, 이라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사완악의 신형은 어느새 유령마가의 가주 앞으로 미끄러지듯 다가갔다.
그리고 쓰러진 연비려를 보호하듯 가로막고 서서 중년인을 향해 일장을 내질렀다.
이 같은 일련의 동작은 그야말로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전광석화와 같이 빨라서 아무리 초절정의 고수라 하더라도 도저히 피할 방도가 없어 보였다.
하지만 사완악의 장력이 중년인의 가슴에 격중하려는 순간.
스르르!
유령마가 가주의 신형이 잔상을 남기며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호오?”
사완악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그것은 그가 평소 즐겨 사용했던 이형환위의 수법이었다.
하지만 이토록 완벽한 경지의 이형환위를 사용하는 사람은 사완악 자신과 사부 구득소를 제외하면 처음 보는 것이었다.
아니, 어쩌면 강호제일의 경신술인 승광신법보다 더 뛰어난 이형환위였다.
“너는 한 가지 착각을 하고 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나타난 유령마가의 가주는 사완악을 노려보며 말했다.
“교주님을 위해 내가 목숨을 바친다고? 네가 과연 나를 죽일 수 있을 것 같은가?”
사완악은 당연하다는 듯 답했다.
“그 누구였더라? 무식하게 주먹만 휘두르는 놈이랑, 멀리서 창질해 대던 놈이랑, 암살자 년까지. 칠대마가의 가주 세 명이 한꺼번에 덤벼도 별거 없던데? 너는 그들보다도 더 약해 보이고.”
유령마가 가주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사완악이 말하는 세 사람이 혈천마가와 창영마가, 그리고 진암마가의 가주들이라는 것을 알아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완악의 말대로 그들 세 사람의 무공은 유령마가의 가주보다 더 강했으니, 그가 사완악의 상대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 정면 대결이라면 나는 네 상대가 될 수 없겠지. 하지만…… 내가 도망치고자 마음먹는다면 이 세상 누구도 나를 잡지 못한다는 것을 모르는구나.”
사완악이 재밌다는 듯 되물었다.
“그럼 현종, 네 교주도 너를 못 잡나?”
“어리석은 녀석. 천마신공을 익히신 교주님과 널 비교하고 싶은 거냐?”
“흐음. 천마신공 앞에서는 도망칠 수 없다는 거구나. 다행이네.”
“다행이라고?”
“그래. 그럼 나한테서도 도망갈 수 없을 테니까.”
유령마가의 가주는 황당하다는 듯 사완악을 쳐다봤다.
“무슨 자신감인지 모르겠군. 좋다, 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쫓아와 보거라.”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중년인의 신형이 다시 잔상을 남기며 갑작스럽게 사라졌다.
유령마가라는 가문의 이름답게, 그야말로 유령 같은 움직임.
하늘로 솟았는지 땅으로 꺼졌는지 모를 정도로 완벽히 사라진 것이다.
하지만 사완악의 얼굴에는 오히려 미소가 떠올랐다.
“거기구나.”
나지막이 중얼거린 사완악의 신형이 땅을 박차며 빛살처럼 빠르게 움직였다.
그리고 약 십여 장 정도를 날아간 뒤, 돌연 허공을 향해 마룡일효의 초식을 내질렀다.
언뜻 봐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행동.
하지만 사완악이 장력을 날린 허공에서, 갑자기 매우 기겁한 비명이 터져 나오며 사라졌던 유령마가 가주의 모습이 나타났다.
“헉!”
유령마가의 가주는 황급히 양손을 뻗어 사완악의 장력을 맞받아쳤다.
하지만 사존의 힘을 모두 사용하기 전에도 칠대마가의 가주들을 압도했던 사완악의 장력을 그가 감당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꽝! 하는 폭음과 함께 그의 신형이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하지만 유령마가의 가주 역시 초절정의 고수.
그는 땅에 떨어지기 무섭게 혼신의 힘을 다해 다시 신법을 전개했다.
그러자 처음과 마찬가지로 그의 신형이 감쪽같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사완악의 표정에는 조금도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소용없어.”
사완악은 잠시 정신을 집중하더니 다시 서쪽 방향으로 날아가 허공에 무공을 펼쳤다.
이번에는 처음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기운이 담긴 장법이었다.
이윽고 외마디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끄악!”
마치 하늘을 날던 새가 화살에 맞은 것처럼.
유령마가 가주의 신형이 땅으로 툭 떨어졌다.
“크윽…… 어떻게…….”
유령마가의 가주는 고통스러운 듯 가슴을 부여잡으면서도 믿을 수 없다는 듯 사완악을 바라봤다.
사완악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아무리 뛰어난 경신술이라 해도 그렇게 순간이동을 하듯이 사라질 수는 없어. 정말 그런 경신술을 지니고 있다면, 아무리 천마신공을 익혔다고 해도 너를 잡지 못하겠지. 즉, 네 경신술은 세상에서 가장 빠른 게 아니라, 가장 은밀하다는 뜻이겠지. 천마신공은 마교에서 가장 뛰어난 마공이니 네 기운을 파악할 수 있는 것일 테고.”
“하지만…….”
“천마신공을 익히지 않은 내가 어떻게 널 찾았냐고?”
사완악은 의아해하는 유령마가의 가주를 향해 말했다.
“아까 내 공격을 피한 이형환위의 수법은 아주 훌륭했어. 조금만 더 빨랐다면 널 놓치고 말았을 거야.”
“그게 무슨 말이지…….”
“옛날에 주선이라는 신기한 도사가 있었다는 거 알아?”
“주선?”
“그 양반이 각종 주술에 능했는데…… 죽기 전에 참 신기한 물건을 많이 만들어 놨더라고. 예를 들면 네 등에 붙어 있는 부적 같은 거지.”
사완악은 쓰러져 있는 유령마가의 가주를 향해 다가가 그의 등 뒤에서 뭔가를 뜯어냈다.
그 물건을 확인한 유령마가의 가주는 깜짝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그것은 노란색 종이에 붉은 글씨로 이상한 문양이 그려져 있는 부적이었기 때문이다.
“네 은신술도 대단하기는 한데…… 참 신기한 주술이야. 그 부적을 붙이고 있으면 삼십 장 이내에서는 얼마든지 위치를 찾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어느 틈에…….”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중얼거리던 유령마가의 가주는 조금 전 사완악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조금만 빨랐다면 놓치고 말았을 거라는.
즉, 그는 이형환위로 사완악의 공격을 피해 냈지만, 사완악이 부적을 날려 붙이는 것까지는 피하지 못했던 것이다.
“사완악…… 과연 무서운 놈이구나…… 하지만…… 네놈도 결국 교주님의 손에…….”
퍽!
유령마가의 가주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사완악의 일장이 다시 한번 그의 가슴을 후려쳐, 마지막 비명도 지르지 못하며 절명해 버린 것이었다.
사완악은 숨이 끊어진 그를 잠시 내려다보다 말없이 돌아서서 연비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의 혈도를 풀어 준 뒤 일으켜 세웠다.
연비려는 혈도가 풀리자마자 힘없이 말했다.
“오라버니, 죄송해요…….”
연비려의 표정에는 미안함이 가득했다.
사완악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 따라왔으나, 오히려 중요한 순간에 발목을 잡는 꼴이 되었으니 면목이 없었다.
하지만 사완악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신경 쓰지 마. 현종, 아니, 종천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그 마교의 교주 놈은 보통 용의주도한 녀석이 아니야. 아무리 인격이 다르다 해도 현종과 머리는 똑같을 테니까. 어차피 네가 아니었어도 본인이 도망갈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준비해 뒀을 거다.”
“그래도…….”
“오히려 덕분에 칠대마가의 가주 중 한 녀석을 또 해치웠으니 이득이라고 봐야겠지.”
“그런데 현종 대사님이 마교의 교주일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어요.”
사완악은 고개를 작게 흔들며 말했다.
“그 녀석은 우리가 아는 현종이 아니야.”
“네?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자세한 건 맹으로 돌아가 설명해 주지.”
하지만 현종이 아니라고 말했던 사완악의 표정 역시 그 어느 때보다 어두워져 있었다.
마교의 교주가 누구라도 현종과 함께 힘을 합친다면 자신이 있던 사완악이었다.
하지만 그 현종이, 혹은 현종의 다른 인격이 마교의 교주라니.
더불어 점점 맞아 떨어지는 천의문의 예언들까지.
‘쉽지 않겠네.’
강호에 나와 처음으로 마음이 무거워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