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cious Beverage RAW novel - Chapter 19
정도마신 18화
“설린은 그야말로 청초(淸楚)라는 단어를 지니고 태어난 여인 같다고 하지요. 화려하지는 않지만 맑고 깨끗한 아름다움으로, 사내대장부라면 그녀를 보는 순간 지켜 주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든다고 합니다. 어쩌면 이미 망해 버린 것과 다름없었던 정유문에 그나마 몇 명의 문도들이 꾸준히 모였던 것도 그런 설린의 매력 때문이겠지요.”
재담꾼 나양조의 말에 그에게 동전을 던졌던 객잔 손님 중 하나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그 정도로 아름답다면 그 일대에서는 꽤 유명하겠군?”
나양조는 죽엽청을 한 모금 마신 뒤, 흥이 오른 듯 말을 이어 갔다.
“그렇습니다. 아름다운 꽃에는 언제나 나비와 벌이 모여드는 법. 설린 문주의 외모에 대한 소문이 퍼지자, 여러 남성들이 그녀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곳 하북성의 모든 장부들은 그녀를 포기해야만 했지요.”
처음 질문을 던졌던 사내는 더욱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포기해야 했다고? 이유가 무엇이지?”
나양조가 약간의 탄식을 내뱉으며 말했다.
“왜냐하면 한 남자가 그녀를 자신의 여인으로 삼겠다고 공표해 버렸기 때문이지요.”
사내는 이해할 수 없는 얼굴로 재차 물었다.
“아니, 도대체 그 사내가 누구인데 하북성의 다른 남자들이 모두 포기했단 말인가?”
나양조는 잠시 좌중을 훑어보며 모두가 그의 다음 말을 애타게 기다릴 만큼 뜸을 들인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는 바로 흑사방 삼방주의 아들, 궁화종이었지요.”
“허어!”
“흑사방!”
이곳저곳에서 감탄인지 한숨인지 모를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들은 정유문이나 설린이라는 이름은 몰라도, 흑사방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쯧쯧, 흑사방이라면…… 그것도 삼방주의 아들이라면 어쩔 수 없지.”
누군가 혀를 차며 하는 소리에 다들 입을 다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흑사방에 대하여 하고 싶은 말이 많은 것 같았으나, 누구 하나 시원하게 내뱉지 못하고 눈치를 살피며 쉬쉬했다.
나양조가 이어서 말했다.
“설린 문주는 궁화종의 청혼을 처음에는 거절했지요. 왜냐하면 이미 그에게는 한 명의 정실부인과 두 명의 첩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긴, 유서 깊은 정유문의 문주가 사파 방파의 세 번째 첩이 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겠지요.”
“궁화종이 거절당하고 가만히 있을 인물이 아닐 텐데?”
나양조는 아까부터 질문을 멈추지 않는 사내에게 대답했다.
“재미있게도 그 일로 얼마 후 흑사방과 정유문의 일대일 비무가 열릴 예정이라고 합니다.”
“일대일 비무?”
“각 문파의 대표가 나와 비무를 하고, 패자는 승자의 요구를 따르기로 한 것이지요.”
“허, 그런 일이…… 하지만 결과는 불 보듯 뻔한 일이로군. 정유문이 흑사방을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을 테니. 혹 외부에서 고수를 초빙해 오면 모를까.”
나양조가 안타깝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정유문도 그러한 생각으로 방수를 찾아 이리저리 알아본 듯하지만…… 결국 흑사방과 대적할 수 있는 고수를 찾기는 어렵겠지요. 참, 세상에 이리도 인물이 없을까요? 만약 누군가 대신 흑사방을 이겨 주기만 한다면, 그 청초하고 아름다운 설린 문주를 자신의 여인으로 만들 수도 있을 텐데 말이지요.”
“그게 그렇게 되나?”
그때, 한 청년의 낭랑한 음성이 객잔에 울려 퍼졌다.
“흑사방이 그리 대단한 곳인가?”
사람들은 일제히 그 청년을 바라봤다.
바로 사완악이었다.
사람들은 사완악의 얼굴과 고급스러운 백의장삼을 위아래로 훑어본 뒤, 그가 좀 전에 재담꾼에게 은자를 던진 청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때 재담꾼 나양조에게 계속 질문을 던지던 사내가 말했다.
“공자는 세상 소식에 꽤 어두운 모양이오.”
“하하. 내가 이곳에서 조금 먼 지역에서 와서 모르는 것들이 있지.”
사내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말했다.
“하긴, 이 지역 사람이라면 아무리 세상에 관심 없는 사람이라도 모를 수가 없을 것이오. 흑사방은 역사는 깊지 않지만, 매우 빠르게 세력을 불리고 있는 신흥 강자라오. 특히 흑사방의 세 방주는 정파의 웬만한 고수들도 피할 만큼 무공이 뛰어나다고 알려져 있소.”
사완악은 흥미롭다는 듯 물었다.
“그래? 그럼 소림사나 화산파 같은 문파만큼 강한 것인가?”
그러자 사람들은 그건 너무 과했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이때 재담꾼 나양조가 끼어들며 말했다.
“소림사나 화산파는 너무도 대단한 문파라 아직 비교할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사파 문파들의 연합인 사천회도 흑사방에 관심을 갖고 있으니…… 이대로 계속 성장한다면 아마 강호의 어떤 문파도 그들을 무시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되오.”
사내가 이어서 혀를 찼다.
“쯧쯧, 그런데 하필이면 삼방주의 아들 궁화종이라니. 그래도 한때는 대영웅이었던 설영충의 후손인데, 참 불쌍하게 되었군.”
사완악이 사내를 쳐다봤다.
“그건 또 무슨 뜻이지?”
사내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자세한 건 말할 수 없소. 나도 목숨이 한 개뿐이라서…….”
그는 사방의 눈치를 살피며 조용히 말했다.
“하북성에서 흑사방에 대한 이야기는 조심해야 하오.”
“재밌군, 재밌어.”
사완악은 알겠다는 듯 홀로 중얼거리다가, 품에서 은자 한 닢을 다시 꺼내 지금까지 나양조와 질답을 주고받던 사내에게 던져 주었다.
“흥미로운 이야기의 보답이야. 그럼 이만.”
사완악은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빙긋 미소를 짓고는 몸을 돌려 객잔을 빠져나갔다.
사람들은 그제야 사내가 나양조와 한 짝으로, 적절히 바람을 잡으며 이야기를 진행시켰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완악이 그렇게 모습을 감추고 일각 정도가 지난 후.
재담꾼 나양조와 그와 한 짝이었던 사내는 객잔 밖으로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나양조가 말했다.
“어때 보이는가?”
나양조의 음성은 객잔에서와 같은 사람이라고는 느낄 수 없을 만큼 낮고 진중했다.
그 옆의 사내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저는 전혀 짐작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나양조는 조금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사완악이 사라진 방향을 잠시 응시하다가 몸을 돌렸다.
“일단은 지켜보는 수밖에…….”
* * *
정유문의 장원 앞에 사람들이 한두 명씩 모여들고 있었다.
설린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씁쓸한 미소로 중얼거렸다.
“조부님께서 유년 시절에는 늘 저렇게 손님들이 줄을 섰다고 하셨죠. 언젠가 그런 날이 다시 오기를 바라신다고 말씀하셨는데…… 오늘이 그러네요.”
그녀의 말에 늙은 총관 황임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과거의 손님들은 정유문과 인연을 맺기 위해서 찾아왔다. 하지만 오늘은 정유문의 현판이 강호에서 사라지는 것을 보기 위해 모이고 있었다.
“미안하다, 린아.”
정유문의 호법이자, 전대 문주 설전추의 의제(義弟)인 관일성은 비통함과 자괴감이 섞인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그는 약 한 달 전, 전대에 인연이 있었던 백매검(白梅劍) 주강환이라는 고수를 초빙하기 위해 먼 길을 떠났었다.
주강환은 실력도 뛰어나지만, 그 유명한 화산파의 속가 제자였기 때문에 아무리 흑사방이라고 해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신분이었다.
하지만 지쳐 쓰러지는 말을 바꿔 가며 쉼 없이 달려갔던 관일성은 백매검 주강환이 병환 중이라는 이유로 제대로 부탁 한번 해 보지 못하고 돌아와야만 했다.
“그런 말씀 마세요. 숙부님께서 얼마나 애쓰셨는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화산파의 속가 제자도 함부로 할 수 없을 만큼 흑사방의 힘이 대단해졌군요.”
설린을 비롯한 황임과 관일성은 백매검 주강환의 병환이 핑계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주강환 외에도 설린과 황임은 다른 고수를 백방으로 알아봤으나, 겨우 정유문을 위해 흑사방과 대적할 수 있는 사람은 찾을 수가 없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관일성은 비장한 얼굴로 말했다.
“비무는 내가 하겠다. 목숨을 걸고 싸운다면 한 번의 기회는 반드시 올 것이다.”
하지만 설린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비무는 제가 하겠어요.”
황임과 관일성이 깜짝 놀라 그녀를 쳐다봤다.
“문주님이 직접 말입니까?”
설린은 물론 정유검법을 배워 어느 정도 검을 다를 줄 알았다.
하지만 그녀의 실력은 검술의 경지로만 따지면 황 총관과 비슷했고, 실전으로 비교하자면 그보다 한 수 아래였다.
그녀의 나이를 감안하면 나쁘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흑사방과의 대결은 어불성설이었다.
“그건 안 될 일이다. 아직 네 실력으로는…….”
“저는 지금 문주로서 내린 결정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설린의 말에 황임과 관일성이 조금 놀란 눈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죄송하지만, 숙부님이라 해도 흑사방의 고수에게 승리를 할 수는 없어요. 목숨을 건다고 하셨지만, 그래도 달라질 건 없다고 생각해요.”
“음…….”
관일성은 설린의 말에 아무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말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 운명이 결정지어지는 비무이니, 제 손으로 결정지을 생각입니다. 저를 정유문의 문주로 생각하신다면 이 문제에 가타부타 말하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설린은 평소 자신이 문주라는 것을 내세워 두 사람에게 명령을 한 적이 없었다.
그만큼 지금 그녀의 결정이 확고하다는 뜻이었다.
설린은 걱정스러운 얼굴과 비통한 심정으로 입을 다물고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 비무는 어차피 궁화종이 나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내가 비무에 나선다면 다른 사람이 다치는 일은 없을 거야.’
흑사방의 성격상 다른 사람이 비무를 한다면 반드시 피를 보고 말 것이다.
설린은 자신 때문에 정유문의 가족들이 다치는 것을 절대 원치 않았다.
‘그리고 최후의 순간에는…….’
설린이 속으로 어떤 끔찍한 결심을 내리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밖에서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이, 이게 무슨 짓입니까! 안에 들어오시면 안 된다니까요!”
장원의 문지기를 맡고 있던 소년 문도, 구휘의 목소리였다.
“멈추시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검을 뽑겠습니다!”
그 언성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핫핫! 대단히 친절한 친구네. 검을 뽑겠다고 경고도 해 주다니.”
“어서 밖으로 나가십시오!”
“뭐 하나만 물어보겠다니까, 거참 빡빡하네.”
설린과 황임, 관일성은 의아한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 본 뒤 마당으로 나갔다.
마당에는 구휘가 양팔을 벌려 한 사내 앞을 가로막고 있는 뒷모습이 보였다.
사내는 눈처럼 하얀 백의장삼을 입고 있었고, 한 손에는 단검보다 조금 긴 길이의 섭선(攝扇)을 쥐고 있었다.
관일성은 티격태격하며 대화를 주고받는 구휘와 사내의 모습에 황당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게 무슨 일이냐?”
구휘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더니 울상이 되어 말했다.
“무, 문주님, 이 사람이 막무가내로…….”
하지만 구휘가 보고를 끝내기도 전에, 청년 사내가 눈을 크게 뜨며 낭랑히 말했다.
“문주? 아하, 저 사람이 정유문의 문주 설린이라는 사람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