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cious Beverage RAW novel - Chapter 200
정도마신 199화
한밤중에 갑자기 나타난 미청년.
그는 바로 꿈에도 그리워하던 사완악이었다.
“사 공자님!”
설린은 크게 놀라 사완악에게 달려갔다.
사완악의 눈에서 이채가 흘렀다.
“일 년 사이에 경공술이 더 늘었군.”
설린은 사완악이 어디 다친 곳은 없는지 찬찬히 살핀 후에 원망 섞인 음성으로 말했다.
“도대체 어디서 무얼 하셨길래 소식 하나 없으셨어요?”
사완악은 대답 대신 품에서 서찰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이건?”
“천기자가 죽기 전 내게 남겨 놓은 서찰이야.”
설린은 그 서찰이 사완악이 사라졌던 이유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빠르게 서찰을 펼쳐 읽기 시작했는데, 점차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이게 사실인가요?”
“음양천자와 관련된 거라면, 모두 사실이더라고.”
“그 사람이 이 땅에 남겨 둔 것을 찾기 위해 일 년 동안 돌아다니신 거였군요.”
사완악은 어깨를 으쓱였다.
“정확히는 사람이 아니고, 일 년도 아니야.”
설린이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알겠는데, 일 년이 아니라니요?”
사완악은 음양천자의 혼령과 싸웠던 이야기를 간략히 말해 주었다.
“그래서 이기긴 이겼는데, 나도 정신을 잃었어. 지금 생각해 보면 한 칠일 동안 기절한 채로 바닷물에 휩쓸렸던 것 같네. 아무튼 다시 깨어났을 땐 어느 무인도더라고.”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으나, 당시 사완악은 그야말로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왔다.
칠 일 동안 물고기 밥이 되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었지만, 천하의 사완악이 그 정도의 상태가 되었다는 것은 음양천자와의 싸움에서 그만큼 엄청난 내상을 입었다는 뜻이었다.
만약 사완악이 지닌 심후한 내공과 생명을 지키는 수호성의 기운이 아니었다면, 영영 깨어나지 못했을지도 몰랐다.
“아무튼 정신은 돌아왔는데, 손 하나 까딱할 수가 없더라고. 신기한 경험이었어. 딱히 고통스러운 건 아니었는데, 온몸이 고장 난 것처럼 정말 꿈쩍도 하지 않더라니까?”
“그, 그래서요?”
“별 수 있나. 우선 누워서 운기조식을 시작했지. 다행히 한 줌의 내공은 남아 있었으니까.”
사완악은 그 마지막 한 줌의 내공을 이용해 필사적으로 운기조식을 했다.
그렇게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조금은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그렇게 간신히 뭍으로 올라왔고, 다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운기조식을 하며 몸의 회복에 집중했다.
“그런데 상처가 가볍지는 않더라고. 하루 이틀로 회복할 수 있는 게 아니었어.”
그러고는 생존을 위한 날들이 이어졌다.
동굴을 찾아서 살 곳을 만들고, 짐승을 사냥할 힘도 없어서 먹을 수 있는 과일을 찾아 연명하며 다시 운기조식을 했다.
사완악은 매일 해가 지고 다시 뜰 때마다 동굴 벽에 하루가 지나갔음을 표시했다.
그의 몸은 정말 조금씩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 속도가 너무나 느려서 평생 불구가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약 삼십 일이 지났을 때를 기점으로, 회복 속도는 점차 빨라지기 시작했다.
손상됐던 몸의 기능들이 돌아오고, 내상이 진정되자 제대로 된 운기조식을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동굴에 새겨진 표시가 삼백 일을 나타냈을 때.
사완악은 비로소 자신의 힘을 되찾을 수 있었다.
모든 내공을 회복한 사완악에게 무인도를 탈출하는 것은 손바닥 뒤집듯 쉬운 일이었다.
어기충소(御氣衝溯)의 수법으로 하늘로 높이 솟구쳐 남해의 육지를 찾아냈고, 승광신법을 전개해 수면 위를 박차며 경공을 펼쳤으니 그야말로 등평도수(登萍渡水)의 경지였다.
“정말 고생이 많으셨군요…….”
설린은 안타깝다는 듯 사완악을 바라봤다.
세상에 그 무엇도 사완악을 위험하게 만들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사완악은 그녀가 상상하지도 못했던 싸움을 끝마치고 돌아온 것이었다.
“사 공자님은 정말 대단하시군요. 모든 사람들 앞에서 마교를 무찔러 강호를 구하시더니, 이번에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천하를 위한 일을 해냈으니까요.”
“이 정도면 협객이 된 건가?”
설린이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사완악이 정유문에 처음 왔을 때, 협객이 되어야겠다고 했던 말이 떠올라서였다.
“그냥 협객이 아니시지요. 어찌 대협이라고 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동시에 설린의 얼굴 한편에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의 그늘이 드리워졌다.
‘나는 정말 과분한 사람을 마음에 품었구나.’
사완악과 비교하면 자기 자신이 너무 초라해졌던 것이다.
그런데 이때였다.
사완악이 달빛 아래서 양팔을 벌리며 물었다.
“이 옷은 어때?”
사완악은 사람들에게 그의 상징처럼 각인된 백의장삼을 입고 있었다.
하지만 예전의 수수했던 백의장삼과 다르게, 지금 사완악이 입고 있는 백의장삼은 더욱 눈처럼 하얀 빛깔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목과 가슴, 소매 부분에 황금색 띠와 문양이 새겨져 있어 더없이 고급스러워 보이는 장삼이었다.
설린은 그러고 보니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정말 멋진 옷이군요. 무인도에서 일 년 동안 갇혀 계셨는데 이런 옷은 어떻게 구하셨어요?”
“황제한테 달라고 했어.”
“역시 그렇…… 네? 뭐라고요?”
설린이 귀를 의심하며 사완악을 쳐다봤다.
“자금성에 갔다 왔거든. 황제가 반갑게 맞아 주던데?”
“설마 옷 한 벌 달라고 황제를 뵌 건 아니겠죠?”
“맞는데? 역시, 황제가 주는 옷이 다르긴 하더라고.”
설린의 얼굴에 황당함이 떠올랐다.
물론 황제가 사완악을 반기는 것은 당연했다.
사완악은 황궁의 은인이었으니까.
설령 반갑지 않더라도, 반가운 척을 했을 것이다.
그래도 그렇지.
“세상에 옷 한 벌 달라고 황제를 알현하는 사람은 사 공자님밖에 없을 거예요.”
사완악이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아마 앞으로는 그럴 일 없겠지. 이번에는 특별히 중요한 일이 있어서 그런 거니까.”
설린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중요한 일이 또 남았나요?”
사완악은 잠시 눈을 돌려 하늘을 바라보다가 불쑥 말했다.
“문주님은 나를 왜 좋아해?”
“예에?”
설린은 순간 너무 당황하여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도 알 수가 없었다.
“가, 가, 갑자기 그게, 무슨…….”
사완악은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나는 어려서부터 사부님에게 여인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어. 여인이 마음을 품으면 어떤 눈을 하고, 어떤 말을 하는지. 그런데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처음부터 그냥 느낄 수 있었거든. 문주님이 나를 좋아한다고.”
설린은 얼굴이 불에 덴 것처럼 뜨거워져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 글쎄요.”
“아니야?”
“아니요! 마, 맞긴 한데…… 사부님께서 이런 말을 당사자에게 직접 하면 안 된다는 건 가르쳐 주시지 않았나요?”
“배웠어.”
“그런데요?”
사완악은 머리를 긁적이고는 말했다.
“이론과 실전은 다르다고 느끼는 중이야. 그래서 왜 좋아해?”
“…….”
설린은 잠시 머뭇거리다 마음을 굳힌 듯 말했다.
“사 공자님은 참 신기한 사람이었어요. 갑자기 나타나 정유문을 구해 주고, 무엇이든 거침이 없었죠. 허술한 듯하면서도 생각이 깊었고, 단호하면서도 아이처럼 해맑았어요. 그런 모습에 제 눈이 계속 머물렀던 것 같아요. 처음에는요.”
“처음에는? 지금은 다르다는 거야?”
“지금은 그냥 좋아요.”
“그냥 좋다고?”
“사 공자님을 좋아하게 된 이유들은 있지만, 지금은 어떤 이유와도 상관없이 좋아졌으니까요.”
“아직도 내가 좋다는 거지?”
설린은 자포자기한 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요. 좋아해요. 사 공자님을 마음에 품고 있어요. 그건 숨길 수 없는 진실이죠.”
이번에는 설린이 되물었다.
“그래서, 저를 이렇게 부끄럽고 창피하게 만드는 이유가 무엇이죠? 제대로 된 이유가 아니라면 사 공자님을 오늘부로 파문하고 싶군요.”
사완악은 푸핫, 하고 웃음을 터뜨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네.”
“다행이라고요?”
“걱정했거든. 문주님과 꽤 오래 떨어져 있었잖아. 혹시 마음이 변했으면 어쩌나 했지.”
“그게 무슨…….”
설린의 말이 갑작스럽게 멎었다.
그녀의 눈에는 놀람과 당황이 뒤섞여 형용할 수 없는 흔들림으로 출렁였다.
그리고 어느 순간.
두 눈에 눈물이 맺혔다.
설린은 눈물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두 눈을 꼭 감았다.
더없이 황홀한 달콤함이 그녀의 혀끝에서 맴돌아 전신을 휘감았다.
한 줄기 달빛 아래서.
두 남녀에게 평생에 잊지 못할 추억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 * *
“저도 물어볼래요.”
“응?”
“사 공자님은 제가 언제부터 좋아졌죠? 이유는요?”
사완악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억울하다는 건가?”
“맞아요. 여인이 먼저 고백을 하는 것도 서러운데, 나만 말하면 너무 억울하죠.”
“흐음.”
사완악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아마도 처음부터.”
설린이 눈이 샐쭉해졌다.
“거짓말 말아요. 무슨 처음부터예요? 그리고 아마도라니. 무슨 대답이 그래요?”
그러나 사완악의 표정은 진지했다.
“그전까지 나는 누구를 좋아해 본 적도, 친구도 없었으니까. 아니, 애초에 당시에는 타인을 좋아한다는 감정이 무엇인지 잘 모를 때였지. 하지만 돌이켜 보면 처음부터였던 것 같아. 당신과 대화를 하는 건 다른 사람들과 매우 다른 느낌이었거든. 그리고 내가 누군가를 이유 없이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생긴 것도 처음이었고. 아! 무엇보다…….”
사완악이 깨달았다는 듯 손뼉을 치며 말했다.
“설린이 우리 사부님과 비교하면 별로 예쁜 편은 아니잖아? 그래도 예뻐 보였으니까. 아마도 그때부터가 아닐까? 눈이 가고, 도와주고 싶고, 예뻐 보이고. 이 정도면 이유로도 충분하지?”
“뭐라고요?”
설린은 어이없다는 듯 눈을 흘겼다.
세상에 오늘 연인이 된 남자가, 여자에게 사부보다 예쁘지는 않다니.
문제는 그게 너무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사실, 그래도 예뻐 보였다는 한마디에 그녀의 기분은 하늘을 날 것처럼 좋았다.
“뭐, 그렇기는 하네요.”
설린은 사완악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저도 사 공자님이 세상에서 제일 잘생겨 보여요. 더 잘생긴 남자를 본적은 있지만요.”
“나보다 잘생겼다니. 누가?”
“그야 물론 현종 스님이죠.”
“현종?”
사완악은 현종이라는 이름에 한 대 얻어맞은 듯 멍하니 설린을 바라보다가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런. 되로 주고 말로 받았군.”
“그쵸?”
설린이 사완악을 따라 웃음을 짓다가 문득 말했다.
“그래도 마지막에 현종 스님과 인사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어요.”
사완악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녀석이 아니었다면 우리 모두 위험했을 거야. 같이 취할 때까지 술을 마시기로 했는데, 못내 그게 아쉽군.”
사완악은 알고 있었다.
마교의 교주, 종천을 쓰러뜨린 것은 자신의 힘만이 아니었다.
천기자가 목숨을 바쳐 만든 봉신환의 힘으로도 종천의 내공을 완전히 태워 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종천이 자신의 모든 힘을 모아 최후의 일격을 전개하는 순간.
종천의 내부에서 큰 변화가 일어났다.
지금까지 죽은 듯 고요했던 현종의 인격이 때를 기다렸다는 듯 꿈틀거리며 그의 정신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던 것이다.
결국 온전히 힘을 사용하지 못한 종천은 사완악의 공격을 받아 낼 수 없었다.
“약속은 지켜야죠. 우리 매년 현종 스님 기일에 함께 술을 항아리째 들고 찾아가죠.”
“하하, 좋지. 대신 설린은 마시면 안 돼.”
“네?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설린의 주정은 감당할 자신 없거든.”
“누가 들으면 진짜인 줄 알겠네요!”
“진짜라니까. 차라리 음양천자랑 한 번 더 싸우고 말겠어.”
“사 공자님!”
“하하하!”
사완악의 웃음이, 강호에 나온 이후 가장 편안하고 행복한 웃음이 하늘에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