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cious Beverage RAW novel - Chapter 201
정도마신 200화
평화롭고 따스한 날이었다.
사완악은 정유문의 지붕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교가 사라지고, 구파일방과 오대세가가 백성의 신뢰와 존경을 받으며, 명석한 황제가 나라를 안정시키니, 세상에는 더 이상 분란의 여지가 없게 느껴졌다.
사완악은 모든 사람의 영웅이 되었고, 어머니와 동생과 상봉했으며, 사랑도 얻었으니 더 바랄 게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사완악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그 이유는 오로지 하나.
“따분하네.”
심심했기 때문이다.
지금의 생활이 나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사완악에게는 너무 잔잔하게 느껴졌다.
처음에는 느긋한 휴식이 좋았으나, 목숨을 건 사투를 반복해 온 그에게는 너무나 단조로웠다.
설린과 함께 있을 때면 즐거웠지만, 그녀는 정유문의 새로운 문도들을 교육하고 관리하는 일로 매우 바빴다.
사완악은 몇 번 도와주려 했으나, 그의 성미에는 전혀 맞지 않는 일이었다.
그렇게 사완악은 무인도에서 돌아온 지 불과 한 달도 되지 않아서 평범한 일상의 공허함을 느끼고 있었다.
“가종후.”
사완악이 나지막이 부르자 한 인영이 지붕 위에 스르르 나타났다.
사귀령 중 한 사람인 가종후였다.
“예, 공자님!”
“다른 애들은 뭐 하냐?”
“대형은 신입 문도들에게 검술의 기초를 가르치고 계시고, 천 사매와 묵 사제는 뭘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문파의 일을 돕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 다들 나름대로 잘 적응하는군.”
“문주님과 총관님께서 워낙 잘 챙겨 주시니까요.”
“넌?”
“예?”
“낮에 맨날 내 수발만 드는데. 그렇다고 딱히 우리가 누구랑 싸우는 것도 아니고. 안 지겹냐는 말이다.”
가종후가 갑자기 한쪽 무릎을 꿇으며 외쳤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지존을 모시는 것은 신에게 가장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그리고 요새는 제가 시간이 나는 대로 새로운 주술을 만들고 있습니다. 전투가 아니라 일상에도 도움이 될 수 있는 주술들인데, 조만간 보여 드리면 크게 놀라실 것입니다!”
“됐다. 너랑 무슨 말을 하냐.”
사완악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자 가종후가 눈치를 챈 듯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 물론…… 예전과 비교하면 조금 지루하다는 생각은 듭니다만.”
“그렇지? 그럼 생각 좀 해 봐라. 뭘 해야 재밌을지. 하다못해 황제한테 말해서 전쟁터라도 나가고 싶은 심정이니까.”
“전쟁터로 나가면 문주님과 떨어지셔야 하는데요?”
사완악이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말이 그렇다는 거지.”
가종후는 잠시 입을 다물고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전쟁터라고 하니까 예전에 정유객잔이 생각나는군요.”
“응? 정유객잔?”
“예. 그때 정말 힘들지 않았습니까? 아침부터 일어나서 재료 손질하고, 객잔 청소하고, 손님 맞을 준비하고, 점심에는 무료 식객들을 대접하고, 저녁에는 술상 차리고, 진상짓 하는 놈들한테 무공도 쓰지 못하고 타일러서 돌려보내야 하고. 문 닫고 또 정리하면 잘 시간이었지요. 정말 칼 없는 전쟁터 같았습니다.”
그때였다.
“그래, 그거다! 좋은 생각이다, 가종후!”
“예?”
가종후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사완악을 바라봤다.
“객잔. 객잔을 열어야겠다.”
* * *
설린은 뜻밖이라는 듯 사완악을 바라봤다.
“객잔을 여시겠다고요?”
“응.”
“가가께서 원하신다면 얼마든지 열 수 있죠. 그런데 왜 객잔을?”
그녀가 사완악을 부르는 호칭은 사 공자님에서 가가(哥哥)로 변해 있었다.
연인 사이에서 쓰이는 애칭이었다.
어쨌든 정유문은 현재 엄청난 자본을 지니고 있었다.
사완악은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에게 마교를 무찌르는 대가로 각 문파에 황금 이천 냥을 요구했었기 때문이다.
사완악은 마교의 멸문 직후, 소림사를 제외한 모든 문파들에게 그 돈을 모두 받아 냈다.
소림사에게 돈을 받지 않은 이유는 그들이 방장 대사를 비롯해 원로 고수를 모두 잃었고, 또 현종에 대한 마지막 선물이었다. 그리고 하북팽가에게는 오백 냥을 추가한 적이 있었는데, 사천당문에게 오백 냥을 감면해 주었으니 총액은 달라질 것이 없었다.
그렇게 사완악이 받아 낸 자금은 자그마치 황금 이만팔천 냥.
황궁을 제외한다면, 중원의 어떤 상단이나 전장보다도 더 많은 돈을 보유하고 있었다.
사완악은 그것을 정유문의 공금으로 쓰라고 했지만, 정유문은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그 돈을 쓰지 않았고, 사용하는 경우에도 매번 사완악에게 결재를 받고 있었다.
한마디로 사완악이 마음먹는다면 중원에서 가장 큰 객잔을 지을 수도 있었고, 사실은 굳이 객잔을 할 필요도 없는 상황이었다.
“생각해 보니 정유객잔을 운영할 때가 하루하루 가장 재밌었던 것 같거든. 그래서 목표가 생겼어. 중원 제일의 객잔을 만들어 볼 거야.”
설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역시 최근 사완악이 평범한 일상을 지루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좋은 생각이에요. 얼마가 필요하세요?”
“은자 열 냥.”
“네? 중원제일객잔 정도의 규모를 만드시려면 황금 열 냥으로도 부족하실 거예요.”
“아니. 그건 목표라니까. 돈으로 모든 걸 해결해 버리면 의미가 없지.”
설린은 그제야 사완악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작은 객잔으로 시작해서 스스로 최고의 객잔을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중원제일객잔은 그렇게 엄청난 크기의 객잔이 아니거든. 아니, 어쩌면 상상하지도 못할 만큼 큰 객잔이라고 할 수도 있겠군.”
“네? 그건 또 무슨 말씀이세요?”
“그냥. 아직은 구상 단계라 자세히 말하기는 어려워.”
문득, 설린은 과거 사완악이 정유객잔을 열어 하북성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무상으로 식사를 제공하면서도 흑자를 만들어 냈던 것을 떠올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어떤 객잔인지는 모르겠지만, 가가라면 정말 해내실지도 모르지.’
당시 설린은 사완악이 그 누구보다 장사에 뛰어난 재능이 있다고 생각했을 정도였으니.
최고 객잔을 만들겠다는 말이 허풍스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알겠어요. 혹시 필요한 사람은 없으신가요?”
사완악은 미리 생각해 놓은 듯 답했다.
“가종후는 나와 함께 일하기로 했고, 만사무는 정유문의 검술 교두 일이 마음에 든다는군. 묵영과 천화에게만 물어봐 줘. 내가 물어보면 거절하지 못할 테니,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할 수 있게 해 줘.”
“네, 알겠어요.”
* * *
사완악은 정유문을 떠나 낙양의 북망산으로 향했다.
산에 도착한 그는 거침없이 경공을 펼쳐 보통 사람은 접근조차 할 수 없는 북망산 깊은 곳까지 올랐는데, 신비로운 안개가 자욱하게 나타나 사방의 시야를 모두 감추는 지역이었다.
사완악은 안개를 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용케 다시 설치해 놨네.”
사완악이 손을 슬쩍 흔들자 안개가 걷어지고, 손가락 끝으로 지공을 몇 차례 쏘아내자 큰 나무 몇 그루가 쓰러졌다.
그러자 놀랍게도 방금까지 자욱했던 안개가 모두 사라지고, 하나의 거대한 장원이 나타났다.
바로 말년에 천기자가 은거하고 있던 그 장원이었다.
“또 당신이군요!”
상당히 화가 난 듯한 앳된 음성이 들려왔다.
사완악은 말끔한 도복을 입고 나타난 도동을 보며 씩 미소를 지었다.
“그래, 또 너가 나왔구나.”
어린 도동은 바로 천기자의 마지막 제자, 허곤이었다.
허곤은 쓰러진 나무를 보고는 화가 나다 못해 울상이 되어 말했다.
“당신의 실력이면 진법을 파훼하고 들어오면 될 일이지, 왜 다 파괴해 버린 겁니까? 제가 사형과 얼마나 공들여 재건한 진법인데…….”
사완악은 별일 아니라는 듯 답했다.
“이제 이 진법이 필요 없으니까 그렇지.”
허곤이 미간을 찌푸리며 사완악을 바라봤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안에 구휘 있지?”
“사형은 당신과 만나고 싶지 않다고…… 헉! 자, 잠깐만요!”
허곤은 다급히 외쳤지만 사완악의 신형은 이미 장원의 대문을 지나고 있었다.
허곤으로서는 그를 막을 재간이 없었기에 헐레벌떡 그 뒤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저기군.”
사완악은 장원 내부를 잠시 둘러보더니 한 전각으로 향했다.
“꼬맹아. 안에 있는 거 다 아니까 좋은 말 할 때 나와라.”
그러자 잠시 후.
이제는 점점 성년의 모습이 되어 가고 있는 소년이 나타났다.
소년은 바로 천의문의 팔군, 구휘였다.
“무슨…… 일이십니까?”
사완악은 그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언제까지 여기 틀어박혀 있을 거냐? 내가 이러라고 널 살려 준 줄 알아?”
구휘가 그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저는 천의문의 가르침과 무공을 책으로 남기고 있습니다. 이는 후대를 위해 중요한…….”
“놀고 자빠졌네. 죄책감 때문에 우리를 피하는 거겠지.”
“…….”
“이제 헛짓거리 그만하고 따라와라.”
“따라오라니요?”
“내가 객잔을 하나 열 거거든. 일손이 부족하니까 와서 도우라고.”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저는…….”
“설린 문주와 총관님, 호법님을 속이고 배신했으며, 심지어는 설린 문주가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을 묵과했었지.”
“그렇습니다. 저는 그런 사람입니다. 그런데 왜…….”
“하지만, 아무도 그게 네 탓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순간, 구휘의 표정에 형용하기 어려운 감정이 떠올랐다.
“넌 네 사부인 천기자의 말을 믿고 따랐고, 신념을 지킨 거다. 첩자가 상대를 속이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지.”
구휘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그저 제 입장에서의 변명이지요. 저는…… 그분들을 다시 볼 면목이 없습니다.”
“보고 싶어 한다.”
“…….”
“너에게 속고 배신당했던 그들이, 여전히 널 그리워한다는 말이다.”
“……!”
구휘는 입술을 꽉 깨물었으나, 얼굴 전체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고 눈시울은 붉어져 있었다.
사완악은 그런 구휘를 가만히 바라보다 말했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다. 네가 그들에게 진정으로 속죄하고, 그들의 품에 다시 돌아갈 수 있는 마지막 기회.”
“저는…… 저는 그럴 자격이…….”
“널 만나러 간다고 하니까 설린 문주가 전해 달라는 말이 있었다.”
“무, 문주님이요?”
사완악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정유문은 절대 문도를 버리지 않고, 휘아는 여전히 정유문의 문도라고 하더군.”
“무, 문주님…….”
구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오열하기 시작했다.
사완악은 그런 구휘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허곤에게 말했다.
“너도 따라와야 한다.”
허곤이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주변을 돌아보고는 말했다.
“저요? 제가 왜 따라갑니까?”
“왜는 왜야? 일손이 부족하니까 그렇지.”
“아니, 그럼 다른 사람을…….”
“꼬마 녀석이 산속에 틀어박혀서 혼자 뭐 하고 살래? 잔말 말고 따라오라면 따라와. 한 번 더 말하게 만들면 네놈 혈도를 봉쇄하고 바지를 벗겨서 데려갈 거다. 천하 사람들이 구경하며 낄낄대겠지. 천기자의 막내 제자 엉덩이가 아주 볼만하다고 말이야.”
허곤이 얼굴을 붉히며 빽 소리 질렀다.
“그건 안 돼요!”
* * *
그로부터 얼마 후.
하북성 어느 마을에 작지만 깔끔한 객잔 하나가 나타났다.
객잔의 이름은 소천객잔(小天客棧).
연소천이라는 이름을 가진 청년이 세운 객잔으로, 맛있는 요리와 술이 있다는 소문이 점점 퍼져 나갔다.
사람들은 객잔에 점점 몰려들었고, 일 년이 지나자 아침 점심 저녁으로 줄을 서서 기다리는 손님들이 나타났다.
소천객잔은 규모를 확장했고, 어느덧 하북성에서 가장 유명한 객잔이 되었다.
그리고 다시 삼 년이 지났을 때.
소천객잔의 이름이 북경과 하남성에도 나타났고, 다시 삼 년이 지나자 사천성에도 구휘라는 청년이 나타나 새로운 소천객잔을 세웠다.
“중원에서 가장 큰 객잔이라는 게 이런 뜻이었군요.”
설린은 미소를 지으며 사완악, 아니 연소천을 바라봤다.
그녀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중원 각지에 소천객잔이라는 이름이 세워질 것이라고는.
“맞아. 이제 내가 없어도 어느 정도 잘 굴러가겠지.”
“그럼 또 심심해지시는 거 아니에요?”
“전혀 그럴 틈이 없을 것 같은데. 알잖아. 우리 집에 마교보다 더 무서운 놈들이 있다는 거.”
“풋!”
설린은 웃으며 연소천의 시선이 머무는 곳을 함께 바라봤다.
“거기 서! 내가 반드시 잡는다!”
“하하하! 잡을 테면 잡아 봐라!”
시끌벅적하게 깔깔대며 마당을 쓸고 다니는 두 사내아이.
두 아이의 얼굴은 서로의 손을 맞잡은 연소천과 설린을 똑 닮아 있었다.
꽝!
“아야!”
“으아앙! 엄마! 아빠! 형이 나 때렸어!”
“때, 때린 게 아니라 부딪친 거야!”
“거짓말 하지 마! 때렸어! 때렸다고! 엄마아아아아! 똑같이 때려 줘! 똑같이!”
“그럼 나도 맞았어! 아빠! 얘가 나 때렸어! 아빠아아아!”
천지가 아이들 소리로 가득 메워졌다.
천하를 지켜 낸 고금제일의 영웅, 연소천의 입에서 나지막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저 성격들 정말…… 도대체 누구를 닮은 건지…….”
설린의 웃음이 다시 한번 터져 나왔다.
대미(大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