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cious Beverage RAW novel - Chapter 26
정도마신 25화
처소에 들어가려던 사완악은 뒤에서 누군가 달려오는 인기척을 느꼈다.
곧이어 하나의 앳된 음성이 귓가에 울렸다.
“잠깐 기다려요!”
돌아보니 다름 아닌 열여섯 살의 소년 문도, 구휘였다.
구휘는 비틀비틀거리며 뛰어왔는데, 얼굴은 홍당무처럼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사완악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꼬마야, 너 술을 아주 진탕 마셨구나?”
구휘는 환영식 내내 구석에서 조용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비록 나이가 어리지만 첫 잔은 같이 마셨는데, 그 이후로도 계속 홀짝인 듯싶었다.
“예, 마셨어요. 이거 아주 기분이 끝내주는…… 거군요.”
“하하. 취했으면 가서 잠이나 자라.”
“아니요! 그럴 수 없습니다!”
사완악이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구휘는 고개를 살짝 숙인 채 눈을 치켜뜨고 사완악을 노려보고 있다가, 돌연 앞으로 쓰러지듯 사완악 앞에 무릎을 꿇었다.
“가르쳐 주십시오!”
사완악은 잠깐 구휘를 바라보다가 바로 대답했다.
“싫어.”
구휘가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드, 들어 보지도 않고…….”
사완악이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들어 보나마나 무공을 가르쳐 달라는 소리겠지.”
구휘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럼 가서 자라.”
사완악은 말과 함께 냉정하게 몸을 돌렸다. 하지만 곧 사완악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구휘가 자리에서 일어나 비틀거리며 사완악의 앞으로 돌아와서 다시 무릎을 꿇었기 때문이다.
“나는 누가 내 앞을 강제로 막는 것을 싫어하는데?”
이때 사완악의 음성은 조금 변해 있었다. 그동안의 장난기 가득한 말투가 아니었고, 약간의 차가운 기운을 머금고 있었다.
하지만 잔뜩 취했기 때문일까?
구휘는 적반하장으로 혀가 꼬인 발음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사 공자님은 정말 너무합니다.”
“너무하다고?”
“예!”
사완악은 조금 인내심을 발휘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내가 왜 무공을 가르쳐 줘야 하지? 나는 그러기 위해 정유문의 문도가 된 것아 아닌데?”
그러자 구휘가 취한 얼굴로 고개를 들며 말했다.
“당연히 이유는 없습니다. 무공을 가르쳐 주셔도 제가 보답할 수 있는 방법도 별로 없겠지요.”
사완악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오호, 그 대답은 조금 마음에 드는구나.”
이때 구휘가 다시 말했다.
“다만 자비를 베푼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나요?”
“자비?”
“사 공자님은 정유문에 영원히 계실 생각이십니까?”
사완악은 뒷목을 살짝 긁적이며 대답했다.
“사람의 운명을 장담할 수는 없겠지.”
구휘가 말했다.
“아니면 자리를 비우실 때라도 있겠죠. 그런데 만약 그런 상황에 다시 흑사방 같은 놈들이 몰려온다면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저도…… 저도 사 공자님처럼, 아니 사 공자님의 발끝만큼이라도 강해져서 문주님과 정유문에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사완악이 묘한 표정으로 구휘를 쳐다봤다.
“자비라…….”
그러자 구휘가 다시 말했다.
“예, 옛 성현의 말씀 중에 옳은 일을 끝까지 하지 않으면 옳지 못한 일이라고 했습니다. 흑사방의 횡포를 막아 주셨으니, 저희가 스스로 지킬 힘을 기를 수 있도록 자비를 베푸시는 것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요? 그럼 정말…… 감사하겠는데요.”
사완악은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뜨렸다.
“너 말주변이 상당히 뛰어난 꼬마였구나. 하지만 내 무공은 가르쳐 준다고 익힐 수 있는 것들이 아니란다.”
사완악의 말에 구휘는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정말 제가 강해질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 저는 평생 절 거두어 주신 문주님과 정유문 분들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는 걸까요?”
“흠…….”
사완악은 팔짱을 끼고 구휘를 조금 삐딱하게 내려다보다가 말했다.
“내가 묻고 싶은 게 있다.”
구휘는 조용히 사완악의 질문을 기다렸다.
그 순간, 구휘를 들여다보는 사완악의 눈동자가 파란색으로 물들었다.
“지금까지 말한 모든 것이 네 진심이냐? 내게 숨기는 것이 아무것도 없느냐?”
구휘는 그 파란 눈동자를 홀린 듯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진심입니다.”
그러자 사완악의 눈동자가 본래의 검은색으로 돌아왔다.
방금 사완악이 펼친 것은 사부 사마소에게 전수받은 진안심공이었다.
자신보다 내력이 약한 상대이거나 깊은 수양으로 자신의 정신과 마음을 완전히 감출 수 있는 자가 아니라면, 진안심공 앞에서는 절대 거짓을 말할 수가 없었다.
사완악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생각해 보니 쓸모없는 무공이 하나 있긴 하지. 하지만 당장 가르쳐 줄 수는 없고…… 내일 설 문주와 황 총관님, 관 호법님과 함께 말할 테니 오늘은 돌아가라.”
이번에는 구휘가 놀란 얼굴로 사완악을 쳐다봤다. 하지만 어쨌든 긍정적인 대답 같았고, 구휘는 사완악의 마음이 행여나 바뀔까 이마를 땅에 박으며 감사를 표하고 일어섰다.
사완악은 그 모습을 보다가 문득 물었다.
“그런데 아까 옛 성현의 말씀 중에 옳은 일을 끝까지 하지 않으면 옳지 못한 일이라고 했다는 말. 그런 말이 진짜 있었나?”
구휘가 사완악의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아, 아, 술에 취해서 너무 어지럽네요. 이, 이만 가 보겠습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사 공자님!”
그리고 줄행랑치듯 빠르게 멀어지는 구휘의 모습이었다.
사완악은 황당한 얼굴로 헛웃음을 내뱉었다.
“제법인걸.”
하지만 구휘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을 때, 사완악은 달빛을 올려다보며 다시 한번 중얼거렸다.
“확실히 제법이야…… 분명히 나를 지켜보고 있을 텐데 말이지.”
그것은 결코 구휘를 향한 말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대관절 사완악의 독백은 무슨 뜻인 걸까?
밤하늘의 별처럼 빛나는 사완악의 장난기 넘치는 눈빛.
그 속내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 * *
이튿날, 정유문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표정으로 사완악을 쳐다보고 있었다.
설린이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물었다.
“새로운 정유검법을 만들었다고요?”
사완악이 품에서 하나의 서책을 꺼내며 말했다.
“응. 이 비급을 참고했어.”
그 서책에는 정유검법(正柔劍法)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다.
설린이 깜짝 놀라며 말했다.
“그, 그 비급을 어디서 구하셨죠?”
“이거? 문주전에 꽂혀 있던데?”
“예? 아, 아…… 그, 문주전에는 허, 허가 없이 들어가시면 안 되는데…….”
사완악이 몰랐다는 듯 오호, 하고 외치며 눈을 살짝 크게 떴다.
“그런 거였나? 미안.”
정유문의 사람들은 조금 황당하기는 했지만 크게 기분 나빠하지는 않았다.
사완악이 산속에서 자라 기본 법규를 모르는 것들이 있다고 생각했고, 사실 정유검법의 비급이라고 해 봤자 대단할 게 없었기 때문이다.
이때 사완악이 구휘를 쳐다보며 말했다.
“아무튼 어제 저 꼬마 녀석이 나보고 무공을 가르쳐 달라고 하더군.”
설린을 비롯해 황임과 관일성이 일제히 구휘에게 고개를 돌렸다.
“내가 없을 때 흑사방 같은 놈들이 시비를 걸면 어떻게 하냐고 하더군. 자기도 강해져서 문파에 도움이 되고 싶다고 말이야.”
맨 정신의 구휘는 어제의 패기 있고 넉살스러운 모습과는 많이 달랐다.
그는 행여나 자신이 무례했다는 말을 들을까 봐 도둑질을 들킨 사람처럼 눈치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설린과 황임, 관일성은 구휘를 책망하지 않았고, 도리어 문파를 책임져야 하는 사람들로서 부끄러움을 느껴 고개를 들지 못했다.
이때 사완악이 다시 말했다.
“듣고 보니 틀린 말은 아니더라고. 명색이 내가 속한 문파인데 어디 가서 당하고 다니는 건 체면이 상하는 일이잖아?”
그러고는 사완악이 쯧쯧 혀를 차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데 솔직히 설 문주는 너무 약해. 물론 황 총관님이랑 관 호법님도 약하지.”
사완악의 적나라한 표현에 정유문 사람들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다른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면 매우 모욕적으로 느꼈겠지만, 사완악에게 그런 의도가 없다는 것은 모두 느낄 수 있었다.
“나도 정유문의 문도가 되었으니 정유문의 무공을 쓸 줄 알아야 구색이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문주전에 들어가서 잠깐 이 비급을 살펴봤는데…….”
사완악은 조금 떨떠름한 표정이 되어 말했다.
“무슨 무공 비급이 중간중간 내용들이 다 끊어져서 연결이 안 되는 건지.”
설린의 얼굴에 슬픔과 부끄러움, 씁쓸함이 뒤섞여 나타났다.
“현조부님께서는 무공을 비급으로 남기는 걸 금지하셔서…… 돌아가신 아버님께서 뒤늦게 비급을 만들어 보려고 하셨지만 많은 부분이 소실되었죠.”
“뭐, 그래도 재료 자체는 나쁘지 않았어. 총관님, 검 좀 빌려 줄래요?”
“예? 아, 여, 여기 있네.”
사완악은 황임에게 철검 한 자루를 건네받았다.
그리고 하나의 기수식을 취했는데, 사람들의 표정이 묘하게 바뀌었다.
그것은 정유검법의 기본 자세였기 때문이다.
“일단 봐 봐.”
사완악은 이어서 초식을 펼치기 시작했다.
곧이어 설린과 황임, 관일성의 동공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사완악의 검은 봄바람처럼 부드러웠고 흐르는 물처럼 막힘없이 이어졌다.
하지만 그 유려한 흐름을 따라 번쩍이는 검광은 때때로 가슴이 섬뜩해질 만큼 예기가 날카로웠고, 절대로 꺾이지 않을 강직함이 담겨 있었다.
“마, 말도 안 돼…….”
설린의 외침은 모두의 심정이었다.
이건 절대 보통의 검법이 아니었다.
어디에서도 보기 어려운 상승의 검술이었다.
당연히 지금까지 알고 있던 정유검법과는 달랐다.
하지만 그럼에도 분명히 정유검법의 느낌을 지니고 있었고, 전설처럼 내려오는 초대 문주 설영충의 검술을 눈앞에서 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사완악은 홀린 듯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정유문의 문도들에게 말했다.
“마음에 들면 가르쳐 주고, 아님 말고.”
* * *
정유문의 사람들은 당연히 사완악의 정유검법을 배우기로 했다.
심지어 사완악은 내공심법도 문제라며 새로운 심공을 만들어 주었다.
설린은 상승의 무공이라는 것이 어찌 이리 쉽게 창안될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것에는 나름의 이유가 존재했다.
‘군자신검 덕분이었지.’
군자신검(君子神劍).
그 이름은 약 이십 년 전, 정도무림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정도제일의 청년 고수 도백천, 그의 별호가 군자신검이었다.
하지만 도백천은 한 요부에게 빠져 자신의 모든 내공과 무공 구결까지 모두 빼앗기게 되었으니, 그 여인이 바로 사완악의 사부 채보령이었다.
사완악은 호기심에 채보령에게 도백천의 무공 구결을 배웠던 적이 있었다.
군자신검은 확실히 뛰어난 검법이었다.
하지만 사완악이 배운 환요검법과는 너무나 궤를 달리했고, 내공심법 역시 염화신공을 익히고 있었기에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하지만 구휘와의 대화에서 좋은 생각이 떠올랐으니, 껍데기만 남은 정유검법에 군자신검을 교묘히 합쳐 보는 것이었다.
결과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아니, 오히려 설린에게 말했던 것처럼 정유검법이라는 재료가 생각보다 더 뛰어나서 군자신검과 합쳐지자 사완악이 예상했던 것보다 한 단계 위의 검법이 탄생되어 버렸다.
그리고 정유문의 사람들은 벌써 칠 일째, 밤낮으로 정유검법을 수련하고 있었다.
‘그런데 가만히 기다리자니 따분하군. 좀 돌아다녀 볼까?’
사완악은 홀로 그런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똑똑.
사완악은 찾아온 손님이 설린이라는 것을 알고 문을 열어 주었다.
설린은 무복을 입고 있었고 온몸이 땀에 젖어 있었다.
사완악은 그녀의 손에 잡힌 물집을 힐끗 쳐다보고는 말했다.
“꽤 열심이군.”
설린이 웃으며 끄덕였다.
“더 열심히 해야죠. 그보다 사 공자님, 기다리시던 안 좋은 소식을 가져왔어요.”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