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cious Beverage RAW novel - Chapter 35
정도마신 34화
회색 옷의 괴한은 한 팔로 설린을 안고도 바람처럼 빠르게 달려갔다.
하지만 그가 고개를 돌려 뒤쪽을 힐끗 바라봤을 때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사완악이 뒷짐을 지고 마치 산책을 하듯 여유롭게 따라오고 있었던 것이다.
괴한은 마치 시합이라도 하듯 속도를 올렸다.
하지만 사완악의 경신술은 잔혹신풍 구득소가 천하 칠대고수의 한 자리를 차지하게 만들어 준 승광신법(乘光身法)이 아닌가.
사완악은 괴한이 더욱 빠르게 달리자 낭랑한 웃음을 한번 터뜨렸다.
그리고 괴한은 화들짝 놀랐다.
등 뒤에서 들려오던 사완악의 웃음소리가 끝나기 무섭게, 자신의 바로 옆에서 사완악의 장난기 가득한 음성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언제까지 따라가야 해?”
“…….”
사완악은 여전히 뒷짐을 진 채 괴한과 나란히 경공을 펼치고 있었다.
괴한은 대꾸 대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는 사완악의 경공술이 자신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괴한과 사완악은 약 열 걸음 정도의 거리를 두고 마주 섰다.
그들은 이미 인적이 없는 외딴곳까지 이동해 왔기에, 주변에는 오직 희미한 달빛과 자연의 소리, 그리고 어둠만이 존재했다.
괴한은 심하게 갈라져서 듣기 거북해지는 음성으로 물었다.
“이 여인은 당신과 어떤 관계인가?”
사완악은 옅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약속을 지키는 것이 우선이 아닐까?”
“…….”
회색 옷의 괴한은 설린을 그대로 사완악에게 던졌다.
설린의 몸이 허공에 떠서 천천히 날아갔고, 사완악은 가볍게 그녀를 받아 냈다.
사완악은 몇 걸음 뒤쪽에 설린을 안전하게 눕혀 놓으며 생각했다.
‘해치려는 의도가 전혀 없었다.’
사완악은 괴한이 내공까지 이용해 설린을 매우 조심스럽게 던진 것과, 설린이 수혈을 제압당했을 뿐 안색이 평온한 것을 확인하며 더 호기심이 깊어진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너는 처음부터 나를 유인하는 것이 목표였구나. 이유가 무엇이냐?”
하지만 괴한은 다시 되물었다.
“그 여인과 각별한 사이인가?”
사완악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 순간, 회의 괴한의 눈이 부릅뜨였다.
어느새 사완악의 신형이 괴한의 바로 앞에 나타나 손을 뻗어 그의 목을 움켜쥐려 했기 때문이다.
회의 괴한은 대경실색하며 좌수를 휘둘러 사완악의 손을 쳐 내고, 오른손으로는 일장을 날렸다.
하지만 사완악의 반대쪽 손이 불쑥 튀어나오더니, 괴한의 장법을 끌어당겼다가 다시 쭉 내밀었다. 그러자 괴한이 처음 내질렀던 장력은 사완악의 손을 타고 괴한에게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바로 무림오십공 중 하나이자, 상대의 힘을 역이용하여 돌려주는 구득소의 무공, 유풍유권(柔風幽拳)이었다.
괴한이 깜짝 놀라 사완악의 손을 쳐 낸 좌수로 다시 일장을 내지르니, 스스로 자기 자신의 공격을 상대하는 그림이었다. 그는 스스로 자신의 장력을 상쇄하며 움찔하는 순간, 사완악의 손이 다시 튀어나와 끝내 그의 목을 움켜쥐었다.
“컥!”
괴한은 말라비틀어진 손으로 사완악의 손목을 잡고 떨쳐 내려 했으나, 그야말로 요지부동(搖之不動)이었다.
사완악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왜 나를 유인했는지 물었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고통스럽게 사완악을 노려보는 괴한의 눈에서 기이한 빛이 일렁이더니, 사완악을 향하여 한마디 명령을 내뱉었다.
“물러서라!”
그러자 사완악은 뜻밖이라는 듯 눈을 치켜뜨며 고개를 모로 꺾었다.
방금 괴한이 부린 술수는 상대의 정신을 조종하는 섭혼술이었다.
물론 섭혼술을 펼쳤다는 것은 별로 대단한 일이 아니었다.
한데 괴한의 섭혼술은 사완악에게 너무나 익숙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너, 정체가 뭐냐?”
사완악의 눈에서 괴한과 비슷한 류의, 하지만 훨씬 더 음침하고 농밀하며 끈적끈적한 기운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괴한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서, 설마 탈정미혼공……! 당신은 정녕…… 케엑!”
괴한은 창백한 얼굴로 다급히 사완악의 손목을 탁탁 두들겼다.
사완악이 차가운 눈빛으로 손을 놓자, 괴한은 크게 기침을 토해 낸 뒤 갑자기 한쪽 무릎을 꿇으며 외쳤다.
“저는 사령문의 제사귀령, 가종후라 하옵니다!”
“사령문? 정말 사령문의 사람이라고?”
사령문(邪靈門).
구백 년 전 강호를 공포로 몰아넣은, 강호 역사상 가장 사이한 문파.
또한 사완악의 몸속에서 사완악을 장악하려 했던 영혼, 영겁사령존의 문파였다.
사완악은 가종후라 소개한 괴한의 섭혼술을 본 순간부터, 내심 설마 하는 생각을 지니고는 있었다. 하지만 진짜 그 이름을 듣게 되자 실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가종후는 고개를 숙인 채 힘을 주어 말했다.
“부디 한 가지만 확인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확인?”
괴한은 품에서 팔찌 하나를 꺼냈다.
그것은 손가락 두 개 정도의 굵기였고, 상아(象牙) 색깔에 아무런 무늬가 없었다.
겉으로 보아서는 고물상에서나 팔 것 같은 평범한 팔찌.
가종후는 떨리는 손으로 그 팔찌를 내밀며 말했다.
“이 팔찌를 착용하여 주십시오. 그렇다면 당신께서 궁금해하시는 모든 것을 설명드릴 수 있사옵니다.”
“흠.”
사완악은 그에게서 팔찌를 받고 잠시 바라보다가 말했다.
“이게 무슨 사령문의 보물이라도 되는 모양이군. 날 시험해 보겠다는 건가?”
그 말에 가종후는 움찔했으나 한쪽 무릎을 꿇고 부복한 자세 그대로 침묵을 지켰다.
사완악은 한편으로는 이 팔찌가 어떤 위험한 물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들자, 사완악의 마음속에서는 오히려 오기와 패기가 솟아올랐다.
“재밌네. 이깟 팔찌 따위가 뭐기에 그러는지 한번 볼까?”
사완악은 씩 웃으며 거침없이 팔찌를 자신의 왼쪽 손목에 착용했다.
그 순간,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갑자기 사완악의 단전에서 약 삼 할 정도의 내공이 움직이더니 팔찌로 쑥 흡수되는 것이었다.
그것은 사완악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고, 급히 내공의 흐름을 막으려 했으나 불가항력(不可抗力)이었다.
사완악의 내공을 머금은 팔찌는 지이잉, 지이잉 하며 묵직하게 진동하더니 점차 붉은색깔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상아색의 팔찌가 적색으로 완전히 물들자, 팔찌 전체에 불꽃 모양의 무늬가 나타났다.
“아아……!”
그것을 본 회의 괴한 가종후는 온몸이 전율에 휩싸인 듯 부르르 떨다가 갑자기 두 무릎을 완전히 꿇고 오체투지(五體投地)하며 외쳤다.
“사귀령 가종후가 영겁사령존을 뵙습니다.”
팔찌를 신기하게 쳐다보던 사완악의 눈매가 살짝 움직였다.
‘영겁사령존이라면 그 귀신 놈의 이름이었는데.’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
하지만 머리가 비상하고 눈치가 빠른 사완악은 가종후의 행동의 앞뒤를 보고 짐작되는 것들이 있었다.
“일어나라.”
가종후는 절대적인 명령을 듣는 사람처럼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완악은 그를 응시하며 말했다.
“내가 사령문의 무공을 익힌 것은 맞다. 하지만 나는 사령문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다. 나는 우연한 기회에 영겁사령존이라는 자가 남긴 비급을 얻게 되어 무공을 익혔을 뿐이다. 그 비급에는 스스로를 사령문의 영겁사령존이라 칭한 글귀만 남아 있었을 뿐, 다른 설명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 네 입에서 사령문과 영겁사령존이라는 이름을 듣게 되니 묻고 싶은 게 많아지는군.”
물론 사완악이 말하는 것은 모두 거짓이었다.
하지만 가종후는 전혀 의심을 하지 않는 눈치였다.
아니, 그는 오히려 경악한 표정으로 감탄을 내뱉었다.
“과연 영겁사령존께서는 후대에 나타날 전인을 위해 준비하신 바가 있으셨던 것이군요. 그럼 사령문의 무공을 비급만으로 홀로 익히셨다는 것입니까?”
“그게 대수로운 일인가?”
사령문의 무공은 일반적인 무공과 궤를 완전히 달리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무공보다는 술법에 더 가까운 성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즉, 무재만 뛰어나다고 배울 수 있는 기술들이 아니었고, 타고난 영력(靈力)과 뛰어난 사부가 있어야만 연성이 가능한 무공들이었다.
그런 사령문의 무공을 비급으로 독학했다니, 가종후는 믿을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과연 영겁사령존이십니다.”
사완악은 가종후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놈의 영겁사령존이 도대체 무엇이지?”
가종후는 여전히 고개를 조아린 채 말했다.
“사령문의 역사를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령문은 현재의 무림이 생기기 이전의 시대, 상고무림(上古武林)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죽음에 대하여 깊게 연구하는 도사들이 있었고, 그들은 함께 모여 서로의 지식을 나누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여러 가지의 술법이 탄생하게 되었고, 명맥을 이어 내려오다가 삼백 년 전, 한 명의 지존이 탄생했습니다.”
사완악은 사령문이 삼백 년 전, 강호를 공포로 몰아넣은 집단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 지존이 영겁사령존이었나?”
“그렇습니다. 영겁사령존은 그 능력이 하늘에 닿으신 분이었습니다. 만약 그때 한 도사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사령문은 그 대단한 마교조차 끝내 이루지 못했던 무림일통을 이루었을지도 모릅니다.”
“도사?”
“그의 정체는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심지어 강호의 다른 문파들은 그 도사의 존재 자체도 모르고 있었지요. 말 그대로 하늘에서 뚝 떨어지듯 갑자기 나타난 자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신선처럼 도력이 높고 바다처럼 깨달음이 깊은 자였다고 합니다. 사령문의 모든 술법이 그에게는 통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물론 영겁사령존의 능력 또한 인간의 한계를 벗어났기에…… 그 도사와 삼 일 밤낮을 치열하게 대결하셨으나 끝내 패배하셨고, 그 도사에 의해 사령문은 와해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종후는 이어서 말했다.
“그 이후 사령문은 다시 음지로 숨어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수많은 고수들을 잃었고 많은 무공과 술법이 사라졌지만, 사령문의 제자들은 포기하지 않고 연구와 복원에 힘을 쓰고 자신보다 더 뛰어난 제자를 키우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왜냐하면 저희는 영겁사령존께서 남기신 예언을 굳게 믿었기 때문입니다.”
사완악은 흥미로운 얼굴로 가종후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예언?”
“언젠가 때가 되면, 자신의 의지와 힘을 이을 새로운 영겁사령존이 탄생할 거라고 하셨지요. 그 영겁사령존은 당신보다 더 강한 존재가 되어 천하가 사령문의 발아래 놓일 것이라 하였습니다.”
사완악은 그 말을 들으며 생각했다.
‘하긴 그 귀신 놈이 대단하긴 했지.’
사완악은 영겁사령존의 힘을 직접 느껴 봤기에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사완악이 그 힘을 거부하며 밖으로 쏘아 냈을 때, 그 기운은 거대한 산벽(山壁)을 관통하여 구멍을 내 버릴 정도였다.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힘.
영겁사령존은 사라졌지만, 그가 지니고 있던 힘은 사완악의 몸에 일부 흡수되어 있었다.
그 일부만으로 사완악이 천하 칠대고수인 영환 대사에 버금가는 공력을 지니게 된 것을 보면, 영겁사령존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사완악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한데 왜 나를 그 새로운 영겁사령존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지?”
가종후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는 듯 말했다.
“영겁사령존께서 차고 계시는 사령녹리완천(邪靈綠彲腕釧)이 그 증거이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