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cious Beverage RAW novel - Chapter 49
정도마신 48화
이튿날, 사완악은 정오쯤 되어 설린의 처소로 왔다.
방문 밖에서 가볍게 설린을 부르자 그녀가 바로 나왔다.
그녀는 밤새 마음이 편치 않았는지 사완악을 보자마자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숙소는 괜찮았나요?”
“아주 편안했어.”
“다행이네요.”
하인들의 숙소라면 여러 명이 한 방에서 잠을 청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사완악은 산속에서 자라 그런지 몰라도 별로 개의치 않아 보였다.
두 사람은 어제 하인이 미리 알려 주었던 연회장으로 이동했다.
넓은 공터인 연회장에는 탁자와 의자가 수백 석이나 마련되어 있었고, 자리마다 문파가 배정되어 있었으며, 탁자에는 푸짐한 음식과 술이 준비되어 있었다.
“이야, 음식들이 맛있어 보이는걸.”
입맛을 다시는 사완악의 모습에 설린이 웃음을 터뜨렸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사완악은 맛있는 음식 앞에서 가장 진심이었다.
사람들은 점점 늘어났다.
대부분 이삼십 대의 청년들로, 비무 대회에 참가하는 후기지수들이었다.
그들은 사완악과 달리 음식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오로지 주변을 살피며 어느 문파의 어떤 후계자가 참가했는지를 살폈고, 어떤 이들은 이 모임이 마치 자신의 인생에 다시 없을 기회인 것처럼 이리저리 돌아다니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
간장으로 조리된 닭 요리를 맛보던 사완악이 동작을 우뚝 멈추며 고개를 들었다.
설린이 물었다.
“왜 그러세요?”
하지만 사완악은 별다른 대답 없이 어느 한쪽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은 연회장 안쪽이 아니라 밖을 향해 있었다.
설린은 의아한 얼굴로 사완악을 다시 쳐다봤다.
하지만 사완악은 이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닭고기를 뜯는 데 열중했다.
그리고 잠시 후.
징- 징-!
두 번의 징 소리가 연회장 밖에서부터 안쪽으로 은은하게 들려오더니, 조금 전 사완악이 바라보던 방향에서 다섯 사람이 나타났다.
그들 중 세 사람은 나이가 지긋한 노인들이었고, 두 사람은 오십 대의 중년인이었다.
연회장의 청년들은 징 소리에 이어 다섯 명의 연배 높은 어른들이 나타나자 호기심에 고개를 돌려 쳐다봤다.
그때 갑자기 누군가 눈을 크게 뜨며 한마디를 내뱉었다.
“매, 맹주님이다……!”
“맹주님…….”
“헉!”
그것은 그리 크지 않은 음성이었으나, 사람들의 반응은 마치 물결처럼 퍼져 나가 시끌벅적했던 장내는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오십 대 중년인 중 문사 차림의 사내가 천천히 말했다.
“만나서 반갑소. 본인은 정도맹의 집법당주를 맡고 있는 서문석이라 하오.”
일순 장내에서 다시 한번 놀람의 공기가 스쳐 갔다.
‘냉혈판관(冷血判官) 서문석!’
서문석은 서문세가를 대표하는 절정의 고수였다.
서문세가는 오대세가는 아니었지만, 강호에서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위치의 문파였다.
그들의 가전무공인 팔문십육검(八門十六劍)은 천기자가 발표한 무림오십공에 이름을 올렸을 만큼 뛰어난 검법이었다.
서문석은 정도맹에서는 법령(法令)을 관리하는 집법당주였다.
그는 서문세가 제일의 고수였지만, 무공보다 유명한 것은 그의 일 처리와 성격이었다.
그는 철두철미하면서도 고지식했고, 융통성이 전혀 없는 인물이었다.
누군가 잘못을 저지르면 상대와의 친분이나 상대의 지위에 상관없이 반드시 그에 맞는 벌을 내리는 자였기에, 모두가 그의 앞에서는 숨 쉬는 것조차 조심했다.
“오늘은 비무 대회에 앞서 모두를 환영하는 바이오. 이곳은 친목을 위하는 연회요. 곧 맹주님의 개회사가 있을 것이니 모두 정숙하기 바라오.”
그가 말을 마치고 다른 오십 대의 중년인에게 고개를 살짝 숙였다.
목례를 받은 중년인은 살짝 끄덕이더니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정도맹에 오신 것을 환영하오. 부족하지만 정도맹의 맹주직을 맡고 있는 양천상이오.”
정도맹주, 운룡무왕(雲龍武王) 양천상.
그는 스스로 겸손하게 말했으나, 세상에 그를 부족하다고 말할 사람은 없었다.
양천상은 본래 곤륜파의 속가 제자였으나, 그의 천부적인 재능을 알아본 곤륜파의 장문인이 직접 제자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불과 삼십의 나이에 사파의 지존이라 불리는 사천회주 마양과 삼백여 합을 겨루어 조금도 밀리지 않은 사건은 그를 정파의 일대 신성(新星)으로 만들어 주었다.
사람들은 그를 운룡무왕이라 불렀는데, 그는 성격 역시 공명정대하고 겸손과 학식을 겸비하여 그야말로 정파인이 추구하는 완벽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 실물을 영접한 강호의 후기지수들은 공통되게 한 가지 생각을 했다.
‘명불허전.’
운룡무왕 양천상의 음성은 나직했으나 장내 전체에 또렷이 울려 퍼졌고,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기운과 진중한 눈빛은 좌중을 압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설린은 자신도 모르게 사완악을 쳐다봤다.
‘역시 사 공자님은 대단하구나.’
아까 전, 모두가 연회의 분위기에 휩쓸려 있을 때.
사완악은 잠시 고개를 들어 어딘가를 쳐다보았고, 그곳에서부터 정도맹주를 비롯한 다섯 사람이 등장했다.
이미 그들의 기운을 느꼈다는 뜻이었다.
그녀는 이 연회장의 후기지수들 가운데 사완악처럼 미리 기운을 느낀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있을지 궁금했다.
‘강하긴 하네. 영환 사부 못지않아.’
이때 사완악도 홀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사완악은 정도맹으로 오면서, 자신이 사부님들에게 배웠던 무림과 현재의 무림은 정세가 조금 달라지고 세대의 교체가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우선은 강호를 대표하는 최고수들.
잔혹신풍 구득소와 염라대사 영환이 무림공적이 되어 숨어 버렸고, 정도맹의 전대 맹주였던 옥허 진인은 은퇴했으며, 남궁세가의 검제(劍帝)가 의문의 병사(病死)를 하는 바람에 칠대고수 중 셋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강호는 넓다고 했던가.
그들이 사라지자 또 다른 고수들이 하나둘씩 나타나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기존에 남은 세 명과 새로운 강자 다섯을 더해 팔대고수라 부르고 있었다.
운룡무왕 양천상도 바로 그 팔대고수 중 한 사람이었다.
‘영환 사부와 비교해도 아래가 아니겠어. 만약 제대로 붙는다면…… 까다롭겠군.’
바뀐 것은 칠대고수뿐만이 아니었다.
강호 삼대미녀의 목록도 바뀌었다.
요희요검 채보령은 구득소와 영환과 마찬가지로 무림공적이 되어 사라졌고, 월궁선녀 한가인과 한빙신녀(寒氷神女) 유양비는 강호에 모습을 나타낸 지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났다.
무엇보다 그녀들의 나이는 모두 마흔이 넘었으니.
강호의 청춘들이 새롭고 젊은 미녀를 찾는 것은 본능과 같은 일.
현재의 강호에는 새로운 사대미녀가 있다고 했다.
사완악이 그렇게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정도맹주 양천상의 개회사가 이어졌다.
“근 이십 년 동안 많은 무림 명숙들의 도움과 협의의 정신으로 강호는 매우 평화로웠소. 하지만 무인(武人)은 근본적으로 강함을 추구하는 법이니, 평화와는 별개로…….”
양천상은 마치 신중하게 단어를 고르듯 말끝을 흐리다가, 이내 너털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하하! 한마디로 몸이 근질근질한 사람이 생겨나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소.”
정도맹의 맹주 입에서 나오는 말치고는 다소 격식에서 떨어지는 말이었다.
하지만 장내의 후기지수들의 얼굴에는 오히려 격한 공감의 빛이 떠오르며 모두 함께 웃음을 터뜨렸다.
몸이 근질근질하다.
그 한마디만큼 젊은 무인들의 마음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는 말이 없었던 것이다.
또한 정도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의 입에서 그런 호탕한 말이 튀어나오자, 후기지수들은 단번에 양천상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확실히 그는 한 단체의 수장답게 무공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군웅을 휘어잡는 힘이 있는 자였다.
“하여 이번 비무 대회는 각 문파의 미래를 책임질 뛰어난 인재들이 모여 서로의 무예를 겨루며 자신의 이름을 알리고, 다른 무공을 견식하며 더욱 성장하기 위한 교류의 장을 만들고자 열었소. 하지만 분명한 것은 여러분의 경쟁은 선의로 이루어져야 함이니, 과열되지 않도록 몇 가지 제한적인 규칙은 있을 것이오. 어쨌든, 오늘은 강호에서 쉽게 만날 수 없는 얼굴들과 인사하고 친분을 쌓는 자리이니 마음껏 먹고 마시고 즐기시길 바라오. 물론 과음하여 비무 대회 때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친구는 없길 바라겠소.”
그의 말에 다시 한번 작은 웃음들이 흘러나왔다.
“그럼 그대들이 편히 즐기도록 본인은 이 한 잔의 술을 마시고 빠져 주겠소.”
양천상은 준비해 온 술잔에 술을 가득 따라 한 번에 털어 넘기고는 포권했다.
그러자 후기지수들은 일제히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집법당주 서문석이 크게 외쳤다.
“연회는 자정에 마치는 것으로 하겠소.”
정도맹주 양천상과 집법당주 서문석이 퇴장하자 본격적인 연회가 시작되었다.
사완악은 상에 차려진 음식들을 골고루 맛본 후 아쉬운 듯 혀를 찼다.
“정도맹이라고 해서 굉장히 기대했는데 음식은 그저 그렇군…… 음? 뭐 해?”
설린은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현종 스님은 안 오셨나 해서요.”
“글쎄. 정도맹에는 도착했을 수 있지만, 이곳에는 없지 않을까?”
“왜요?”
“아, 내가 말하지 않았었나? 현종은 비무 대회에 참가하지 않아.”
“어머, 그래요? 저는 당연히 현종 스님이 사 공자님과 다시 비무를 하고 싶어서 이 대회에 참가하라고 하신 줄 알았어요.”
“현종은 신분과 배분이 다르니까.”
현종은 소림사에서 비밀리에 키운 소림 수호승이다.
또한 무림에서는 나이가 아니라 누구의 제자이냐에 따라 배분이 정해진다.
현종은 소림사 원로원의 공동 제자이자, 방장의 사제였다.
정도맹의 맹주와 같은 급의 신분이라는 것이니, 청년들을 대상으로 하는 비무 대회에 참가하는 것은 다소 민망한 일이었다.
“듣고 보니 그러네요.”
“뭐, 본인이 초대한 거니까 나중에 알아서 만나러 오겠지. 그건 그렇고…… 문주, 저 사람들 누군지 알아?”
사완악이 눈짓으로 가리킨 곳에는 열 명의 남녀가 있었는데, 그들을 중심으로 주변에는 수많은 후기지수들이 몰려 있었다.
그 열 명의 남녀는 모두 얼굴이 훤칠했다. 그들의 혁혁한 안광과 여유로운 표정은 마치 저들이 이 연회장의 주인공 같은 느낌이었고, 범상치 않은 신분이라는 것 또한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설린은 그들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끄덕였다.
“저들은 아마도……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제자들인 것 같아요.”
“오호?”
구파일방과 오대세가.
현재 강호에서 가장 큰 힘을 지닌 단체는 정도맹이었다.
약 백 년 전, 정파는 정도맹을, 사파는 사천회를 만들어 천하를 양분했었다.
하지만 사천회는 잦은 내분으로 세력이 커지지 않았고, 그에 비해 정도맹은 날이 갈수록 체계적이고 단단해졌다.
물론 사천회도 마양이라는 절대 고수가 나타나 내분을 종결시켰으나, 이미 정도맹과는 힘의 균형이 깨져 있었다.
그리고 이 천하제일의 조직, 정도맹을 세운 것은 바로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였다.
맹주직을 포함한 대부분의 요직(要職)을 구파일방과 오대세가 출신의 고수들이 차지하고 있었고, 다른 문파들 역시 그것에 아무런 불만이 없었다.
그들에게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는 질투가 아니라 존경과 선망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설린도 저들과 초면이었지만, 이 연회장에서 모두의 주목을 받는다면 틀림없이 그들일 터였다.
사완악이 중얼거렸다.
“열 명인 것을 봐서는 연회장에 참석하지 않은 사람도 있나 보군. 그런데 저 여자는 특이하네. 연회장까지 와서 얼굴을 가리고 있잖아?”
사완악이 말한 여인은 십여 명의 명문대파 제자들 중 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면사를 써서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적당히 마르면서도 육감적인 몸매는 감출 수 없는 듯 많은 청년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설린은 그녀가 누구일까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하하, 그건 그녀가 바로 강호 사대미녀 중 한 사람인 당소윤이기 때문이오.”
들려오는 목소리에 사완악과 설린이 고개를 돌리니, 그곳에는 처음 보는 한 명의 귀공자가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