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cious Beverage RAW novel - Chapter 85
정도마신 84화
약간의 탁한 쇳소리가 섞인 노인의 음성.
그리고 무려 스무 명의 사람들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듯 나타났다.
사완악은 돌연히 나타난 자들을 바라보고는 의외의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모두 현종과 같은 붉은 가사를 걸치고 있었다.
열여덟 명은 삼십 대 정도의 젊은 나이였고, 그 앞에 서 있는 두 명은 흰 눈이 내려앉은 듯 하얀 눈썹을 지닌 노승들이었다.
두 노승들 중 한 사람은 키가 컸고, 한 사람은 키가 작았다.
‘소림사의 승려들 같은데…….’
사완악은 현종을 쳐다봤다.
그런데 이때 현종은 평소와 달리 매우 표정이 굳어져 있었다.
사완악은 그들의 등장이 심상치 않은 일임을 직감했다.
현종은 두 노승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두 사승(師僧)님을 뵙습니다.”
“사승?”
“두 분 모두 내 사부님이시다.”
사승이라는 호칭은 본래 존재하지 않으나, 소림 수호승만이 쓰는 것이었다.
그 안에는 복잡한 이유가 숨어 있었지만 현종은 굳이 설명하지 않았고, 사완악도 전혀 관심을 두지는 않았다.
다만 현종의 스승이라면, 소림사의 원로임을 뜻했고…….
사완악은 그제야 현종의 표정이 굳어진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영환 사부와 같은 항렬이구나.’
사완악이 그것을 깨달았을 때, 두 노승(老僧)은 현종과 사완악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했다.
“현종, 그 아이가 사대악인의 제자가 맞느냐?”
그 음성은 낮고 느릿했으나, 사완악은 그 노승이 매우 큰 분노를 간신히 억누르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예, 사승님.”
그 순간, 두 노승의 눈에서 어떤 기이한 빛이 번쩍였고, 동시에 강렬한 기운이 몸 전체에서 흘러나온 탓에 사완악은 자신도 모르게 그들을 바라보게 되었다.
키 작은 노승이 말했다.
“너는 그것을 알고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
현종은 어렵게 대답했다.
“작별을 고하고 있었습니다.”
스으으읍……!
두 노승은 마치 거대한 분노를 삼키듯 한 차례 심호흡을 하고는 사완악을 노려보다가 말했다.
“다시 한번 묻겠다. 너는 염라대사의 제자가 맞느냐?”
키 작은 노승은 사대악인이 아니라 염라대사를 지목하며 물었다.
사완악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 사부님들 중 한 분이지.”
그 순간.
두 노승의 몸에서 맴도는 강렬한 기운이 폭사하듯 터져 나왔다.
사완악은 양어깨가 짓눌리는 듯한 느낌에 속으로 감탄했다.
‘이 두 늙은 중의 내공은 양천상의 아래가 아니다.’
내공이 무공의 전부는 아니지만, 이 정도의 내공을 쌓은 소림사의 원로라면 필시 뛰어난 절학을 익히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사완악은 또한 두 노승 뒤에 서 있는 열여덟 명의 젊은 승려들도 바라봤다.
그들 역시 두 노승만큼은 아니지만, 비무 대회에 나왔던 후기지수들 중 청운을 제외하면 저 승려들보다 강한 사람이 없을 것 같았다.
이들은 모두 강호에 특별히 별호가 알려진 자들도 아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나 고강한 무공을 지니고 있었다.
‘이래서 소림을 무림의 태산북두라고 하는 건가?’
과거 소림사에서도 천재라고 불렸던 염라대사 영환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소림을 우습게 보지 말라고.
사완악은 그 뜻을 이제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이때 키 작은 노승이 말했다.
“나의 법명은 영소. 여기는 영도라 한다. 너는 우리의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있느냐?”
다른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면 사완악은 당신들 이름 따위를 왜 알아야 하냐며 비웃었을 것이다.
하지만 눈앞의 두 노승에게는 조금 달랐다.
사완악은 그들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바로 염라대사 영환의 사형들이었다.
“한 번쯤 들어 본 것 같네.”
사완악의 말투는 언제나처럼 공손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두 노승은 그런 것을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그는 어디에 있느냐?”
“나도 몰라. 믿든지 말든지.”
두 노승은 사완악을 고요히 응시하다가 말했다.
“너는 그가 어떤 짓을 했는지 아느냐?”
사완악은 말했다.
“영환 사부는 자신의 사부를 죽였다고 들었어.”
염라대사의 사부는 곧, 두 노승의 사부였다.
두 노승의 눈에서 불길이 일었다.
“그렇다. 그는 감히…… 감히 사부님을 해하였다. 색욕을 이기지 못하여 잘못을 저질렀고, 그것을 감추기 위해 사부님을 기습했다!”
사완악은 두 노승의 말에 틀린 부분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염라대사 영환이 사부 각양 대사를 죽인 것은 맞지만, 색욕을 참지 못한 건 각양 대사가 어떤 여인과 운우지락을 나누는 모습을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사완악은 굳이 그런 사실을 전하지 않았다.
“그는 실로 천인공노할 짓을 저질렀고, 강호를 돌아다니며 여인들을 겁탈했다. 그는 우리 소림의 역사에 가장 큰 오점이고 치욕이니라. 너는 정녕 그에 대해 우리에게 할 말이 없느냐?”
사완악은 키 큰 노승을 바라보며 물었다.
“만약 내가 할 말이 없다면, 당신들도 내게 사부의 죗값을 물을 생각인가?”
키 큰 노승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일은 없느니라. 그의 죗값은 오로지 그만이 치를 수 있는 것. 어느 누구도 그의 죄악을 대신 씻어 줄 수 없거니와, 하지도 않은 일에 대한 벌을 받는 것은 아니 될 말이다.”
사완악의 눈에 이채가 흘렀다.
이 노승이 하는 말은 지금까지의 사람들과는 조금 달랐다.
어떻게든 사대악인의 행방을 말하라고 협박하는 것이 아니라, 영환 대사가 저지른 죄악이 크니 부디 도움을 달라고 부탁을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내가 당신들에게 말해 줄 수 있는 건 딱 한 가지야.”
두 노승의 눈빛이 빛났다.
“그게 무엇이지?”
사완악은 지금까지 다른 사람들에게는 한 번도 이야기하지 않은 사실을 말했다.
“하나는 내가 영환 사부와 마지막으로 헤어진 곳. 그러니까 사대악인이 지난 십오 년간 나를 가르치며 거처했던 은거지를 알려 줄 수 있지. 물론 내가 아는 사부들은 내가 강호로 나온 순간, 그 은거지를 버리고 다른 곳으로 갔을 테지만.”
키 작은 노승이 다급히 말했다.
“상관없다! 그곳이라도 알려다오.”
두 노승은 그곳을 조사하면 염라대사 영환이 어디로 갔는지 어떤 단서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사완악은 지체 없이 두 노승에게 전음을 날려 사대악인과 함께 지냈던 거처를 알려 주었다.
전음을 들은 두 노승의 동공에는 삶의 희망을 되찾은 듯한 생기(生氣)가 돌았다.
그리고 한편으로 두 노승은 사완악이 그들에게 동시에 전음을 날렸다는 사실을 깨닫고 내심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놈이 가르쳤으니 예사 놈은 아니겠구나.’
이때 사완악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사부님들은 과연 혈도를 풀었을까?’
사완악은 그들과 헤어지기 전, 군림혼혈공의 마지막 수법인 폐맥폐공으로 사대악인의 내공을 모두 막아 버렸다.
사마소는 군림혼혈공을 익히고 있으나, 폐맥폐공을 해혈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내공이 필요했다. 그러니 내공을 봉인당한 사마소는 스스로 해혈을 할 수가 없을 터였다.
하지만 사완악은 네 명의 사부 모두 재주가 뛰어나다는 것을 알기에 지금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문득 궁금해졌다.
“그럼 이제 완악을 보내도 되겠습니까?”
지금까지 조용히 있던 현종의 목소리에 사완악은 상념에서 깨어났다.
“그러네. 너무 지체하면 또 누가 나타날지 모르는 일이지.”
사완악이 씩 웃으며 말했다.
“그럼 나는 이만…….”
그런데 그때였다.
“잠깐!”
키 작은 노승의 외침이었다.
현종은 이때 표정이 처음보다 더욱 굳어졌고, 사완악은 해맑은 표정으로 동작을 멈췄다.
키 작은 노승은 사완악의 그런 얼굴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너는 사대악인의 제자답지 않은 면모가 있구나.”
“그런가?”
“좋다, 우리는 너를 붙잡을 생각이 없다. 다만, 한 가지는 내려놓고 가거라.”
사완악이 고개를 갸웃하며 키 작은 노승을 쳐다보자, 그가 이어서 말했다.
“소림사에서 가져간 것. 그것만 내려놓으면 된다.”
“소림사에서 가져간 것?”
“염라대사의 무공은 소림의 것이니라.”
사완악은 노승의 말뜻을 알아차리고는 황당한 웃음을 내뱉었다.
“뭘 어떻게 놓고 가라는 거지?”
키 큰 노승이 대신해 말했다.
“너의 단전을 파(破)하는 것으로 소림은 너를 사대악인과 아무런 연관도 짓지 않을 것이고, 또한 무림 동도들 앞에서 너의 입장을 대변해 주겠다.”
단전을 파한다는 것은 지금까지 쌓은 내공을 모두 없애고, 앞으로도 영영 심법을 익힐 수 없는 몸이 된다는 뜻이었다.
사완악은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사대악인의 죄를 나에게 묻지 않는다는 말은 나에게 뭔가를 얻어 내기 위한 위선이었나?”
키 작은 노승이 말했다.
“오해를 하는군. 이것은 네가 사대악인의 제자인 것과는 별개의 문제이다. 소림의 절학을 외인이 지닐 수는 없는 법이다.”
사완악은 현종을 보며 말했다.
“현종. 네 언변이 뛰어난 이유가 사부들의 덕분이었군. 하하, 세상에 다시없을 개소리를 저렇게 격조 있게 하다니. 과연 천 년 동안 존경받아 온 소림이란 말이야.”
현종은 씁쓸한 표정으로 두 눈을 잠시 감았다.
사실 현종은 지금의 상황을 어느 정도 예측하고 있었다.
그는 소림사와 원로원이 염라대사 영환에게 얼마나 깊은 원한을 지니고 있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완악이 말했다.
“만약 내가 싫다고 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키 작은 노승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작게 말했다.
“십팔나한진(十八羅漢陣) 삼형(三形)을 펼쳐라.”
그러자 후방에서 강렬한 기운을 내뿜으며 기립해 있던 열여덟 명의 소림승들이 땅을 박찼다.
그들의 신형은 일사불란하게 이동하더니 순식간에 사완악과 현종, 그리고 두 노승을 중심으로 큰 원을 만들며 둘러섰으며, 손에는 모두 긴 목봉(木棒)을 쥐고 있었다.
사완악은 키 작은 노승의 말에서 이 무승들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그 유명한 십팔나한(十八羅漢)인가?”
십팔나한은 소림사를 대표하는 열여덟 명의 무승(武僧) 집단이었다.
이들은 무공이 고강하고 충성심이 높은 정예로만 엄선되었고, 그 임무는 소림사의 중지(重地)를 지키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소림사의 귀한 서책이 보관되어 있는 장경각이나 면벽 수련을 하는 달마동, 원로원, 방장 대사의 거처 등이었다.
때문에 그들이 소림사에서 내려오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그런 십팔나한이 사대악인의 제자가 나타났다는 말에 원로원의 노승들과 함께 나타났으니, 소림사의 원한이 얼마나 뼛속까지 깊은지 말해 주는 바였다.
어쨌든 무림에서는 십팔나한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고, 그들이 침입자를 대비하여 익히는 진법은 강호 삼대 진법 중 하나로 꼽혔다.
바로 사완악의 눈앞에 펼쳐져 있는 십팔나한진(十八羅漢陣)이었다.
십팔나한은 가슴 앞에 목봉을 양손으로 쥔 채, 공격은커녕 미동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사완악은 그들의 간격이 자로 잰 듯 일정하다는 것을 보고, 결코 예사 진법이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저 늙은 중이 삼형(三形)이라고 외친 것으로 보아 여러 가지 형태로 변화할 수 있겠군.’
그런데 이때, 키 작은 노승은 십팔나한이 아닌 현종을 향해 말했다.
“현종, 이제 그 아이를 제압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