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cious Beverage RAW novel - Chapter 9
정도마신 8화
“나 신천마뇌 사마소 앞에서 그런 시건방을 떠는 건 강호에 너밖에 없을 거다.”
예전 같았으면 사마소의 이런 한마디에 기가 죽을 사완악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사완악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사완악은 어깨를 한 차례 으쓱이고는 대수롭지 않은 듯 대꾸했다.
“이 정도 말재주도 없으면 어디 가서 신천마뇌 사마소의 제자라고 말할 수 없겠지요.”
사마소를 높여 주는 동시에 익살스럽고 건방진 말투와 태도는 그대로다.
사마소는 결국 기가 차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당돌한 녀석…… 좋아. 맞는 말이다. 내 제자라면 그 정도는 되어야 한다.”
“클클, 사마소가 입씨름으로 밀릴 때도 있군.”
“딱히 그런 건 아니지만.”
구득소의 놀림에 인상을 찌푸리며 대답한 사마소는 조금은 대견스러운 표정으로 사완악을 응시했다.
“나는 너를 믿는다.”
그건 다른 사대악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사완악은 사부들의 눈빛에서 느껴지는 감정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애정(愛情).
사대악인과 사완악이 함께한 세월은 어느덧 십오 년이었다.
천의문의 제자가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것 외에는, 다른 사람과의 교류가 일절 없는 세상.
처음에는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키웠던 제자.
그러나 제자를 기른다는 것은 생각보다 더 즐거운 일이었음을 그들은 알게 되었다.
자신들의 절기를 이어받아 세상에 그 모습을 당당히 나타낼 후계자.
언제부터인가 사완악은 아들이요, 분신 같은 아이가 되어 있었다.
물론 그런 사완악에게 살인마나 색마가 되라는 등의 요구를 아낌없이 하는 것을 보면 과연 사악한 악인들이라 할 수 있지만…….
어쨌든 그들에게 사완악은 이미 특별한 존재였다.
염라대사 영환이 재밌다는 듯 말했다.
“강호가 너로 인해 얼마나 요동칠지 궁금하구나. 아마 너는 우리 사대악인의 이름보다 더 높은 악명(惡名)을 떨칠 게다.”
사완악은 염라대사 영환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씩 웃으며 말했다.
“당연하지요. 전 이미 사부들조차 소름 끼치다고 할 만큼 엄청난 악행을 준비해 놓았으니까요.”
잔혹신풍 구득소가 끼어들었다.
“클클, 이놈아, 허풍 떠는 거 아니냐?”
“아닌데. 내가 흰소리하는 거 봤어? 구 사부는 정말 놀라 자빠질지도 몰라.”
구득소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잉? 도대체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 거냐? 빨리 말해 봐라, 궁금해 죽겠다.”
“이따 말해 줄게. 그런데 이렇게 수다만 떨다가 구천살심공이랑 탈정미혼공은 언제 전수해 주려고?”
“흠, 그건 그렇군. 그럼 후딱 하자. 알지? 나 궁금한 거 못 참는다.”
요희요검 채보령은 늠름해진 아들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이제 앉아 보렴. 탈정미혼공의 마지막 구결을 알려 줄 테니.”
사완악은 염라대사 영환을 가만히 바라봤던 것처럼 채보령을 잠시 뚫어져라 응시했다.
“왜 그러니?”
“헤헤, 아무것도 아니에요.”
사완악은 대답과 함께 그 자리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채보령은 사완악의 눈빛이 평소와 미묘하게 다르다고 느꼈으나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다. 이내 채보령은 사완악의 등 뒤에 장심(掌心)을 갖다 대고 눈을 감으며 말했다.
“자, 탈정미혼공의 흐름을 내가 인도하는 대로 느껴야 한다.”
사완악 역시 두 눈을 감고 집중했다.
이러한 방식으로 상대의 내공을 직접 조종할 때는 두 사람의 육체 모두 매우 예민한 상태가 된다.
만약 사완악이 조금이라도 그녀의 인도를 거부하게 되면, 채보령은 심각한 내상을 입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리고 기억해라. 마지막 탈정미혼공의 구결은…….”
사완악은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구결대로 탈정미혼공을 운기했다.
그동안 운기하던 방법과는 조금 다른 혈도, 다른 길을 통해 탈정미혼공이 사완악의 온몸을 돌고 돌았다.
‘음!’
사완악은 탈정미혼공의 마지막 구결을 운기하면서 자신의 하복부 아래가 매우 팽배해짐을 느꼈다.
운기만으로도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몸 안에서 색욕(色慾)이 마구 치솟는 것이었다.
그러나 채보령의 음성은 전과 다르게 냉정했다.
“몸의 변화에 흔들리지 마라. 정신은 얼음처럼 차갑고 고요해야 한다.”
채보령이 말하지 않아도 사완악은 흔들리지 않았다.
‘이 정도야 우습지.’
지난 육 년간 사마소가 그에게 강행했던 고문들.
그 지옥 같은 고통 속에서도 이제 웃으며 견딜 수 있는 사완악이었다.
사완악은 탈정미혼공의 마지막 구결대로 약 반 시진(1시간)가량 운기조식을 계속했다.
나머지 세 사부들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사완악이 긴 숨을 내뱉으며 비로소 눈을 떴을 때, 누군가 번갯불이 번쩍이듯 빠른 속도로 사완악의 등 뒤에 앉았다.
당연히 잔혹신풍 구득소였다.
“이제 구천살심공이다!”
뭐라고 대답할 틈도 없었다.
구득소는 양 손바닥을 쭉 뻗어 사완악의 어깨 아래쪽에 갖다 대고는 냅다 자신의 진기를 불어넣기 시작했다.
‘켁! 이 늙은이가 진짜!’
이제 막 탈정미혼공의 운기를 마친 사완악은 전혀 다른 기운의 진기가 들어오자 황급히 자세를 바로 했다.
그 모습을 보며 염라대사 영환이 혀를 찼다.
“쯧쯧. 저 무식한 녀석. 내공을 전수한다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데…… 저러다 주화입마(走火入魔)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사마소와 채보령도 동감이라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주화입마란 내공을 수련하다가 잘못되어 혈맥이 다치고 내상을 입게 되는 일이다. 주화입마가 심각할 경우 폐인이 되기도 한다.
무인으로서는 가장 조심해야 하는 일.
때문에 자연의 순수한 기운을 모으는 정파의 내공을 전수할 때도 조심, 또 조심하는 법이었다.
하물며 구천살심공처럼 마기가 강한 내공은…….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성질 급한 구득소는 자신의 진기를 콸콸 쏟아 넣고 있었으니까.
사완악은 구득소의 구천살심공을 받아들이며 이 내공심법이 매우 독특하다고 느꼈다.
음유(陰柔)하다고 표현할 수 있을까?
부드럽게 단전을 감싸는 것 같으면서도 언제 폭발할지 모를 것 같은 느낌.
사람으로 따지면 해맑게 웃고 있다가도 별안간 심장에 칼을 찌를 것 같은 기운이었다.
이어서 구득소의 입에서도 구천살심공의 구결이 흘러나왔다.
“하, 정말 대책 없는 작자로군! 영환 대사, 채보령, 어서 귀를 막으시오.”
염라대사와 요희요검은 사마소의 말을 바로 알아들었다.
만약 자신들이 구천살심공의 구결을 듣고 무심결에 그것을 익혔다가는 서로가 죽이려 달려들 것이 뻔했다.
염라대사 영환은 잠시 저 멍청한 구득소의 머리통을 빠개 버릴까 고민하다가 할 수 없이 귀를 막았다.
사완악은 두 눈을 감고 구천살심공을 받아들이고 있었지만, 사마소의 말을 들으며 이와 같은 상황을 모두 파악할 수 있었다.
사완악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더 잘됐군!’
무엇이 더 잘됐다는 뜻일까?
그런데 그 순간, 구득소의 입에서 약간 당황스러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음? 완악아, 이제 되었다. 구천살심공의 구결은 모두 전수했다. 그런데 이거…… 왜 이러지?”
구득소는 자신의 손을 통해 사완악에게 흘러 들어가는 기운이 멈추지 않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그 의아함은 점점 더 깊어지기 시작했다.
“어…… 어라?”
마치 두 손바닥이 사완악의 양어깨에 찰싹 붙어 버린 듯한 느낌. 그리고 멈추려 해도 자신의 내공이 계속해서 빠져나가는 것이 아닌가?
“완악아, 뭐가 이상하구나!”
사완악은 묵묵부답이었다.
다른 사대악인들은 단순히 손으로 귀를 막은 것이 아니라 내공으로 자신에게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게 차단하고 있었기에 구득소가 계속 구결을 전수하는 것으로만 보고 있었다.
“완악아!”
사완악은 그제야 대답했다.
“구 사부, 왜 그래?”
구득소가 황급히 외쳤다.
“내공이, 내공이 계속 빠져나가는구나! 운기를 멈춰 보아라!”
그리고 사완악의 장난기 섞인 대답이 들려왔다.
“그냥 다 주면 안 돼?”
“뭐라고?”
“사부, 기왕 나 도와주는 거 내공 좀 많이 달라고.”
“그게 무슨……!”
잔혹신풍 구득소가 비록 사마소처럼 지략이 뛰어나지 않을지라도, 칠대고수의 자리까지 오른 노강호(老江湖)였다. 그는 아무리 용을 써도 두 손바닥이 떨어지지 않자 고개를 홱 돌려 사마소를 바라봤다.
“……!”
사마소는 구득소가 심하게 일그러진 표정으로 소리를 지르는 듯한 모습에 무언가 잘못됐음을 직감했다.
그것은 염라대사 영환과 요희요검 채보령도 마찬가지.
세 사람은 재빨리 소리를 차단했던 내공을 거두었다.
“배신! 이놈이 배신했다!”
곧바로 들려오는 구득소의 고함 소리.
배신!
이 한마디는 모든 상황을 설명하고도 남는다.
영환 대사와 채보령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멍하니 사완악과 구득소를 바라봤다.
다만, 사마소는 이미 신법을 펼치며 사완악에게 날아가고 있었다.
쉭, 쉭, 쉭!
사마소의 병기는 판관필이다.
강철로 만든 붓 모양의 그 무기가 사완악의 이마와 인중, 목젖, 세 곳을 연달아 찔렀다.
“읏차!”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던 사완악의 신형이 튀어 오르듯 일어섰다.
“쿨럭!”
그제야 양손이 떼어진 구득소가 땅에 쓰러지며 답답한 기침을 내뱉었다. 동시에 사마소의 판관필은 사완악의 움직임을 예상했다는 듯 허공에서 우회하여 뱀처럼 사완악의 혈도를 노려 갔다.
탁탁탁!
사완악의 손이 사마소의 손목을 밀어내듯 쳐 냈다.
겉보기에는 한없이 부드러운 동작.
그러나 사마소의 신형은 갸우뚱하며 중심을 잃고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상대의 힘을 역이용하여 돌려주는 수법.
바로 잔혹신풍 구득소의 독문무공(獨門武功)인 유풍유권이었다.
“사마 사부는 역시 무공이 조금 부족하네.”
사완악과 서너 합을 겨루고 물러난 사마소의 눈빛은 이미 살기로 가득해 있었다.
“이게 무슨 짓이냐?”
사완악이 씩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무슨 짓이긴, 사부들의 가르침을 따르는 중입니다만.”
“뭐라?”
“악인이 되라고 하셔서 악행의 첫걸음을 내딛는 중이지요.”
사마소의 눈살이 더욱 찌푸려졌다.
“네놈 설마…….”
사완악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맞아. 날 지금까지 키워 준 부모 같은 사부들의 뒤통수를 좀 치려는 거야.”
“갈!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냐!”
어느새 날아온 염라대사 영환의 호통 소리였다.
사완악은 영환 대사를 슥 쳐다본 후 태연하게 말했다.
“강호로 나가서 사부들 꼭두각시 노릇이나 하고 돌아올 생각이 없다는 건데요?”
“……!”
사대악인 네 사람은 아연실색한 얼굴로 사완악을 바라봤다.
불과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자신들의 분신과 같았던 사완악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것이라곤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
“제가 귀찮게 화산파 장문인은 왜 잡아 오고, 강호 미녀들은 왜 납치해 옵니까? 정 하고 싶으면 사부들이 직접 하시죠. 아, 강호로 나가는 건 겁나시나, 헤헤.”
“완악아, 너…….”
사완악은 채보령을 보고는 머리를 긁적였다.
“미안, 어머니.”
염라대사 영환이 이를 갈며 소리쳤다.
“배은망덕한 놈! 널 자식같이 대했건만, 감히 키워 준 은혜를…….”
사완악이 웃기다는 듯 그의 말을 잘랐다.
“영환 사부도 사부의 사부님을 때려죽이지 않았던가? 그깟 오입질이 뭐라고 사부를 죽였어?”
“뭣이……!”
염라대사 영환은 배신감에 분통이 치솟았으나 동시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순간 그의 머릿속에 과거, 원통하고 기가 막힌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던 사부의 눈빛이 떠올랐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