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datory Soul RAW novel - Chapter 150 (5)
헤롯트는 연기를 뱉는 것도 잊어버리고 숨을 멈췄다. 짧은 한마디가 얼음으로 만든 단검처럼 서늘해서 온몸에 소름이 쭉 끼쳤다.
밤의 어둠이 아니었다면, 흠칫거리는 꼴사나운 모습을 고스란히 내보였을 터였다. 헤롯트는 억지로 웃어 보였다. 안간힘을 쓴 끝에야 떨지 않고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이샤칸은 느긋하게 잎담배 연기를 들이마시고 내뱉었다. 길어지는 침묵에 헤롯트가 충분히 초조해졌을 즈음에야 툭 하고 답해주었다.
“마음에 안 들어서.”
“…….”
그러니까 지금 제 담배 연기가 기분 나쁘다고 하는 소리인 건가. 대답을 들었으나 믿기지가 않아서, 헤롯트는 귀를 의심했다.
긴장한 나머지 어느새 입 안이 버쩍 말라있었다. 마른침을 삼키며 머리를 굴렸다. 이대로 꼬리 말고 달아나기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연회장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이샤칸은 여왕의 허리에 손을 감고 보란 듯이 애정표현을 했다. 그러면서도 헤롯트를 쳐다보거나, 시선을 마주하진 않았다. 마치 그럴 가치도 없는 상대라는 듯이.
심지어 왕인 자신에게 최소한의 예법조차 지키지 않고 함부로 말해댔다. 존칭 하나 없이 마구잡이로 대하는 행태에서 바르칼트를 어찌 여기는지가 빤하게 보였다.
천한 야만족 주제에.
노예로 빌빌거리던 새끼들이 기세등등하게 설치다 못해, 이제는 대륙을 지배하려 들었다. 굴욕적인 분노가 두려움을 조금씩 집어삼켰다.
헤롯트는 연초를 쭉 빨았다. 연기를 입 안에서 굴리며 저 오만한 남자를 일그러뜨릴 말을 골랐다.
“바르칼트의 사교계에서는 온갖 일이 벌어지곤 합니다.”
바르칼트는 성에 대해 굉장히 자유롭고 개방적인 분위기였다. 색에 대해 알고 싶다면 바르칼트로 향하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그런 만큼 바르칼트 사교계에서는 상상도 못 할 일들이 종종 벌어지곤 했는데, 헤롯트와 유디아는 보통 그 중심에 끼어있는 사람이었다. 사교계에서 벌어지는 난잡한 짓거리에 대해서는 훤히 꿰고 있는 것이다. 헤롯트는 흥미로운 가십거리를 말하듯 입을 열었다.
“최근 있었던 일 중에 가장 흥미로운 사건은 두 부부가 배우자를 맞교환하여 성교를 맺은 일이었습니다.”
말없이 듣고 있는 남자를 확인한 뒤, 헤롯트는 어깨를 으쓱했다.
“뭐어……. 서로 합의하여 행한 일이고, 당사자들도 다 만족했다고 해서 처벌은 없었지만요. 사실 강제로 한 것이 아니면 처벌할 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요새는 유행으로 번지는 것 같습니다.”
오래된 부부에게는 가끔 이런 별난 쾌락이 필요한 법이라며 웃었다. 눈매를 가늘게 좁히며 질문을 던졌다.
“혹시 관심 있으십니까?”
헤롯트는 같이 저녁이나 한번 먹자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아까 보셨겠지만 제 부인이 꽤 괜찮습니다. 그녀도 이런 일에 흥미가 있고…….”
다 피운 연초를 바닥에 던졌다. 석재 바닥 위에 떨어진 연초를 구둣발로 비벼 끄며 웃었다.
“재미있을 것 같지 않습니까.”
이샤칸도 헤롯트를 따라 웃었다. 퍽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 웃기에 의외로 이런 쪽에 관심이 있는 건가, 하고 생각하는 찰나였다.
“……컥!”
눈앞이 번쩍하더니 커다란 충격이 몸을 뒤흔들었다. 발이 땅에서 떨어져 허공을 허우적거렸다. 한 손으로 헤롯트의 목을 붙잡고 들어 올린 이샤칸은 반대쪽 손으로 태연히 흡연을 이어갔다.
목을 옥죄는 손을 손톱으로 마구 할퀴었으나, 질긴 피부에는 생채기도 나지 않았다. 눈에 실핏줄이 터졌다. 숨이 막혀서 눈앞이 가물거렸다.
“얼마 전에 함부로 지껄이는 놈의 혓바닥을 잘라주었는데 말이지.”
“끄으윽……!”
“아무래도 네놈은 아랫도리를 잘라줘야 할 것 같군.”
이샤칸은 벌게진 얼굴 위에 연기를 길게 뱉었다. 고통과 모욕을 견디지 못하고 헤롯트가 눈물을 줄줄 흘렸다. 이내 쓰레기 버리듯 몸이 내던져졌다.
“캑, 크억, 컥…….”
헤롯트는 급하게 숨을 들이마시며 기침했다. 침과 눈물로 범벅이 된 꼴을 내려다보며 이샤칸은 혀를 찼다.
“얌전히 기다리고 있으면 알아서 죽여줄 텐데……. 왜 이리 성가시게 굴지.”
무언가 콰직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바닥에 엎어져 허덕거리던 헤롯트는 제 안경이 부서지는 소리임을 뒤늦게 알았다.
이샤칸은 마지막 인사를 남기곤, 연초를 입에 물고 유유히 사라졌다.
“조만간 또 보자고, 바르칼트의 왕.”
***
연회 둘째 날. 이샤칸은 또다시 아침 일찍부터 외출했다.
그가 쿠르칸들을 싹 데리고 나간 탓에, 궁이 조금 쓸쓸하게 느껴졌다. 오늘은 연회에도 참석하지 못할 것 같다고 했으니, 아마 밤새도록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았다.
레아는 이샤칸이 계속 쿠르칸들을 데리고 왕궁을 비우는 이유가 혹시 바르칼트 때문인가 추측하고 있었다.
헤롯트와 유디아는 각자 레아와 이샤칸을 유혹하고 있었다. 그들의 목적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에스티아와 쿠르칸의 동맹을 깨는 것이리라.
하지만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행동이 이상했다. 단순히 유혹하려 드는 정도가 아니었다. 화친협정이 위태로울 만큼 무례하게 굴면서 선 넘는 짓을 일삼았다.
레아와 이샤칸이 반드시 자신들에게 넘어오리라 확신하지 않고서야, 이렇게 행동할 수가 없었다. 무언가 믿는 구석이 있는 것 같았다. 이샤칸은 그 비밀을 캐내기 위해 계속 왕궁 밖으로 나도는 중인 듯했고 말이다.
레아에게 말해주지 않고 감추는 걸 보면 결코 좋은 일은 아닐 터였다. 이샤칸을 믿고 기다리는 중이지만, 하루빨리 해결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컸다. 기껏 정벌 마치고 돌아왔는데 붙어있질 못하니 서운했다. 그래도 적적할 새는 없었다. 레샤가 있기 때문이었다.
“아기 늑때 뚜뚜뚜! 기여워 뚜뚜뚜! 나는 기여워!”
레샤가 이상한 노래를 부르며 팔짝팔짝 뛰어갔다. 은빛 고수머리가 풀썩이는 모습을 보며 레아는 미소 지었다.
지난밤에 놀아주지 못해서, 오늘 오후는 레샤와 함께 보내기로 했다. 레샤는 왕궁 이곳저곳을 쏘다녔다. 곳곳에 참견하며 귀여움 받는 아이를 한참 따라다니다가, 잠시 정원의 의자에 앉았다.
분수대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가 졸졸 들렸다. 나무 위에서 지저귀는 새를 잡고 싶어 하는 레샤를 만류하며 슬며시 물어보았다.
“어제 아빠한테는 뭐라고 말한 거야?”
연회장에 가기 전, 둘이서만 뭘 속닥거렸는지 궁금했다. 레샤의 속삭임을 들은 이샤칸의 표정이 제법 진지했던지라 더욱 궁금증이 일었다.
“우웅, 비밀인데.”
“엄마도 알려줘.”
“앙대……. 파파랑 비밀 약속해쏘.”
레샤는 입술을 손으로 막는 시늉을 해 보였다. 순순히 알려줄 태세가 아니어서, 레아는 비장의 무기를 꺼냈다.
“엄마만 안 알려주는 거야?”
“우…….”
“그렇구나……. 서운해라…….”
울먹이는 시늉을 해 보이자, 레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마, 마미!”
울지 말라고 허둥지둥 레아를 달랬다. 흑흑 울음소리를 두어 번 내고 나니, 레샤는 금방 무슨 얘기를 했는지 실토했다.
“꿈 말해조써……. 마미가 나뿐 거 먹는 꿈.”
“내가 나쁜 걸 먹는 꿈?”
“웅!”
이샤칸은 레아에게 당분간 아무거나 먹지 말라고 경고했었다. 레샤의 말을 듣고 경고한 것이라면, 조금 의아한 일이었다. 마치 레샤의 꿈이 예지몽이라도 되는 것 같지 않은가.
이런 걸 물어볼 상대는 정해져있었다. 다음에 모르가를 불러다 진지하게 이야기를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곰곰이 생각에 잠겨있는데, 작은 손이 레아를 톡톡 두드렸다.
“괘차나, 마미!”
레샤가 고개를 한껏 치켜들며 말했다.
“마미는 내가 지켜주니까. 옛날에두 그래짜나. 나 어릴 때. 마미 안에 잇어쓸 때.”
레샤는 와아앙 늑대 흉내를 냈다. 자그만 손으로 날카로운 발톱을 흉내 내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이따금 레샤는 태아 시절의 이야기를 하곤 했다. 배 속에 있었을 때의 일들을 기억하는 것이었다. 고통스러웠을 텐데도, 아이는 자신의 기억을 괴롭게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엄마를 지켜냈다며 자랑스러워했다.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연회가 열리기 전, 저녁 만찬으로 바르칼트의 사신단을 접대하기로 일정이 잡혀있었다.
이샤칸 없이 혼자서 헤롯트와 유디아를 상대할 생각을 하니 벌써 피곤했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혼자는 아니었지만…….
-레샤를 데려가.
이샤칸은 저녁 만찬에 레샤와 함께하라 일렀다.
-그대 곁에 뮤라가 없으니 다른 호위를 두어야지.
레샤가 있으면 안심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아직 어린아이에 불과한데도, 이샤칸은 레샤를 어엿한 쿠르칸으로 여기고 있었다.
“구러니까 마미, 걱정하디 마!”
으스대는 레샤는 이미 엄마의 호위 역할에 심취한 상태였다. 레아는 웃으며 아이를 꼭 끌어안았다.
“응, 엄마는 레샤만 믿어.”
그래도 웬만하면 아이가 나서는 일이 없도록, 제 선에서 처리할 것이다. 레아는 혼자 그리 생각하며, 레샤의 의젓함을 한껏 칭찬해주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 레아는 레샤와 함께 만찬장을 찾았다. 목에 커다란 리본이 달린 예복을 입은 레샤는 시나엘 남작부인의 품에 안겨서 조잘거렸다.
“셔버 머꾸 시퍼. 셔버.”
전에 먹었던 레몬 셔벗이 맛있어서 또 먹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레아는 복도를 걸으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노을이 지고 있었는데, 어느새 해가 떨어져 사위가 어두웠다. 어둠을 밀어내기 위해 곳곳에 밝혀놓은 등불이 일렁이며 긴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흔들리는 그림자에 마음이 까닭 모르게 어수선해졌다. 그때 시나엘 남작부인에게 안겨있던 레샤가 팔짝 뛰어내리더니, 레아의 옆으로 다가와서 나란히 걸었다. 눈이 마주치자 레샤는 방긋 웃었다.
나쁜 생각을 할 틈조차 주지 않는 것이 아빠와 똑같았다. 레아는 레샤를 따라 웃으며 만찬장에 다다랐다. 그리고 문이 열렸을 때, 불길한 예감이 적중했음을 깨달았다.
드넓은 만찬장에는 단 한 명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유일한 참석자, 헤롯트가 의자에서 일어나 레아를 맞이했다. 레아는 헛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분명 바르칼트의 사신단을 모두 초청한 만찬이건만, 떡하니 혼자 앉아있었다. 레아와 조용히 대화할 자리를 만들기가 어려우니, 이딴 식으로 수작을 부렸구나 싶었다.
“전하.”
시나엘 남작부인이 나직이 레아를 불렀다. 어찌할지 묻는 부름에 레아는 말없이 만찬장에 들어서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이쯤 되니 어디까지 가는지 한번 보자 싶었다. 레아는 냉소하며 자리에 앉았다. 레아와 레샤가 나란히 앉고, 그 맞은편에 헤롯트가 자리했다. 헤롯트는 뒤편의 시중인을 불러다 무어라 지시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레아는 잠시 눈을 깜빡였다. 오늘 헤롯트는 안경을 쓰고 있지 않았다. 맨얼굴이 조금 낯설었다. 특이한 점은 그뿐이 아니었다.
날씨와 어울리지 않게도, 그는 목이 올라오는 셔츠를 입고 있었다. 너무 관찰하는 티가 나지 않도록 스치듯 시선을 흘리던 레아는 셔츠 목깃 사이로 언뜻 붉은 흔적을 보았다.
손자국……?
누군가에게 목이 졸린 듯한 손자국이었다. 잘못 봤나 싶어서 재차 살피려 했지만, 그 사이 헤롯트가 고개를 돌렸다. 잠깐 드러났던 목은 다시 가려져버렸다.
“홀로 찾아뵙게 되어 송구합니다.”
헤롯트는 난처하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웃기지도 않은 소리였다. 레아는 표정 없는 얼굴로 답했다.
“송구할 게 무어 있겠습니까. 다만 궁금하기는 하네요. 바르칼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기에 자꾸만 이런 식으로 행동하는 것인지.”
레아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원하시는 바가 전쟁인가요.”
헤롯트는 웃음을 터뜨리며 농담처럼 말을 넘겼다.
“그럴 리가 있습니까.”
더 캐물어봤자 헛소리나 늘어놓을 듯해서, 추궁을 관두었다. 만찬이 시작되고, 식사는 겉보기엔 평화롭게 진행되었다.
레샤는 레아의 옆에 앉아서 투정부리지 않고 얌전히 음식만 먹었다. 헤롯트는 거슬리지 않는 수준의 가벼운 이야기로 대화를 이끌었다. 고기요리를 먹을 즈음, 헤롯트가 레샤를 칭찬했다.
“왕자님이 참으로 귀여우십니다.”
그러나 그의 눈은 레샤가 아닌, 레아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에스티아 왕실의 상징이 은색 머리카락이라 들었는데, 볼수록 신비하군요.”
시선이 머리카락을 타고 흘러내렸다. 레아는 살짝 눈매를 찌푸렸다. 안경알에 가려져 있던 눈이 고스란히 드러나니, 확실히 마주하기가 거북했다.
오늘따라 그의 눈에 묘한 광기가 깃들어있어 더욱 그렇게 느껴지는 것일지도 몰랐다. 궁지에 몰린 이가 발악하는 것처럼…….
냅킨으로 가볍게 입을 닦아낸 헤롯트가 손을 들어 시종을 불렀다.
“사죄의 의미로 선물을 가져왔습니다.”
그의 선물은 포도주였다. 헤롯트는 바르칼트 왕실에 진상되는 유명한 포도주라며 간단한 설명을 곁들였다. 레아도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는 귀한 포도주였다.
헤롯트가 시종들을 물리고 직접 코르크 마개를 열어서 잔에 따랐다. 말간 유리잔 안에 붉은 포도주가 채워졌다.
레아는 그가 건네는 잔을 받아들었다. 옆에 앉아있던 레샤가 식사하던 손을 멈추고 유리잔을 쳐다보았다.
레아는 유리잔을 살살 흔들며 향을 맡았다. 풍성하게 올라오는 과일향과 꽃향이 좋았지만, 선뜻 입을 가져다 대진 못했다. 아무거나 먹지 말라고 했던 이샤칸의 경고 때문이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자면, 안전한 포도주일 터였다. 눈앞에서 마개를 따서 부어준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레아는 세상의 논리보다 남편 말을 더 믿었다.
마시지 않고 입술만 대었다가 내려놓으면 되겠지.
천천히 입가로 가져가던 찰나였다. 손에 있던 유리잔이 팍 내쳐지며 멀리 날아갔다. 대리석 바닥에 떨어진 잔이 날카로운 파열음을 내는 동시에, 레샤가 식탁 위로 뛰어올랐다.
눈으로 좇을 수 없을 만큼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조그만 손이 스테이크용 나이프를 꼭 움켜 쥐고 헤롯트의 목에 겨눴다.
“마미한테 손대지 마.”
아이의 동공이 바짝 좁아져 있었다. 레샤는 뾰족한 송곳니를 드러내며 그르렁거렸다.
“너 주길 거야.”
***
유디아는 시녀들을 닦달하여 가장 아름답게 치장했다. 머리와 화장에 공을 들이고, 옷은 간단하되 몸매를 잘 드러내는 것으로 입었다. 갖가지 재주를 부려 유디아를 치장한 시녀들은 결과물을 보고 감탄했다.
“맙소사…….”
“황홀합니다. 설령 목석이라도 가슴이 두근거릴 것입니다.”
유디아가 보기에도 제 모습이 아름다웠다. 그녀는 몹시 만족스러워하며 로브를 쓰고 왕궁 밖으로 빠져나갔다.
쿠르칸의 왕은 오늘 밤 연회에 참석하지 않고 왕궁 밖에서 머무를 예정이었다. 유디아는 아랫사람을 시켜 왕이 어디로 향했는지 알아보라고 명했다. 그가 여관에서 밤을 보낼 것이란 말을 들은 유디아는 이것이 저를 부르는 신호가 틀림없다고 여겼다.
마차를 타고 여관으로 향하는 내내, 마음이 들떠서 절로 웃음이 나왔다. 아닌 척하더니 역시나 제게 관심이 있는 모양이었다. 연회장에선 보는 눈이 많으니 일부러 무심한 척한 것이리라.
마차에서 내린 유디아는 마부와 시녀에게 내일 아침까지 기다리라 일러두었다. 서둘러 여관으로 들어섰다.
그러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 순간, 유디아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했다.
피부 위로 뾰족한 감각이 쏟아졌다. 마치 수백 개의 바늘이 한 번에 꽂히는 듯한 날카로운 감각이었다.
예리한 통증의 원인은 시선이었다.
여관 안에는 수십의 쿠르칸들이 있었다. 그들은 각기 탁자와 의자, 창틀, 계단, 2층의 난간 따위에 자유로이 앉아있었다.
일견 제멋대로인 것처럼 보이나,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모두가 같은 행동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쿠르칸들은 모든 동작을 멈춘 채로, 눈조차 깜빡이지 않고 유디아만을 보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칼날이 목에 겨눠진 것 같았다. 숨이라도 잘못 내쉬었다간 곧바로 온몸이 갈가리 찢겨나가리라. 아마 유디아가 조금이라도 덜 담대했다면, 이 자리에서 실금을 하며 주저앉았을 것이다.
마치 멋모르고 미끼를 문 사냥감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유디아는 다급히 눈동자를 굴렸다.
유디아가 찾는 남자는 가장 안쪽의 탁자에 앉아있었다. 딱히 찾으려 애쓰지 않아도 존재감이 뚜렷하여 곧바로 눈에 들어왔다.
쿠르칸의 왕, 이샤칸. 남자의 이름을 다시금 속으로 되뇌며, 유디아는 목소리를 돋웠다.
“왕이시여.”
가만히 유디아를 지켜보고 있던 이샤칸이 한쪽 손을 가볍게 내저었다. 시선이 거둬졌다. 유디아는 헉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숨통이 트이고 나자 더욱 자신감이 생겼다. 역시 이 남자는 자신을 기다린 게 분명했다.
“긴히 드릴 말이 있어 결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
유디아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 잡았다. 촉촉한 눈망울로 이샤칸을 응시하며 속삭였다.
“화친협정과 관련된 일입니다. 듣는 귀가 많으면 곤란할 이야기인지라……. 독대를 청하고 싶습니다.”
조르듯 애교 섞어 말하자 이샤칸은 청을 들어주었다.
“다들 물러나 있거라.”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쿠르칸들은 모습을 감췄다. 그림자 속으로 녹아 사라지는 광경에 유디아는 소스라쳤다. 눈으로 보고 있는데도 믿기지 않았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지, 왕비.”
근사한 저음의 목소리에 유디아는 정신을 차렸다. 드디어 단둘이 남게 되었다. 얼룩진 욕망이 기대감을 품고 솟구쳤다. 심장이 세차게 뛰면서 아랫배가 간지러웠다.
‘그것’도 제대로 챙겨왔다. 오늘 밤이 지나고 나면, 자신은 쿠르칸의 왕을 가지게 되리라.
유디아는 대담하게 행동했다. 로브를 벗어 바닥에 떨어트리곤, 이샤칸의 맞은편에 앉은 것이다. 허락을 구하지 않은 행동이었으나, 이샤칸은 나무라지 않고 픽 웃었다.
유디아는 살살 웃으며 탁자를 살폈다. 탁자 위에는 움푹한 접시가 하나 놓여있었는데, 쪼글쪼글하고 찐득해 보이는 갈색 열매들이 수북하게 담겨있었다.
듣기론 쿠르칸들은 말린 대추야자를 먹는다고 했다. 달달한 냄새가 올라오는 것이 아마 이것인가 싶었다. 단내가 강해 가져온 술의 안주로 곁들이기에 적당해 보였다.
말린 대추야자가 놓여있는 게 일이 수월하게 풀릴 징조인 듯해서, 유디아는 내심 기뻐하며 들고 온 병을 탁자에 올렸다.
“우선 술을 한잔 올려도 될까요.”
코르크 마개 사이로 작은 관을 집어넣어 ‘그것’을 흘려 넣은 포도주였다. 구멍 난 마개는 감쪽같이 메워두었고, 오기 직전에 작업했으니 술의 맛과 향도 크게 변하지 않았을 터였다.
오랫동안 공들여 천천히 제 것으로 만들어도 좋겠지만, 이번에는 그럴 수가 없었다. 시간도 없거니와, 꾸물거리다간 헤롯트가 먼저 여왕을 자빠뜨릴지도 몰랐다. 그놈한테 뒤처지는 건 딱 질색이었다.
유디아는 포도주병을 탁자에 올리며 주변을 살폈다.
“잔을…….”
포도주잔을 가져오겠다고 하려는데, 이샤칸이 대추야자가 담겨있던 접시를 들고 그대로 뒤집었다. 와르륵 쏟아진 갈색 열매들이 나무 탁자 위를 나뒹굴었다. 코앞에 접시를 들이밀며, 그는 명령했다.
“부어.”
유디아는 그림 같은 미소를 지었다. 거친 행동이 오히려 매력적이었다. 잠자리에서도 저리 제멋대로 굴어주면 짜릿하겠는데…….
제 몸매가 잘 보이도록 부러 몸을 숙이며 술병을 기울였다. 접시에 포도주가 채워졌다. 이샤칸은 망설임 없이 쭉 들이켰다. 굵직하게 불거진 목울대가 시원스레 움직였다. 몇 모금 만에 접시는 깨끗이 비워졌다.
빈 접시를 확인한 유디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건방진 남자가 곧 제 앞에 무릎 꿇고 사랑을 애원하게 될 광경을 상상하니 웃음을 참기가 힘들었다.
유디아는 기대에 찬 눈으로 이샤칸을 바라보았다. 이제 슬슬 약효가 돌 것이었다.
“…….”
한데 이상했다. 충분한 시간이 지났는데도 아무런 반응이 나타나지 않았다. 금색 눈동자는 여전히 고요했다. 그의 눈에는 유디아가 원했던 열렬함도, 간절함도 존재하지 않았다.
어째서?
이미 여러 번 써왔던 약이다. 이렇게까지 효과가 늦게 나타난 적은 없었다. 뭐가 잘못된 것일까.
당황한 유디아가 우물거리는 사이, 커다란 구릿빛 손이 포도주병을 가볍게 쥐고 흔들었다. 병 안에서 찰랑이는 액체를 응시하던 이샤칸의 입매가 비뚤게 치켜 올라갔다.
“역시 가짜였군.”
금색 눈동자에 정신을 빼놓고 있던 유디아는 뒤늦게 답했다.
“……네?”
이샤칸은 병을 천천히 기울였다. 포도주는 가늘고 긴 궤적을 그리며 바닥으로 조르륵 쏟아졌다. 달콤한 향이 확 피어올랐다.
“그대가 술에 탄 사랑의 묘약이 가짜라는 소리야.”
붉은 액체가 엉망으로 튀며 발치를 더럽혔다. 신경 써서 차려입은 옷이 포도주에 물들었지만, 유디아는 제 옷이 지저분해지는 줄도 몰랐다. 멍하니 앉아있다가 소스라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어떻게 알았……. 아니, 그럴 리가 없는데……. 분명히, 여태껏 진짜로…….”
이샤칸은 탁자에 굴러다니는 대추야자를 하나 집어 먹으며 되물었다.
“내가 사랑에 빠진 것처럼 보이나?”
“…….”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멀거니 이샤칸을 쳐다보기만 하던 유디아는 갑자기 제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비명을 질렀다.
“그러니까 이걸 우리 레아 님한테도 먹이려고 했다는 거죠?”
언제 다가온 것인지, 뒤편에 쿠르칸들이 서있었다. 가벼운 분위기의 남자와 그보다 더 큰 키의 여자였다. 무뚝뚝한 표정의 여자는 유디아를 내려다보며 뒤이어 말했다.
“이건 암살 시도보다 더 심각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웃음기가 그득한 이샤칸의 대답이 들려왔다.
“그렇지. 죄질이 아주 나빠.”
그의 말이 떨어지자, 아무것도 없었던 그림자에서 쿠르칸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냈다. 텅 비어있던 여관이 빠르게 채워져 나갔다.
감당할 수 없는 공포에 시야가 꺼멓게 물들었다. 귀에서 시끄러운 이명이 들려왔다. 벌벌 떨고 있는 유디아의 모습에 쿠르칸들이 이빨을 드러내며 히죽 웃었다.
“저기, 왕비님.”
쿠르칸 남자가 유디아에게 바짝 붙어서며 물었다.
“혹시 에스티아의 왕에게 암살 시도한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들어본 적 있으세요?”
유디아는 답하지 못했다. 그녀는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며 마구 눈알을 굴렸다. 애타게 도망갈 곳을 찾으니 남자가 눈썹 사이를 모으며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모르는구나.”
남자가 귀여운 목소리로 애교 부리듯 말했다.
“그럼 지금부터 알면 되겠네요.”
찢어지는 비명이 여관을 뒤흔들었다. 바닥에 고여있던 포도주 위에 새로운 붉은 액체가 더해지는 소리였다.
***
레샤가 나이프를 깊숙이 들이대어서, 헤롯트의 목에 상처가 났다. 냅킨으로 급하게 지혈한 헤롯트는 별궁으로 돌아가 의사에게 치료를 받았다. 만찬은 엉망으로 마무리되었다.
왕의 목에 칼을 들이대었으니 발칵 뒤집어질 상황이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바르칼트는 어떠한 항의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들이 실수를 저지른 것처럼 쥐죽은 듯 침묵했다.
평소 레샤를 귀엽게 여기던 왕궁의 시종시녀들은 적잖이 충격을 받은 눈치였다. 어리광쟁이 왕자님이 갑자기 맹수로 돌변해 귀빈에게 나이프를 들고 날뛰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다들 레샤가 따끔하게 훈육을 받으리라 짐작하는 듯했으나, 레아는 그러지 않았다. 배 속에 있을 때부터 레아를 위해 목숨을 걸었던 아이였다. 분명히 헤롯트가 포도주에 무슨 짓을 해놨을 터였다. 방법은 모르겠지만, 그걸 레샤가 어떻게 눈치를 채서 막아낸 것이리라.
아이를 일찍 잠자리에 들이며, 레아는 이마와 뺨에 잔뜩 입을 맞춰주었다.
“엄마 지켜줘서 고마워.”
“웅!”
레샤는 작은 입으로 하품을 푸아암 하고선, 레아의 손에 얼굴을 부비며 속삭였다.
“마미 사랑해…….”
하도 많이 해서 제일 정확하게 발음할 줄 아는 말이었다. 다정한 사랑 고백을 마지막으로 레샤는 잠들었다. 레샤가 잠들고 나서도 한참동안 머리를 만져주고 배를 토닥여주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레아는 작게 한숨을 쉬며 서재로 향했다. 원래는 연회장에 가봐야 하지만, 그냥 불참하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바르칼트 쪽도 지금 한가롭게 연회를 즐길 분위기가 아닐 터였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잠은 오지 않으니, 서재에서 책을 조금 읽을까 싶었다. 귀한 서책들로 가득한 서재는 창가에 커다란 소파가 놓여있었다. 작은 침대만 한 크기의 소파였다. 낮에는 햇볕이 내리쬐고, 밤에는 달빛이 스며들어서 레아가 가장 좋아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저번에 책방에서 사온 책을 들고 소파에 앉았다. 책갈피를 뽑아내고 조용히 독서에 몰두했다. 고대어가 섞여있어서 집중하지 않으면 읽기가 어려운 책이었다. 흠뻑 빠져서 읽고 있는데, 달그락달그락 소리가 들렸다.
“……?”
무의식적으로 창문을 돌아본 레아는 눈이 커졌다. 얼른 일어나서 창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시원한 밤바람과 함께 남자가 창턱에 걸터앉았다.
“여기 있었네, 레아.”
“이샤칸!”
레아가 탄성처럼 그의 이름을 불렀다. 이샤칸이 길게 숨을 내쉬며 속삭였다.
“한참 찾았어…….”
레아는 그를 흘겨보며 타박했다.
“왜 자꾸 창문으로 와.”
“급해서.”
멀쩡한 문을 놔두고 뭐가 그리 급해서 창문으로 오는지 모를 일이었다. 웃으며 그를 바라보던 레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평소 같았으면 오자마자 당장 끌어안고 부비적거렸을 남자였다. 그런데 지금은 창턱에 걸터앉아서 다가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레아에게 손가락 하나 대지 않고 바라보기만 했다.
그를 찬찬히 살폈다. 달빛을 등지고 있어 잘 보이지 않지만, 이샤칸의 얼굴이 붉은 것 같았다.
“당신……. 어디 아파? 다쳤어?”
이샤칸의 몸에서 열기가 후끈하게 느껴졌다. 평소에도 체온이 높은 편이지만, 지금은 비정상적으로 뜨거운 것 같았다. 이마에 손을 짚어보려고 하는데, 이샤칸이 몸을 스윽 뒤로 물렸다.
“손대지 마.”
처음 들어보는 거절에 입술을 벌렸다. 놀란 레아를 보며 이샤칸이 스윽 웃었다.
“안 만지는 게 좋을걸.”
“무슨 소리야. 무슨 역병이라도 옮아왔어?”
“그보다 더 심할지도 모르지.”
이샤칸이 맥락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확인해보려 직접 마셨거든. 나는 주술이 통하지 않으니 먹어도 괜찮을 테니까.”
그리고 레아는 발견했다. 터질 듯이 부풀어있는 아랫도리를…….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이샤칸이 답지 않게 두서없이 말해서 자세한 상황은 모르겠으나, 대충 짐작해보자면 미약을 주워 먹은 것 같았다. 레아는 빨개진 얼굴로 숨죽여 외쳤다.
“대체 뭘 먹고 돌아다니는 거야! 수상한 게 있으면 모르가한테 확인하라고 해도 되잖아.”
“그러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
이샤칸은 불만스러운 눈으로 레아에게 대꾸했다.
“거슬리는 놈이 자꾸 그대 곁에서 얼쩡거리는데 빨리 처리해야지.”
말하다 말고, 이샤칸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가 괴롭게 신음했다. 놀라서 팔짝이는 레아를 바라보며, 혀로 입술을 핥았다.
“하아……. 터질 거 같아.”
무엇이 터질 것 같은지는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이샤칸은 불룩하게 솟은 아래를 하고서 노골적인 신음을 흘렸다. 그러다 퍽 난처하단 듯 말했다.
“터지면 어쩌지. 내 부인이 제일 좋아하는 것인데.”
어처구니가 없었다. 물론 좋아하긴 하지만, 제일 좋아하는 건 아니었다. 레아는 그를 잠깐 흘겨보았다가 주저하며 물었다.
“……내가 도와주면 안 돼?”
“안 돼.”
“어째서.”
이샤칸이 낮게 웃었다. 그가 열에 취한 눈을 하고서 속삭였다.
“심하게 굴 것 같아서 그래.”
과장 하나 없는 담백한 말이었다. 이샤칸은 순수하게 제 상태를 드러냈고, 그것은 진실이었다.
금색 눈동자는 동공이 바짝 줄어들어 있었다. 인간을 벗어나 짐승에 가까워진 눈은 금방이라도 목덜미를 물어뜯을 듯했다. 그에게서 어렴풋한 피비린내가 느껴지는 것 같아서, 레아는 살짝 몸을 떨었다.
이샤칸은 레아의 두려움을 어렵지 않게 읽어냈다. 그가 손으로 제 눈 위를 덮었다. 날카로운 눈동자를 가려놓고서 말했다.
“그대에게 별일 없는지 확인만 하러 온 거니까…….”
“이샤.”
약한 부분을 기습당한 것처럼, 이샤칸이 짧은 신음을 내었다. 이내 그의 입술이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그가 눈 위를 덮고 있던 손을 살짝 벌렸다. 손가락 사이로 샛노란 눈동자 한쪽을 드러내고서 장난스럽게 말했다.
“기어코 내 거를 터뜨리려고 그러나.”
레아는 고개를 내저었다.
“나한테 심하게 굴어줘.”
이샤칸의 입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그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어디 가서 그런 말 함부로 하지 마.”
“당신한테만 이런다고 몇 번이나 말했잖아.”
이샤칸은 여전히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는 뚫어져라 레아를 보다가 경고했다.
“울면서 그만해달라고 해도 못 멈출 텐데.”
“그래도 괜찮아.”
그에게 손을 뻗었다. 날아오는 화살도 잡아채는 남자는 느릿하게 다가오는 손을 피하지 못했다.
“내가 도와줄게, 이샤.”
손끝이 가슴팍에 닿는 순간이었다. 우지끈 하는 소리가 났다. 이샤칸이 다른 손으로 움켜쥐고 있던 창턱이 부서진 것이다. 아주 조금 후회하는 찰나, 손목이 강하게 끌어당겨졌다. 레아는 더운 품에 파묻혔다.
“난 경고했어.”
더 이상 도망칠 기회는 없었다. 죽지는 않겠지, 라고 생각하며 이샤칸의 옷을 잡아당겼다. 그가 곧바로 상의를 벗어 던졌다. 레아와 이샤칸은 한데 뒤엉켜 소파 위로 떨어졌다.
단추와 리본을 풀 여유가 없어서, 이샤칸은 그대로 옷을 반으로 찢어버렸다. 이렇게 찢어먹은 옷이 왕궁에 한가득이었다. 레아는 그의 목덜미를 끌어안았다.
맨살이 맞닿자마자 화들짝 놀랐다. 뜨거운 수준이 아니었다. 피부 아래에서 절절 끓는 열이 느껴졌다. 다급한 마음에 손으로 어깨를 문질렀다. 열을 식혀주려는 행동이었으나, 이샤칸에게서 괴로운 신음만 이끌어 내버렸다.
“하, 크읏…….”
이샤칸이 몸을 버쩍 굳히고 앓는 소리를 냈다. 근육이 탄탄하게 조여드는 느낌이 손바닥 아래에 느껴졌다. 뜨거운 입술이 레아의 목과 쇄골에 점점이 찍혔다. 그가 턱을 깨물었다가, 급하게 입을 맞춰왔다. 꿈틀거리며 안으로 파고든 혀가 입 속을 마구 찔러댔다.
난잡한 입맞춤에 정신이 팔린 사이, 허벅지 사이로 손이 파고들었다. 여린 안쪽 살에 자국이 남도록 허벅지를 꽉 움켜쥐었다가, 다리를 양옆으로 활짝 벌렸다. 그새 젖은 음부가 훤히 드러났다.
“하아…….”
이샤칸은 한숨을 내쉬며 잠시 레아의 음부를 내려보았다. 그는 망설임 없이 입술을 가져갔다. 쭙 소리 나게 아래가 빨렸다. 슬쩍 고이기 시작한 애액을 낱낱이 빨아먹으며 혓바닥을 지저분하게 문질렀다. 도록 튀어나온 음핵을 깨물다가, 갈라진 틈새로 혀를 밀어 넣었다.
콧대가 뭉개지도록 깊게 쑤시며 몰캉한 내부를 조심성 없이 파고드는 행위에 눈앞이 어지러웠다. 혓바닥이 안을 휘저어서 레아는 몸을 마구 뒤틀었다. 시트를 문지르던 손으로 이샤칸의 머리카락을 붙잡았다.
“흐으으, 이, 이샤칸, 천천히, 읏, 아아……!”
평소와 너무 달랐다. 급하게 성감을 끌어올리며 몰아붙이는 탓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머리카락을 아프게 쥐어뜯는데도 이샤칸은 꿈쩍하지 않았다. 바둥거리는 다리에 자꾸 뜨겁고 딱딱한 뭔가가 부딪혔다. 흐린 눈으로 확인하니 이샤칸의 성기였다.
그는 레아의 음부를 빨면서 다른 손으로는 제 것을 쥐고 흔드는 중이었다. 핏줄 불거진 성기는 귀두 끝이 부풀어있었다. 당장이라도 정액을 내보낼 것처럼 요도에서 끈적한 선액이 줄줄 흘렀다.
이샤칸이 거칠게 성기를 위아래로 흔들며 그에 맞춰서 음부의 구멍에도 혀를 처넣었다. 레아는 흐느끼며 허리를 뒤로 꺾었다. 몸이 바르르 경련하다가 어느 순간 힘이 탁 풀렸다. 허벅지에 뜨끈한 액체가 뿌려지는 감각을 느끼는 동시에 발가락이 쫙 펴졌다.
“아읏……!”
레아는 이샤칸의 머리를 한껏 끌어안으며 소리 질렀다. 칼날 같은 쾌감이 몸을 난도질하고, 뒤이어 거대한 탈력감이 찾아왔다. 빠져 죽기 직전에 물속에서 꺼내진 사람처럼 숨을 헐떡였다. 덜덜 떨고 있던 레아는 히끅 딸꾹질을 했다.
“…….”
이샤칸이 가만히 레아를 지켜보고 있었다. 광채가 감도는 금색 눈동자에는 야릇하고 음란한 기운이 넘실거렸다.
그가 발간 혀를 내밀어 레아가 흘린 애액으로 번들거리는 제 입술을 사악 핥았다.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커다란 손이 곧바로 턱을 붙들었다.
“나 봐.”
이샤칸은 초조해 보였다.
“눈 돌리지 마. 네 눈이라도 보고 있어야 조금이나마 정신 차리니까…….”
그는 없는 자제력을 간신히 끌어 모으고 있었다. 레아는 갑자기 시간을 되돌리고 싶어졌다.
죽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얼마나 안이하고 순진했던가. 오늘 서재에서 복하사로 실려 나갈 가능성은 아주 충분했다.
“이샤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