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ferences for possessed people RAW novel - Chapter (110)
110화
얼어붙은 소나무가 다 파헤쳐진 중정을 가로질러 본관으로 들어갔다. 거대한 그랜드홀이 우리를 맞이했다.
온 사방이 아이스블루색으로 반짝였다.
바닥과 벽은 물론 천장의 샹들리에까지 얼음을 정교하게 세공하여 지어진 곳이었다.
실내도 냉동고같이 춥긴 했으나 눈보라를 막아주는 것만으로 훨씬 살 만해졌다.
잠시 숨을 돌리고 있는데 옆에서 테실리드가 세 개의 통로를 보며 미간을 좁히는 것이 보였다.
찌푸려도 매력적으로 잘 생겼군 따위의 생각을 하다가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왜 그래? 문제 있어?”
그는 입안의 파편을 의식한 듯 한 손을 입가에 댔다.
“보스룸까지 가는 길이 기억나지 않아서.”
“아, 난 또 뭐라고.”
나는 시스템 지도를 켜고 살폈다.
“보스룸이 대연회장이었던가? 음, 좋아. 나만 믿고 따라와.”
내 듬직함에 감격할 줄 알았던 테실리드는 눈매를 가늘게 좁히고 있었다.
“흐음.”
“저기요, 테실리드 경? 동료 사이에 그런 눈빛은 좀?”
“그럼 동료로서 묻겠는데 어떻게 너는 뭐든 잘 아는 거지? 거의 전지(全知)에 가까운 수준인데.”
그야 시스템의 특혜를 받는 빙의자니까 그렇지.
테실리드의 의혹은 엉뚱한 쪽으로 튄 듯했다.
“아이, 중요한 문제니 솔직하게 대답해 줬으면 좋겠어. 혹시 네 정체가 ‘엄격한 질서와 선’의 분신이라거나…….”[‘세계를 구축하는 언령’이 선을 넘은 발언에 진노합니다.]“큰일 날 소리 하지 마. 절대 아니야.”
“그래? 그럼 다행이야.”
깔끔하게 납득해 준 건 고마웠지만 나는 순간 의아함을 느꼈다.
다행인가? 그의 입장에서?
내 시선에서 의문을 읽은 듯 테실리드는 그림처럼 미소 지었다.
“인간이어야 내 곁에 있겠지.”
아주 당연한 말 같으면서도, 묘한 의미를 내포한 말처럼 들리기도 했다.
그때 테실리드가 입을 다문 채 작게 기침을 삼켰다. 상념이 확 날아갔다.
“파편 때문에 기도가 차가워져서 그런가 보다. 얼른 가자.”
성기사단에도 알렸다.
“다시 출발합니다. 이제부터 조심해서 저를 따라오세요.”
“예! 예하!”
얼음성의 구조는 미로와 같았다. 복도를 따라 걷다 보면 아무런 용도가 없어 보이는 홀이 나왔고, 그 건너편에는 갈림길이 선택을 기다렸다.
그런 패턴의 반복이었다.
이따금씩 방 안에는 적들이 대기하고 있기도 했다. 눈의 여왕을 지키는 눈의 정령들이었다.
그들은 눈의 여왕과 똑같이 타락하여, 본래 아이스블루 색이었던 몸이 블루블랙으로 변해 있었다.
앞장을 서다 보니 자연히 적들의 처리도 나와 테실리드가 맡았다.
타락한 정령 하나하나가 B급 보스와 맞먹는 수준이었으나, 성녀급 신성력 능력자와 익스퍼트 최상급 오러 유저 앞에서는 잡몹에 불과했다.
단, 지나치게 쉽게 처리한 부작용도 있긴 했다.
“S급 던전 치고 적들이 약하군요? 괜히 긴장했습니다. 하하하.”
은총 기사단장, 렉스가 검 손잡이에서 손을 떼며 한 말이었다.
구구절절 설명하기도 귀찮아서 대충 웃으며 대꾸했다.
“그럼요. 렉스 경도 충분히 하실 수 있답니다.”
내가 듣기에도 상냥한 음성이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성녀 코스프레 아니겠는가.
……그런데 성녀 캐릭터는 만만하게 보이기 쉽다는 사실을 깜빡했다.
“예, 물론입니다! 저희 은총 기사단은 언제든 신성경 예하를 위해 싸울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지원과 엄호가 필요하시면 언제든 말씀하십시오, 예하!”
“……지원과 엄호 말이죠.”
클로비스랑 똑같은 소리를 하는군.
하여간 나와 테실리드가 2인 공략에 실패해서 도움을 간절히 요청하는 상황을 학수고대하는 사람들이 많은 듯하다.
나는 입꼬리만 당겨 웃으며 낮게 뇌까렸다.
“누가 먼저 요청할지 기대되네요.”
“예?”
“아무것도 아닙니다.”
얼음성 2층으로 올라가자 내부 인테리어에 변화가 약간 생겼다.
여느 평범한 성을 흉내 내고 싶었는지 곳곳에 예술품이 보였다.
복도의 벽면에는 얼음 액자에 표구된 다양한 그림이 걸려 있었고, 복도에서 방으로 통하는 입구 양옆에는 조각상이 수문장처럼 자리했다.
물론 마계의 일부가 되어버린 장소이니만큼, 예술품의 감성이 인간 같지는 않았다.
악마의 취향에 맞춰 극도로 외설적이거나 가학적인 것들뿐이었다.
시스템 덕분에 정신을 보호받는 나는 눈살을 약간 찌푸리고 말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꽤 충격이었던 모양이다.
“맙소사! 이렇게 추악한 그림이라니!”
“아아, ‘질서와 선’이시여. 저의 눈을 정화해 주시옵소서.”
“타락으로부터 저희를 보호하시기를 간청하나이다…….”
뒤통수 쪽에서 절박한 기도 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힐끔 테실리드를 보니, 그 역시 그림에 눈 돌리지 않으려 앞만 향한 채 걷고 있었다.
빠른 걸음으로 복도 끝에 다다라, 새로운 방에 입장했을 때였다.
이제까지 보아온 것과 결이 다른 예술품이 그곳에 있었다.
“아니 저건……!”
“이런 곳에 멀쩡한 예술품이라니?”
거대한 홀 중앙에 위치한 건 아름다운 천사상이었다.
두 날개를 처연히 늘어뜨린 채 무릎을 꿇고 하늘을 향해 기도 드리는 여성형 천사.
그 모습이 어찌나 성결한지, 성기사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감동하며 성호까지 그을 정도였다.
그러나 나와 테실리드는 가슴께가 차게 식는 것을 느꼈다.
“……실레반의 작품이군. 원래는 없었던 것 같은데.”
테실리드가 혼돈악에게 죽을 뻔했던 던전, ‘조각가의 아틀리에’.
이 천사상은 그곳의 주인이 인간을 재료로 만든 악취미적인 주검이 분명했다.
“굉장히 아름답군요.”
단장인 렉스마저 성호를 그으려 하는 것이 보였다. 이 무지한 참배를 말려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다들 그만두세요.”
“예하?”
긴 이동행렬이 방 안에 다 들어와 있는 상태였기에 내 목소리는 전원에게 전달되었다.
“이 천사상은 예술품 같은 게 아니라 악마가 모독한 시체예요.”
“예?!”
“마계의 미술가들이 쓰는 도구 중에는 사람의 몸을 천천히 굳혀 조각상으로 만드는 유약이 있어요. 악마 조각가들은 그런 방식으로 조각을 해요.”
“그, 그럼 이 천사상도…….”
“살아 있는 사람의 등에 하피 날개를 박아 넣고, 와이어로 자세를 고정한 뒤, 특수한 유약을 보름 동안 발라서 만들었겠죠. 이 사람은 그 시간 동안 천천히 죽어갔을 테고요.”
“허억!”
성호를 긋던 손들이 황급히 차렷 자세로 변했다.
이동이 재개되었다. 이제 막 방을 빠져나가 새로운 복도로 걸음을 내디디려던 때, 문제가 발생했다.
아그네스의 부름과 동시에 오러를 감지했다. 나는 고개를 휙 돌렸다.
퍼서석!
돌아본 내 시야에 비친 것은 부서져 내리는 천사상과 그 앞에 발검한 한 기사의 모습이었다.
“……사고쳤군.”
테실리드의 건조한 중얼거림이 현 상황을 정리해 줬다.
“세네일 경! 무슨 짓인가!”
곧 클로비스의 노성이 쩌렁쩌렁 울렸다.
발검한 갈색 머리 여성 기사는 잠깐 움찔했으나 곧 당당하게 대꾸했다.
“왜 그러십니까, 단장님? 제가 뭘 잘못했습니까……?”
“뭐?”
“예하께서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악마에게 모욕당한 주검이라고요. 흙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망자에 대한 예의라고 판단해서 부쉈을 뿐입니다.”
“하! 예의?”
“네.”
“그럼 예하와 나는 예의를 몰라서 조각상을 내버려 두고 지나간 줄 아나?”
“……!”
그제야 세네일이라는 기사가 흠칫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쿠구궁! 쿠우웅!
복도로 통하는 길이 모두 막혔다. 우리는 방 안에 꼼짝없이 갇혔다.
“서, 설마 저 때문에…….”
“그래! 이제 알았나?!”
던전에는 함정이 도사리기 마련이다. 특히 이런 성 형태의 환경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안일하게 아무거나 건드린 세네일에게 사방에서 비난의 시선이 꽂혔다.
렉스는 세네일보다 더 타격감 좋은 대상을 골라서 힐난했다.
“아무리 성전의 주요 임무가 수색이라지만 던전에서의 상식조차 모르다니 황당하군! 클로비스 단장께선 단원 교육을 어떻게 시키는 것이오?”
“……면목 없습니다.”
쿠구구구궁!
불길한 진동이 규모를 키워서 다시금 방을 흔들었다.
“아이, 혹시 짐작 가는 트랩 있어?”
“그거 내가 너한테 물으려고 했는데.”
뭐가 되었든 일단 대비부터 해야겠다. 나는 손을 뻗었다.
“수성의 방벽.”
예순 명을 감싸고도 남을 거대한 은색 성채가 구축되었다. 곧 이 대응은 현명한 선택이었음이 밝혀졌다.
쾅! 콰광! 콰아앙!
“허억!”
“헉!”
높은 천장에서부터 무수한 대형 고드름이 창살처럼 내리꽂혔다.
물론 그것들은 평범한 고드름이 아니라 빙결 마법, 크라이오맨서(Cryo-Mancer)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위력은 무려 6써클. 내 결계가 아니었다면 익스퍼트 미만은 중상을 입거나 죽었을 것이다.
“예, 예하……!”
다들 눈치는 있는지 감동의 눈빛이 여기저기서 꽂혀왔다.
결계를 때리는 얼음의 기세가 잦아들었다. 그러나 안도할 수는 없었다.
천장에서 타락한 눈의 정령들이 등장했다. 적군의 모습에 아그네스가 말했다.
“그러게요.”
과연 SS급에 가까운 S급 던전이라고 해야 할까. 군단이라고 해야 할 숫자였다. 그들은 진군하듯 이쪽으로 돌진했다.
나는 즉시 신성력 스킬을 시전했다.
“신벌. 신벌. 신벌!”
워낙 숫자가 많아서 절반을 처리하는 게 고작이었다. 살아남은 녀석들이 결계에 달라붙었다.
이제 접근전을 할 수밖에 없는 거리다.
“셋을 세고 결계를 거두겠습니다. 하나.”
“전원! 교전 준비!”
“둘.”
“예, 예엣! 알겠습니다!”
“셋!”
타락한 정령 군단이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를 내며 아군에게 달려들었다.
“뭐, 뭐야! 왜 이렇게 센데!”
“생각보다 강하잖…… 으악!”
개별 개체가 B급 보스나 다름없는 적들이 떼거리로 아군 속에 파고든 상황이다.
진형을 갖출 수가 없어 각개 전투가 시작되었다. 당연히 몇 안 되는 익스퍼트 상급 유저를 제외하고는 고전을 면치 못했다.
“지, 진형을 어떻게든! 힐러를 보호해!”
“제길! 타락해도 정령이라고, 신성력에 내성이……!”
“오러 위주로 공격해야 먹힌다!”
“여, 여기 좀 도와줘!”
난전이 벌어졌다.
뭉치면 S급 보스를 토벌할 수 있는 전력이라지만 각자가 무쌍을 찍는 건 별개의 영역이다.
무엇보다 진형을 구축할 수 없는 점은 치명적이었다.
“으아아악!”
굵직한 비명이 귀청을 울렸다.
빙의자를 위한 특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