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ferences for possessed people RAW novel - Chapter (127)
127화
24장. 포상 휴가
“예하! 정신이 드십니까?!”
“아일렛, 내가 보이니?”
렉스 단장과 카틀레야 추기경의 음성이 머리를 둥둥 울렸다.
마치 두 귀가 점액질 유체 속에 잠겨 있는 듯이 소리가 멀게 들렸다. 시야는 누군가 간유리를 대놓기라도 한 것처럼 불투명했다.
이전까지 신열병 페널티를 겪고 나면 늘 개운하고 상쾌한 상태로 일어나곤 했는데, 이번에는 달랐다.[‘세계를 구축하는 언령’이 금방 괜찮아질 것이니 안심하라고 우울한 목소리로 중얼거립니다.] [‘영혼을 심판하는 천칭’이 ‘세계를 구축하는 언령’의 어깨를 토닥입니다.]언령님의 말씀대로였다.
시야의 초점이 천천히 돌아오고 소리에 잡음이 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장소부터 확인했다. 성황청에서 지급해 준 신성경의 처소.
내가 누운 침대 주변을 교단 사람들이 둘러싸다시피 했다.
신성 강림을 쓰면 이틀 동안 신열병을 앓는다는 약점은 다 들켰으려나.
한숨을 꾹 삼키던 때였다. 클로비스가 이상한 말을 했다.
“한나절 동안 눈을 뜨지 않으셔서 걱정했습니다.”
“……한나절이요?”
“예. 국경에서 전투를 치른 뒤로 그만큼 시간이 흘렀습니다. 지금은 밤입니다. 진찰을 다녀간 의사와 사제마다 몸에는 별 이상이 없다는 소리만 해서 답답했는데, 이렇게 눈을 뜨셔서 다행입니다. 아마도 전투 피로 탓이었나 봅니다.”
6시간밖에 안 흘렀다고?
게다가 내 몸에 별다른 이상이 없다고 진단했다고?
고열 증상을 봤다면 저렇게 말할 리가 없다.
표정 없이 속으로 의문을 품고 있는데, 렉스가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다소 불만이 섞인 어조였다.
“전장에서 예하를 한참 동안 찾았습니다. 그런데 예하도 안 보이고, 게이트는 소멸해 있어서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십니까. 저는 예하께서 그 수상한 마족놈과 마계의 쓰레기장으로 동귀어진이라도 한 줄 알았습니다.”
“…….”
“세 시간이 지나서야 테실리드 경이 예하를 모시고 성황청으로 귀환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때는 정말…… 다리에 힘이 풀리는 줄 알았습니다.”
테실리드가 나를 데리고 성황청으로 직접 왔다.
그제야 상황이 명료해졌다.
나와 함께 사라진 세 시간의 공백 동안 그가 뭔가 했구나.
아마도…….
……아.
순간 설명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아졌다. 나는 튕기듯이 상체를 일으켰다.
나는 반쯤 정신이 나간 채로 다급히 이불을 걷고 가슴팍을 내려다보았다.
아메시스트가 박힌 순금 십자가.
내가 집어 던졌던 펜던트가 다시 체인에 꿰여 목에 걸려 있었다.
“예하?”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죄송한데, 다들 잠시만 나가 있어 주실래요?”
내 부탁에 다들 머뭇거리기만 하자, 중저음의 미성이 나 대신 그들을 채근했다.
“제가 지키고 있겠습니다.”
그제야 사람들이 응접실로 이동했다.
방문이 닫힌 뒤의 침실에는 적막한 공기가 감돌았다.
빛무리가 눈앞에 어른거렸다. 어느새 형상화한 아그네스가 침대맡에 걸터앉아 나를 직시했다.
처음 보는 매서운 눈이었다. 분노를 가장한 원망이다.
“…….”
“…….”
나는 숨을 끊어 쉬었다. 이불을 쥔 손에 힘이 꽉 들어갔다.
“미안해요, 아그네스.”
“정말…… 미안해요.”
“잘못했어요.”
“미안해요.”
난처한 미소와 함께 말했다.
“약속은, 못 해요.”
조금 풀리는가 싶었던 아그네스의 표정이 다시 단단해졌다.
그녀는 더 이상의 대화가 힘든 듯 감정을 꾹꾹 눌러낸 음성으로 말했다.
“…….”
아그네스의 형상이 흩어졌다.
혼자 있고 싶으니 당분간 부르지 말라는 뜻이겠지.[‘균형을 조율하는 독설가’가 말 좀 잘하지 그랬냐고 한숨을 쉽니다.] [‘만상의 혼돈을 감시하는 눈동자’가 잘못 들었나 싶어 눈을 비빕니다.]침실에 테실리드와 단둘이 되었다.
침대맡 스툴에 앉아 있는 그는 석고상처럼 미동이 없었다.
고요한 무표정. 그러나 오래전부터 내게 닿아 있었음직한 시선은 심장에 파고들 듯 강렬했다.
나는 눈의 깜빡임조차 잊은 듯한 그의 얼굴을 조심히 응시했다.
“펜던트, 네가 찾아준 거야?”
“그래.”
“찾기 힘들었을 텐데 고마워.”
“그래.”
“어, 음, 아그네스 말로는, 내가 신열병에 걸린 이틀 동안 던전에서 시간을 때웠다고 하던데…….”
“그래.”
“고마워. 멋진 기지였어.”
“그래.”
“…….”
무슨 말을 해도 단답만 돌아왔다. 대화의 의지가 없는 모양이다.
그렇다고 딱히 아그네스처럼 내게 화나서 시위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저 정신이 반쯤 날아가 있는 듯했다.
나는 시선을 살짝 내려 그의 가슴팍 부근을 보았다.
리드의 오러 블레이드 세 자루에 관통당했던 곳.
등받이 없는 스툴 의자에 앉아 있을 정도면 괜찮다는 거겠지.
옷을 벗겨 확인해 볼 수 없으니 짐작해 볼 따름이었다.
그때 테실리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도 렉스 경과 똑같은 생각을 했어.”
“…….”
“네가, 그 녀석과 함께 가버리는 줄 알았어.”
‘그 녀석’을 입에 담는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압도적인 무력을 가진 최종 흑막, 리드.
그가 바로 ‘조각가의 아틀리에’ 던전에서 자신을 죽이려 했던 인물이라는 것을, 테실리드는 알아보았을까.
평정을 잃은 듯한 떨림에서 트라우마가 느껴졌다. 우선 그를 진정시켜야 할 것 같았다.
“처음엔 그랬는데.”
“…….”
딱 한마디 내뱉었을 뿐인데 테실리드가 숨을 멈췄다. 얕은 바다색 눈동자가 깨지기 직전의 유리 같았다.
다급히 덧붙였다.
“끝까지 들어봐. 금방 마음을 바꿨어.”
“바꿨다고?”
“생각해 보니까 너 힐해 줘야겠더라고. 너 그때 중상 입었었잖아. 그래서 마지막에 있는 힘껏 그 자식 손을 뿌리쳤어. 알지? 내가 너 힐해 주려고 힐러 된 거.”
“…….”
이만하면 기분이 풀렸겠지 생각했다. 그러나 오산이었다.
코앞에서 테실리드의 표정이 소리 없이 무너져 내렸다.
모진 고문이라도 당한 듯이.
이내 그가 고개를 푹 떨구었다. 쏟아진 은발 너머로, 그의 오른손이 눈두덩을 덮어 누르는 모습이 비쳤다.
“그래, 힐…….”
“…….”
“신열병에 걸린 상태로…… 왜, 왜 그렇게까지…….”
“…….”
아아.
그때, 의식이 있었구나.
가슴이 완전히 관통당해서 정신을 잃은 줄로만 알았는데.
신열병에 저항하며 그에게 다가가던 내 모습이 그의 눈에는 어떻게 비친 걸까.
대체 어땠기에 그가 이렇게 괴로워하는 걸까.
어느새 그는 얼굴을 감싸던 손을 내려 제 왼팔을 잡아 뜯을 듯 움켜쥐고 있었다.
“미안해.”
“진정해. 자책하지 말고.”
나는 그의 오른 손목을 잡아서 떼어냈다.
“힐러니까 힐을 한 것뿐이야. 다친 게 네 탓은 아니잖아.”
“아니, 내 탓이야.”
나와 리드가 일대일 전투를 하는 곳에 쫓아와서 부상당한 것 때문에?
확실히 앞뒤를 재보지 않은 행동이긴 했다. 하지만 결과를 따져 보면 도움이 없지는 않았다.
그가 잠시간이나마 리드의 주의를 끈 덕택에, 속박 스킬로 리드를 더 빨리 게이트로 집어넣을 수 있었으니까.
그의 중상을 대가로 유리한 결과를 얻은 셈이다. 의도하지도 바라지도 않았지만.
그때 그가 쏟아내듯 말을 이었다.
“내가 약해서, 여기가 17회차라서, 내가 죄를 지어서……. 그러니까 내 탓이야. 전부, 내 탓…….”
“테리, 정신 차려.”
“……아.”
텅 빈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왔다.
이따금씩 드러나는 그의 불안정한 정신 상태를 볼 때마다 가슴 한구석이 선득해진다.
“네 탓이라고 할 만한 건 하나도 없어. 결과적으로 잘 해결되었고, 너도 나도 살았잖아.”
“…….”
“세상의 법칙을 뒤틀 정도로 비정상적인 존재였어. 그런 녀석을 상대로 이만하면 선방한 거지.”
“…….”
다행히 조곤조곤한 설득이 먹히는 모양이었다. 테실리드가 점차 안정된 모습을 보였다.
그래서 웃으며 더 긍정적인 관점에서 말을 덧붙여 보았다.
“생각해 보니까 운도 좋았던 것 같아. 마지막에 던전 클로징이 가속되었잖아. 덕분에 그 녀석을 훨씬 수월하게 치울 수 있었어.”
“그래, 운이 좋았지…….”
테실리드가 시선을 내리깔며 대답했다.
그의 인생과 거리감이 큰 단어를 입 밖에 내서 그런지 어조가 조금 꺼끌했다.
‘그러고 보니 정말 무슨 현상인지 모르겠네.’
던전 클로징의 가속. 세구회에 이런 건 없었는데.
난이도가 SS급으로 상승하더니 버그가 막 난무하는 건가? 그렇다면…….
‘착한 버그 인정합니다.’
그래도 일단 모범 빙의자답게 버그 제보를 했더니.[‘천기누설 감찰관’이 의문을 품습니다.] [‘천기누설 감찰관’이 ‘세계를 구축하는 언령’에게 잠시 따로 이야기 좀 하자고 말합니다.] [‘세계를 구축하는 언령’이 우울한 눈으로 당신을 지켜보느라 본의 아니게 무시합니다.]뭐, 나머지는 알아서 해주시겠지. 나중에 버그 제보 보상을 챙겨 주시면 좋겠다.
그 무렵 테실리드의 음성이 내 머릿속을 환기시켰다.
“내가 너무 약한 것 같아.”
여전히 침울하지만, 그래도 아까처럼 정신이 불안정한 기색은 없었다.
그래서 마음 편히 대꾸했다.
“아, 나도 그 생각했는데.”
“…….”
그의 눈빛이 상처받은 듯 흐려졌다. 나는 다급히 오해 발언을 수습했다.
“아니, 아니! 너 말고 내가 약하다고. 더 강해져야 할 것 같은데 어쩌면 좋을지 막막하네.”
나는 한숨을 푹 쉬며 어깨를 늘어뜨렸다.[‘세계를 구축하는 언령’이 당신의 축 처진 모습을 보기 괴로워합니다.] [‘세계를 구축하는 언령’이 터덜터덜 일을 하러 갑니다.] [‘천기누설 감찰관’이 ‘세계를 구축하는 언령’의 뒷덜미를 낚아채서 회의실로 끌고 갑니다.]
빙의자를 위한 특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