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ferences for possessed people RAW novel - Chapter (144)
144화
“그러니까…… 이 세계의 기원은 책에 있어요. 그리고 저는…….”
폐가 꽉 차도록 한차례 공기를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책 속의 인물에 빙의했고요.”
긴 설명을 시작했다.
세구회라는 소설, 신계의 빙의 공공사업, 내가 빙의하게 된 일련의 과정에 대해.
최대한 노력을 기울여 단어를 고르고, 정제된 어조를 내도록 했다.
너무 신경 쓴 탓일까.
방 안을 울리는 내 음성은 왠지 목이 잠긴 듯 평소보다 낮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아그네스는 표정 없는 얼굴로 묵묵히 듣기만 했다.
소설, 즉 허구의 세계가 현실의 근간을 이룬다는 진실.
이 세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폭력이나 모욕을 넘어서, 존재에 대한 반역으로 여겨질 만한 것이지 않을까.
특히나 신을 믿는 입장이라면.
어느덧 설명이 끝났다. 나는 침묵 속에서 아그네스의 표정을 살폈다.
일견 담담해 보이는 모습이 도리어 위태롭다고 생각했을 때였다.
마침내 그녀가 입을 열었다.
“네. 아그네스가 실재이고, 제가 실재이듯이요.”
“…….”
아그네스는 무언가에 대한 선고를 앞두기라도 한 듯 긴장한 눈이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저도 오늘 알게 된 건데 그건 아닌 것 같아요.”
“만물상 할머니가 그랬잖아요. 신이 신을 창조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세계 구축을 맡은 전임자가 있었다고.”
“우연인지, 개명했는지 모르겠지만 ‘엄격한 질서와 선’은 존재해요. 그리고 자신이 만든 세상을 버리고 갔고요. 이것도 뭐…… 원작의 설정에 충실하기 위함인지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니까 엄밀히 말해서 허상은 아니다.
신의 존재를 긍정받았으나 아그네스는 별로 기뻐 보이지 않았다.
아그네스가 스스로 머릿속을 정리하기 위함인 듯 입을 열었다.
“네. 그게 원작의 극후반부…… 99회차에 밝혀진 반전 설정이었거든요.”
무책임이란 단어를 말하면서 이를 악물었는지 발음이 좀 뭉개졌다.
“네. 원작과 똑같이 행동한 신 때문에…….”
그때였다.
아그네스가 나로선 생각해 본 적 없는 관점을 제시했다.
“……아.”
저절로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2부에서 풀린 설정과 신의 행보가 모두 현실이라고?
말이 된다.
이건 정말 말이 된다.
세구회는 한 번 연재를 중단한 적이 있었고 그 부분을 기점으로 1부와 2부가 나뉘었다.
평범한 세계 구원물이었던 85회차까지가 1부, 세계를 구원하고도 회귀에서 벗어나지 못해 좌절하는 피폐물인 86회차부터가 2부.
그리고 1부와 2부는 결이 완전히 달랐다.
그러니까 어쩌면…….
‘세구회 2부는 전임자에 의해 차원화가 시작되고 쓰여진 이야기가 아닐까?’
가정을 바탕으로 생각해보았다.
본래는 전임자인 ‘엄격한 질서와 선’은 주인공이 세상을 구하고 깔끔하게 완결되는 1부를 기반으로 세계를 창조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신이 튀어버리는 바람에 주인공과 세상에 오류가 발생했다.
소설 안에 존재하는 ‘세상을 구해야 한다’는 테실리드의 회귀 종료 조건.
그리고 신계에 존재하는 ‘신이 없는 세상은 미래를 그려내지 못하고 멸망한다’라는 차원계의 법칙.
이 두 가지가 서로 교묘하게 맞물려, 테실리드의 회귀를 가동시킨 것이다.
‘그래서 본래는 존재하지 않았던 2부가 탄생해 버린 거야.’
아아, 뇌리를 관통한다는 게 이런 느낌인가 보다.
“하.”
그래, 이거였네. 이거였어.
“와, 진짜……. 와, 나…….”
“맞아요. 딱 그 상태예요. 아그네스 없었으면 저 어쩔 뻔했죠? 당해도 알고 당해야지, 이거 뭐 완전히 모르고 당할 뻔했네?”
마침 메시지창 조용한 거 봐라.
‘저기요, 신님들?’[‘만상의 혼돈을 감시하는 눈동자’가 눈을 되록되록 굴립니다.] [‘균형을 조율하는 독설가’가 혓바닥이 데는 줄도 모르고 커피만 쪽쪽 빨아 먹습니다.] [‘시련의 마천루 건축가’가 느닷없이 폐관 수련을 하겠다며 탑으로 들어갑니다.] [‘영혼을 심판하는 천칭’이 ‘세계를 구축하는 언령’의 옆구리를 쿡쿡 찌릅니다.] [‘세계를 구축하는 언령’이 소재를 알 수 없는 익명의 신을 향해 회장 아들이면 다냐고 욕을 마구 퍼붓습니다.] [‘천기누설 감찰관’이 ‘세계를 구축하는 언령’의 입을 틀어막으며 눈을 부릅뜨고 다른 신들을 감시합니다.]단체로 당근을 흔들고 계시네, 아주.
1부로 완결되었으면 S급 정도였을 난이도가, 2부가 쓰여지는 바람에 리드가 탄생하고 SS급이 된 셈이다.
원래 이런 소설이니까 하고 포기했을 때라면 모를까, 원래 그런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보니 몹시 억울해졌다.[‘균형을 조율하는 독설가’가 이러나저러나 당신이 처한 현실은 바뀌는 것이 없으니 좋게 생각하라며 헛기침을 합니다.] [‘세계를 구축하는 언령’이 그러잖아도 요즘 당신을 위한 보상을 준비 중이었다고 살살 달랩니다.]따지고 보면 언령님도 전임자 때문에 고생하는 피해자였다. 위로받아야 할 처지에 나를 달래주시니 마음이 누그러질 수밖에.
하지만 그와 별개로 속은 여전히 답답했다.
빙의자가 이렇게 억울할 정도면 회귀자는 어떤 심정일지.
“하아아…….”
내가 신계에 닿으라는 듯이 하늘을 향해 한숨을 크게 내쉴 때였다.
아그네스의 부름이 내 정신을 환기했다.
긴장감과 더불어 머뭇거림이 느껴지는 음성. 그녀답지 않아서 조금 의아했다.
“왜 그래요, 아그네스?”
“네.”
“네. 말씀하세요, 아그네스.”
많이 심각한 이야기인가. 집중하며 다음 말을 기다리는데.
“…….”
잠시 후, 나는 두 팔을 벌렸다.
“환영합니다, 아그네스 자매님.”
그날 아그네스는 개종했다.
멋지고 훌륭한 언령교로.✠한편 그 시각.
‘빌어먹을…… 질서와 선…….’
테실리드는 바닥에 쓰러져 피를 토해내는 중이었다.
이 장기를 짜부라뜨릴 듯한 강제력은 처음 겪는 일은 아니었다.
만상의 도서관. 그곳에서 그는 진리의 바이블이 세이브 포인트의 소재를 탐색하는 데 힘을 보탠 적이 있었다.
그때 반동에 휩쓸린 것과 똑같은 현상이다.
그때야 신에게 도전했기 때문이라지만, 이번에는 아무것도 안 했음에도 이런 꼴을 당해야 했다.
‘이 세상을 버리고 떠났다더니……. 세이브 포인트의 주인이 대체 누구길래…….’
이렇게까지 싸고도는가.
참, 대단한 편애이기도 하지.
“쿨럭!”
또다시 한 움큼의 피를 토해낸 그가 떨리는 손으로 품을 뒤적였다.
꺼내져 나온 것은 작은 유리병으로, 판도라의 밑바닥 던전에서 아일렛이 그에게 준 포션이었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남김없이 삼켰다.
그러자 최고급 힐링 포션답게 내상이 빠르게 치료되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가 준 포션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 박약한 몸뚱이를 치료하기 위해 마검을 써야 할 뻔했다.
물론 그랬다면 문제가 커지지만…….
‘이번 회차를 포기할 수는 없으니까.’
입가의 피를 제복으로 닦아낸 그가 가까스로 상체를 일으켰다.
벽에 기대어 앉은 미남자가 고개를 뒤로 꺾었다.
천장 너머, 하늘 너머, 차원 너머 어딘가에 있을 기만적인 존재를 향해 오랜만에 기도했다.
“착하게 살 테니…… 이번 회차에 오래 머물게 해줘…….”✠다음 날부터는 신성경으로서의 공식 일정이 있었다.
공왕성으로 찾아온 히스펜릴 공국의 귀족들과 인사를 하고, 수도 페론사의 랜드마크인 황금 상아탑에 방문하고, 퍼레이드 마차를 타고 수도를 한 바퀴 쭉 도는 일들을 해치워야 했다.
당연히 모든 일정에는 내 유일한 기사단원이자 성검의 주인인 테실리드가 함께해야 했고 말이다.
그런데 그는 아침 식사도 거르더니 출발 시간이 다 되도록 내 방문을 두드리지 않았다.
늘 약속 시간보다 한참 일찍 와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답지 않았다.
직접 테실리드가 묵는 방으로 찾아갔다.
그는 마침 방문을 나서던 중이었는데 나를 발견하고 힘없이 인사했다.
“안녕, 아이…….”
“테리?”
정말이었다.
테실리드는 비척거리며 걸음을 떼다가 벽에 기댔다.
나는 황급히 다가가서 그의 몸을 받쳐주었다.
“뭐야? 어디 아파? 안색이 왜 그래?”
“괜찮…… 쿨럭.”
“피?!”
입을 잠깐 가렸던 손바닥에 핏기가 비쳤다.
당장 힐을 쏟아붓자 테실리드가 한결 편해진 얼굴을 했다.
“대체 무슨 일이야?”
“나도 모르겠어.”
“네가 모르면 누가 알아.”
“정말 몰라.”
한마디 더 다그쳐 물을 뻔한 것을 꾹 삼켰다. 그가 너무 지쳐 보였다.
설마하니 내가 모르는 지병이 있진 않을 테고.
‘얘 갑자기 왜 이러는 거예요?’[‘천기누설 감찰관’이 곧 조사에 착수할 예정이라고 말합니다.] [‘세계를 구축하는 언령’이 이놈의 주인공은 무슨 버그 덩어리냐며 짜증을 냅니다.] [‘지고한 만물상’이 곰방대를 뻐끔거리며 깊은 생각에 잠깁니다.] [‘세계를 구축하는 언령’이 ‘지고한 만물상’에게 여긴 어쩐 일이냐고 묻습니다.] [‘천기누설 감찰관’이 본신이 불렀다고 대답합니다.]나는 걱정스레 그의 의향을 물었다.
“쉴래? 나 혼자 일정 처리해도 돼. 여차하면 렉스 경도 있고.”
“아니, 같이 가. 내 책무를 방기할 수는 없으니까.”
확고한 의사가 느껴졌다.
나는 한숨을 쉬며 인벤토리를 뒤적였다.
“그럼 이거 다 마셔.”
기력을 보할 포션을 다섯 병쯤 테실리드의 뱃속으로 밀어넣었다.
아침을 안 먹었어도 배부르게끔 만들고 나자 테실리드는 그럭저럭 멀쩡해진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이런 적이 두 번째 같네.
만상의 도서관에서 엘란티아를 상대하고 나왔을 때도 대충 이것과 비슷한 상태였던 기억이 났다.
그때 테실리드가 내 주의를 환기했다.
“늦겠군. 가자.”
이때부터 빡센 하루가 시작되었다.
빙의자를 위한 특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