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ferences for possessed people RAW novel - Chapter (186)
186화
✠“……저렇게 되도록 두지 않는다, 라고.”
공허한 중얼거림이 적막한 공기 속에 부스러지듯 흩어진다.
그를 ‘믿을 수 있는 사람’으로 규정하고서 맘껏 무방비해진 아일렛 로델라인은 지금 그의 품 안에 안겨 있다.
테실리드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가라앉은 눈을 했다.
끝까지 그의 박약한 정신이 무너져 타락할 것을 걱정하던 아일렛.
불필요한 걱정에 마음 쓰는 그녀를 보고 있기 괴롭다.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그녀에게 알려줘야 할까.
이미 그는 늦어버린 존재라고.
“…….”
테실리드는 현실을 외면하듯 눈꺼풀을 깊게 내리 닫았다.
쿠구구궁.
마계의 군단들이 이곳으로 진격해 오는 요란한 진동이 상념을 끊는다.
당장은 이 혼돈과 악이 판치는 세계에서 그녀를 데리고 무사히 빠져나가는 게 우선이었다.
그러고 나서 그다음은…….
‘오러부터 어떻게 해야겠군.’
답답할 정도로 약한 몸뚱이를 좀 더 쓸 만하게 바꿔놓을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만 충동적으로 마검을 잡아 파국에 이르는 일을 막을 수 있으리라.
그가 쉬운 길을 두고 힘든 길로 돌아가는 이유는 뻔했다.
리드가 둘인 세상을 그녀 쪽에서 먼저 포기해 버리면 안 되니까.
“……가자, 아이.”
테실리드는 아일렛의 몸을 추슬러 안았다.
그리고 100회차의 리드가 선택하지 않은 다른 균열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함께 나락을 헤맬 시간이다.
31장. 나락의 샛길
“깼어?”
깊고 낮게 울리는 음성.
그것이 몽롱하게 표류하던 내 의식을 붙잡는다. 그리고 현실이라는 수면 밖으로 건져 올린다.
눈꺼풀을 올리고 초점을 맞췄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비스듬히 돌아앉아 있는 미남자의 옆얼굴이었다.
불꽃에 어룽진 음영이 섬세한 이목구비를 더욱 도드라지게 했다.
언제부터인가 항상 그렇듯, 신성 강림 후에는 테실리드가 내 곁을 지키고 있었다.
“여기는……?”
다음으로 주변을 살폈다.
일단, 인세는 아닌 듯했다.
기울어진 낮은 천장을 보건대 어느 건물의 꼭대기에 있는 다락방 같았다.
조금만 움직여도 바닥에서 삐걱대는 소리가 날 만큼 허름했다.
주목할 것은 벽을 이루는 나무판자였다.
노인의 얼굴을 본떠 놓은 듯한 괴기스러운 목재가 느릿하게 입을 뻐끔거렸다.
인면목(人面木)이었다.
깨진 천장의 틈으로 보이는 하늘은 요사스러운 보라색이다. 죄다 마계의 특징이었다.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 대충 짐작이 되었다.
나는 ‘용사들의 시체가 묻힌 동화의 땅’ 던전을 클로징하지 않았다.
마왕들이 각축전을 벌여 서로의 세력을 줄이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때 문 닫힌 보스 룸에서 가만히 출구 게이트의 생성을 기다리고 있었다간, 나와 테실리드는 대규모 전쟁에 휘말렸을 것이다.
그리고 때마침 알현실에는 세 마왕이 리드를 위해 열어놓은 균열이 있었다.
자신들의 영지까지 통하는 안전한 길을 깔아준 셈.
테실리드는 그 균열들 중 한 곳으로 나를 데리고 빠져나간 것이 분명했다.
아그네스가 내 추측을 긍정해 주었다.
“그렇군요.”
나는 천장을 보았다. 하늘을 보기 충분한 틈새에 달이 끼워져 있었다.
녹아내린 보라색 초승달.
마계에서 독특한 달의 형태는 특정 마왕을 상징한다. 이 땅이 누구의 것인지 답이 나왔다.
마른기침을 한 차례 한 뒤 결론 내렸다.
“여긴 어빅시니스의 마왕령 같네요.”
서열 1위 마왕, 혼돈의 묵시관 어빅시니스.
어빅시니스는 상당히 악취미적인 구석이 있었다.
스스로를 혼돈악의 사도로 칭하며, 자신의 마왕령을 인세의 엘펜하임 교국을 모방해서 다스렸기 때문이다.
혼돈악을 찬양함과 동시에 질서와 선을 모독하는 마왕이라 하겠다.
‘그럼 이곳은 신전들 중 하나일 텐데…….’
시스템 지도를 켰다.[ ‘혼돈악의 신전 18호’
어빅시니스 마왕령 외곽에 위치한 혼돈교 신전 중 하나다. 악마 대주교 테즈리할이 관할하고 있다.]다행히 마왕 어빅시니스가 있는 중앙 대신전은 아니었다.
그때 바닥에 나 있던 틈새에서 빛이 새어 들어오기 시작했다. 다락방 바로 아래쪽에는 넓은 홀이 있었다.
검은 로브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뒤집어쓴 몰개성한 마족들이 들어오더니, 알 수 없는 주문을 외우며 역오망성의 마법진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다.
그림으로 그린 듯한 사특한 의식 장면이었다.
좀 더 시간이 지나니 파이프오르간도 연주되기 시작했다. 바닥을 기는 듯이 낮고 묵직한 음계가 귀에 익었다.
일전에 성황청의 예배당에서 누군가를 만나러 갔다가 들은 적 있던 진혼곡이었다.
‘리드.’
그를 떠올리기 무섭게 알현실에서 있었던 일들이 한꺼번에 머릿속으로 밀려 들어왔다.
탈출 계획은 이따가 차근차근 짜기로 했다. 당장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다.
“……테리.”
오랜 잠으로 잠긴 목이 아직도 풀어지지 않은 모양이다. 그의 이름을 담는 내 음성은 스스로가 듣기에도 탁하고 낮았다.
내게서 비켜 앉아 있던 테실리드가 부름에 반응했다.
하지만 고개를 살짝 움직인 것에 그쳤을 뿐, 그는 바닥에 깐 시선을 내게 맞춰주지 않았다.
“…….”
“…….”
이어진 것은 어색한 침묵.
그럴 만한 상황이었다.
신성 강림 페널티를 받는 이틀은 나에게도, 그에게도 멈춰 있는 시간이다.
따라서 지금은, 리드 때문에 알현실에서 지독한 꼴을 겪은 직후나 마찬가지였다.
무거운 분위기에 목걸이의 아그네스는 말없이 조용했다. 그러고 보니 신님들도 말이 없었다.
침묵의 틈을 어두운 장송곡만이 비집고 들어온다. 이대로 있다간 음울한 상념을 불러일으킬 것만 같았다.
어떻게 말을 시작하면 좋을까.
고르고 골라 꺼낸 첫마디는, 보잘것없었다.
“괜찮아?”
“…….”
허공에 시선을 풀어둔 바다색 눈이 일렁이는 것 같았다.
나는 채근 없이 기다렸다. 몇 시간이라도 기다릴 수 있었다.
마침내 그가 나를 완전히 돌아보며 목소리를 들려주었다.
“한참을 생각해 봤는데……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군.”
“…….”
의외였다.
예상과 달리 담담해 보이는 어조와 표정이었으므로.
정말로, 그는 내 생각보다 괜찮아 보였다.
혹시 또 모를 일이다. 괜찮은 척하는 건 아닐까. 그는 뭐든 혼자 버텨내는 데 익숙하니까.
걱정을 놓지 못한 내가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할 때였다.
테실리드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렇게 두지 않을 거라며.”
“응?”
“네가 날 그렇게 두지 않을 테니까.”
“…….”
“네가 있으면 나는 괜찮아.”
“…….”
크게 부풀어버린 내 눈을 직시하며, 그가 다시 말한다.
“정말로 괜찮아. 네가 있는 한.”
“…….”
나를 의지하겠다는 그의 말이 귀가 아닌 심장에 직접 닿는 느낌이었다.
“……테리.”
잠긴 목이 이제는 콱 막혀 버릴 것만 같았다. 조금 벅차서.
시선을 마주 잇는 동안 문득 생각해 보게 되었다. 테실리드를 향한 나의 감정은 무엇인지.
리드는 연민이라고 했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나는 빙의자다.
본래 활자였던 세상과 인물과 비극이 실재가 되었다. 이에 따라 내가 빙의하기 전부터 독자로서 가졌던 감정 역시 변화한다.
납작한 연민과 애착이 부풀어 오르고 있음을 느낀다.
이제 나는 너를 세계 밖 높은 곳에서 관음하고 있지 않다.
이렇게 이 세계 안에서 너와 눈을 마주하고 있다.
그러니까 눈앞에 실존하는 테실리드 아르젠트의 불행을 막고 싶다.
리드처럼 되도록 두지 않는다는 말은, 한 사람의 운명을 구하겠다고 장담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사실 빙의한 직후에 원작의 회차를 배정받을 때에만 해도, 나는 되도록 높은 회차에 걸리기를 바랐다.
혼자서도 세상을 척척 구할 수 있는 강한 주인공에게 업혀갈 얄팍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17회차라서 다행이라고 여기고 있다. 진심으로.
17회차의 테실리드 아르젠트는 내가 노력하면 구할 수 있을 테니까.
오만한 선의, 알량한 자아도취, 안일한 책임감이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설령 그의 회귀를 끊어내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그가 앞으로 겪어야 할 수십 회차의 고생을 단축할 수는 있다.
배신과 상실을 겪지 않고도 혼돈악을 봉인할 수 있도록, 비교적 편한 길을 열어줄 수 있다.
그러면 이번 시간선이 실패하여 모두가 죽는다고 해도, 다음 회차가 있는 그에게는 충분한…….
“아이.”
테실리드의 부름이 내 생각의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리깔고 있던 시선이 단박에 끌어 올려졌다.
테실리드가 물거울 같은 눈동자로 나를 보며 말했다.
“그러니까, 너도 이 시간선에 있어.”
“…….”
“나와 함께 있어.”
“…….”
내가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받았다.
나약한 생각으로 포화될 뻔했던 머릿속이 단숨에 환기되었다.
이 시간선에서 그와 내가 같은 것을 바란다는 것이 기묘한 충족감을 준다.
그때 테실리드가 이것만은 양보할 수 없다는 눈을 하고서 못을 박았다.
“날 두고 죽으려고 하지 마. 네가 없으면 나도…… 포기할지 몰라.”
“…….”
포기라는 말을 저렇게 쉽게 하는 이가 아니었는데, 리드의 존재가 그를 약하게 만든 모양이었다.
아무튼 지금 내가 그에게 들려줘야 할 말은 정해져 있다.
“응. 그럴게.”
다짐하듯 말하자 그가 살며시 입가에 곡선을 그렸다.
그 미소의 희미함이 내게 스며 오랫동안 빠지지 않을 것 같았다.
빙의자를 위한 특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