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ferences for possessed people RAW novel - Chapter (192)
192화
응?
반사적으로 나는 테실리드를 돌아보았다.
시선이 마주친 그는 설핏 당황한 기색으로 입을 가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때 레이윈이 아까 손사래 치느라 들어 올렸던 내 왼손을 물끄러미 보더니 말했다.
“그나저나 아일렛, 그 반지는 예전엔 못 보던 것 같은데.”
곧 ‘설마’하는 표정을 지은 그가 적의 기습이라도 느낀 양 고개를 홱 돌렸다.
시선이 옮겨간 곳은 테실리드의 왼손이었다.
내 것과 쌍을 이루는 반지가 마침 한낮의 태양 아래 유난히 번쩍번쩍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흠칫하는 레이윈을 보고 나는 황급히 나서서 설명했다.
“저건 말이죠, 얼마 전에 운 좋게 구한 묵주반지 형태의 아티팩트예요. 테실리드랑 같이 얻은 거고, 주교급 신성력 각성자에게 효과 있는 거라서 나눠 꼈어요.”
“그렇군. 그런데 왜 하필이면 약지에……?”
“중지에 안 들어가서요.”
“그……래.”
그때 프린츠가 다가오더니 레이윈의 어깨에 손을 짚었다.
“레이윈, 기운 내.”
“프린츠?”
그새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반말을 하는 사이가 되었나 보다.
발전된 교우 관계를 흐뭇하게 보는데.
“나는 너를 지지할게.”
“……?”
“사관학교에서 6년간 봐온 너라면 내가 보증할 수 있으니까.”
“…….”
뭐라는 건지.
한편 은채 기사단원도 테실리드의 어깨를 두드리는 중이었다.
“어떡하냐, 테실리드. 소공작이면 너무 강력한데.”
“포기하긴 일러. 도리어 데릴사위가 가능하단 게 장점으로 어필될 수 있을지 몰라.”
“이번에 저는 중립을 지키겠습니다. 죄송합니다, 테실리드 형님.”
“…….”
돌아가는 상황에 내가 나직이 실소할 때였다. 목걸이가 울렸다.
“네.”
하, 진짜. 아그네스까지.
“……그만하죠?”
[‘영혼을 심판하는 천칭’이 웃음을 주체하지 못합니다.]나는 대꾸 한마디 못 하고 놀림당하고 있는 테실리드를 팔꿈치로 찔렀다.“신경 쓰지 마.”
“……알았어.”
상황부터 정리하는 게 좋겠다.
“자자, 어서 왕궁으로 가죠.”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프린츠가 꺼낸 다인원 전이석이 부서졌다. 허공에 퍼진 가루에서 빛이 번져 시야를 하얗게 지웠다.
잠시 후, 눈을 감았다 떴을 때는 주변의 풍광이 완전히 변해 있었다.[ 빈체스터 왕국의 수도, 빌헬론 지역에 입장했습니다. 시차에 따라 현재 시각을 조정합니다.]위용을 뽐내는 왕궁 안.
화려하게 가꿔진 중정 한복판에서, 좌우로 도열해 있던 왕실 기사들이 일제히 예를 갖췄다.
“신성경 예하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성대한 환영 인사를 받는 내 태도는 다소 무성의했다.
그들이 아니라 내 옆을 지키고 선 테실리드를 신경 쓰는 데 집중하고 있었으니까.
이곳에 도착한 직후부터 그의 눈은 급속도로 생기를 잃고 있었다. 포위하듯 둘러싼 왕궁의 성벽이 지난 회차의 지독한 기억을 되새기게 하는 모양이었다.
‘여긴 테실리드한테 있어서 적진 한복판이나 마찬가지지.’
그를 집중적으로 포격해올 다채로운 권모술수에 맞서려면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빈체스터의 귀족분들.”
사교적인 미소를 덮어쓴 채 비장한 일보를 내디뎠을 때였다.[‘클리셰 미식가’가 막장 드라마의 낌새를 느끼고 고개를 슬쩍 내밉니다.]새로운 무대에 걸맞게도 새로운 신이 메시지를 보내왔다.
놀랄 것 없이 앞을 향해 걸었다. 따가운 볕을 벗어나 왕궁 건물 안에 들어섰다.
왕실의 위엄을 드러낸 그랜드홀에서 우리 일행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
“귀한 걸음을 해주셔서 영광입니다, 신성경 예하.”
“마중 나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셀레스티드 왕녀 전하.”
물결치듯 부드럽게 구불거리는 백금발의 왕녀가 정중히 예를 표했다.
옆에는 내 소중한 친구인 흑발의 귀족 영애도 있었다.
“비아.”
“아이.”
얼굴을 보니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서 뭐부터 꺼내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조금 먹먹한 기분으로 시선만 잇고 있는데 목걸이가 울렸다.
“…….”
덕분에 정신을 차렸다.
공적인 용무로 와서 사적인 관계에 너무 집중할 뻔했다. 민망함을 감추며 셀레스티드에게 말을 건넸다.
“오래 기다리셨나요?”
“생명의 은인을 기다리는 일이니 길어도 긴 줄 몰랐습니다.”
오래 기다렸다는 말이네.
왕실 화법이란.
“예하, 던전에서 마지막에 일어났던 이변 때문에 얼마나 가슴 졸였는지 모릅니다. 그래도 이렇게 무사히 생환하신 모습을 보니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신께서 보우하신 덕분이죠.”
“저를 구해주신 신성경 예하뿐만 아니라 신성경을 지켜주신 신께도 깊은 감사를 올려야겠군요. 예하의 교회가 완공되면 감사 헌금을 바칠 것을 약조 드립니다.”
“진짜요? 신께서 셀레스티드 왕녀 전하의 앞날에 찬란한 영광을 안배하실 겁니다!”
원래부터 왕녀님을 지지했지만 더 지지할게요.
이때다 싶어 드러낸 내 정치색에 셀레스티드가 순간이지만 놀라움을 드러냈다.
주변의 눈과 귀를 의식한 듯, 그녀는 미소로 대답을 대신하고는 주제를 돌렸다.
“귀빈을 세워두는 결례를 저질렀네요. 우선 폐하를 알현하셔야 하니 접견실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셀레스티드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복도를 걷는 동안 향후 일정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내일 예하께 감사를 표하기 위해 성대한 연회를 열 예정입니다. 중앙 귀족들이 헬카이온 토벌전과 아낙시아 토벌전의 영웅을 영접하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답니다. 자리를 빛내주신다면 몹시 영광으로 여길 겁니다.”
“그렇군요. 사교 연회는 처음인데 잘 부탁드립니다.”
나는 감흥 없이 대답하고는 눈동자를 옆으로 굴렸다. 슬쩍 살펴본 테실리드의 반응은…….
‘음, 역시.’
성예술품 같은 미남자가 작게 입을 벌렸다가 소리 없이 닫았다. 한숨을 삼키는 모습이었다.
그는 지난 생에 참석했던 연회의 기억을 돌이켜 보며 홀로 퍽퍽함을 느끼는 중인 듯했다.
평민 출신 성기사가 귀족 연회에 초대받고서 겪을 법한 일들.
원작이 피폐한 고구마물이라는 것을 고려할 때, 느낌이 딱 오지 않는가?
복장 트집, 예법 트집, 화법 트집, 헛소문, 뒷담화, 앞담화, 신분 조롱, 음주 강권, 저열한 수작질 등등.
아주 가지가지 했더랬다.[‘영혼을 심판하는 천칭’이 이번에도 주인공을 건드리면 확 신성 강림을 갈겨버리자고 외칩니다.] [‘천기누설 감찰관’이 고구마가 있기에 한 모금의 사이다가 값진 것임을 왜 모르냐며 혀를 쯧쯧 찹니다.] [‘세계를 구축하는 언령’이 ‘천기누설 감찰관’에게 탄산 빠진 사이다는 너나 드시라고 비웃음을 날립니다.]어느덧 목적지에 거의 다 온 모양이었다. 코너를 돌자 복도 끝에 알현실의 문이 보였다.
옆에서 셀레스티드가 작게 숨을 들이켰다. 다소 긴장한 기색으로, 그녀가 나를 나직이 불렀다.
“예하.”
“네, 전하.”
“빈체스터 왕실의 정세에 대해서는 알고 계실까요?”
‘필요하면 설명 좀 해줄까?’라는 뜻이었으나.
“물론입니다.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렇군요.”
괜한 걱정을 했다는 듯이 셀레스티드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럼, 신성경과 성검의 주인을 제외한 다른 분들께서는 여기서 대기해 주시길 바랍니다.”
스윽.
경첩이 부드럽게 움직이며 거대한 문이 좌우로 벌어졌다.
“엘펜하임 교국의 신성경, 아일렛 로델라인 경과 성검의 주인, 테실리드 아르젠트 경께서 입장하십니다.”
시종의 낭랑한 호명이 있은 후, 나와 테실리드가 문턱을 넘었다.
눈을 지그시 내리깐 채 알현실 가장 깊은 곳을 향해 걸었다. 멀리 단상 위의 왕좌가 조금씩 가까워진다.
사실 빈체스터의 국왕 페라트는 오래전부터 병환으로 몸져누운 상태였다.
그동안 실권을 장악하여 섭정 중인 권력자가 있었으니, 그 사람은 바로…….
“빈체스터 왕국의 고귀하신 왕후 폐하를 뵙습니다.”
3왕자 리가레스의 친모인 라비오사 왕후였다.
“일어나세요, 신성경.”
“예, 폐하.”
왕좌에는 만년빙을 깎아 만든 여신상이 아닌가 싶을 만큼 냉혹한 미인이 자리하고 있었다.
곧 마흔을 앞두었음에도 실제 나이를 왜곡하는 듯한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여인.
시린 물색 눈동자는 말할 것도 없고, 오래전 불운한 사건을 계기로 하얗게 세어버린 백발마저 신비롭다.
‘과연 미모만으로 왕후의 자리에 오른 인물.’
본래 라비오사 왕후는 몰락한 자작가의 영애였으나 국왕의 눈에 띄어 후처로서 왕후의 자리에 올랐다.
뒷배 없이 왕실에 시집을 왔으니 그 모진 고생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남을 해할 줄 모르던 순박한 여인은 어떻게든 정치 풍파에서 벗어나 조용히 살고자 했다. 그러나 세상은 왕의 자식을 둘이나 낳아버린 아름답고 힘없는 여자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결국 그녀의 첫 아들이자 2왕자인 레미닉을 잃은 사건을 계기로, 그녀는 완전히 변하여 권력을 탐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현재, 라비오사 왕후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권력에 미친 백발의 악녀’였다.
현재 라비오사 왕후의 목표는 하나뿐인 아들, 3왕자 리가레스를 왕위에 올리는 것이었다.
당연히 셀레스티드를 구해온 내가 곱게 보이진 않을 것이다.
“우선 셀레스티드 왕녀와 하데일 왕자를 구해주신 데에 감사해야겠군요.”
감정이 거세된 음성을 듣고 그제야 기억났다.
아참, 하데일도 있었지. 잊을 뻔했다.
리드가 등장한 난리통에 별 신경을 안 썼는데, 그 역시 던전에서 잘 탈출했었나 보다.
하여간 쓸데없는 놈이 명줄은 질겼다.
“별말씀을요.”
길게 말을 붙여봐야 그녀의 비위만 거스를 테니 짧게 겸양을 떨었다.
긴말하고 싶지 않은 건 라비오사 왕후도 마찬가지인지, 그녀는 한층 차갑게 가라앉은 눈을 하고서 본론을 말했다.
“교국의 신성경을 신의 딸로서 극진히 모실 것을 약속드립니다. 부디 머무시는 동안 불편함 없으시길.”
언뜻 듣기에 평이했지만 말 안에 박힌 뼈는 단단했다.
‘중립 잘 지키다가 조용히 돌아가란 뜻이네.’
신의 딸답게 세속적인 것, 즉 정치에 신경 쓰지 말라는 경고였으니까.
신성경이자 히스펜릴 공왕의 손녀인 나의 지지는 제법 파급력이 크다.
라비오사 왕후는 결코 제 아들을 향할 리 없는 나의 영향력을 정치판에서 배제하고자 저러는 것이었다.
“이런, 제가 너무 에둘러 말했을까요?”
내 길어진 침묵이 행간을 읽지 못한 것처럼 보였나 보다.
라비오사 왕후의 화법이 조금 노골적으로 변했다.
“부디 왕위 계승 다툼에 관여하지 마세요. 그래야 나도 신성경의 사람을 건드리지 않을 테니까요.”
명백한 협박조.
심지어 말을 마쳤을 때 그녀의 시선은 나를 향하지 않았다.
내 옆에 있는 테실리드를 바라보는 라비오사 왕후의 눈이 소름 끼치도록 차가웠다.
정확해요, 아그네스.
빙의자를 위한 특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