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ferences for possessed people RAW novel - Chapter (196)
196화
리가레스가 아주 어렸을 적의 일이었다.
라비오사 왕후와 그녀의 두 아들인 레미닉과 리가레스는 왕궁에서 좋은 대접을 받지 못했다.
왕궁 사람들의 눈치를 보느라 거의 왕후의 처소에 틀어박혀 살아야 했던 나날들. 그러던 어느 날 왕궁 바깥에서 축제가 벌어졌더랬다.
꼬마 리가레스에게 왕궁 안이 답답한 감옥이었던 만큼, 왕궁 바깥은 동경이 넘쳐나는 곳이었다.
리가레스는 축제를 구경하고 싶다고 밥도 안 먹고 이틀 동안 어머니와 형을 졸라댔다.
모친은 절대 안 된다고 선을 그었으나 아우에게 약한 형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레미닉은 리가레스의 어리광에 넘어가 그와 같이 축제에 가줄 것을 약속해버리고 말았다.
모친이 절대 안 된다고 엄포를 놓은 상태였으므로 축제 구경은 몰래 이루어져야 했다.
왕자들은 침대 이불 속에서 작은 머리를 맞대고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그렇게 왕자들의 생애 최초 모험이 시작되었다.
왕자들은 어린아이치고 영특했다. 그들은 처음 축제 정보를 물어다 준 시녀를 고용하기로 했다. 그녀는 반년 전부터 자주 보던 이였으므로 믿을 수 있었다.
금단추 두 개를 그녀의 손에 쥐여줘 가며 왕궁 바깥으로 몰래 빠져나가는 일과 축제 장소에서의 안내를 부탁했다.
계획은 성공적이었다.
어린 왕자들은 시녀를 졸졸졸 쫓아다니며 극단의 곡예를 보고 시장의 물건을 구경하고 솜사탕을 먹었다.
행복한 시간이었다.
성공적인 모험이었다.
모험의 전리품으로 이만한 것이 있을까?
보물처럼 가지고 있다가 이따금씩 떠올리게 되는 소중한 기억.
형제가 우당탕 싸우고 토라졌다가도 이때만 생각하면 화해의 마음을 먼저 먹게 되는 둘만의 비밀.
장성한 왕자들이 정원에서 차를 마시며 이런 일도 있었다고 귀족 영애들 앞에서 우애를 드러내기 좋은 추억.
왕궁으로 돌아간 왕자님들에게 첫 모험은 아름답게 기억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두 왕자들은 왕궁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해가 진 거리는 어린 꼬마들에게 상냥하지 않았다.
어느 순간 그들을 데리고 나온 시녀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두 왕자는 불꽃놀이의 소란을 틈타 괴한들에게 납치당했다.
두 왕자들이 넘겨진 곳은 광신도들이 점령한 폐쇄적인 수도원이었다.
그곳 지하 감옥에는 리가레스와 레미닉 말고도 잡혀온 다른 아이들이 많았다. 두 왕자는 아이들과 별개의 방에 갇혔다.
어둡고 냄새나는 감옥의 환경은 왕자들을 주눅 들게 하기 충분했다.
두려움에 떠는 리가레스를 레미닉은 걱정할 것 없다며 달랬다. 형의 차분한 음성은 늘 그렇듯이 믿음직스러워서, 리가레스는 금세 안도할 수 있었다.
사특한 의식이 이루어지는 시간마다 덜덜 떨며 갇혀 있기를 사흘째.
공포 외에도 그들에게는 또 다른 문제가 있었다.-형, 나 배고파.
-조금만 참아, 리가.주어지는 배식은 하루 두 끼뿐. 그것도 묽은 귀리스프와 작은 빵이 전부였기에 리가레스의 배 속은 늘 요란했다.
제 형이 배가 고프지 않다며 음식을 양보해 줬음에도 그랬다.
그런데 극도의 공포감 때문에 형이 이상해져 버린 것일까.
나흘째부터 상냥하던 형이 돌변했다.-레미닉 형, 대체 왜 이래!
-…….레미닉은 리가레스의 음식까지 모조리 빼앗아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견디다 못한 리가레스가 주먹질을 하며 제 몫의 음식을 달라고 해도 레미닉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는 동생에게서 등을 돌린 채 음식을 꾸역꾸역 먹어치웠다.
사레들리면서도, 헛구역질을 하면서도 그랬다. 그때의 형은 마치 걸신이라도 들린 듯했다.
그렇게 이틀. 굶주린 리가레스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조차 없는 채로 누워서 숨만 쉬었다.
그는 이대로 끝을 직감하며 천장을 향해 초점을 풀어놓고서 계속 생각했다.
형이 많이 밉다고.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그러던 어느 밤이었다. 레미닉이 리가레스를 억지로 깨워 일어나게 했다.
볼품없이 말라 앙상해진 꼬마의 몸은 힘이 없어 균형조차 잡지 못했다.
레미닉은 따로 빼두었던 빵을 리가레스의 입에 넣어주었다.
이제 와서 제 형이 왜 이러나 싶었다. 형이 주는 음식 따윈 뱉어내고 싶은데, 입은 착실하게 빵을 씹어 삼키고 있었다.
레미닉은 눈에 띄게 안도하며 감옥 모서리에 있던 돌들을 치웠다.
거기에는 어린아이 둘이 빠져나갈 법한 작은 구멍이 있었다.
놀라는 리가레스에게, 레미닉은 자신이 그동안 밤마다 이 구멍으로 들락날락하면서 탈출로를 찾았다고 말했다.
그럼 그간 리가레스의 음식까지 다 먹어치운 것은 밤에 돌아다닐 힘을 비축하기 위해서였을까?
순식간에 납득해 버리자 어린 가슴에 맺혔던 응어리가 녹아내렸다. 하지만 어리광을 부렸다.-그래도 형이 미워.
-…….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응.이때를 떠올릴 때면 리가레스는 기억 속 형의 얼굴이 완전히 풍화되어 버렸다는 사실을 다행으로 여겼다.
제 말에 상처 입은 표정도 떠오르지 않으니까.
대신 그 표정을 마주한 동안 심장이 아팠던 감각만이 상흔이 되어 선명하게 남았다.
뜨끔한 리가레스는 말을 번복하려고 했지만 타이밍을 놓쳤다. 먼저 앞장서기 시작한 형의 뒤를 따르며 속으로 다짐했다.
여기서 나가면 진심이 아니었다고 말하자.
나는 세상에서 형이 제일 좋다고 말하자.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탈옥이 발각되었다. 야명석을 들고 그들을 찾는 광신도들의 모습이 보였다.
레미닉과 리가레스는 죽을힘을 다해 뛰었고, 마침내 담벼락에 도달했다.
두껍고 높다란 돌벽에는 지하 감옥에서처럼 작은 개구멍이 있었다.
레미닉은 서둘러 리가레스를 밀어 넣었다. 앙상한 몸이 겨우겨우 구겨져 들어갔다.-됐다! 형! 형도 빨리!속으로 환호성을 지르며 리가레스가 구멍 너머로 레미닉에게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나는 못 가, 리가.
-……!이런 결말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레미닉은 웃었다.
그제야 리가레스는 지난 일주일간 왜 형이 자신을 굶겼는지 알 수 있게 되었다.
알고 싶지 않았는데.-어서 가. 가서 도움을 청해. 기다릴게.
-형! 혀엉!
-빨리 가!리가레스가 떠나지 않자 레미닉이 먼저 뒤돌아섰다.
리가레스보다 고작 두 살 많았을 뿐인 어린아이는 그대로 광신도들에게 제 발로 걸어갔다.
그게 리가레스가 본 형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 뒤 무슨 정신으로 마을을 찾고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해서 왕궁으로 돌아갔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았다.
왕실에서는 즉시 레칸드로 후작을 보내 해당 수도원을 점령하고 2왕자를 구해내도록 했다.
그러나 레칸드로 후작이 수도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광신도들은 거처를 옮겼으며, 남아 있는 것이라곤 사특한 의식을 벌였던 끔찍한 흔적들뿐이었다.
회상을 마쳤을 무렵 리가레스의 손등은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다. 그럼에도 손등뼈를 으스러뜨릴 듯한 악력은 멎지 않았다.
“어머니, 저는.”
아집으로 가득했던 소년의 얼굴이 무너지듯 일그러졌다.
“저를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그날 저녁. 1왕자 하데일은 부관을 통해 신성경의 처소 응접실에서 있었던 일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리가레스 측에서 의도적으로 정보를 푼 덕분이었다.
“막내가 성녀에게 왕세자비 자리를 제안했고, 성녀는 거절의 기색을 비치지 않았다고?”
하데일은 코웃음 쳤다.
왕세자비라니.
리가레스는 제 이복형님의 형수 자리를 살뜰히 챙길 만한 녀석이 아니었다.
즉, 리가레스 자신이 왕세자가 되어 신성경을 반려로 맞이하겠다는 뜻이었다.
게다가 제 드레스와 에스코트 제안을 거절한 신성경은 왕세자비 자리에 혹한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
쌍으로 괘씸하기 이를 데 없었다.
“성녀가 왕후와 3왕자 모자의 손을 잡으려는 건가.”
하데일은 왕실의 장자라는 사실과 리가레스보다 성품이 온화하다는 평판 덕에 지지를 받고 있었다.
특출한 구석이 없는 그일진대, 리가레스가 민심마저 가져가면 상황이 불리해질 것은 불 보듯 뻔했다.
하데일이 짜증스러운 기색으로 부관에게 말했다.
“쯧. 왕후와 3왕자가 진심으로 왕세자비 자리를 제안했을 리가 없잖나. 성녀는 교국의 대표라는 이가 그것도 모르나?”
“교단의 성녀가 정치를 알겠습니까? 평생 정쟁의 한복판에서 담금질되어 오신 1왕자 전하와는 식견에서 현저한 차이가 날 수밖에요.”
“그래서 내가 친히 조언까지 해주었는데. 그 머리로 왕세자비가 가당키나 할지.”
“쓰고 버리기 좋은 체스말 정도겠지요.”
하데일과 그의 부관은 죽이 잘 맞았다.
속사정이야 어떻든, 내일 연회에서 신성경이 리가레스와 연대하는 모습을 귀족들에게 보여줘서 좋을 것은 없었다.
이간질이 필요했다. 그리고 이 방면에서 하데일은 탁월한 재능이 있었다.
10대 시절에 이미 경쟁자 하나를 깔끔하게 제거한 그가 아니던가. 너무나 쉽다.
라비오사 왕후와 리가레스 왕자의 역린을 건드리면 그만이니까.
“광신도들에게 납치당해서 실종된 불쌍한 내 동생 이야기를 되새겨주면 정신 차리겠지.”
“레미닉 왕자를 또 이용할 생각이시군요.”
“또?”
“…….”
“말조심해라. 그리고 이용이라니, 도움을 받는 거지.”
“실언했습니다.”
날카로운 정색. 지레 찔리는 자가 보일 법한 반응이었다.
“내일 성녀가 축원 기도를 올리기 전에 터뜨리는 게 좋겠어. 그깟 왕실의 평화 말고, 더 좋은 기도가 생각났거든.”
“그게 무엇입니까?”
그림으로 그린 듯한 왕자님은 비열하게 미소 지었다.
“가엾은 동생의 명복을 빌어달라고 해야지. 요즘 왠지 내 꿈자리가 사나워서 말이야.”✠크리스털에 난반사된 샹들리에의 불빛이 시야를 어지럽힌다.
화려한 연회장에는 한여름의 꽃처럼 화사하게 스스로를 꾸민 귀족들이 가득했다.
그들 중에는 교국의 성기사단원들과 왕실 기사로 구성된 네 명의 남자 무리가 있었다.
“술이다, 술.”
“안 들키게 마셔라, 이페일.”
“레이 형님, 왜 자꾸 출입구를 힐끗거리십니까? 적이 매복해 있기라도 한가요?”
“……신경 쓰지 마라.”
또 한쪽에는 고혹적인 드레스를 입은 흑발의 귀족 영애와 예복을 갖춰 입은 분홍 머리의 왕실 기사도 있었다.
“프린츠 경, 과연 사관학교 수석답군요.”
“예? 비안카, 왜 갑자기 그런 말씀을……?”
“왕궁 예법이 아주 훌륭해서요.”
“비안카를 부끄럽게 하지 않는 수준은 되는 듯해서 다행입니다.”
“히스펜릴 공왕의 손자만 아니었어도…….”
“예?”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빙의자를 위한 특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