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ferences for possessed people RAW novel - Chapter (223)
223화
“……?”
응? 인과율?[ 주인공이 변경됩니다.]뭐?[ 빙의자 ‘아일렛 로델라인’이 주인공의 지위를 찬탈합니다.]네?[ 원작 ‘세계를 구할 때까지 회귀’의 영향력에서 해방됩니다.] [ 장르 이탈 페널티가 종료됩니다.]“…….”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내가 얼떨떨하게 눈만 끔뻑일 때였다.
신들의 메시지가 들려왔다.[‘창조경제 관리자’가 장르 변경권이 괜히 100억 캐시인 게 아니라고 말합니다.] [‘세계를 구축하는 언령’이 그러니까 BL만 피하면 된다고 말했잖냐며 느긋하게 웃습니다.] [‘영혼을 심판하는 천칭’이 이제 원작이 없어졌으므로, ‘원작에 없는 연애를 하면 사별’이라는 조건도 사라졌다며 축하를 건넵니다.]“……아.”
삐걱거리던 사고회로가 다시금 돌아가기 시작했다. 엄청난 가능성을 얻었다는 사실을, 내 머리가 비로소 이해했다.
새파란 창공으로부터 밀려온 시원한 공기가 나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휘감고 지나갔다.[ 축하합니다, 아일렛 로델라인. 당신은 세계를 구할 수 있는 주인공입니다.]새로운 세계의 첫인사 같은 바람이었다.✠밤하늘에 달이 두 개였다.
피 흘리는 적색 만월과 이지러진 푸른 반달. 무엇 하나 온전한 천체의 모습을 한 것이 없었다.
형태가 왜곡된 두 개의 달은 검푸른 창천을 추상화 캔버스로 탈바꿈시켰다.
이곳은 하늘만큼이나 지상 역시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원색적인 파랑과 노랑의 줄무늬가 칠해진 텐트형 건물.
서커스장 느낌이 물씬 나는 장소에 피에로와 마리오네트 언데드들의 시체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무수한 숫자였다.
서커스장은 통째로 마족의 공동묘지가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악마의 시산혈해를 밟고 선 한 인간이 있었다.
길고 탄탄한 다리를 휘감은 가죽바지 위에 새하얀 셔츠를 받쳐 입은 남자였다.
요란한 분장과 소품이 난무하는 장소에 어울리지 않는 금욕적인 차림.
그러나 긴 전투로 찢어진 셔츠 틈으로는 가죽 벨트 같은 것이 언뜻언뜻 비쳤다.
시체의 산 정상에 올라선 그는 정복자의 깃발 대신 손에 들고 있는 검을 꽂았다.
남자를 닮아 새하얀 성검에서 푸른 성화가 쏟아져 나오며 마족들의 시체를 태웠다.
불현듯 바람이 불어온다. 삭풍처럼 차가운 기류가 그의 몸을 훑고 은발을 헝클어뜨렸다.
바람의 희롱에도 장인의 역작처럼 섬세한 이목구비는 무표정을 고수할 뿐이었다.
남자가 허공에 의미 없이 시선을 던져두고 있을 때였다.
가라앉아 있던 그의 바다색 눈동자에 돌연 이채가 떠올랐다.
“아.”
그는 제 왼팔을 들어 올렸다. 소매를 걷자 드러난 팔뚝 안쪽.
그곳에 하얀 성흔을 휘감고 있던 검은 가시철사가 잿가루처럼 부서져 떨어져 나가고 있었다.
“금제가…….”
그를 구속하던 힘의 속박이 드디어 완전히 사라졌다.
마족으로 시산혈해를 만든 행위가 큰 선행으로 판정된 모양이다.
전신의 피가 빠르게 돌기 시작했다. 그의 몸 깊은 곳에서 굳게 닫혀 있던 수문이 활짝 열린다.
타락하기 전, 99회차만큼의 힘이 밀려 나와 그의 온몸을 적셨다.
그는 나직한 날숨을 길게 내뱉음으로써 기운을 가라앉혔다.
그 무렵 지평선 부근에서 세 번째 달이 모습을 드러냈다. 녹아내린 보라색 초승달이었다.
어빅시니스의 상징인 저 달이 남중하는 때에 발푸르기스의 밤은 시작된다.
세 개의 달이 한 캔버스에 모인 것만으로 마계의 땅에 이변이 생겨났다.
땅거죽으로부터 녹색 안개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독무였다.
마계의 이변은 인세에도 영향을 준다.
조만간 각국에서는 맹독이 던전 게이트를 통해 흘러나가는 현상, 던전 드레인이 일어날 것이다.
이 암녹색 독은 인간의 호흡기관을 병들게 한다.
발푸르기스의 밤이 열릴 무렵에는 지독한 역병이 창궐할 터였다.
어느덧 마족들의 시체가 다 타서 없어졌다. 푸른 번제를 마친 테실리드가 성검을 회수했다.
“슬슬 토벌하고 나가야지.”
37장. 스승과 제자
스테인드글라스가 아름다운 성황청의 대예배당.
나이 차이가 꽤 나는 두 여인이 주변에 호위 기사들을 물린 채 마주하고 있었다.
“찾아계셨습니까, 세네딕트 교황 성하.”
“어서 오세요, 뮤리엘 성녀님.”
병환을 털고 일어난 교황은 자신이 불러들인 이를 눈으로 훑었다.
긴 흑발, 청색과 금색이 공존하는 신비로운 눈동자를 가진 젊은 여인.
그녀는 최근 성황청에서 빠르게 입지를 굳혀 가고 있는 성녀였다.
고아한 태도와 선량한 미소가 아름답다. 그녀의 모습은 어느 동화 속 삽화에서 빼온 듯한 성녀 그 자체였다.
‘저런 여인이 촌부의 딸이라니.’
날 때부터 성녀인 듯한 모습이 믿기지 않게도, 뮤리엘 필리제는 엘티오 산기슭에 있는 시골 마을 출신이었다.
그곳 마을 사람들에게 뮤리엘에 대해 묻자, 주민들은 정신이 온전치 않은 노부부를 극진히 봉양한 참한 처자라며 홀린 듯이 칭송했다.
그 마음 씀씀이에 신께서 감명이라도 하신 걸까.
뮤리엘은 8계위 신성력을 각성하고 클로비스에 의해 성황청으로 오게 되었다.
좋게 말하면 신비롭고, 나쁘게 말하면 수상한 여인.
세네딕트는 잡념을 털어버리고 입을 열었다.
“긴히 전할 이야기가 있어 따로 뵙자 청했습니다, 뮤리엘 성녀님.”
“말씀하시지요, 성하.”
“근시일 내에 세상에 재앙이 닥칠 것이란 계시가 전달되었습니다.”
뮤리엘의 청금안이 커졌다. 놀란 기색으로 그녀가 되물었다.
“계시요? 성하께서 직접 받으신 건가요?”
“아닙니다. 신과 가까운 존재께서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신과 가까운 존재? 그분이 대체 누구인가요?”
뮤리엘의 눈빛이 남모르게 가라앉았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가소로운 말이었다.
이 세상에 뮤리엘 자신보다 ‘엄격한 질서와 선’과 가까운 존재는 없을 터였으므로.
그 무렵 세네딕트가 말을 넌지시 흘렸다.
“자세히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
“…….”
“그분은 ‘빛이 잉태한 어둠’이라고 불리십니다. 그것만 알고 계시길.”
“……빛이 잉태했다고요?”
석연찮은 의미를 품은 호칭이다.
그러나 이번에 세네딕트는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본래 목적으로 돌아왔다.
세네딕트가 제례복의 넉넉한 소매 품을 뒤적여 무언가를 꺼냈다.
옷감 너머는 아공간 창고와 연결되어 있었던 모양이다. 상당히 길쭉한 물체가 한참을 빼내고서야 그 끝을 드러냈다.
“받으세요, 뮤리엘 성녀님.”
“이건……?”
세네딕트가 뮤리엘에게 건넨 것은 십자가 깃발이 달린 깃대였다.
그것은 일전에 아일렛이 헬카이온을 토벌한 뒤 얻었던 아티팩트이기도 했다.
아일렛은 이 아티팩트를 교황청에 환원하는 대가로 삼일조 면제를 약속받았다.
세네딕트가 설명했다.
“이 아티팩트의 이름은 ‘성지 구축’. 던전 안에 아군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영역을 만들 수 있습니다.”
“이런 귀한 걸 왜 저에게 주시는지요?”
“예언을 주신 그분께서 곧 필요해질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현재 성황청에 있는 사람 중 가장 강력한 신성력을 가진 이가 뮤리엘 성녀님이시니, 당신에게 이것을 맡기고 싶습니다.”
이 인선은 필연적이었다. 성지 구축을 발동하는 데는 막대한 신성력 혹은 마력이 소모되는 탓이었다.
막중한 책임만큼이나 아티팩트의 무게는 묵직했다.
뮤리엘은 두 손에 받쳐 든 성지 구축을 잠시간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내 그녀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보았다.
“교황 성하.”
“예, 뮤리엘 성녀님.”
“저도 ‘빛이 잉태한 어둠’님을 만나뵐 수 있을까요?”
“그분께서 원하신다면 부름을 받으실 겁니다.”
완곡한 거절이었다.
“이만 가보셔도 좋습니다, 뮤리엘 성녀님.”
“……네, 성하.”
뮤리엘이 아티팩트를 들고서 출입구로 돌아 나갔다.
거대한 아치 나무 문이 닫히고, 대예배당에 정적이 감돌았다.
세네딕트가 침통하게 입을 열었다.
“곧 재앙이 도래한다. 통곡이 밤하늘을 메우겠구나.”
그녀는 몸을 일으켜 기도실로 향했다. 진혼제를 준비해야 했다.✠현상 수배자가 되었다는 메시지를 마지막으로 테실리드의 소식이 뚝 끊긴 상황이 지속되었다.
장르 변경권을 구매했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노트에는 짧은 생존 신고조차 추가되지 않았다.
나는 걱정스럽기는 했으나 불안감에 매몰되지 않고자 노력했다.
장르 이탈 페널티는 확실하게 끝났다. 분명 그는 무사할 것이다.
지금은 재회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하는 데 집중해야 했다.
발푸르기스의 밤이 터지기 전까지는 던전 시간으로 약 열흘의 여유가 있었다.
그 시간을 활용해서 아그네스에게 본격적으로 오러 마스터 특훈을 받기로 했다.
그리하여 던전 최정상에서 먹고, 자고, 대련하기를 반복하는 일과를 보내기를 닷새째.
지금 나는…….
“아무래도 저는 재능이 없나 봐요…….”
땅을 파는 중이었다.
아그네스의 사복검술과 오러 블레이드가 어우러진 갖가지 절기들.
그걸 종이에 그리라면 그릴 수도 있을 만큼 눈에 담았다. 그러나 깨달음은 한 톨도 없었다.
경지의 장벽은 크고 굳건해서 조금의 금도 가지 않았다.
아니, 솔직히 내가 그 장벽 앞에 도달했는지도 의문이다.
사실 장벽까지 가려면 한참 멀었는데 설레발을 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까놓고 말해서 오러를 체득한 것도 죄다 오러 마스터 패키지 덕분이지 않은가.
시스템이 주는 빙의자 특혜 덕분이지, 내 재능으로 이룬 성과라고는 말할 수가 없다.
그럼 여기까지가 한계인가.
아그네스는 농담이라도 들은 것처럼 맑은 웃음을 터뜨렸다. 너무했다.
나는 울적한 마음에 신들을 향해 속으로 아무 말이나 했다.
‘장르가 무협이었으면 좋을 뻔했어요. 그러면 스승님께 벌모세수를 받는다든가, 우연찮게 만년삼을 먹고 환골탈태한다든가 해서 바로 강해질 텐데…….’[‘창조경제 관리자’가 장르 변경권을 하나 더 사겠냐며 눈을 빛냅니다.]
빙의자를 위한 특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