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ferences for possessed people RAW novel - Chapter (243)
243화
“……!”
교국민들이 소리 없이 경악했다. 철제 의자에 앉은 아일렛 역시 눈을 부릅뜬 채 숨을 멈췄다.
“…….”
정작 테실리드 본인은 조각상 같은 얼굴 위로 한 점의 동요조차 드러내지 않았지만.
그 담담함은 멀찍이서 뒤통수만 볼 수 있는 아일렛에게까지 잘 전해졌다.
무한 회귀자 특유의 죽음에 대한 초연함. 그것이 그녀를 자극하고 말았다.
아일렛은 홧김에 소리를 높였다.
“대속은 무슨 대속이야? 테리 너다운 짓, 아니 섣부른 짓 하지 말고 일단 이리 와!”
“…….”
“잘 생각해 봐, 테리. 지금 당장 네 목숨값으로 다른 사람들을 살린다고 해도 임시방편일 뿐이야.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 응?”
“…….”
“야! 내 말 안 들려?! 너, 너 이러면 내가 용서할 것 같아? 뒷감당할 수 있겠냐고! 어?”
“…….”
테실리드는 고집스레 그녀를 돌아보지 않았다. 좀 더 유효한 타격이 필요한 게 분명했다.
숨을 크게 들이켠 아일렛. 그녀가 괴로운 얼굴로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테실리드 아르젠트! 너 이대로 죽어버리면 나는……!”
“…….”
“너 말고 딴 남자랑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 거라고!!”
“……!”
단전에서부터 끌어 올린 음성은 암벽까지 닿았다.
딴 남자랑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 거라고…… 살 거라고…… 살 거라고…….
마계 한복판에 치정의 메아리가 화려하게 울려 퍼진 순간이었다.
“…….”
“…….”
이제까지와 조금 결이 다른 정적이 흐른다.
심각한 남녀. 그러나 주변 공기의 무게는 어쩐지 조금 가벼워진 것 같았다.
그 틈을 비집고 웅성거림이 자라났다.
“시, 신성경 예하……?”
“서, 설마 성검의 주인하고……?”
꿋꿋하게 뒤통수만 보이고 있던 테실리드가 드디어 뒤돌아 아일렛에게 시선을 주었다.
차분한 미남자가 말간 눈으로 아일렛을 바라본다. 모양 좋게 굴곡진 입술이 몇 번인가 소리 없이 달싹였다.
약간의 머뭇거림이 있은 뒤, 마침내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누구랑? 리드랑?”
“어……?”
“리드도 품을 수 있어?”
“…….”
진지한 추궁을 돌려받을 줄은 몰랐던 아일렛은 대답하지 못했다.
“마, 맞나 봐.”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
“역시…….”
이 긴장감 빠진 상황을 정리한 건 레반트 후작이었다.
“하! 지금 장난합니까? 감히 엄숙한 법정에서 애정 행각이라니 괘씸하군요! 마왕 폐하, 빨리 사형을 집행하여 저 두 마리 바퀴벌레들을 사별시켜 버리시지요!”
“진정해라, 레반트 후작. 그러잖아도 사형 방식을 고민하고 있었느니.”
“가장 잔혹한 방식으로 사형시켜야 마땅합니다!”
사랑의 멋짐을 모르는 레반트 후작은 한동안 열변을 토했다.
그때 데자뷔가 느껴지는 상황이 펼쳐졌다.
테실리드가 중요한 할 말이 있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지망하는 사형 방식이 있는데 말해도 됩니까?”
“……방금 뭐라고요, 인간놈? 지망?”
노역형도 아니고 사형을?
이렇게까지 초연한 인간은 악마들도 처음이었다.
물론 테실리드는 알 바 없이 제 할 말만 이어나갔다.
“저를 고독의 구덩이에 떨어뜨려 주십시오.”
“……!”
레반트 후작이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세상에! 어리석은 인간놈 같으니, 지금 그게 얼마나 무시무시한 벌인지 알고 하는 말입니까? 그런 멍청한 머리로 위대한 악업을 쌓았다니 믿을 수가…….”
“재밌구나.”
인페리노스의 음성이 잡설을 끊었다.
“그러잖아도 그 방식을 생각하고 있었거늘, 대속할 죄인 쪽에서 먼저 청할 줄이야.”
“…….”
“들어주지 못할 것도 없지. 기꺼이, 너는 원하는 대로 죽을 것이다.”
드드드드득!
돌연 지축이 울리기 시작했다.
인페리노스가 위치한 첨탑처럼 높은 단상.
이를 떠받치고 있던 웅장한 청동 부조의 벽장식이 양쪽으로 갈라졌다.
이윽고 드러난 것은, 벽을 꿰뚫는 통로였다.
일직선의 길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끊겼다. 그 끝에는 막다른 골목 대신 절벽이 존재했다.
요사스러운 붉은 아지랑이가 짙게 피어오르는 절벽 아래쪽에 대해, 인페리노스가 친히 설명했다.
“앞에 보이는 곳이 바로 고독의 구덩이다. 내 영토에 얼마 전 신설된 처형터지.”
“…….”
테실리드가 천천히 통로로 걸어 들어갔다.
“테리!”
아일렛의 애타는 부름을 그는 다시금 외면했다.
절벽에 끄트머리에 서자 아래쪽에서 들끓는 섬뜩한 소리들이 그의 귓가를 메웠다.
쇠붙이가 마찰하고, 무언가가 파괴되고, 종족을 알 수 없는 누군가가 비명을 지른다.
아득히 울려 퍼지는 소음의 합주가 알려준다.
붉은 연무 너머, 구덩이 아래쪽에는 치열한 전장이 펼쳐져 있다고.
첨탑처럼 높은 단상에서는 등만 돌리면 고독의 구덩이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었다.
인페리노스가 절벽 앞에 선 테실리드를 향해 말했다.
“서로 죽고 죽여 마지막 남은 하나가 다른 모든 자들의 힘을 흡수하는 곳이다. 마족이든, 인간이든, 가축이든, 벌레든.”
이른바, 배틀 로얄.
물론 마지막까지 살아남는다 한들 미래는 없었다.
“그렇게 탄생한 최후의 생존체는 훌륭한 악의 그릇이 될 터. ‘갓 태어난 혼돈악’께 바쳐지는 영광을 누릴 것이다.”
즉, 고독의 구덩이는 리드를 위해 만들어진 곳이었다.
스르르륵.
재판장의 반대편인 죄인 대기소 쪽에 거대한 출구 게이트가 생성되었다.
그러나 아직은 열리지 않은 듯 전격이 접근을 막았다.
인페리노스가 테실리드에게 명했다.
“스스로 뛰어내려라. 그럼 인간들을 석방하겠다.”
“…….”
테실리드가 천천히 아일렛을 돌아보았다. 늘 그렇듯 온화한 미소가 오로지 그녀만을 향했다.
“아이.”
언젠가 들었던 듯한 말이 그녀의 귀를 울렸다.
“다녀올게. 걱정하지 않아도 돼.”
“……!”
쉬이익!
테실리드의 신형이 시야 사각으로 사라졌다.
그녀의 눈동자가 깨질 듯이 흔들렸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분명 전에도 한 번 겪었던 일이건만, 나는 왜 내성이 조금도 생기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한마디 벙긋하기는커녕 숨도 제대로 못 쉬는 나를 대신하듯 교국민들이 그를 불렀다.
“테, 테실리드 경!”
“아, 아아…… 맙소사…….”
멍하니 넋 놓고 있는 시간이 길어질 때였다.
철그렁.
묵직한 쇳소리가 동시다발적으로 울렸다.
교국민들의 손목을 옥죄던 쇠고랑이 풀렸다. 그리고 뒤쪽에 생성된 게이트에서 스파크가 가라앉았다.
“나가라. 은색 성흔양을 제물로 바쳐 구차한 목숨을 연명한 인간들이여.”
“…….”
인페리노스가 약속을 이행했다.
침통해하던 교국민들이 정신을 차리고 하나둘씩 몸을 일으켰다.
곧 몇몇이 결심한 듯 돌아섰다.
“크흑! 테실리드 경! 미안합니다!”
“이 은혜는 살아서, 살아서 평생토록 갚겠습니다……!”
길게 늘어섰던 행렬이 역행하기 시작했다.
아슬아슬한 낭떠러지 길을 다 건넌 후부터는 그들의 다리에 속도가 붙었다.
게이트가 닫히기라도 할세라 사람들이 서둘러 공간을 넘었다.
마족에게 계약은 절대적인 것.
일찍이 노역형을 선고받고 끌려갔던 내 동료들과 교국민들도 지금쯤 마왕령에서 탈출했을 것이다.
내 머리가 상황을 정리했다.
테실리드가 사람들을 구했다.
대속의 규칙을 이용해서.
내가 모르는 구덩이에 몸을 던지는 것으로.
“…….”
나는 조금 충격받은 것 같다. 여러 가지 의미로.
그때 멀리서 들려온 음성이 내 정신을 환기시켰다.
“그대는 돌아가지 않는가, 단악의 집행관?”
나를 구속하고 있는 의자는 진작에 사라져 있었다. 자유의 몸이 되었으나 나는 자리에 붙박여 서 있었다.
교국민들이 모두 마왕령을 빠져나간 지금까지도.
[‘영혼을 심판하는 천칭’이 초조한 눈으로 당신을 지켜봅니다.] [‘세계를 구축하는 언령’이 극단적 연출만은 안 된다고 신신당부합니다.]나는 인페리노스에게 대꾸하지 않은 채 천천히 걸음을 뗐다.내가 향한 곳은 테실리드가 뛰어내린 고독의 구덩이 앞이었다.
붉은 연무에 가려져 있어 아래쪽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시각 대신 청각 정보를 모아보기로 한다. 밑바닥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광범위한 지역에서 펼쳐지는 끊임없는 전투 소음. 자신 외에 모두 적인 전장.
그 치열함이 뚜렷이 느껴진다.
그런 곳에서 테실리드는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그에게는 내가 필요해. 분명.
“구덩이 아래로 내려가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니야, 단악의 집행관.”
“……!”
폐부가 짓눌린 듯 숨쉬기가 조금 힘들어졌다.
어느새 인페리노스가 내 등 뒤에 서 있었던 탓이다.
“마왕 폐하, 어찌 미천한 인간과 같은 바닥을 디디십니까!”
기겁하는 레반트 후작을 무시한 채 인페리노스가 나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마왕을 지척에 두고 선 상황.
나는 검을 뽑지 않는 대신 온 신경을 다해 상대의 미세한 움직임 하나하나를 경계했다.
동공이 길게 찢어진 마족 특유의 눈이 구덩이 밑바닥을 향해 내리깔렸다.
인페리노스가 입을 열었다.
“고독의 구덩이에는 내 권능에 의해 강력한 규칙이 적용된다.”
“……어떤 규칙이지?”
“한번 들어가면 최후의 개체가 되기 전까지는 살아나올 수 없다는 것이지. 그러니 설령 그대가 성흔양을 구하러 내려가서 다른 모든 개체들을 다 죽인다고 한들, 이곳으로 올라오는 건 둘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연인 간의 상잔을 원하는 건 아니겠지? 뭐, 레반트 후작은 즐거워하겠다만.”
예상 밖의 친절한 설명이다.
나는 눈동자만 굴려 마왕을 탐색하며 질문했다.
“구덩이 안에는 어떤 존재들을 넣어놨지?”
“너무 많이 넣어서 다 말하기 어렵다만.”
“잡다한 것 빼고.”
오러 마스터인 테실리드가 혼자서 처리할 수 있는 수준인가?
인페리노스가 눈을 휘어 웃었다.
“내 휘하의 최정예 권속 스물여섯을 넣었다.”
“……서열 두 자릿수 대의 악마들을 저 안에 처넣었다고?”
“그래.”
나는 치밀 뻔한 욕설을 가까스로 삼켰다.
SSS급들이 각축전을 벌이고 있는 한복판에 테실리드가 들어갔다는 뜻이지 않은가.
동요로 손끝이 가늘게 떨려온다.
그것을 감추기 위해선 손등의 뼈마디가 희게 질릴 정도로 주먹을 말아 쥐어야만 했다.
그 와중에도 내 얼굴은 착실하게 비아냥거리는 웃음을 꾸며냈다.
빙의자를 위한 특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