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ferences for possessed people RAW novel - Chapter (256)
256화
위선적인 본성을 들킨 성녀의 입장은 곤혹스럽다.
레칸드로 후작의 눈빛과 음성에는 노골적인 비난의 기색이 전무했으나, 이미 뮤리엘에게는 충분한 압박이 되었다.
어색한 분위기가 그녀를 힐난하고 있었으니까.
그 증거로 뮤리엘을 호위하기 위해 뒤에 시립해 있던 은총 기사단원들이 민망해하며 시선을 옆으로 흘리기 바빴다.
그때 이제껏 조용히 있던 히스펜릴 공왕이 반응했다. 육중한 몸은 상체를 일으켜 세우는 것만으로 존재감을 키웠다.
“레칸드로 후작.”
“히스펜릴 공작 각하.”
“나는 우리 손녀와 손녀사위를 믿소. 분명 보란 듯이 멀쩡히 돌아와서 우리와 합류할 것이오.”
걱정을 신뢰로 누르며 히스펜릴 공왕이 주먹을 꽉 쥐었다 폈다.
레칸드로 후작도 고개를 묵직하게 끄덕였다.
“그럼 저도 그리 믿겠습니다.”
그때 옹졸하게 초를 치는 인물이 있었다.
“허허, 아까 성검의 주인이 고독의 구덩이에 투신했다는 말 못 들었소? 분홍 성녀는 몰라도 성검의 주인은 이미 죽었을 것이외다. 내가 대마법사라서 고독에 대해서도 좀 아는데, 그건 마지막에 살아남아도 결코 살았다고 볼 수 없는 흑마법 주술…….”
“닥치시게, 멸치.”
“닥치십시오, 미치광이.”
“……요즘 중년들은 웃어른에 대한 예의가 부족하구려.”
모리피스가 가죽 초커를 매만지며 서러운 척할 때였다.
뮤리엘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물었다.
“그런데 밤독수리의 주인은 어디로 간 거죠? 아까까지 옆에 계셨던 것 같은데?”
“당신의 그림자를 밟고 있습니다, 성녀 뮤리엘.”
“……!”
과연 최고의 암살자 집단, 밤독수리 길드의 마스터라는 건 허명이 아니었다.
흑갈색 머리의 복면인이 기척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얼굴은 볼 수 없었으나 저음의 목소리는 의외로 꽤 젊었다.
스릉.
반사적으로 공격 태세를 갖춘 로미나 레칸드로가 다시 납검하며 낮게 경고했다.
“다들 긴장 상태입니다.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않도록 기척에 주의해 주십시오, 플리겔 나이트.”
“이후 유의하겠습니다, 후작 각하.”
실상 플리겔은 충분히 주의하고 있었다.
두 오러 마스터의 등 뒤에서 나타나지 않고 뮤리엘과 모리피스의 그림자를 밟은 것이 그런 이유에서였다.
히스펜릴 공왕이 플리겔의 샛노란 눈을 마주하며 물었다.
“잠깐 사이 어딜 다녀온 게요?”
딱히 추궁은 아니었다. 오늘 첫 대면을 했지만 곧 치열한 전투를 함께 치러야 하는 사이다.
전투 직전에 일상적인 대화 몇 마디를 주고받는 행위는 의외로 함께 싸우는 데 큰 도움이 되기도 했다.
“근처에 애제자가 있기에 잠시 지켜보다가 왔습니다.”
“지켜보고만 왔소? 인사하지 않고?”
“예. 직업 특성상 일방적인 염탐과 정보 수집이 편합니다.”
“흐음, 그렇구려. 정보는 좀 얻으셨소?”
“애제자의 여자친구가 바뀐 것 같았습니다.”
“……여자친구?”
“예.”
목소리는 참 진지하고 딱딱한데 어째 내용은 약간 실없는 것 같기도 했다.
‘뭐, 실력만 확실하면 됐지.’
히스펜릴 공왕, 레칸드로 후작, 뮤리엘은 그렇게 생각했다.
한편 모리피스는 왠지 혼자 반색하며 친한 척을 했다.
“나도 일방적으로 관찰하고 관음하는 걸 좋아한다오. 우리는 잘 맞을 것 같구려.”
“……예.”
마왕전을 앞둔 시점.
이런 대화로나마 원작의 다섯 강자들은 긴장을 풀고 서로와 합을 맞출 준비를 했다.
한편, 플리겔이 염탐하고 간 줄 모르는 은빛 성채 기사단은 걱정과 불안으로 분위기가 심각했다.
“신이시여, 부디 저희의 머리 위에 드리워진 멸망을 거둬주시길……. 그리고 춥고 어두운 곳을 헤매는 두 사람을 빛의 길로 인도해 주시길…….”
가을의 찬바람 속에서도 힐데는 기도에 여념이 없었다. 애쉬가 조용히 제 겉옷을 벗어서 그녀에게 걸쳐주었다.
이페일이 한숨을 푹 내쉬며 침울하게 말했다.
“테실리드하고 아일렛은 무사할까?”
“당장 우리가 마왕이랑 싸우게 생겼는데 남 걱정할 때나?”
“야, 헤스티오. 넌 걱정도 안 돼?”
이페일의 비난조에도 헤스티오는 당당했다.
“아일렛은 다 계획이 있겠지. 보란 듯이 테실리드 멱살이든 머리채든 잡고 나오지 않겠냐?”
“어…… 그건 그럴지도?”
“아낙시아 토벌하러 갔을 때 생각해 봐. 던전 입장부터 길을 줄줄이 꿰고 보스 공략법까지 다 알고 있었잖아. 보스룸에 먼저 도착해서 보스인 척 우리 기다리고 있었던 일은 또 어떻고.”
“아, 그거 진짜 충격이었지!”
“그렇다니까. 쓸데없는 걱정이야. 이번에도 분명…….”
헤스티오가 목구멍에 치민 뭔가를 삼키듯 숨을 크게 들이켰다.
“……괜찮을 거야. 둘 다.”
그때 소란이 일었다.
누군가 대기 중인 병력의 전열을 흐트러뜨리며 은빛 성채 기사단 쪽으로 다가온 탓이었다.
“3왕자 전하. 여긴 전하께서 계실 만한 곳이 아닙니다!”
“왕자님, 왕궁으로.”
“시끄러워, 체를리 경, 셰즈 경.”
“……고집, 불통.”
“셰즈, 쉿.”
빈체스터 왕실 기사들을 꼬리처럼 달고 온 사람은 3왕자, 리가레스였다.
은채 기사단 앞에 멈춰 선 그는 백금발을 거칠게 쓸어 올리는 것으로 성질을 드러냈다.
그는 기사단원 네 사람을 쭉 보다가, 가장 서열이 높다고 판단되는 인물을 향해 말을 걸었다.
“힐데 부주교.”
“네? 아, 네! 왕자 전하……!”
“우리 형이 교국민들을 살리기 위해서 희생을 자처했다는 말이 사실인가?”
브라더 콤플렉스답게 리가레스는 당장 직면한 마왕전보다 제 친형의 안위가 더 중요했다.
한편 질문을 받은 힐데의 유순한 눈꼬리가 더욱 처졌다.
“네…….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저희도 다른 생존자분들에게 그렇게 들었습니다……. 어, 언니가 말리셨는데도 절벽에 스스로 뛰어내리셨다고…….”
리가레스는 손등의 뼈마디가 새하얗게 도드라질 만큼 주먹을 쥐었다.
“형…… 형은 왜 매번……!”
“…….”
“제기랄……!”
리가레스의 머리가 과거를 되감았다.
어린 저를 담벼락의 구멍에 밀어 넣고는, 시간을 벌기 위해 제 발로 광신도들에게 걸어가던 어린 형의 모습이 떠오르고 만다.
리가레스는 괴로운 감정을 억누르기 위해 욕설을 마구 뱉어냈다.
성숙하지 못한 방법인 것은 알고 있었으나 어쩔 수 없었다.
한편 리가레스의 등 뒤로 도열한 왕실 기사들 중에는 체를리와 셰즈 외에도 익숙한 얼굴이 둘이나 더 있었다.
프린츠와 레이윈. 그들은 테실리드 외에 또 다른 사람에 대한 걱정으로 표정이 흐렸다.
마침 리가레스가 아일렛의 안부에 대해 물었다. 여전히 제 성미를 못 죽이고 으르렁대는 듯한 말투로.
“그런데 형수는? 형이 대속인지 뭔지를 했으면 형수는 무사히 나왔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왜 안 보이지?”
“언니는…….”
“걔가 나왔겠습니까?”
대답하려는 힐데의 말을 가로채는 사람이 있었다.
“헤스티오 사제?”
호박색 눈에는 울컥한 기색이 역력했다.
조금 전까지 쓸데없는 걱정이라고 늘어놓았던 말이 무색하게도, 헤스티오는 속마음을 드러내 버리고 말았다.
“걔 성격에……. 아일렛 성격에 테실리드를 두고 그냥 나왔을 리가 없잖습니까. 그래서 다들 걱정하고 있는데…….”
“…….”
“무사히 나오기는 누가 무사히 나왔단 말입니까? 참 쉽게도 말씀하십니다. 형수라고 부르려거든 걔에 대해 뭘 좀 알고나…… 웁웁!”
“야, 야, 헤스티오. 왜 갑자기 욱하고 그래. 저래 봬도 왕자님이셔.”
“으아앗! 저희 형님이 아일렛 누님 걱정에 예민해져서 실언하신 것 같습니다, 전하.”
이페일과 애쉬가 수습하는 동안 리가레스는 가만히 굳어 있었다. 그러다 이윽고 한마디했다.
“아니, 실언은 내가 한 것 같군.”
“…….”
리가레스가 의외로 순순하게 나오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테실리드가 잃어버린 레미닉 왕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 직후, 라비오사 왕후와 리가레스가 제일 먼저 한 일은 그간 테실리드의 행적을 낱낱이 조사하는 것이었다.
덕분에 모자는 테실리드가 교단에서 어떤 취급을 받아왔고, 던전에서 어떤 생사의 고비를 넘겼는지 괴로울 정도로 상세하게 알 수 있었다.
개중에는 신성경의 도움이 없었다면 소름 끼치는 결과로 이어졌을 것이 확실시되는 일화도 많았다.
장난감의 대저택에서.
성마의 검이 봉인된 언덕에서.
조각가의 아틀리에에서.
판도라의 밑바닥에서.
찬영 기사단을 심판하던 종교 재판장에서.
맥추절의 번제가 진행되던 성황청 중정에서.
검은 마검사가 마도군을 학살한 국경지대에서.
또 그 검은 마검사가 난입한 아낙시아의 알현실에서.
……그때 테실리드의 곁에 신성경이 없었다면 어쩔 뻔했는가.
그토록 강한 신성경이니 누군가를 구하는 일쯤은 별것 아닌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하지만 라비오사 왕후와 리가레스가 읽은 보고서에 의하면 신성경도 그리 쉽지만은 않은 길을 걸어왔다.
실제로 신성경이 테실리드를 살리기 위해 했던 노력들 중 몇몇은, 필사적이었다는 말을 붙여도 모자람이 없었다.-찬영 기사단장의 자백에 의하면 신성경은 성검의 주인을 찾기 위해 협곡으로 주저 없이 뛰어내렸다고 함.
-검은 마검사의 격전 직후 신성경과 성검의 주인이 세 시간 동안 실종. 당시 수색대의 보고서에 의하면 헬카이온 버스트 게이트 주변에서 수상한 흔적 발견. 누군가 다량의 출혈을 일으켰고, 또 다른 누군가가 그곳으로 ‘기어간’ 자국이 있음. 잔존하는 신성력의 반응으로 보아 ‘기어간’ 쪽은…….그렇게 온 힘을 다해 살렸던 테실리드가 혼자 희생하겠다고 투신을 했다고 한다.
그녀의 눈앞에서.
그 광경을 목도한 아일렛 로델라인의 심정은 어떨 것인가.
혹시 판도라의 밑바닥 던전에서처럼 테실리드를 뒤따라 고독의 구덩이라는 곳으로 뛰어내렸으면 어쩐단 말인가.
안일했다. 형수라고 입만 살아 떠들어댔다.
“내가…… 너무 쉽게 말했어. 형수의 심정도, 자네들의 심정도 살피지 못했다. 미안, 하네.”
조금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이런 분위기를 환기한 것은 연갈색 머리칼의 기사였다.
“막내 왕자님, 철듦.”
“……셰즈, 제발 조용히 해.”
빙의자를 위한 특혜